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의 섬 제주도의 업장들 중에는 노키즈존이 그렇게나 많단다. 관광객들 중에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관광객도 적지 않을 텐데, 그들을 거르고도 이럭저럭 장사가 잘 된다는 뜻이리라.

  이런 현실을 감안해, 제주도 여행을 계획한 한 양육자는 아이를 둔 부모들은 헛걸음 방지 차원에서,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맞는 ‘맞춤형 정보’ 검색 차원에서 참고할 수 있도록 ‘제주도 노키즈존 리스트’를 만들어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링크). 혹여나 엉뚱한 업장이 리스트에 올라 불의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리스트 작성자는 해당 업장에서 ‘직접’ ‘최근에 올린’ 노키즈존 공지를 하나하나 확인, 대조한 후에 리스트를 뽑았다. 9월 초의 일이다.

  이 ‘노키즈존 리스트’가 새삼 논란이 되었다. (국민일보 기사) (한국일보 기사) 논란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왜 노키즈존으로 자기 업장을 운영하려 하는 사람들의 가게를 ‘블랙리스트’화하느냐?” (‘리스트’에 올라간 업장 중 한 곳의 주인이 리스트 작성자에게 항의한 데서 논란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출처를 찾을 수 없어 ‘충분히 그러했을 수도 있겠다’라는 가능성으로만 남겨둔다.)

  배우자와 나는 이 논란을 접하고 동시에 탄식했다. “하나만 해라 하나만.”

 

  사실 나는 이것도 양육자들이 꽤 많이 양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키즈존 업장들이 자신들의 운영 방침을 신속히 바꿀 가능성은 멀어 보이니(한국일보 기사의 여론조사 결과를 참고하자면, 아직까지 노키즈존 반대보다는 찬성 의견이 더 우세하다), 노키즈존이라는 기상천외한 형태의 차별을 전면 반대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우선 ‘문전박대’당하는 경험이라도 사전에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현실적으로 부담이 덜한 선택지이다.

  그래서 노키즈존을 노키즈존이라 불렀사온데, 노키즈존이 아니라 하시면… 이것을 자영업자 혐오라 말하시면…….

  아, 노키즈존 업장 사장님들, 혹시 이겁니까? 내 맘에 들지 않는 부류의 손님군을 내 손으로 직접 쫓아내는 데서 오는 쾌감을 경험하고 싶어서? 그래서 양육자들로 하여금 “넌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라는 대사를 말하게끔 하고 싶어서? 노키즈존이 차별인 건 알겠는데(남들이 차별이라 말하니까), 대놓고 ‘나는 차별주의자다’라는 이미지가 붙는 건 싫어서? 그래서 ‘은밀하게 위대하게’ 양육자들을 차별하고 싶어서?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로 흔히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대비 또는 예측한다’라는 ‘과거-현재-미래’론을 든다. 과거보다 진보한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의 한 단면을 보면, 그 시대의 내적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종종 우스워진다. 그렇지만, 각종 차별을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그 차별이 기괴한 논리로 뒷받침되던 시절, 이제는 지나간(혹은 지나갔다고 믿고 싶은) 시절을 역사 기록의 형태로 다시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그때 그 사람’들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우스운 모습, 과거의 과오가 현재에도 다른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의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역사 공부의 목적 중 하나다.

 

 

 

나는 작금의 노키즈존 논란을 접하며, 최근 읽은 『소비의 역사』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흑백분리가 ‘합법’이던 시절의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겨우 반 세기 전쯤 이야기.

 

 

 

  자유노동자가 된 흑인들은 이제 상품과 소비의 세계에서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상점 같은 소비 공간은 일터나 가정보다도 훨씬 더 백인과 마주칠 확률이 높은 곳이었다. 그런데 백인들은 흑인들이 자기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흑인을 교묘하게 배제함으로써 소비의 장에서까지 그들을 소수자로 남겨두려 했다. 이를 위해 백인들은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이라는 전략을 내세웠고, 이는 노예해방 후 이루어진 차별의 근본적인 기제가 되었다. 말이 좋아 분리평등이지 실제로는 분리와 불평등을 조장하는 수많은 인종차별적 규범과 법령이 만들어졌다.

  흑인과 백인은 같은 숙소 건물에 묵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고, 극장에서도 백인은 1층, 흑인은 2층에 완전히 따로 앉아야 했다. 화장실이 별도로 만들어졌던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음수대에서조차 흑인은 ‘유색인종 전용colored only’이라고 쓰인 수도꼭지만 사용할 수 있었다. 버스나 열차에서는 흑인용 좌석이 분리되어 지정되었을 뿐 아니라, 병원에서조차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대기하며 백인 환자의 진료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중략) 이런 식의 차별은 심지어 죽어서까지 계속되었다. 흑인은 백인과 같은 묘지에 묻히는 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앨라배마 주의 버밍엄 시는 1950년에도 새로운 분리법(Birmingham Segragation Law)을 추가하여 흑인과 백인이 야구, 축구, 농구 등의 스포츠를 함께 즐기는 일을 금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흑인이 상품과 소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오직 불평등의 원칙을 순순히 받아들일 때만 가능했다. (396-398, 강조는 인용자)

 

 

  노키즈존 리스트를 반대하는 의견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고 한다. ‘노키즈존이라 하더라도 아이 없이 양육자들끼리만 올 수도 있고, 테이크아웃을 해서 갈 수도 있지 않느냐. 왜 굳이 리스트를 만들어 공유를 하나.’

