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누이
싱고 지음 / 창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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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는 시인이 되고 싶어서 시를 많이 읽은 적이 있다. 시인이 되려면(=등단을 하려면) 시를 ‘잘’ 써야 하는데, 잘 쓰려면 우선 시를 많이 읽어야 한다는 조언을 여러 경로로 접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고등학교 졸업을 기점으로 시 읽기에서 손을 떼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은연중에 생각했었다. 앞 문장을 ‘생각했었다’라고 끝맺은 이유는, 생각만 야심차게 하고 생각만큼 많이 읽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집에는 사 두고 읽지 않은 시집만 많다. 어쨌든.

  ‘시인 되기’에 대한 미련이야 아직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그러니까 남들보다 시를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던 시절보다는 확실히 시를 덜 보는 요즘이다. 그렇다고 시에 대한 감각이 아예 제로베이스로 돌아갔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생활이 목표하는 바가 단순해지다 보니 단순한 사고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시 읽기가 그 경향에 맞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것이 낫겠다.

  그러니까, 예전에 시를 조금 읽긴 읽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시와 거리를 두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는 초심자를 위한 시‘선’집도, 눈 밝은 시 마니아를 위한 시집이나 시 ‘전’집도 애매하기만 하다. 초심자와 마니아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나 같은 독자에게 다시 시 읽기의 즐거움을 매개해 줄 책이-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없었다.

 

  『詩누이』의 저자는 시인이다. 시인은 아무래도 시와 친연한 사람. 시를 보는 안목이 빤하지는 않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시와 너무 친연하고 익숙한 나머지 시가 막연히 어렵고 낯선 사람들에게 어떤 고난이도의 ‘과제’를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가질 수 있다(“어때요. 참 쉽죠?”). 시의 목록을 찬찬히 보았다. 앞의 기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과 뒤의 우려가 현실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낌적으로’ 느낄 수 있다.

  ‘느낌적으로’라는 말은 중요하다. 학교에서는 언어와 사물이 일대일로 대응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과 사람의 일, 세계에서 목격하는 사물과 현상들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언어를 현실에서 단박에 찾아본 일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원래 세계는 복잡하다. 그리고 우리는 늘 그 복잡함에 어울리는 언어를 찾지 못해 주저하기 마련이다. 그저 ‘느낌’으로 우리 주위의 감정과 일과 사물과 현상을 파악할 뿐이다. 그 주저하는 가운데, 언어의 첨단을 탐색하는 시도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시(詩)다. 그래서 시의 언어는 ‘느낌적’이다. 어떠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詩누이』의 그림은 시의 이러한 ‘느낌적’인 성격과 어울린다. 시와 최소한의 연결 고리를 가지고 풀어가는 에피소드도 있고, 시의 구절을 이미지화한 에피소드도 있고, 시의 이미지를 고유한 서사로 변주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들 그림-이야기는 시의 해석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중고등학생 시절에 받았던 시 교육을 생각해 볼 때 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가 그림 안에 숨어 있을 것도 같지만, 그런 것 없다. 이 포근한 만화는 우리로 하여금 시를 더 잘 ‘느끼게끔’ 해 주는 역할을 할 따름이다.

책 띠지에 있는 ‘토닥토닥’이라는 단어가 나로 하여금 이 책의 성격을 오해하게 할 뻔했다(띠지에 있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시로 ‘마음의 온도’를 맞춰주는 싱고의 ‘토닥토닥’ 웹툰 에세이). 그러니까, 섣불리 자신과 독자를 위로하려 하는, ‘힐링’ 계열의 책으로 잠깐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생각이 짧았다. 시는 아무 것도 단정하지 않는다. 앞서 나는 이 책의 그림(자꾸 그림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저자님께 양해를!)이 시의 성격과 어울린다고 했는데, 단일한 해석을 내리거나 섣부른 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책의 그림과 시는 닮아 있다. 그러므로 또한 어울린다.

  “이 책에서 봤던 시와 그림이 떠오른다면, 그것대로 보람”일 것이라는 저자는 마음껏 보람을 느껴도 좋을 것 같다. 나만 하더라도, 이 책의 그림에서 보았던 차분한 유머에 피식거렸던 순간, 시와 그림의 절묘한 컬래버레이션에 나지막이 감탄을 내뱉던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책의 유일한 결점(?)이라면, 제목이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어떠한 ‘느낌’. 짐작건대, 대다수의 기혼 여성들에게 ‘시’자가 앞에 붙은 존재들은 마냥 편한 느낌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댁, 시누이 등등……. 부디 그러한 ‘느낌’ 때문에 이 책이 일부 독자들에게 부수적인 외면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객쩍은 생각을 해 본다. 이런 시누이라면, 시를 즐거이 나눌 수 있는 누이-언니라면 나로서는 언제나 환영이다.

