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인에게 들은 얘기다. 아파트 한 구석에 버려진 책들이 쌓여 있었다. 너나를 막론하고 글쟁이들이란 책을 보면 무심히 지나지 못하는 법. 제법 쓸 만한 책들이 눈에 띄어 아예 주저앉아 책을 들추기 시작했다. 한데 속표지 첫장에 ‘○○○님 혜존’이라는 저자 증정 사인이 적혀 있었다. 받는 사람은 유명한 소설가였고, 드린 사람들도 모두 알 만한 이름들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했다. 사인이 된 책들만 골랐는데 너무 많아 속표지 첫장들만 곱게 찢어 들고 왔다고 했다.
얘기로만 듣던 일이 내게도 일어났다. 수업이 끝난 직후 나이든 제자가, 특이한 내 이름과 글씨체를 오래 전에 본 적이 있다며 인사치레를 했다. 헌책방을 기웃거리다 내 시집을 보게 되었는데 그 책의 첫장에 ‘드림’이라는 글자 앞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그냥 좀 씁쓸해서 샀다는 것이다. 순간 내 얼굴도 화끈거렸다.
학교 다닐 적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볼 때 누구에게 드린다는 저자의 사인이 적혀 있던 책들을 본 적이 있다. 사인 밑에는 ‘기증’이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곤 했다. 이런 경우는 그래도 점잖은 편이다. 도서관으로 고이 모셔다 놓았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 이름들이 생존해 계시는 분들인 경우라면 여전히 쓸쓸하다. 소장할 만큼의 친분 혹은 저서는 아니었음을 엿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가치 있는 사인들도 많다. 국가를, 단체를, 개인을 대표해 무언가를 약정하고 약속하는 경우이다. 홍익대 앞 모 노래방에 가면 연예인들의 사인이 비싼 액자에 담겨 하얀 벽에 줄줄이 걸려 있다. 마치 명화들처럼. 연예인들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유명 작가의 펜사인회에는 독자들이 줄지어 서기도 하고, 유명 문인들의 육필 원고나 사인은 기념관에 전시되기도 한다.
저자 사인이 들어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책들을 모두 껴안고 있을 수는 없다. 때로는 소용에 닿는 누군에겐가 주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도 하다. 또 수명을 다 한 책들은 폐기처분해야 한다. 그러나 그때 잠깐만이라도 헤아려봐야 하지 않을까. 사인에 담아주었던 마음을. 그리고 유명하지 않은 이름일수록 더욱 잘 갈무리해야 되지 않을까.
받은 이에게는 그다지 소용에 닿지 않았던 마음, 수많은 이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마음, 잠시 머물렀으나 잊혀진 마음, 단지 스쳐 지나가는 마음, 이제는 소장 가치가 없는 마음들에게도 예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정끝별/시인·열린사이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