  → 아, 네, 그래서 노키즈존 계속 하는 게 좋다고요? 저는 안 갑니다. 내가 왜 굳이 불평등을 ‘감수’까지 해 가면서, 말로 설명하기조차 싫은 굴욕감과 모욕감과 그 외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그 업장을 이용해야 합니까?

 

  흑백분리가 ‘분리평등’이라는 미명으로 위장된 시대를 살았던 흑인들도, 그들에게 주어진 불합리와 차별을 더는 받아들이기만 할 수 없었다. 소비는 평등하게 하지만 불평등한 차별을 받는 괴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차별받느니 소비하지 않겠다’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1950년대부터는 흑인인권운동이 시작되면서 ‘분리평등’ 원칙에 근거한 수많은 불평등에 대해 저항하는 목소리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먼저, 흑인들이 백인과 가장 자주 접촉해왔던 상업 공간, 즉 백인 소유의 상점에서 일어났던 차별들이 구체적인 불만 사항으로 공론화되었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 1960년대로 접어들자 미시시피주에는 수년 동안 계속된 흑인인권운동의 영향이 만들어낸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그 결과의 하나로 많은 도시에서 백인 소유 상점에 대한 ‘보이콧(불매운동)’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 운동을 가장 적확하게 대변하는 슬로건은 “차별을 사지 맙시다Don't Buy Segregation”였다. (399-400, 강조는 인용자)

 

 

  노키즈존의 찬성 논리 중 가장 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아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아이가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데 말리지 않는 일부 무개념 엄마(꼭 이럴 때만 엄마 찾더라)들 때문에 노키즈존이 필요한 것이다.’

  한 마디로 ‘그럴 만하니까 그러는 것이다’라는 논리인데, 이 ‘그럴 만하니까’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얼마나 자의적인지는, 백인들이 흑인 소비자를 공공연하게 차별하며 내세웠던 논리를 보면 알 수 있다.

 

 

  백인들은 흑인들에게 물건을 팔면서도 그들이 돈만 생기면 마구 돈을 써대는 무절제한 존재이자 고상한 취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박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했다. 상점 주인들은 흑인 손님이 오면 싸구려 옷만 잔뜩 골라서 내주곤 했는데, 특히 형형색색의 옷을 내놓으며 흑인들에게는 이런 옷이 잘 어울린다는 식으로 대하곤 했다. 더 심각한 차별은 흑인에게는 옷을 입어보는 일조차 금지한 것이다. 흑인은 무언가를 훔쳐갈 것이라는 의심을 받은 탓에 원천적으로 탈의실 사용이 불허되었다. 심지어 모자를 써볼 수도 없었는데, “흑인들의 머리카락은 언제나 기름기로 떡칠되어 있어서 모자를 망가뜨린다”는 이유에서였다. (399-400, 강조는 인용자)

 

 

  아이를 데려가면 노키즈존이니 오지 말라 하고, 그래서 안 간다고 하면 업장 혐오라고 하는 이 놀라운 이중 잣대는, 사실 백인들로부터 수입해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도 업장에서 흑인을 실컷 차별해 놓고, 막상 불매운동을 벌이니 자신들의 행동을 돌아보는 대신 흑인들을 비난하고 탄압했다.

 

 

  흑인의 불매운동은 백인 상점주와 정치가 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흑인들이 분별없이 돈을 써대는 집단이라고 생각해왔기에 흑인들 스스로 소비를 통제하며 집단행동에 나선 사실이 몹시 뜻밖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종분리철폐운동이 내세운 다른 저항에 비해 상점 앞 시위는 사소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대신 백인들은 이런 불매운동은 외부에서 온 선동가들이 벌인 것이라고 떠벌리면서 참여자들도 금세 질려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보이콧은 몇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고, 상점 주인들은 경제적 압박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 인권운동이 강렬해지면서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긴자이 고조된 도시에서는 KKK단과 시의회 등이 나서서 백인들에게 피켓 시위가 벌어지는 가게를 멀리하라고 권고했다. 자칫 그곳에서 흑백 간의 충돌이 일어날 경우 언론에 알려질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상점에는 흑인뿐 아니라 백인 손님마저 끊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급해진 상점들은 자기 가게는 안전하다는 내용을 신문에 광고하며 손님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중략) 하지만 불매운동은 계속되었고, 발길을 끊은 백인 고객도 별로 늘어나지 않자 상점주들은 흑인 시위자들을 영업 방해 혐의로 고발하기 시작했다. (402-403, 강조는 인용자)

 

 

  백인들의 반발이 어떤 식으로 있었는지에 대한 서술이 더 이어지지만, 백인들의 행태가 우리 사회의 차별주의자들을 떠올리게끔 하니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굳이 인용하지는 않겠다(정 궁금하시면 책을 직접 찾아 보셔도 좋다. 조만간 이 책에 대해 리뷰를 하나 쓸 것인데,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좋은 책이다.).

 

  아, 그래서 미국에서의 이야기는 결말이 어떻게 되었냐고요?

 

  십여 년도 더 전에 미국 고등학교에서 수학할 때, 내가 가장 재미있게 공부한 과목은 미국사(American history)였다. 미국도 한국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보다 더 ‘국가’를 강조하는 가치관이 뚜렷하다 보니, 미국사 교과서의 서술이 ‘국뽕’에 찬 것은 아닐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500년도 안 되는 ‘비교적 짧은’ 역사이지만 그 안에는 개척주의, 식민지 시절, 제국주의, 전쟁, 다원화사회 등의 테마가 모두 녹아들어가 있다. 그 테마 중 어느 하나라도 간과하고 지나갈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기록한다. 당연히, 저 흑백분리 시절의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도 ‘그런 것이 있었다’라고 적는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의 설명을 덧붙인다. ‘그것은 부끄러운, 말도 안 되는 과거였다’라고.