 

ps. 글의 제목은 블리자드 사의 게임 ‘오버워치(Overwatch)’ 등장 영웅 중 한 명인 트레이서(Tracer)의 대사("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이야!")를 변용했다.

 

 


 

*본 서평은 ‘<詩누이> 사전 서평단’ 활동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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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19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내용이 쉬울수록 좋아요. 그런데 내용이 쉬운 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아마추어 시인이 쓴 시가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천대받습니다. 표현이 어설퍼도 시를 읽을 때 좋은 느낌을 가졌다면, 그것도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인간의과도기 2017-06-19 23:56   좋아요 1 | URL
말씀해 주신 대로, 읽는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시는 좋은 시입니다. 몇몇 지하철 시나 SNS에서 공유되는 창작 시 같은 것들에서, 감정이 절묘하게 포착된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쉬운 시를 무시하는 경향은, 아무래도 중등학교에서 시를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문학 갈래‘라고 전제한 후 시 교육을 한 것에 따른 부작용 같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오는 자신의 느낌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읽지 않고 ‘여기 뭔가가 더 있을 거야‘라고 의심하고 고민하다 보니 결국에는 시 읽기를 포기해 버리는 거지요. 우리가 언제부터인지 잃어버린 ‘느낌적인 시 읽기‘에 이 책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귀한 댓글 감사합니다. :)
 

  한때 주위 사람들에게 요즘 읽을 만한 한국 소설가로 장강명을 첫 번째로 권했던 때가 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는 권하지 않는다. 우선 요즘은 나에게 ‘읽을 만한 책이 무엇인지’ 의견을 묻는 사람이 없다. 또한, 장강명을 탐독했던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인식 체계의 격절이 있다. 유신 시절의 김지하와 지금의 김지하 사이만큼의 격절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장강명의 작품을 거의 다 읽었다. 리뷰를 쓰지 않아 독서 이후의 느낌이 어땠는지 떠올릴 만한 단서는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매력적인 부분이 있었을 테니까 계속 찾아서 읽었겠거니’ 하는 생각이다.

 

   그의 등단작인 『표백』은 독서기록을 찾아보니 2013년 여름에 읽었다. (그러고 보니 이때는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한국 소설을 정말 많이 읽었던 때다. 현실로부터 무작정 도망가는 데에는 이야기만한 게 없지 않은가 말이다. 어쨌든.) 그 이후로 한동안 ‘장강명’이라는 이름으로 인상적인 작품이 발표된 적은 없었다. 내가 당시 『표백』에 대해 가진 인상이라면 ‘한겨레문학상’이라서 가능했던, 적당히 잘 만들어진, 적당히 사회적인 소설이라는 것뿐. 뭐, 앞으로 작품 활동이야 계속 하시겠지요, 건필을 바랍니다. 이 정도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다.

 

 

 

 

  그렇게 ‘장강명’이라는 이름을 잊고 지내다, 『한국이 싫어서』를 접했다. ‘헬조선’ 담론이 한창이던 때였다. 약간의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지금-여기’의 당대성을 이렇게 잘 포착해낸 소설이 있었던가. 거기다 불필요한 수식, 미학 그 자체를 위한 미학적 문장도 없어 잘 읽힌다. 드디어 ‘한국문학은 재미도 없고 만날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한다’는 세간의 해묵은 편견을 반박할 증거를 찾았다! 이 소설 이후로 나는 ‘장강명 전도사’를 자처한 것이다. 한국문학이 재미가 없어요? 고개를 들어 장강명을 보세요. (한국문학하고 담 쌓은, 그리고 정말로 ‘한국이 싫어서’ 이민 준비하고 있던 나의 지인에게도 이 소설을 추천했다. 그 소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결혼해서 잘 사는 듯 보인다.)

 

 

 

       

   전도사는 자고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큰 믿음이 있어야 하는 법. 장강명의 신작은 신작 알리미 신청해서 소식 받자마자 주문해서 읽고(『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댓글부대』), 이전 소설들은 일부러 찾아서 읽었다(『호모도미난스』, 『열광금지, 에바로드』). 단편도 찾아 읽었다. 계간 문학잡지 『세계의 문학』(민음사 간, 지금은 폐간되고 없다)에 게재된 「알바생 자르기」,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단편 하나 더(파업 참여자/관계자의 삶을 건조하게 취재하듯 쓴 단편소설이었다), 『다행히 졸업』에 수록된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까지. 글을 쓰는 이 시점까지 읽지 않은 장강명의 작품은 『한밤의 산행』 수록 단편, 『뤼미에르 피플』, 이 둘 뿐이다. 물론 다른 지면에 내가 확인하지 못한 작품이 실렸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찾아보고 싶지는 않다. 전도사는 어쩌다 냉담자가 되었을까?

