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도 일한 덕분에 이번 주말은 이틀 연휴가 아닌 사흘 연휴로 보낼 수 있었다. ‘하루라고 쓰면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주말이 1.5배가 되었다고 쓰니 정말 큰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을 실감하게 된다. 실제로도 여유가 생겨, 간만에 배우자와 주중에 맛있는 음식도 먹고 교외 산책도 했다. 마음이 많이 여유로워진 덕분에 그간 사두었으나 읽지 않았던, 한편으로는 새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한, 묵은지 같은 책들을 완독하고 또 뒤적이는 시간을 보냈다.

 

 

  

가난의 문법2주에 걸쳐 읽었다. 사실 나는 누가 무슨 책 주로 읽어요?’라고 묻는다면(아직 유명인사가 아닌 탓에 이런 질문을 많이 받지 못한다) ‘가장 좋아하는 책 분야는 시사나 사회과학입니다라고 답할 만큼 사회과학 책을 많이 읽지만, 이 책은 주목을 하는 주체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전통적인 예비 사회운동가부터 친자본주의적 인플루언서까지) ‘대세는 일단 피하고 본다반골 힙스터기질 때문에 독서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평소에도 시민은 어떤 식으로 사회에 책임을 지는가를 자주 생각하면서 정작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사회의 주요 논의를 회피한다면 그것만큼 모순이 어디 있겠는가?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원래 좋은 사회과학 책은 독자를 불편하게 할뿐더러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을 공론장으로 인도하는 법. ‘폐지 수집 노인이 마주한 구체적이고 삭막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니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시야에 들어온다.

 

사회과학 책을 읽을 때 보통의 독자가 취하게 되는 태도, 저건 내 일은 아니야에서 비롯되는 모든 태도(연민, 동정, 외면 등)를 저자는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 다음의 대목과 같이 그 최소한의 태도조차 경계하는 저자의 선명한 말이 나는 충분히 미더웠다.

    

 

가난한 노년을 다가올 불행으로 여기며, 그보다 나아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일은 처참하다. 노인들의 모습은 젊은이들의 불행쿠키가 아니며, ‘반면교사(反面敎師)’도 아니다. 지금 닥친 노인들의 생활 속에서 노인들의 어려움을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종이상자의 생산량·배출량의 늘어나는 현상은 노인을 착취하는 일을 심화시키고 있다. 배달과 온라인 쇼핑이 활성화되며 종이상자의 사용량이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다. 집과 가게마다 다 쓴 종이박스의 배추량도 늘어났다. 그렇지만 젊고 부유한 소비자들은 폐품의 배출과 처리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들은 종류에 따라 분리수거를 하면 자신의 책임을 완수했다고 여긴다.

 

책의 결론은 에필로그에 아주 명확히 드러나 있다. 이 글에서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조차 스포로 여겨진다고 생각해서 적지 않았는데, 궁금하다면 직접 찾아볼 것을 추천한다.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최근 가장 많이 읽는 작가는 곽재식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전자책 구입목록을 보면 나온다. (나 혼자서 웃기다고 생각하는) 웃기는 사실은, 종이책으로 산 책이 하나도 없다는 것. 앞으로도 그의 책을 꾸준히 사려면, 책 종수가 많다보니 종이책은 곤란하지 않겠는가 하는 심정도 있었겠지만, 사실은 신간/구간 가리지 않고 전자책으로도 출간된 책이라면 종이책을 제끼고 전자책을 선택한다. (혹 작가님이 이 글을 본다면, 종이책을 둘 공간이 마땅치 않은 독자의 충정을 헤아려주시길.)

 

 아무튼. 최근 한 달 이내에 산 곽재식의 책은 삶에 지칠 때 작가가 버티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구매일과 책 제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건대, ‘삶에 지친정도가 압도적으로 심해 글이고 뭐가 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무시로 들다보니 곽재식은 정말로 삶에 지칠 때 어떻게 버텼는지가 궁금했던 것 아닐까. 나는 물론 작가도 아니지만, 어쨌든 생계와 직접 관련이 없는 글을 비정기적으로 쓰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한때는 작가를 꿈꿨던 사람이니까.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내린 결론은 곽재식이니까 버텼지라는, 매우 이상한 것이었다.

    

 

 

 

 

지금은 로봇 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는 그의 또 다른 책을 읽는 중인데, 첫 부분에 무려 그의 어린이시절, 컴퓨터로 ‘BASIC’ 언어로 프로그래밍한 일화를 그럴 수도 있지정도의 느낌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은, 성인이 된 지도 한참 지난 아저씨니까 어린이시절은 저마다 다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어린이 때 이룬 업적 중 하나가 기껏해야 읽고 싶은 책이 있어 생일 선물로 이 책을 사 주세요라고 양친에게 요구했다는 일 정도다. 고전도 아니고 대학 개론서도 아닌, 그냥 어린이용얇은 교양 서적 한 권.