 

  노키즈존이 사업자의 자유라고 하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사회학자 오찬호는 여기에 이렇게 되묻는다. “사업자의 권리가 '사회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패러다임'을 벗어나 있을 수 있을까요?”(원본 링크)

  ‘그래도 노키즈존이 흑인 차별 같은 건 아니지 않냐’라고 이야기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맞는 이야기다. 완전히 같지는 않다. 전자는 법적으로까지 보장되지는 않은 사업자의 재량이고, 후자는 법적으로 보장된 백인 사업자의 권리였으니까. 그러나 노키즈존과 ‘분리평등’은 본질적으로 같다. 차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굳이 차이를 구분해 이야기하자면, 전자는 ‘법적으로 아직은 보장되지 않은 차별’이고, 후자는 ‘법적으로 보장된 차별’이라는 점일 테다.

  나는 먼 훗날, 한국사 교과서의 사회문화사 부분에서 ‘2010년대 들어 사회적 지위에 따른 차별이 가속화되었다. 아이를 동반한 보호자가 입장할 수 없는 ‘노키즈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같은 문장을 보고 싶지 않다. 내 생애의 일부분을 거대한 차별의 흐름 속으로 밀어넣고 싶지 않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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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9-26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뭐라뭐라 댓글 쓰다가 결국 이 글의 반복을 쓰고 있는 것 같아 다 지웠어요.
:)

인간의과도기 2017-09-26 15:18   좋아요 0 | URL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와 배우자에게 요 최근에 노키즈존 논의만큼 분노를 일으키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다음 세대에서는 차별이 당연한 것으로 학습되지 말아야 할 텐데 말이죠 ㅠ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읽고 표시할 수 있는 가장 큰 찬사로 생각합니다. ^^ 남은 하루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2017-12-22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3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리베카 솔닛은 “남성 페미니스트의 역할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 마세요.” 1) 이민경은 페미니즘에 동참하고자 하는 남성에게 제시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음의 네 가지를 들었다. “여성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주변의 혐오발언을 저지하기 / 무심코 판단하는 위치에 서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고,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페미니즘을 만들어가기 / 남성으로 살아오면서 당연하게 누린 특혜를 본인의 언어로 재구성하고 다른 남성에게 설명하기 / 기득권자란 기본적으로 가부장제의 가해에 동조하는 입장임을 다른 남성에게 설득하기”(빗금 표시는 인용자) 2)

 

  기득권자는 자신이 기득권자인 줄 모른다.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체한다.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자’라는 단어가 ‘정치경제적 상위 지위를 획득한 계층’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다 보니, 정치와 경제 이외의 영역에도 기득권자가 있을 거라 상상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기득권은 어디에나 있다. 엄연히 있다. 작년, 피해 호소인들의 고발로부터 점화된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생각해 보면 기득권자의 ‘피해자 코스프레’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문인들은 대개 자신들을 정치경제적 기득권과 대항하는, ‘시대의 양심’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정치경제적 기득권과 적극적으로 야합하는 문인도 있지만). 그러나 문단 그 자체만 보면 어떤가? 최근 징역형을 선고받은 배용재는, 이런 말한다고 하나도 미안하지 않지만, ‘끗발 있는’ 문인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춘문예로 등단한 ‘문단 시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 과도한 특권을 부여해주었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는데, 그깟 등단이 뭐라고 채 인간도 안 된 나부랭이들이 왜 비범한 예술가로 대접받는가? 글을 잘 써서 그렇다고? 웃기지 마라. 미학적 가치로 따지면 예전에 문필 활동 접었어야 할 ‘문인’의 수가 두 손으로 꼽아도 모자라다. 이건 사회문화적 기득권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자면 ‘한국 남자’는 반박할 여지가 없이 사회문화적 기득권자다(물론 한국 여성의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를 생각해 볼 때 정치경제적 기득권자이기도 하다.). 동일한 사안을 두고 ‘그대가 단지 여자/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결과나 평가가 천양지차로 달라지는 것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남자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들이 생각하기에 기득권자란 정치경제적으로 ‘끗발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인데,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처지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전 같이 안정된 직장이 보장된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도 가는데’, 여성들은 계속 자신들의 삶이 불평등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메갈’을 찾는 것이다. 예전엔 여자들이 이렇게 ‘과격’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운운하면서.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 그러니까 성 평등 이슈를 틀어막는 용도로 메갈 어쩌고 하는 ‘한국 남자’들을 ‘비겁하다’고 규정한다.

  규정하는 것은 쉽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래서, 나도 ‘한국 남자’인데, 구조적인 성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할까? ‘한국 남자’인데?

 

 

 서민 교수는 페미니스트로 살기를 지향한다. 그에 따르면 여성혐오적 언행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동조하거나 (심지어) 침묵한 사람도 큰 틀에서 보면 여성혐오의 ‘공범’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 남자’들의 여성혐오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한국 남자’들의 사례를 인터넷에서 수집해서 왜 이것이 여성혐오인지를 친절하게 해설해 준다. 페미니스트인 이상 여성혐오에 동참할 수는 없으니, 이 책을 쓴 것이 그 나름대로의 페미니즘 실천이리라.