 

 

 

  장강명을 탐독할 때 그가 출연한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더 테라스’를 유튜브로 찾아 들은 적이 있다. 정확한 워딩이 기억나지는 않는데, 그는 여기에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을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했다. 아직 내가 본격적으로 페미니스트 정체화를 하기 이전인지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2016년이 되고, 그의 본모습(?)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시작은 ‘악스트를 위한 변명’(링크)이었다. 은행나무에서 출간하는 문학잡지 악스트는 매 호마다 작가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익명의 SF 소설가 ‘듀나’와의 인터뷰가 그 준비의 무성의함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에 ‘알트SF’라는 1인 SF 웹진이 악스트의 인터뷰를 비판했고, 은행나무 출판사는 여기에 법적 어쩌구 하는 문제를 언급해 결국 알트SF는 무기한 휴간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 장강명의 저 글이 드러난 것이다.

  초록창에 ‘악스트를 위한 변명’ 검색하면 나오는 블로그 글(링크)에서도 비판하고 있지만, 그는 ‘한국 SF 독자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글을 쓴다는 것을, 은행나무 출판사나 악스트 측으로부터 어떠한 부탁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굳이’ 강조하면서 객관적으로 양측(악스트-은행나무/알트SF)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기술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은행나무-악스트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나는 이 글을 ‘물타기의 전형’이라 판단했다.

 

 

 

 장강명의 첫 에세이 『5년 만에 신혼여행』은, 출간 전 인터넷 연재분만 읽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이다. 읽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부분들이 있었다. 가령 폴리아모리에 대한 언급 같은 것들(링크).

 

 

 

 

  올해 들어서는 한국일보에 칼럼도 종종 쓰는 것 같은데, 그 중 하나를 보고 나는 문자 그대로 기함했다. 그 제목부터가 대단하다. ‘심오롭고 공허한’(링크). 지금의 내 기준에서 보면 첨삭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가장 심각한 부분은 이것이다. 그는 ‘심오로운’, 그러니까 심오한 것 같지만 사실은 별 뜻 없는 문장이 SNS에서 널리 확산되며, 그 중 일부는 ‘위험하거나 해로운’ 것이라 규정했다. 그 대표적 예가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 같은 문장이라고 한다. 이 ‘심오로운’ 문장이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구분하면서 살 것이라며 농을 들었는데, 그 아래 문단에서 ‘장학생 선발은 차별 없이 어찌 하나? 형사재판에서 범죄자 양형은 차별 없이 어찌 하나?’라는 요지의 문장들을 발견하다 보면, 그가 ‘차별’과 ‘구분’을 제대로 ‘구별’하고 있는지부터가 의심이 드는 것이다. 때마침 이 글을 내가 읽은 시점은 군인의 신분으로 동성애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A대위에게 군사법원이 유죄를 선고한 날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이러한, 인간 이하의 일이 너무 태연하게 일어나는 것을 차마 예측하지 못하고 무려 2주 전에 이런 글을 썼으니까 이번 일과 상관이 없을까? 나는 오히려 그와 같은 부류가 더 심각하다고 본다. 레드홍이나 태극기부대, 일베처럼 차별을 대놓고 조장하는 이들은 그래도 사회 전반의 교양 수준이 올라가면 걸러내기가 쉽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는 기자 출신이다. 문장 수련을 다년간 받은 사람이다. 그것은 자연히 소설에 드러났고, 기사문과 같은 명확하고 건조한 문장은 그가 쓴 소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여기에 독자들이 많이 호응해 주었다. 그런 그가 소설 아닌 글을 쓴다. 사실과 판단, 개념과 오개념을 섞어서 쓰고, 논점을 교묘하게 흐린다. 나는 그가 ‘몰라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산문을 읽고 대놓고 책잡을 사람들이 사회적 소수파밖에 없다는 것을 ‘아니까’ 그렇게 쓰는 것이다. 장강명의 산문에 나타나는 이런 ‘심오로운’ 문장들에, 의외로 많은 이들이 납득을 한다. 그리고 진정한 ‘숙의’는 이 지점에서 멈춘다. ‘숙의’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많은 말들을 논의의 차단이라고 받아들이시면, 아, 예. 할 말이 없어집니다. 전 ‘논객’이었던, 곧 ‘페미니즘의 억지를 고찰’하는 책을 낸다는 모 씨가 생각나는군요.

 

  이쯤 되니, 장강명이 ‘진보가 좋아하는 주제들 적당히 믹스하면서’ 글을 썼을 뿐이라는 비판이 어느 정도 와 닿기도 한다(링크). 그런데 이걸 반대로 생각해 보면,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작가들은 왜 작품을 이렇게 못 쓰는가? 예전에 이우성이 장강명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인터뷰에도 이런 문제의식이 포함되어 있다(링크).

