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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냉면의 품격 - 맛의 원리로 안내하는 동시대 평양냉면 가이드
이용재 지음 / 반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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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MI 하나. 나는 냉면을 싫어했다. 다 떠나서, 그 질깃질깃한 면이 도무지 면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 내게 '평냉'이라니. 평냉에 관한 내 머릿속 등식은 '평냉=힙스터들의 음식=맛없고 실속도 없는데 있어 보이려고 먹는 음식' 정도였다. 게다가, 평냉 예찬론을 대형 일간지 주말 섹션에 당당하게 실으신 분이 '간장 두 종지' 가지고 화를 내셨다는 분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안 이상 더더욱 평냉에 선입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TMI 둘. 첫 문장은 왜 과거형으로 썼을까. 이제는 냉면을 아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싫어하지도 않는다. 이제는 최소한 '함흥'과 '평양'을 구별할 줄은 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가 본 평냉 전문점은 두 군데 정도밖에 안 된다. 거의 안 먹어 봤다는 이야기다.

  이런 내가 왜, 평냉 전문점 비평집(?)을 사다 읽었는가? 가장 큰 이유는 저자와 그의 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쯤에서 TMI 셋. 지금은 끊은 SNS에서 매우 왕성한 활동을 하시던 내 이웃 한 분은 요식업계 종사자였다. 그 분과 그 주위 사람들(물론 동종 or 유사업계 사람들이다)은 하나같이 이 저자에 대해 '번역은 잘 하지만 글솜씨는 엉망이고 음식에 대한 기본도 모르는 사람' 정도로 평가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이용재 씨)가 누구인지 알 리가 없으니, 아 그런갑다, 하고 넘겼지만, 그의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에는 문득 이런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려보는 것이다.

  '번역은 우리말에 대한 체계와 감각이 없으면 잘 하기 어려운 것인데, 그 좋은 시스템이 번역할 때는 돌아가고 자기 글을 쓸 때는 안 돌아갈까? 그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저자의 책은 이번에 처음으로 읽었다. 전작 『한식의 품격』을 놓고 글의 체계와 문장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은 것을, 당장 100자평만 봐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특정한 형태의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다른 형태의 글은 못 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은 경험만 가지고서 그의 글 전반을 평가할 수는 없겠다. 다만, 이 책에서만큼은 그의 문장이 간결하고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가 평냉이라는 단일 품목에 적용하는 평가의 기준은 앞머리(‘들어가는 말’)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으며, 그 기준이 어떤 식으로 체크리스트화되었는지는 책의 마지막 부분(‘평양냉면 리뷰 노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상비평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는 비평가의 원칙을 밝힌 것인데, 그 원칙이 서른한 곳의 평냉집 비평을 두루 관통한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면, 비록 평냉을 많이 먹어보지 않았더라도, 그 이전에 평냉이 어떤 음식인지조차 잘 몰랐더라도, 평냉의 기초를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이 눈은, 안목이라고도 한다.

 

 

  2.

  개인적으로는 ‘추천의 말’도 너무 좋았다. 이러기가 쉽지 않은데.

 

 

  사소한 질문을 공격적인 화살이라 생각하고, 나름의 속마음을 천편일률적인 비아냥거림이라고 분노하는. 이를테면 방어력만 만땅인 시대에 비평을, 그것도 누구나 즐길 수 있고, 누구나 향유하고 있는 대중적인 대상을 비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의견에 대한 궁금함이 사라진 시대, 혹은 대중적인 것을 전문적인 문장으로 전환해내는 것을 권력이라고 오해하는 시대. 『한식의 품격』의 작가 이용재가 직면한 세상은 이렇게 자신의 의견이 순환되는 것이 아니라, 일방으로 전달되고 감정 섞인 실드로 응답받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은 가장 대중적인 어떤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문장’이라고 나는 믿는다. 모두가 너무 쉽게 각자의 의견을 갖게 되는 시대에, 바로 지금 상상하고 사유해야 할 지점을, 상대방이 재수 없어 하고 귀찮아하더라도 설파해야 하는 의무를 갖는 직업. 그래서 나는 다양한 비평의 글들을 사랑한다. (후략) (영화감독 변영주 ‘추천의 말’ 앞부분)

 

 

  어쩜 이렇게 나의 마음을 유리병 보듯 보고 있는 것일까. 나는 평냉을 잘 모르니까, ‘평냉에 비평‘씩이나’ 필요해?’ 하는 생각을, 감히 이 책 보기 전에 잠깐 했었다.

  (사실 나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나라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영화, 책, 시, ...기타 등등 대중이 즐길 수 있는 문화 양식을 대상으로 하는 비평가의 말은 군더더기 취급받는다. 군더더기가 거름이 되어 대중문화의 또다른 밑거름이 되기까지, 그 여유 있는 시간을 인정받는 경우는 드물다.)