 

 

 

 

  그러고 보면 나는 어떻게 페미니즘을 실천했나.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남자’이니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긴 했지만, 저 비겁한 무리들, ‘메오후’와 ‘쿵쾅쿵쾅’을 달고 사는 여성혐오자들을 인터넷에서 보면서, 적극적으로 그것에 대항하거나 맞서지는 않았다. ‘인터넷에서 여혐하는 xx들이 다 찌질하지 뭐’하고 무시했고, SNS에서 내 생각과 비슷한 페미니스트들의 의견을 소심하게 공유했다. 집에서는 배우자와 함께 집안일을 분담하고 있지만, 배우자가 좀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의 여혐 발언은, 내가 ‘급’이 안 된다는 핑계를 대고 제지하지 않았다(변명이지만, 수험 생활로 인해 만나는 ‘주위 사람’ 자체가 거의 없기는 하다). 아, 그러니까 나는 입만 산 페미니스트였던 거였다. 이러니 ‘페미니즘의 실천에 남성 페미니스트는 필요 없다(또는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도.

  남성은, 특히나 ‘한국 남자’는 페미니즘을 실천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인식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남자라서 여자에 비해 받은’ 차별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자꾸 군대 이야기하는 ‘군무새’들은, 여자가 군대 보낸 거 아니니까 정부 기관에 정중히 청원을 넣기 바란다. 아, 10만 명 넘게 청원을 넣었는데 대통령이 수석들과의 대화에서 그냥 웃고 넘겼다던가? 그럼 별수 없고.).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존재가 인식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가? 성 불평등을 인지하고 실천하는 ‘저마다의 속도’가 동일하지 않다면, 후열에 있는 남성들은 모두 ‘도태’되어야 하는가?

  페미니즘적 관점은 ‘학습’되어야 한다. 학습은,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모르면 외워서’ 될 문제가 아니다. 당장 서민 교수의 이 책에서도, 외우긴 했지만 응용이 완벽히 되지 않아 일부 ‘삑사리’가 난 부분이 있다.

 

가해자와 싸우는 과정이 고통스럽더라도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이 용기를 내주면 좋겠다. 그 싸움은 자신은 물론이고 직장 내 다른 여성들, 그리고 그 뒤 그 직장에 들어올 여성들을 위한 가치 있는 싸움이니까.(132)

-> 개인적으로 가장 뜨악하게 여긴 부분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대의를 위한 싸움을 종용할 수는 없다. 싸움은 힘들다. 몸과 마음이 갈려 나간다. 싸움의 당사자가 완전 소진되지 않도록, 주위에서는 연대와 지지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 있는 저자 자신도 팟캐스트 이후로 여성혐오자들의 공격을 받는 것이 힘들었을 텐데, 왜 여성이 성희롱을 당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해결의 공을 피해자에게 넘길까?

 

  남성 페미니스트의 의견은 불완전할 수 있다. ‘나는 무려 남자인데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했어, 그러니까 어서 날 칭찬해 줘!’라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나는 페미니스트에게 과도한 무결함을 요구하는 어떠한 추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페미니스트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낄끼빠빠’라는 조어가 나는 참 마음에 든다(한국어의 새말은 조어의 원리며 결과물이며 모두 경이롭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의 줄임말인데, 남성 페미니스트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싶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많지 않다. 여성이 한국 사회에서 받는 구조적 차별과 억압을 이야기할 때 남성으로서 ‘징징’대지 않는 것,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성차별 및 성희롱을 남의 일처럼 여기지 않고 함께 연대하는 것. 딱 이 정도다.

 

 

  ps. 저자가 알라디너, 그것도 꽤 오래전부터 활동한 알라디너이시라고 들었다(갑자기 존대). 이 책의 ‘비판적 지지자’를 자처하는 입장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해 보자면,

  다음부터 ‘나무위키’는 ‘성차별, 집단적 반지성주의, 반달리즘’ 등의 실제 사례로 가져올 게 아니라면, 인용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다른 주제도 아니고, 있지도 않은 ‘이퀄리즘’을 ‘집단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날조한 집단이 나무위키다.

 

  ps2. 배우자가 최근에 이야기하기를, 내가 결혼하고 지금까지 “집안일을 ‘도와 준다’”라는 표현을 두세 번 정도 썼다고 한다. 아주 명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한 번인데, 나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배운 대로 실천한다고 하지만 무의식의 깊은 곳까지 완전히 갱신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또 한 번 반성한다. 내가 누굴 비판하나. 나나 잘 할 것이지. 한국 남자로 태어난 이상, 내 안에 있는 성차별적 인식 및 여성혐오의 무의식, 그러니까 나에게 운명론적으로 주어진 ‘빻음’과는 평생 길항해야 하겠다.

 

  ps3. 늘 멋진 글을 쓰시는, 이 책을 선물해 주신 알라디너 분께, 고작 이런 감상밖에 남기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1) 2017년 8월 25일,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리베카 솔닛 내한 강연에서. 워딩은 정확하지 않으나, 맥락상 이러한 내용의 문답이었다.

2) 이민경,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페미디아, 2016, p.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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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9-25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멋진 감상 잘 읽었습니다. 저도 서민님의 이 책을 읽고 고개를 갸웃하고 흐음, 이건 아닌데, 라고 했던 부분이 몇 군데 있었거든요. 저기, 저 인용해주신 부분이 그런 부분 중 하나였어요. 용기를 내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그러니까 어떠한 취지로 저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알겠지만, 저 부분에서는 좀 아쉬웠어요.