  이런 점에서 장강명은 나에게 애증이다. 내가 여전히 과문한 탓이겠지만, ‘지금-여기’의 현실을, 선명한 서사와 함께 환기하며, 동시에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떠한 문제의식을 떠올리게끔 하는 소설을 쓰는 동시대 작가는 한국 문단의 규모에 비하면 초라하리만큼 적다(진보연하면서 막상 자기 성찰도 안 하는 분들이 일단 한 다스다). 장강명이 그 초라하리만큼 적은, 몇 안 되는 동시대 작가에 해당한다. 소설만 보면 그렇다. 그 가치를 높이 산 증거로, 작년에 학교에서 계약직으로 일할 때 학생들에게 장강명의 단편을 읽히고 토론을 진행했다. 물론 ‘성인의 현실’이 학생들에게 곧이곧대로 와 닿겠냐마는, 그래도 한국전쟁기나 산업화 시대 소설보다는 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불행히도 교과서에는 그런 ‘옛날’ 소설들이 많다). 소설만 보면, 장강명의 몇몇 소설은 학교 현장에서 주로 가르쳐지는 대부분의 ‘아재 문학’보다 낫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이전보다 덜 읽는 지금도 장강명의 신작은 뭐가 나왔나 찾아보게 된다(사실은 신간 알리미를 해제하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이 글을 처음 쓰고자 한 이유도 장강명의 최근작 『아스타틴』에 대한 감상평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 소설은 스페이스 오페라다. ‘지금-여기’를 연상케 하는 요소가 1도 없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로운데, 초지능의 후계자들이 초지능의 자리를 놓고 서로 살육전을 펼친다. 최후의 생존자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어, 잠깐, 나 이런 이야기 본 적 있어.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자백(?)한다. “이 소설은 SF 명작들의 영향을 듬뿍 받았고, 저는 글을 쓰며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많은 부분을 인용했습니다. (...) SF 세계관 속에서 벌어지는 서바이벌 게임은 스티븐 킹의 『런닝 맨』, 타카미 코슌의 『배틀 로얄』, 수잔 콜린스의 『헝거 게임』에 멋지게 나온 바 있습니다. 특히 『런닝 맨』과 『헝거 게임』은 그런 서바이벌 게임들이 TV로 방영되고, 시청자 반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SF 장르가 특히 한국 문학계에서는 변방 취급을 받고 끊임없이 주류로부터 ‘후려치기’를 당하는 만큼,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인용한 부분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이 작품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다. 다만 이 작품을 ‘굳이’ 봐야 하는 이유를, SF 문외한인 나로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작품에 ‘지금-여기’를 연상케 하는 요소가 하나 있기는 하다. 이야기 말미에 주인공 ‘사마륨’의 행보와 관련한 내용인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다. 2017년 상반기 현재가 정말 잘 연상된다는 것만 이야기하겠다.

 

  나는 작년에 『5년 만에 신혼여행』 100자평에 이렇게 썼었다: “장강명의 문장을 변용하자면, 나는 소설가 장강명의 팬이다. 에세이스트로서의 장강명에 대해서는 견해를 다소 달리 한다.” 지금은 여기에 한 문단을 덧붙인다.

  장강명은 최근 칼럼(링크)에서 세대갈등을 다루며 베이비붐 세대와 88만원 세대가 “잘 모르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를 하나씩 추측해 써” 본다고 했다. 88만원 세대에게 모를 것이라고 추측한 이야기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 개인주의와 인권 감수성은 언어와 같다. 몇 시간 동안 공부한다고 저절로 몸에 익지 않는다. 그리고 성, 인종, 성적 지향에 대한 인권의식이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온 건 선진국에서도 상당히 최근 일이다. 나를 비롯한 기성세대들은 지금 외국어를 배우느라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기본적으로 서툴고, 아는 것도 자꾸 틀린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답한다. 언어 습득에 있어 학습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직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인권 의식이 언어와 같다면, 인권에 대한 직관이 없는 사람은 인권을 배우려 하지도 않을뿐더러, 이해를 해도 잘못 이해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일부가 뛰어난 직관을 가질 수도 있고, 88만원 세대의 일부가 직관이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충분히 숙의하고 있다. 그는 글에서 쉽게 제3자, 관찰자, 판단자의 위치를 점한다. 창작자의 사상이 교묘하게 뒤틀리면 그 흔적은 반드시 그 자신의 작품에 남는다. 나는 그가 오래도록 유의미한 작품 활동을 하길 바란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그에게는 조금 더 많은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ps. 『아스타틴』 본문에 편집 오류인 듯 보이는 부분이 있어 문의를 하려고 출판사 트위터를 찾아 봤는데, 음... 총체적 난국이다.