  내가(대부분의 사람들이) 비평과 비평가에 대해서 그렇게(=재수 없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그렇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비평이 왜 필요한지, 적확한 언어로 짚어낸 글이다. 보통 추천사는 안 읽고 넘어가도 독서에 하등 지장이 없는 부분이라 여겼는데(+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읽었는데), 이 추천사를 보니 ‘세상에 이유 없는 존재는 없다’라는 말도 생각나고 그렇다.

 

 

  3.

  비평의 세계에서 별점만큼 직관적이고 즉물적인 요소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단비평에 별점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 요새 문단의 분위기를 보면 후자로 기우는 것이 내 개인적 심정이다.) 별점은 비평문이 공들인 모든 언어를 하나의 단어로 압축한다. 내 마음을 성급하게 이끄는 결론이다. 좋은 비평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그래서 여기는 별점이 몇 점일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별점 시스템은 저자가 세계 최초로 도입한 것도 아니니 너무 연연해하지 말고, 독자로서 ‘참고점’으로만 삼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3-1.

  이런 글을 쓰면서 별점을 매기는 것이 모순이라고도 생각하게 되고.

  빈 별 하나의 의미는 굳이 붙이자면 ‘판단유보’다. 위에서 적었듯, 이 책이 내가 첫 번째로 읽은 저자의 글이자 책이기도 하고, 이 책에 담긴 비평이 정성스러운, 좋은 비평임을 알기는 하지만 내가 ‘평냉’을 잘 모르기도 하고, 평냉에 조금 더 익숙해진 뒤 내 마음속에서라도 별을 하나 더 덜거나 더하거나 할 수는 있으므로.

 

 

  4.

  ‘후보로 삼았던 40여 군데 가게 중 서른한 군데를 간추려 담았다. 음식 자체의 완성도가 너무 떨어져 평가 자체가 무리이거나, 소위 ‘노키즈존’을 표방하는 등 기본적인 음식점의 조건을 갖추지 않은 곳은 제외했다.’(‘들어가는 말’ 중, 강조는 인용자)

 

 

  노키즈존 ‘따위’가 외려 ‘사업장의 운영상 자유’로 포장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쉬쉬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기본적인 음식점의 조건을 갖추지 않은 곳’이라고 적시해 주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ps. 나와 배우자가 아껴 마지않는 평냉집(내가 경험한 평냉집 두 군데 중 한 군데)은 별점이 형편없었다. 여기서 심정적으로 마이너스 1점. 그러나 나와 배우자가 모두 ‘아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한 평냉집(내가 경험한 나머지 한 군데)도 별점이 좋지 않았다. 저자의 기준은 정말로 ‘일관’되었구나. 그 일관성을 높이 사서 플러스 1점. -1+1=0. 제로섬이라서 이 책의 별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ps2. 이 책의 가치는 이런 사실을 밝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처음에 도서관에서 종이책으로 빌려서 휘리릭 보고 반납하려다가, 이 책을 두 번 세 번, 나중에라도 곱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자책으로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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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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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들어보는 이름은 아니다. 대통령이 광복절 축사에서 그 이름을 언급했기에 그런 것은 더욱 아니다. 공무원 시험에 잠깐 관심을 두었을 때, 한국사능력검정시험과 공무원 시험 한국사 과목에 각각 한두 번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험에서 여러 번이 아닌, 한두 번 언급되는 인물이나 사건이라는 것은 곧 수험생들에게 생소한, 잘 모르는, 그래서 앞으로는 굳이 알 필요 없는, 딱 그 정도의 의미로만 기억된다. 시험과목으로서의 역사는 그러한 면에서 보면 편리한 측면도 있다. 사가들이 ‘객관적’으로 정리한 ‘팩트’만 외우면 되니까. 내 삶을 굳이 당대에 추구했던 가치에 이입하지 않아도 되니까. 여성인권에 하등 관심이 없어도 ‘식민지 조선 최대의 여성운동단체는 근우회’라는 것을 알 수는 있다.

  앎과 삶의 간극은 일부 수험생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님이 언급하셨으니까, 이전에 알려져 있지 않던 여성독립운동가에게 손수 축사로써 조명해 주신(심지어 그는 축사가 있기 십 년 전에 훈장을 받았는데도 말이다!) 이 ‘역시 대통령 은덕亦君恩’이샸다, 하고 편히 주워섬길 수 있는 일부의 사람들. 달을 가리키니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열심히 보는 사람들에게도 역사는 현재와 만날 일이 없는 과거의 장식품일 뿐이다.