오늘 아침만 해도 제 서재에 달린 댓글 읽고 또 힘이 빠졌는데(그렇지만 상처받지는 않아요), 이 멋진 글을 읽으니까 좀 기운이 나네요. 감상 고맙습니다!!

인간의과도기 2017-09-25 16:02   좋아요 2 | URL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상 독자로부터 호평을 듣는 것만큼 글쓴이에게 기쁜 일은 없지요.
한편으로, 다락방님의 댓글을 보니 페미니스트로서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똑같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해도 단지 제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용인되는 현상이 분명 있습니다. 페미니즘 논의장에서조차 남성으로서 가져가는 기득권이 있음을 저 스스로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습니다. 이것조차 ‘말뿐‘으로 끝나지 않게 더 반성하는 것은 덤이고요.
다락방님의 글과 말을 항상 지지합니다. 남은 하루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

cyrus 2017-09-26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이민경 님의 조언을 보게 되니까 제가 그동안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쓰면서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보이지 않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과도기 2017-09-26 04:08   좋아요 1 | URL
어쩌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문제점을 잘 보지 못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기에 반성이라는 덕목이 그만큼 귀하다고 여겨집니다. 저 역시 페미니즘의 한 부분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할 때, 이것이 혹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표현을 빌리자면-유사페미니스트나 안티페미니스트의 궤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아닌지 늘 고민이 되고는 합니다.
cyrus님의 페미니즘 글에는 분명 고유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의 글쓰기를 돌아보시는 모습에서 볼 때, 페미니즘을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동시에 cyrus님만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잘 실천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세상에 2017-09-27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성평등은 복합적인 문젭니다. 다름에서 파생되는 차이는 때로 필연적이기도 하고요.
그 차이점을 조율 해서 균형을 맞추는게 페미니즘이지 그저 막연하게 페미니즘 페미니즘 연호 해봤자 그냥 유사 페미니스트로 밖에 보이지 않아요 사실은.
그래요 너무 많은 자릴 차지하려 하지 마세요.
무작정 남성은 지배자고 가해자고, 여성은 종속적이고 피해자라 칭하는건 환원주의적 오류에 불과해요. 님은 진보적인 페미니스트 남성이 아니라 그냥 젠더 개념에 멈춰 계신거라고요. 개개인의 삶의 구성요인은 다원적이에요.
성별, 인종, 계급, 성적 지향성, 연령, 성경험의 유무, 장애 유무, 혼인 여부, 민족적 배경, 국적 등 모든게 동시 다발적으로 작용해서 개개인의 삶이 구성 되잖아요.
근데 님은 모두를 그저 성별이라는 프레임 하나로 이분법으로 떡하니 갈라다가 무슨 주인님 몫 챙기는 노비 마냥 그렇게 여성 상위적 사상으로 똘똘 뭉칠 필요가 있는건가요?
무지의 베일 속에서 평등히 살고 싶으시다고요?
남한을 포함한 다른 자유주의 국가에선 별 다른 방도가 안보이네요.
직시할건 직시하고 합의점을 찾아야죠.
그렇게 굴종적인 자존감은 같은 남성이 보기에 많이 애달픕니다. 힘내세요.

인간의과도기 2017-09-27 21:25   좋아요 2 | URL
아, 네. 제가 혹시 잘못 읽었나 싶어 달아주신 댓글을 여러 번 읽어 보았는데, 합리적인 척 하나마나한 헛소리 하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세부적으로 고려해야 할 게 많다는 사실을 제가 설마 모르고 이 글을 썼을까요? 그렇게 인간 삶을 구성하는 요소를 다양하게 고려하실 줄 아는 분이, 페미니즘은 ‘여성 상위적 사상‘이니 ‘이분법‘이니 하는 말로 못을 박아두시나요?
제가 위 댓글에서 사용한 ‘유사 페미니스트‘라는 개념은 정확히 님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진정한 페미니즘 찾으면서 현실에 존재하는 가부장제와 그로 인한 성차별을 애써 못 본 체하는 님같은 분 말이죠. ‘이퀄리즘‘이라고 하던가요 그쪽 동네에선?
자신의 단견을 애써 예쁘고 합리적으로 보이도록 포장하는 님을 보니 제가 더 애달프고 안타깝네요. 페미니즘의 ‘페‘ 자만 보여도 이렇게 찾아와서 본문과 상관없는 내용으로 공격하는 님같은 분을, 저는 본문에서 ‘비겁하다‘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이후에 댓글 달지 않겠습니다.