  ps2. 악스트 사태의 이후 결과: 악스트 편집위원들이 듀나에게 공식 사과하고, 문제의 인터뷰는 악스트 인터뷰 모음집 『이것이 나의 도끼다』에서 전면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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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민주주의 잔혹사 - 한국 현대사의 가려진 이름들
홍석률 지음 / 창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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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유명 역사 강사의 강의 캡처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링크). 수능에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등장한 것에 불만을 토로한 수험생들의 반응을 전하며, 진정 역사에서 ‘중요한’, 또는 ‘중요하지 않은’ 인물은 누구인지를 되묻는 내용이다. 비록 그는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한국사 강의를 주업으로 하지만, 그런 그가 보기에도 ‘시험에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수험생들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새겨진 이름들을 ‘지나칠 정도로 가볍게’ 넘어가는 현실은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무시당하고 말 이름일지언정 역사에 남게 된다는 것은, 그것도 한 사람, 또는 그 시절의 단체명이나 사건, 운동 등의 이름이 오롯이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의미인지! 이름 한 번 불리지 못하고 사라져 간 많은 이들의 삶이 역사책에서 ‘이후 몇(십) 년 동안 과도기가 지속되었고, 사람들의 삶은 힘들어졌다.’ 식의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사례를 의외로 흔하게 본다(교과서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안다’고 말할 때의 평가 척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의 한 시기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누구이며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얼마나 아는지의 여부가 된다.

 

 

 

  이 사람 누군지 알아? 이토 히로부미? 안 되겠네. 민족의 역사도 모르는 매국노!

 

 

  서벌턴(Subaltern)이라는 개념은 우리말로 ‘하위자’ 또는 ‘하위주체’쯤으로 번역된다고 한다. ‘~고 한다’라고 앞 문장을 끝맺은 이유는, 학부 시절에나 개념을 얼핏 익혔을 뿐 개념의 정확한 정의나 관련된 논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이 주는 문제의식만은 이후 내 역사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엄연히 현실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라지는 이들은 누구인가? 왜 그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잊히는가?

  잠깐, ‘그들’이 잊힌다고? 나는 그럼 민중이 아니고 엘리트쯤 되나? 이쯤에서 질문을 수정해 본다. 민중의 정확한 이름은 무엇인가?

  우리는 민주주의를 공기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살고 있고, 그 바탕에는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피와 눈물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민중이 민주주의의 주체라는 것도, 권력의 근본이라는 것도 상식으로써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간 민주주의를 반추할 때 떠올리는 이름은 4.19 혁명의 김주열, 87년 항쟁의 김종철과 이한열, 이 정도다.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열사들의 이름값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민중은 그들의 피를 기억하고 그들과 ‘함께’ 이 땅의 민주화를 이끌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사실상 ‘들러리’ 취급을 받는다. 기껏해야 ‘몇십(또는 몇백)만’의 ‘인구수’로 다루어지는 게 현실이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민중이 잊힌 민주주의’라는 현실에서 비롯한다. 필자는 서문에서 말한다.

 

“‘민주주의 잔혹사’라 할 때 이는 한국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탄압, 국가폭력 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혹은 희생된 사람이 여전히 가려지고, 역사에 잘 기록되지 않는 것 역시 잔혹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책은 주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건’에 대한 ‘잘 모르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4.19 혁명의 결과가 무엇인지, 5.18이 어떤 날인지, 6월 항쟁이 대략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정도는 이미 잘 안다고 생각한다(여담이지만, 나의 학부 시절 때도 5.16과 5.18을 구분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기사가 교내 신문에 나고 그랬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 때 억울하게 끌려간 삼청교육대원들에 대한 진상조사가 아직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 4.19 혁명 때 이승만 하야를 분명하게 외친 이들이 마산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라는 이야기, 산업화 시대에 ‘민주노조’를 이루려 노력했던 이들이 여성 노동자들이며 그들이 정부, 한국노총 및 남성 노동자들에게까지 핍박받았다는 이야기들은 생소할 것이다.

  역사 주체의 행위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면 그 주체는 역사의 진보와 발전에 있어 수행한 역할이 미미한 것일까? ‘그렇다’라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어떤 주체와 그 주체의 행위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부차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관련 기록이 부족한 것이다.