 

 

 

 

이런 간극의 차이에서 누가 누굴 본받나. 실제로도 삶에 지칠 때 작가가 버티는 법에 실린 여러 글들이 총체적으로 의도하는 바, 그러니까 책의 기획 의도가 과연 제목에 부합하는지가 읽으면서도 여러 번 의심이 되었다. 결론은 이렇다. 곽재식의 팬이어서 별점 기본 4(5점 만점). 그러나 글쓰기에 대한 실용적인 지침은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를 참고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되니 참고할 것.

그러나 이 책이어서 건진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곽재식 속도의 실체. 그는 그 실체를 친히 알리는 것을 넘어, (예비) 작가들에게 권면하기까지 한다.

  

 SF를 쓰는 사람들이 하는 농담 중에 곽재식 속도라는 게 있다. (...) 6개월 동안 단편 소설 네 편을 쓰는 속도를 말한다. (...) 그렇지만 여러 상황을 막론하고 1곽재식 속도 정도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도전해 볼 만한 속도라고 생각한다. 반년 동안 원고지 4백 장을 목표로 글 쓸 건수를 만들며 그때그때 결말을 짓고 완성해 나가는 것은 작가가 되려고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해 볼 만하다.

 

 

정말 해 볼 만한가요? 어린이가 BASIC 프로그래밍을 하는 것만큼이나? ‘곽재식 속도는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원고지 400/6개월 = A4 40/24주 = A4 1.67/1

(여기서 A4는 한글 프로그램에서 용지/글꼴 설정을 바꾸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설정을 안 바꾸고 한 장을 꽉꽉 들이 채우면 원고지 10매 언저리가 나온다.)

   

 

그러고 보면 나도 한 번 쓸 때는 이 정도를 쓴다. 반은 인용, 나머지 반의반은 정보값 없는 헛소리라서 그렇지. 문제는 삶에서 지치는 정도가 너무 잦아 매주 글쓰기를 꿈만 꾸고 실천은 못 한다는 것. 하긴 모든 진리(예수님 부처님 공자 말씀 포함)는 옛날부터 지극히 당연한 말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던가? 실천을 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문제였을 뿐.

어찌 됐든, 쓸 게 있을 때는 쓰는 게 좋다. 쓸 게 없는데 억지로 쓰지 않는다면야.

(사족: 기록에 관한 신간-그 책을 차마 사지는 못했지만- 출간 소식에 영감을 받아 요새는 며칠에 한 번 꼴로 일기를 쓴다. 지극히 평범한 말로 이루어져 있는, 늘어지는 일기.)

    

 

아무튼, 은 이전의 나였다면 크게 관심 가지지 않았을 책이다. 나의 산행은 한 번도 자의에 의한 적이 없었다. 수학여행, 야간행군 등... 그 누가 미운 정을 이야기했나? 미운 것은 곁에 오래 두면 더 미워질 수도 있다. 지금의 나는 회사에서 부서도 바뀌었고, 사무실에만 앉아 있다 보면 360도로 돌아버리는 시점이 언젠가는 올 것 같아서 점심을 먹고 나면 꼭 산책을 한다. 산책의 은 당연히 그 이 아니지만, 산책과 산 타기는 야외에서 몸을 움직이는 활동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젊은 사람이’, 산이 힘들어서 좋았다라고 이야기하는 데에는 대체 무슨 내막이 있나? 궁금증이 들어 선택한 책이다. (끼워맞추기)

 

삶의 안정적이고 고요한 동태에서 안주하기보다는 산을 정말로 좋아해서,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삶을 선택했다는 이야기.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점점 흐려지기도 하고, 주위 핑계를 대지만 삶에 급격한 변화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태도의 변화도 있어서인지, 저자의 이야기가 온전히 내 것 같아 가깝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산을 몇 번 자발적으로 타고 나면 이 책도 달리 읽힐까? 그러나 아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혼자 산을 타러 갈 시간은 충분치 않을 듯하다. (새벽에 타러 가도 되지만, 나는 좋아하는 일이 있어도 새벽에 일어나서 하느니 잠을 선택하는 편이다)

  

 

  

업무 특성상 내일은 90% 이상의 확률로 야근하는 날이다. 어차피 일은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게 거의 없으니까, 지금부터 내일을 굳이 생각하지는 말아야겠다. 다음 주에는 공휴일이 일요일 다음에 있어 이번 주말과 같은 사흘 연휴이니, 내일부터 한 주 동안은 사흘 연휴나 틈날 때마다 생각하고 기대해야겠다. 닷새 중 하루나 이틀, 혹은 그 이상을 번아웃 상태로 날리느니 주4일제가 시행되면 좋으련만 현실은 있는 주5일제도 여기저기서 각종 편법으로 어기고 한편으로는 제도적으로, 합법적으로 안 지켜도 문제 없도록 해 주니, 그저 한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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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2-22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과도기님! 기다렸어요!!^^;;
그럼 다음 주에도 글이 올라오는 거지요?? 응???

인간의과도기 2021-02-22 23:15   좋아요 0 | URL
매번 반가이 맞아주셔서 감사해요 라로님! 어제까지만 해도 다음 주말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출근 하루 만에 다시 의지를 잃어서 ^^;;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리시지 않게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