 

 

  을밀대상의 체공녀, 여류 투사 강주룡 회견기? 제목 한번 걸작이다. (239)

 

 

  나라고 해서 그들, 그러니까 아는 것 따로, 사는 것 따로 하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소설 제목을 처음 접하고 한 번, 그리고 줄거리를 접하고 또 한 번, 나는 어느새 반듯한 차림의 평가자가 되어 소설의 책을 잡았다. 읽지도 않은 소설을.

  지금이 어느 때인데 ‘○○녀’ 같은 비하적 호칭을 제목에 버젓이 붙이는가. 그런데 줄거리는 여성 독립 운동가이자 노동 운동가의 삶을 전기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니, 이건 또 시류에 적당히 편승하고자 하는 ‘속 보이는’ 내러티브 아닌가. 뭐 이런 식으로.

  그렇게 시작한 독서는 이내 패배의 독서로 결론지어졌다. 나의 전근대적 무의식이 패배한 독서.

  어쩌면 나도 모르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고공 농성자니까, 나와 같이 세상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무서움을 매양 달고 살지는 않겠지, 두려움이 잠시 스쳤더라도 초인과 같이 이겨냈겠지, 하고 쉽게 상정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소설 속의 강주룡은 충분히 사랑했다. 그의 남편을, 남편의 일을, 평원고무공장의 동료들을, 정나기, 혹은 정달헌을. 사랑이 있었기에 연대할 수 있었고, 그보다 앞서 그 주위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두려워하고 망설였으며 불안해했다.

  소설을 읽으며 그의 삶에 전적으로 공명하기 위해 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내가 지닌 삶의 흔적 몇 조각이 소설을 읽다 보면 문장의 모습으로 고요히 앉아 있다.

  강주룡은 ‘체공녀’이기도 하지만, ‘체공녀’만은 아니다. (힌트: ‘체공녀 강주룡’의 ‘체공녀’는 ‘미스 함무라비’의 ‘미스’와 작품 속 맥락이 비슷하다.) 강주룡은 조선 최초의 고공농성자, 여성 노동운동가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이지만, 역시 그뿐만은 아니다. 강주룡은 강주룡일 따름이다. 이 소설이 그것을 내게 알게 해 주었다.

 

 


*〈체공녀 강주룡〉서평단 활동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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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8-30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동 거신다 아싸 과도기님 시동 거신다 ㅎㅎㅎ^-^

인간의과도기 2018-08-31 06:27   좋아요 0 | URL
ㅎㅎ 간만에 쓴 글이라 그런지 품이 좀 떨어져 보여 면구합니다. 간간이 소식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
 
에이다, 당신이군요. 최초의 프로그래머 - 컴퓨터 탄생을 둘러싼 기이하고 놀라운 이야기
시드니 파두아 지음, 홍승효 옮김 / 곰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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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컴퓨터에서 프로그래밍(programming)에 해당하는 일련의 명령을 해독하면서 자동적으로 계산을 실행하는 기계를 19세기 초에 영국의 수학자 C.배비지가 계획하였다. 그 시작기(試作機) 중에서 차분기관(difference engine)과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이라는 것이 현재에도 남아 있다.”

 

  “영국 수학자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 1792~1871)는 다항함수와 로그함수, 삼각함수 등을 계산할 수 있는 기계식 계산기인 차분기관을 1822년에 제작하였고, 1835년에는 해석기관을 설계하였다. 이 해석기관은 최초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컴퓨터로 인정받고 있다.”

 

 

  위 두 문단은 컴퓨터의 유래에 관한 내용 일부를 서로 다른 지식백과에서 발췌한 것이다. 내용을 찾을 때 검색어를 ‘컴퓨터’로 했으니,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기계의 형태를 누가 먼저 구안했느냐의 문제로 따져 본다면 상기한 서술들의 정합성은 더 따지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컴퓨터를 컴퓨터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고장이 나서 작동하지 않는 컴퓨터나 (어찌 보면 작은 컴퓨터라고도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보며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가?