세상에 2017-09-27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을 잘 못 읽으신거 맞아요. 난 페미니즘이 여성 상위적이다거나 이분법적이라 한적이 없어요. 님의 생각에 대한 감상을 말 했을뿐 페미니즘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요 바르게 추구 된다면. 님이 생각을 잘못 하고서 잘못 받아들이는 수용체라고 말한거라고요.그런 생각으론 님은 페미니스트 일 수가 없어요.
합리적인 척 하나마나라뇨 정작 기본적인 독해부터 안되시는 분한테 내가 너무 무익한 언쟁을 시작했네요. 가부장제가 있는 만큼 그 반대의 형태의 가정도 있는거고요. 님이야 말로 진정한 페미니즘이 일궈놓은 성과를 다 배제하고 여성을 그저 보호 받아야 할 약한 존재로 상정하고 계신것 같아요. 그거 여성 입장에선 되게 듣기 거북한 내용이거든요 사실. 대화할 생각이 없잖아요. 솔직히 말해봐요. 여러 번 읽어 보았다뇨. 제대로 안 읽었잖아요.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글은 무슨 더러운 똥 보듯 겉핥기 식으로 보느라 제 논지를 다 놓치셨네요.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이 글은 그냥 영양가가 없어요. 요점도 없고 페미니즘인척 하려는 다른 뭔가에요.
그저 맹목적으로 자기 아들 좋은거만 떠먹이려는 대치동 아줌마 수준의 비합리적인 뒷바라지.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그정도로 해둘게요.
절 비겁하다고 규정 하시겠다고요?
있지도 않은 이퀄리즘에다가 절 갖다 붙이시겠다고요?
기도 안 차네요.

세상에 2017-09-27 21:4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첨언하자면 비판과 공격은 확실히 다른거라고 봐요.
이 정도 비판도 예상치 못하고 자기 의견 드러내시는거 아니잖아요.
모두가 같은 생각하면 토론과 언쟁은 없겠죠.
당황하셔서 말이 헛나왔다고 생각할게요.
제가 낯이 다 뜨거워지네요.

인간의과도기 2017-09-27 22:55   좋아요 2 | URL
아, 그러니까 제 글에서 ‘여성 상위적‘이고 ‘이분법‘적인 태도를 발견하셨다고 했는데, 지금 님의 이 댓글에 따르면 그 ‘여성 상위적‘ 태도라는 게 ‘여성을 그저 보호 받아야 할 약한 존재로 상정‘하는 거군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그러한 태도는 ‘시혜적‘이라고 명명하는 게 보다 정확하며, 저는 이 글에서 ‘시혜‘가 아닌 ‘연대‘를 이야기했습니다. 제한적인 조건에서 연대하자는 게 이분법에 따른 여성 상위의 추구입니까?
님의 원 코멘트를 보면 제가 환원주의적 오류를 범했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글에서 개인으로서의 남자/여자를 호명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페미니즘의 갱신을 위해서는 말씀해 주신 여러 요소의 고려가 필요하겠습니다만, 이 고려가 ‘구조적 가부장제의 철폐‘ 목적을 은폐하지는 않습니다. 아, 참고로 말씀드리면 가부장제는 현대 사회에 있어 가정 안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닙니다.
님은 님 편의대로 용어를 섞어 쓰고 있습니다. 토론의 첫 번째 전제는, 토론하고자 하는 개념 정의에 상호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몰이해를 비판하시고자 한다면 님이 생각하시는 개념, 님이 글 어느 부분에서 그러한 인상을 받았는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제가 님 말마따나 토론이든 뭐든 하지 않겠습니까?
제목을 ‘남성 페미니스트의 역할‘로 정했고 맨 마지막 문단에 제가 생각하는 역할을 정리했습니다. 이 글에 요점이 없다고 이야기하시는 게 합리적인 비판이신지는 스스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더군다나 ‘주인님 몫 챙기는 노비‘니 ‘굴종적인 자존감‘이니 이야기하시면서 비판과 공격의 차이를 이야기하시면, 저는 ‘모르겠다‘라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분명 페미니즘이 아닌 ‘이 글‘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셨으니, 저런 표현은 분명 저를 겨냥한 표현이실 텐데, 제가 기분이 나빠지고 안 나빠지고를 떠나서, 토론을 요청하는 표현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비합리‘의 상징으로 하필 ‘대치동 아줌마‘ 운운하시는 것은 제 입장에서야말로 기가 찰 일입니다.
글에서 언급한 책에 왜 ‘김여사‘가 문제적 표현인지 설명하는 글이 있습니다. 안 읽어보셨으면 한번 읽어보시기 바라며, 읽어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표현을 쓰시는 거라면, 님에게야말로 토론의 의지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zzovok 2017-09-30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너무 좋은글이에요. 잘읽었습니다! 과도기님 같은 남성 페미니스트가 많이 늘었으면 좋겠지만..너무 큰 기대일까요...현실이 참 씁쓸하네요..심지어 같은 페미니스트여도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 발언에 대한 온도차이가 매우 극명한것도 현실이구요 책도 좋았지만 리뷰를 읽으면서 또한번 생각하게 되는것 같아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위에 이상한 댓글은 신경쓰지마세요. 그래도 남성페미니스트라고 하니 메갈이니 쿵쾅쿵쾅이니 이런 저급한 말은 안나오네요ㅎㅎ..)

인간의과도기 2017-10-03 06:42   좋아요 0 | URL
개인적 사정으로 대댓글을 이제야 답니다. 힘이 되는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요 며칠간 제 자신의 말과 행동 사이 괴리, 실천의 온도차를 돌아보며 페미니스트가 맞는지 자문해 보았습니다. 여남 할 것 없이 자신 안의 여혐을 되돌아보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실천해도 지금보다는 나은 사회상을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시기 바랍니다. :)
 
에이다, 당신이군요. 최초의 프로그래머 - 컴퓨터 탄생을 둘러싼 기이하고 놀라운 이야기
시드니 파두아 지음, 홍승효 옮김 / 곰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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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컴퓨터에서 프로그래밍(programming)에 해당하는 일련의 명령을 해독하면서 자동적으로 계산을 실행하는 기계를 19세기 초에 영국의 수학자 C.배비지가 계획하였다. 그 시작기(試作機) 중에서 차분기관(difference engine)과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이라는 것이 현재에도 남아 있다.”