  승자는 패자의 역사를 끊임없이 지워내는 한편, 자신의 역사를 치장하여 더욱 빛나도록 한다. 5.16 군사정변 관련자들은 ‘4.19 혁명 이후 사회는 어지러웠고 기존 정권이 부정과 부패로 얼룩졌으므로 불가피하게 새로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라는 식으로 ‘거사’를 일으킨 이유를 댔다. 이러한 서술이 민주화 도래 이후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으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내가 군인이던 2010년대에도 버젓이 군 정신교육 자료라는 이름으로 유포되고 있었다. 군 정신교육을 진지한 마음으로 듣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민주시민과 국가를 수호한다는 집단에서 왜곡된 역사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설마, 지금도 정신교육 내용이 그러하려나). 개인적으로는 군사정변 관계자들이 내걸었던 명분이 그 당시의 실제적인 정치적 상황과 얼마나 괴리가 있는지를 낱낱이 지적하는 5장의 내용이 이 책의 백미라고 생각했다.

  아, 직전의 서술은 취소해야겠다.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중심과 경계를 구분 짓고 있었다. 이 작은 책에서조차! 어느 것 하나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외면했던 작은 역사들, 그 역사에서 살던 소외된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의 명료한 뜻을 지금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역사적 가능성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우리가 미래의 역사를 준비하는 데 있어 좀 더 넓은 시선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역사를 다루는 데 있어 가정법은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 명제는 반만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명제는 우리나라가 저 고구려 때와 같이 드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등과 같은 민족주의적, 영웅주의적 사관을 포기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역사적 가능성을 소거해 버림으로써 일반의 역사의식을 결과 중심적으로 굳어지게 한다. 역사가 과거를 토대로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정의에 가깝도록 역사를 체화할 필요가 있다. 주변부를 배제했던 민주주의의 지난날, 그 잔혹한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은 가능성의 호출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형식적 민주주의를 맞이한 지 이제 겨우 30년 지났다. 그 중 10년 가까이는 말 그대로 민주주의의 형식적 껍데기만 남은, 민주주의가 사실상 뒷걸음질하던 시절이었다. 김광석의 노랫말처럼, ‘이제 다시 시작’일 뿐이다. 위대한 몇 사람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결코 위대하지 않은, 평범해서 눈에 띄지 않는 민중들이 만들어가는 역사에도 이제는 주목해야 한다. 사실, 그 역사는 우리가 만드는 역사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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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로스트 한국말’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이 영상(링크)에서 말을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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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대학 동기 모임에 갔더니 동기들이 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ㅇㅇ(오빠/형)~ 얼굴 진짜 좋아졌네! 인상이 훨씬 부드러워졌어.”

 

  물론 나는 단박에 알았다. 한국어 화법의 전통으로 학교에서도 가르치는 것 중 하나가 ‘완곡어법’인데, 그네들이 나에게 그것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살이 쪘다는 것이다…….

 

  나는 한동안 살이 찌지 않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자그마치 ‘체중 미달’로 학교에서 실시한 일제 헌혈에서 제외되기도 했었으니, 말 다 했다. 대학에 진학했다고 영양 상태가 급격히 좋아지지는 않아서, 몸무게‘만’ 따지고 보면 어지간한 남성 아이돌 가수 못지않았다. 술, 패스트푸드 등 체중 관리에 안 좋은 것들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도 그 몸무게를 유지했으니, 돌이켜보면 그때가 축복받은 시절이었다.

 

  과거의 영광 늘어놓으면 뭐하나. 운동은 끔찍이도 싫어했고 먹는 것, 특히 살찌는 음식은 끔찍이도 좋아했으니 살이 찌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결혼하고 나서는 새삼스럽게 배우자와 함께 하는 외식(=맛집 탐방)의 즐거움에 빠졌다. 집에서도 먹고, 먹고 또 먹었다. 결국 결혼한 지 1년이 안 된 시점에 몸무게 증가폭이 두 자릿수에 달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예의 인상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내가 죄인이다. 배우자를 살찌운 죄인…….

  BMI 수치가 ‘비만’으로 나오는 일은 내 인생에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이제 현실을 직시할 때였다. 조금 더 살이 찌면 ‘고도비만’으로 넘어가겠다 싶었다. 당장에 다이어트 시작.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나는 운동을 싫어한다. 그런데 살을 빼려면 운동을 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운동이 싫다. 그럼에도 살을 빼려면 운동을 해야…… 무한반복.

 

  그러던 중에 ‘생각하는 운동쟁이들’ 피톨로지의 신간을 보게 되었다.

 

  

 

  피톨로지는 『생존체력: 이것은 살기 위한 최소한의 운동이다』를 통해 생존체력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생존체력이란?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한’ 체력이다. 바야흐로 ‘맨정신으로’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어려워진 시대이다(바꾸어 이야기하면 이 시대는 불안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존 조건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 매일 스스로를 번아웃시키는 시대다). 식스팩이니 S라인이니 하는 몸짱이 되겠다고 운동을 하면, 안 그래도 지치는 일상이 더 지친다. 그래서 피톨로지는 제안했다. 일상을 보다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체력, 생존체력을 기르자고.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서 소개된 운동법은 정말 간단하다. 스쾃, 버피, 푸시업, 플랭크. 네 가지가 끝이다. 물론 실전으로 옮기면 알게 된다. 이 운동들은 정말 간단하지 않구나, 라는 혹독한 현실을. 결국 나는 생존체력도 제대로 못 기르고 스쾃 단계에서 며칠 버티다 뻗어 버렸다. 그러면 그렇지.

