전출처 : sweetmagic > 20040818 - 엄마의 일기장 3 -

진주를 다녀와서

참으로 오랜만에 진주를 갔다.
촉석루 변에 있는 유성장어구이에서 식사를 하고
개천 예술제가 열리고 있는 강변을 따라 걷다가..
논개 사당을 거쳐 가을을 보고 왔다.
날씨가 화창했다면 좋았겠지만 가끔씩 뿌리는 비를 맞으며...
어두운 날씨에도 나무들은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누렇게 퇴색한 잔디밭이 머지 않아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가을은 도처에 있고
가을 들녘은 사십을 맞이하는
내 나이만큼의 연륜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젊음이란 좋은 것이다.
노래 자랑에 출연한 젊은이들이 그랬고
손잡고 걷는 연인들이 그랬다.
가끔씩 오는 세월이 두려워 질 때가 있다.
아무 준비도 없이 늙어 간다는 건 얼마나 허망한가....
온갖 부질없는 것에 얽매여 잊고 사는 모든 것이
갑자기 뇌리를 스치며 나는 가슴 두근거리며 두려움에 빠져든다.

엄마의 일기는 어느 가을날 짧은 여행을 끝으로 갈무리되어 있었다.

사실...엄마의 일기장 안에는 내가 쓴 일기 한 장이 붙여져 있었다.
나를 이해 못하는 엄마를 원망하고, 자기 몰래 자기의 일기장을 본 것에
광분하며 마치 보란 듯이 비아냥거리며 읊조린 글이다.
엄마는 장학적금통장을 찾으려고 열어본 서랍 속에서 그 글을 보게 되었고...
얼마나 독기가 서린 글인지 그 글을 다시 읽는 내가 다 섬찟했다.
더 무서운 건 ..난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것....

눈물이 자꾸 흘러 글을 쓸 수조차 없는 이 서글픔과 허망함과
가슴 터질 것 같은 분한 마음을 나 혼자 참아내야 한다는 게 서러운 아침이다. 나에게 말로 쏟아 붓고 싶었지만 차마 못하고 적어놓은 너의 마음을 읽으며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싶었던 나의 지나온 삶이 송두리째 아래로 처박히는 것을 보았다. 이 못난 엄마도 네가 일깨워 주지 않아도 네가 생각하는 정도는 알고 사는 사람이란다. 매일 아무도 나처럼 집에 틀어박혀 살지 않는 다는 걸 생각하며 자식들 모두 남들처럼  포기하고 나 자신의 삶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 까하는 갈등을 나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걸 너는 모르는 모양이구나. 나는 너보다 못나서 실천을 못할 따름인데  그래 모든 점이 나보다 나으니 참 다행이다.
나보다 더 이쁘고 똑똑한 딸 낳으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아무렴 더 예쁘고 똑똑하게 잘 살아야지
그렇게 해주려고 나의 취미생활도 여유생활도 다 포기하고 너희들 밑에 힘겨운 투자를 하고 있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도 있을 수 없는 괴로움일 테니까. 단지 자식한테 이 정도의 무시를 당할 만큼 잘못 살았나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프다. 그러면서도 나는 왜 또 혼자 울고 잊어버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세월이 흐른 뒤에 너 자신이 얼마나 후회없이 살고 싶은 대로 잘 사는지 눈으로 보여다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잘나고 똑똑한 딸로 커 주어서 다행이구나. 정말 잘 살거라. 하지만 네가 착한 딸이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살기 바란다.


아.....이 일 말고 또 내가 기억하는 일들말고....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던 것일까 ......
난 참 살기 편한 아이다. 남 괴롭힌 일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니 말이다.

매일 저녁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상냥하고 다정하게 내 손을 잡아 주는 것일까...너무 너무 미안한 나머지 어디로 도망가서 숨어버리고 싶다.



참하다. 이쁘다. 얌전해 보인다. 여성스럽다...
이런 내 모습 안에 숨어 있는 괴물은 도대체 몇 마리나 되는 것일까...

일기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없앨 수도 없고 가지고 있기도 괴롭고
파란 하늘 사각 구멍을 뚫고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자물쇠를 달고
하늘 구름으로 일기장을 꽁꽁 묶어서는 사각하늘 너머에 아무도 몰래 숨긴 다음 열쇠로 잠그고 열쇠는 깊은 바다로 던져버리고 싶다.


오늘 집에 가서 엄마 얼굴을 어떻게 보나....
어디로든 멀리 멀리 도망가고 싶다.

 

 

 

 


 
이젠 잘난 척 할 곳이라곤 엄마 품 밖에 없는 못난이

그러게 .....

까불면......아프다.
아니, 아프게 되어있다.

올 가을.....
시원하게 선선하게,  갈색 가을빛 바람이 불면.....
엄마가 갔던 흔적 따라 나도 진주에 한번 가봐야겠다.

 


**변명 :
혹시라도 이 글을 읽으실 알라디너 분.....
저 때는 제가 질풍노도의 시기, 성깔이 많이 까칠해져 있던 때라
아무나 한번 덤벼봐라 . 한판 붙자 뭐 이런 ....지금보다 더 철없던 시절의 저입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병아리 눈물만큼은 더 나은아 진것도 같으니 너무 엄하게 보지 말아 주옵소서. 오늘 부터 세상에 저 같은 딸은 저 하나 뿐이기를 매일 기도 하기로 했습니다. 그때가 야생 살쾡이였다면 지금은 들고양이 정도 밖에 못 되는 줄로 아오니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옵소서....



    

 

 

 

 

일기장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떠오른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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