 

  “영국 수학자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 1792~1871)는 다항함수와 로그함수, 삼각함수 등을 계산할 수 있는 기계식 계산기인 차분기관을 1822년에 제작하였고, 1835년에는 해석기관을 설계하였다. 이 해석기관은 최초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컴퓨터로 인정받고 있다.”

 

 

  위 두 문단은 컴퓨터의 유래에 관한 내용 일부를 서로 다른 지식백과에서 발췌한 것이다. 내용을 찾을 때 검색어를 ‘컴퓨터’로 했으니,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기계의 형태를 누가 먼저 구안했느냐의 문제로 따져 본다면 상기한 서술들의 정합성은 더 따지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컴퓨터를 컴퓨터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고장이 나서 작동하지 않는 컴퓨터나 (어찌 보면 작은 컴퓨터라고도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보며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가?

  백과사전의 서술은 컴퓨터를 컴퓨터답게 하는 것, 수의 언어를 “숫자 외에 다른 것에도 작용”(28)하도록 하는 규칙, 컴퓨터의 영혼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의 성취마저 배비지의 공으로 돌렸다는 점에서 편향적이다. 역사적 기록은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찰스 배비지와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해석기관의 설계에 ‘공동으로’ 관여했고, 에이다는 그 중 해석기관의 논리를, 오늘날의 언어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그러나 그 기록은 얼마간은 가려진 기록이었다. 나 역시 수학 교과서에서, 어린 시절 보았던 과학 교양만화에서 차분기관의 대략적인 형태를 삽화로 접했을 뿐이다. 프로그래밍이 컴퓨터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중요한 ‘물건’은 누가 설계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책 제목에서부터 ‘에이다, 당신이군요. 최초의 프로그래머!’라고 우리의 주인공을 호명하니, 추측건대 그래픽노블의 형태로 다시 쓴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전기(傳記)일 것이었다. 그러나 책을 받아보고는, 그 추측이 반만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전기는 전기이되, ‘다중우주’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컴퓨터 창조의 주역들로 하여금 종횡무진 활약하게 하는, ‘워너비 전기’인 셈이다. (참고로 원제목은 『The Thrilling Adventure of Lovelace and Babbage』, 우리말로 ‘러브레이스와 배비지의 짜릿한 모험’ 정도로 직역할 수 있겠는데, 책 내용에는 조금 더 부합하지만 아무래도 비영어권 독자인 우리에게는 밋밋하고 낯선 제목이었으리란 생각도 든다. ‘러브레이스는 누구며 배비지는 또 누군데?’)

  대체역사물이 한국의 출판시장에서 그리 드문 것은 아니지만, 대개 이러한 형태의 ‘워너비 서사’는 대중의 헛헛한 역사의식, 역사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민족의식을 왜곡된 방식으로 충족시키기 마련인지라 책의 기본 설정을 확인한 후 우려가 되는 바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책을 빼곡히 매운 각주, 그리고 거기에 더해 각주를 보충하는 미주, 그리고 각 장마다 다채로운 방식으로 빛나는 러브레이스와 배비지의 모험담을 마주하며, 나는 나 자신의 얼굴을 새삼 다시 마주했다. 어떤 대상을 깊이 사랑하면 그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지 않을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이 질문은 나에게나 유효한 것이었다.

  저자인 시드니 파두아는 수학 전공자가 아니다. 본업은 애니매이터 겸 특수영상 아티스트라고 한다. 사소한 계기로 그리게 된 러브레이스에 관한 웹툰을 보충하고자 시작한 자료조사는 저자를 러브레이스와 배비지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기이한 수학자들에 대한 무한한 매혹으로 이끌었다. 책은 말하자면 저자가 경험한 매혹의 과정이자 결과다. 요즘에는 시각 관련 업계에서 컴퓨터가 필수불가결한 도구이기에, 저자의 매혹은 어쩌면 운명적인 것이었을까? 그러나 모든 애니메이터가 수학의 역사와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저자는 엄밀히 말하면 수학 이론의 장(場) 바깥에 있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더 객관적으로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 구글링이라는 이 시대의 보편적 방법론에 러브레이스와 배비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더함으로써. 그렇기에 저자는 “러브레이스가 무지한 사기꾼이라는 주장과 배비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엄청난 천재라는 주장은 둘 다 … 과장되어 있다! // 당신은 한쪽이 그녀를 축소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 다른 한쪽은 그녀를 확대했다.”(258-259)라는, 객관에 가까운 주관적 평가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군데군데서 실없이 웃게 만드는 영국식 유머라든지, 저자가 직접 온라인 ‘노가다’를 통해 발굴한 러브레이스와 배비지에 관한 ‘원전’이라든지, 수많은 논문과 연구자료를 참고하여 저자가 ‘직접’ 그린 해석기관 전체의 도해라든지……. 이 책의 빛나는 부분은 많다. 그러나 이 빛나는 모든 것들을 빛날 수 있게 한 유일한 요소를 꼽으라면, 미완의 과제에 평생을 매달린 두 수학자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창작물로 바친다는 것이 굉장히 지난하지만 아름다운 작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ps. 나는 소위 ‘문돌이’다. 수학에 일찌감치 거리를 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책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해가 충분히 되지 않는 부분(가령 해석기관의 도해라든지!)은 충분히 되지 않는 대로 넘기며 읽어도 무방할 듯하다. 저자가 짠 방대한 이야기 그물을 샅샅이 훑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또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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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월 3일, 나는 고민에 빠진다. 전자책캐시 10만원어치를 지를 것인가 말 것인가.