  어찌 되었든, ‘생존체력’이라는 개념의 제안도, 이것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컨텐츠로 가공하는 피톨로지의 내공에는 신뢰가 갔다. 그래서 블로그도 찾아가 업데이트된 새 글도 꾸준히 읽고 했었다.

 

 

 

  그런 피톨로지가 신간을 냈는데, 무려 다이어트 책! 제목부터 거창하다. 『공포 다이어트』. 그렇지. 살을 뺀다는 건 공포가 느껴질 정도로 힘든 일이야……. 이건 아니고. 책 소개를 보니 여기서의 ‘공포’는 ‘공복감/포만감’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즉, 공복감과 포만감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공포 다이어트’의 핵심이다. 한마디로 ‘덜 먹으면 빠진다’는 것인데, 너무 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우리는 당연한 소리를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마나한 소리, 식상한 소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대개 진실은 그 ‘하나마나한 식상한 소리’에 있다. 안 먹으면 살이 빠진다.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 여기까지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이 그리 쉽게 굴러가던가. 어쩌다 과음을 하게 될 때도 있고, 미친 듯이 야식이 당길 때도 있고, 아픈 시기가 있어 입맛이 싹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도 있다. 먹는 게 계획한 대로 조절되지 않다 보니, 다른 묘수를 찾게 된다. 원푸드 다이어트, 황제 다이어트, 지방 다이어트 등등…….

 

  피톨로지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왜 사람들은 정도(正道)를 포기하고 샛길로 가는가? 단지 다이어트의 목적이 ‘살만 덜어내는 것’인가? 물론 다이어트는 살 빼려고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살 빼서 뭐 하려고? 예뻐지고 멋있어지려고? 아니면 단순히 건강해지려고?

 

  최근에 아이돌 그룹의 한 멤버가 거식증으로 활동을 중단한 일이 있다(관련 기사). 살이 빠지면 지금의 한국 사회 기준으로는 예뻐지고 멋있어지는 게 맞다. 그런데, 예뻐지고 멋있어지는 것이 인생의 유일 목적인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아이돌 가수들의 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문제에 주목해 본다면, ‘어떻게든’ 살을 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살을 빼되, 건강하게 빼는 것이 중요하다. 어차피 대다수는 아이돌이 될 것도 아니고, 아이돌이 될 수도 없다.

  결국 우리 생활 습관을 점진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피톨로지는 이 점에 주목해, 지극히 기본적이면서도 장기적인 다이어트 방법을 제시한다. 공복감과 포만감의 패턴을 포착하고, 이를 조절해 궁극적으로 체중을 감량하는 것.

  물론 지금 당장 살을 덜어내야 하는 이들에게는 피톨로지가 제안한 방법이 답답해 보일 수도 있겠다. 두 달 뒤부터 바캉스 철인데, 그렇게 천천히 해서 살 언제 빠지냐고! 하지만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자. 다이어트는 결국 내가 좀 더 건강해지기 위해 하는 것이다. 우리는 건강을 잃은 마른 몸을 보고 예쁘고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생을 함께 할, 평생까지는 무리더라도 장기간 함께 할 다이어트 방법을 찾는다면, 일단 먹는 것부터 차츰 줄여나가는 게 어떨까?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남들이 다 자는 새벽. 아직 갓난쟁이인 딸을 돌보느라 낮밤을 바꿔 생활하다 보니 저녁을 열두 시 이전에 먹고는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는다. ‘공포 다이어트’를 시작한 지 나흘째, 예전 같으면 4시가 되자마자 패스트푸드점에 아침 메뉴 주문을 넣었을 텐데(‘x모닝’은 내 소울 푸드다), 물만 마시며 버틴다. 다음 끼니는 자고 일어나야 먹을 수 있다.

다이어트는 장기전이니까, 작심삼일하지 말고 버텨야겠지. 그래도 배고픈데 참는 건 정말 힘들다!