 

 

  10만원은 절대 적은 돈이 아니다. 하지만 매월 1일부터 3일까지 전자책캐시를 충전하면 마일리지가 두 배로 쌓인다. 10만원을 충전하면 마일리지가 18,000점이 들어온다. 어지간한 종이책 한 권을 살 수 있는 돈이다.

  그러나 역시 10만원은 적은 돈이 절대 아니다. 18,000점 마일리지의 유혹에 이끌려 매달 전자책캐시를 10만원씩 충전했다가는 잔고에 바람 부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매달 빠져 나가는 돈이 아까워서 월납 저축액도 줄였는데, 매달 전자책캐시를 충전하게 된다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섬 게임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나에게 다시 한 번 자문한다. 그래서 충전한 캐시가 쓸모없었느냐고, 충전만 해 두고 묵힌 적이 있느냐고. 그렇지는 않다. 어떻게든 ‘총알’을 채워두게 되면, 전자책이 이상하게 눈에 잘 띄고, 그래서 아낌없이 ‘쏜다’. 나는 돈이(캐시가) 있으니까!

  이쯤에서 내면의 양심이 나에게 묻는다. 그렇게 산 전자책, 다 읽었느냐고. 여기에서 나는 할 말을 잃는다. 그렇지. 나와 같이 사는 사람들이 나에게 한결같이 이야기한 건 ‘제발 산 책 다 읽기 전에 새로운 책 또 사는 것 자제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부모님께서 그러하셨고, 지금은 배우자가 그러한다.

  그렇지. 읽지도 않을 책을 뭐 하러 사는가.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독서에 허영심도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지만(보다 자세한 내용을『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을 참고하세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책을 마구잡이로 사는 것은 내 생활에 맞지 않는, 독 같은 허영이 아닌가. 배우자는 비록 나에게 ‘골프 치러 다니거나 낚시 하러 다니는 것보다는 낫다(=골프채나 낚싯대 사는 것보다는 낫다)’라고 말해주었지만, 남편이 철없이 공부도 소홀히 하고(남편은 현재 수험생이다) 책, 책읽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답답할까.

 

 

  ……이렇게 마음 속에서 ‘지르지 않기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면 매월 3일이 지나간다. 그러면 남은 27일 동안은, 새로 나온 전자책, 특가 할인하는 전자책들을 쭉 훑어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아, 역시 지를 걸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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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들은 이 소설의 내용을 두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느냐고, 극단적인 사례만 모아놓은 것이 아니냐고.1) 다른 한편에서는 이 소설의 내용을 가지고 이렇게 평한다. 소설로서의 미학이 부족하다고, 단순히 우리 사회의 현상을 르포처럼 기록한 것이라 문학적인 가치는 떨어진다고.2)
  나는 이들 모두에게 묻고 싶다. 대체 '현실'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또 무엇인가?

  문학은 그 자체로서의 미학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주장은 문학이 언어예술이라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다. 문제는, 문학을 둘러싼 현실의 자장을 애써 무시하면서 문학의 미학을 제일로 여기는 이른바 '예술지상주의'의 수호자들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맞다면 오늘의 문학은 미학적 가치가 부족해서 외면받고 있다는 것인데, 과연 그런가. 그 미학이라는 것, 사실은 낡고 비루한, 누구네들만의 미학은 아닌가.

  '책의 위기'라는 말은 지난 십수 년간 꾸준히, 지루한 돌림노래처럼 되풀이되었다. 정작 그 말은 사람들이 문학에서 무엇을 읽고 싶어하는지를 간과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아니, 어쩌면 이것도 모른 '척'한 것일 수도.


  입때껏 한국 사회는 여성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겼다. 있어도 거짓인 것처럼, 사실이 아닌 것처럼 취급했다.
  한국문학이 독자로부터 지속적인 호응을 얻지 못한 데에는, 독서와 문학에 관심이 많은 여성 독자를 타자화하고 그들의 서사를 주변화했다는 것에 그 이유가 있다. 물론 이것이 모든 이유는 아니며, 노력하는 작가들이 지금에는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 허나 어쩌랴, 못난 사람들이 목소리가 크다는 법칙은 문단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문단 내 성폭력 고발과 관련하여 현재 돌아가고 있는 꼴을 보라. 그네들은 자기들이 잘난 줄로 알고 있는 천하의 못난놈들이다.)  

  이제는 흐름이 변하고 있다. 이 흐름은, 비록 언젠가는 더디어지거나 또다른 흐름으로 바뀔지언정,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1) 2017년 7월 31일 현재 알라딘의 해당 작품 100자평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반응을 '가끔' 접할 수 있다.

2) 문학평론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물론 이렇게 직설적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하나는 SNS에서 확인했고(그 분은 "82년생 김지영"하고 "은교"에 똑같이 별 세 개를 주더라. 어이가 상실됨), 다른 하나는 문예지에서 봤는데, 훑어보기를 한 것이라 내가 오독한 것일 수도 있다.)

 

 

 


 

 

*오늘의 작가상 후보작 응원 이벤트에 남길 코멘트였는데, 길이 제한이 칼같이 지켜져서(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개인 서재로 옮겨 쓴 생각임을 밝힙니다. 옮겨 쓰며 수정을 조금,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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