 

 

  ps. 『공포 다이어트』 에필로그에서 밝히기를, 원래 ‘교양과학서’로 기획되었던 원고가 지금의 ‘실용서’의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책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문적인 과학 지식이 그 증거다. “‘다이어트 책’인데 왜 이렇게 어려운 내용이 많아?”라고 생각이 되신다면, 두 번째 챕터만 볼 것을 권래 드린다. 방법론으로만 따지자면 두 번째 챕터가 핵심이다.

  ps2.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명색이 ‘다이어트 책’이니만큼, 첫 번째 챕터에서 다이어트에 대한 나름의 동기부여를 하는데, 이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식/서술인지에 대한 고민을 잠깐 했다. 잠깐 했는데, 뭐, 다이어트 책이니, 어쩔 수 없겠다 싶어서 가볍게 읽고 넘어가버렸다. 혹시 모르니, 참고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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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종류의 SNS를 사용한다. 알라딘 블로그까지 하면 세 종류지만, 이건 이제 막 시작했으므로. 쨌든. 이들 SNS의 초기 타임라인을 구성한 건 N년 전의 나인데, 지금의 나와는 정치적 성향이나 가치관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 역시 다르다. 그 결과 내 SNS 타임라인에서는 주요 대선후보의 지지자들을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2번 빼고.

  링크한 기사에서는 '대선 과몰입' 현상을 이야기한다. 멋대로 요약하자면, 대선 과몰입이란 지지하는 후보가 비판받는 것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때로는 그 후보를 위해 자발적으로 준-선거운동을 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기사 말미에는 전문가의 의견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는 이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한편 이에 따른 해결책으로 '인터넷으로부터의 도피'를 제시한다.


  SNS가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한 만큼, SNS 정체성(identity)을 둘러싼 담론도 많이 생산된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SNS 정체성 담론의 전환적, 보편적 패러다임이 제시되지 않았다고 본다. SNS 정체성과 기존의 정체성 사이의 관계가 서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사실 잘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기존의 관습 체계, 그러니까 SNS가 지금처럼 익숙하지 않았던 몇 년 전까지의 생각하던 습관에 따라 SNS를 오프라인으로부터 쉽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이라 여긴다. SNS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 중 하나가 '확증 편향'이라는 데에서도 이런 일반적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오프라인과 달리' 자기의 선호 체계에 따라 인간관계를 재구성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니 이 얼마나 편협하냐, 라는 생각. 실제로 이 비판은 현상의 경향성을 일정 정도 반영한 것이기는 하다.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도 자신의 입장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져 버리니 말이다. (요즘 내 SNS 타임라인을 보면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다.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이 비판은 인간관계의 본질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인간관계는 스트레스다.' 사고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의 말도 경청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온다. 나만 하더라도, 모 SNS에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럴 듯한 흰소리로 여성 문제를 호도하는 '자칭 전 논객'을 볼 때마다 '피꺼솟'한다. (알라딘에는 자신의 저서 비판에 장문의 분노를 리뷰랍시고 직접 올리신 분이기도 하다. 페미니스트를 그렇게 싫어하시면서 '페미니즘의 포비아 확산'에 관한 책 어쩌구 '~~~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으로 곧 출간하신다는 그 분!!!) 그럼에도 그의 SNS 팔로우를 끊지는 않는다. 내 인성이 훌륭해서는 아니다. 다만 남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확증 편향의 오류에 빠지고 싶지는 않다.


  물론 안다. SNS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달게 받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 좋자고 하는 건데, 굳이 스트레스 받아야 하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 나 하나 무기를 내려놓는다고 뭐가 바뀌나? 하는 회의적인 생각도 든다. 사실 나부터가 은연중에 스트레스를 받아 왔는지도 모른다. 당장 이렇게 누가 읽을지도 모르는 글을, 이런 황금 같은 주말에 길게 쓰고 있지 않은가(물론 나는 수험생이므로 주중/주말 구분이 의미 없다).


  탄핵이라는 역사적 전환기 이후의 첫 대선이니만큼 이 대선은 중요하다. 각 후보 지지자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후보들에게는 나름의 한계가 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 한 명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려 한다. 정치가 진정 차악을 선출하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수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부딪쳐야 한다. 어떤 지점에서 후보를 비판하고 어떤 지점에서 후보를 지지하고 수용하기로 할지, 왔다리 갔다리 하는 생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 속에 이미 들어 있다. 이 말에는 '수용'에 무게추가 쏠려 있긴 하지만, 정당한 비판이라면 그 비판을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

 

  글 쓰느라 나 혼자 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 할많하않.

 

  *사족: 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칠 때 '예상 독자를 고려하라'고 한다. 이 글을 누가 읽을 것인지 염두에 두고 써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당초 이 글은 내가 이용하는 한 SNS에서 특정 후보를 과도하게 지지하는 지인의 말이 날이 갈수록 과격해지기에 그가 한 번 보았으면 해서 썼다. 누가 어떻다, 이런 이야기를 글에 쓰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는 내 글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글을 약간 고쳐서 다시 썼다. 그의 구체적인 말들이나 가치관을 여기에 그대로 옮기면 그야말로 '뒷담화'가 되는 것이니, 진짜로 여기까지.

 

  인생은 고통이다. 할많하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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