  백과사전의 서술은 컴퓨터를 컴퓨터답게 하는 것, 수의 언어를 “숫자 외에 다른 것에도 작용”(28)하도록 하는 규칙, 컴퓨터의 영혼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의 성취마저 배비지의 공으로 돌렸다는 점에서 편향적이다. 역사적 기록은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찰스 배비지와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해석기관의 설계에 ‘공동으로’ 관여했고, 에이다는 그 중 해석기관의 논리를, 오늘날의 언어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그러나 그 기록은 얼마간은 가려진 기록이었다. 나 역시 수학 교과서에서, 어린 시절 보았던 과학 교양만화에서 차분기관의 대략적인 형태를 삽화로 접했을 뿐이다. 프로그래밍이 컴퓨터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중요한 ‘물건’은 누가 설계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책 제목에서부터 ‘에이다, 당신이군요. 최초의 프로그래머!’라고 우리의 주인공을 호명하니, 추측건대 그래픽노블의 형태로 다시 쓴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전기(傳記)일 것이었다. 그러나 책을 받아보고는, 그 추측이 반만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전기는 전기이되, ‘다중우주’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컴퓨터 창조의 주역들로 하여금 종횡무진 활약하게 하는, ‘워너비 전기’인 셈이다. (참고로 원제목은 『The Thrilling Adventure of Lovelace and Babbage』, 우리말로 ‘러브레이스와 배비지의 짜릿한 모험’ 정도로 직역할 수 있겠는데, 책 내용에는 조금 더 부합하지만 아무래도 비영어권 독자인 우리에게는 밋밋하고 낯선 제목이었으리란 생각도 든다. ‘러브레이스는 누구며 배비지는 또 누군데?’)

  대체역사물이 한국의 출판시장에서 그리 드문 것은 아니지만, 대개 이러한 형태의 ‘워너비 서사’는 대중의 헛헛한 역사의식, 역사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민족의식을 왜곡된 방식으로 충족시키기 마련인지라 책의 기본 설정을 확인한 후 우려가 되는 바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책을 빼곡히 매운 각주, 그리고 거기에 더해 각주를 보충하는 미주, 그리고 각 장마다 다채로운 방식으로 빛나는 러브레이스와 배비지의 모험담을 마주하며, 나는 나 자신의 얼굴을 새삼 다시 마주했다. 어떤 대상을 깊이 사랑하면 그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지 않을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이 질문은 나에게나 유효한 것이었다.

  저자인 시드니 파두아는 수학 전공자가 아니다. 본업은 애니매이터 겸 특수영상 아티스트라고 한다. 사소한 계기로 그리게 된 러브레이스에 관한 웹툰을 보충하고자 시작한 자료조사는 저자를 러브레이스와 배비지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기이한 수학자들에 대한 무한한 매혹으로 이끌었다. 책은 말하자면 저자가 경험한 매혹의 과정이자 결과다. 요즘에는 시각 관련 업계에서 컴퓨터가 필수불가결한 도구이기에, 저자의 매혹은 어쩌면 운명적인 것이었을까? 그러나 모든 애니메이터가 수학의 역사와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저자는 엄밀히 말하면 수학 이론의 장(場) 바깥에 있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더 객관적으로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 구글링이라는 이 시대의 보편적 방법론에 러브레이스와 배비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더함으로써. 그렇기에 저자는 “러브레이스가 무지한 사기꾼이라는 주장과 배비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엄청난 천재라는 주장은 둘 다 … 과장되어 있다! // 당신은 한쪽이 그녀를 축소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 다른 한쪽은 그녀를 확대했다.”(258-259)라는, 객관에 가까운 주관적 평가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군데군데서 실없이 웃게 만드는 영국식 유머라든지, 저자가 직접 온라인 ‘노가다’를 통해 발굴한 러브레이스와 배비지에 관한 ‘원전’이라든지, 수많은 논문과 연구자료를 참고하여 저자가 ‘직접’ 그린 해석기관 전체의 도해라든지……. 이 책의 빛나는 부분은 많다. 그러나 이 빛나는 모든 것들을 빛날 수 있게 한 유일한 요소를 꼽으라면, 미완의 과제에 평생을 매달린 두 수학자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창작물로 바친다는 것이 굉장히 지난하지만 아름다운 작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ps. 나는 소위 ‘문돌이’다. 수학에 일찌감치 거리를 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책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해가 충분히 되지 않는 부분(가령 해석기관의 도해라든지!)은 충분히 되지 않는 대로 넘기며 읽어도 무방할 듯하다. 저자가 짠 방대한 이야기 그물을 샅샅이 훑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또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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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누이
싱고 지음 / 창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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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는 시인이 되고 싶어서 시를 많이 읽은 적이 있다. 시인이 되려면(=등단을 하려면) 시를 ‘잘’ 써야 하는데, 잘 쓰려면 우선 시를 많이 읽어야 한다는 조언을 여러 경로로 접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고등학교 졸업을 기점으로 시 읽기에서 손을 떼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은연중에 생각했었다. 앞 문장을 ‘생각했었다’라고 끝맺은 이유는, 생각만 야심차게 하고 생각만큼 많이 읽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집에는 사 두고 읽지 않은 시집만 많다. 어쨌든.

  ‘시인 되기’에 대한 미련이야 아직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그러니까 남들보다 시를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던 시절보다는 확실히 시를 덜 보는 요즘이다. 그렇다고 시에 대한 감각이 아예 제로베이스로 돌아갔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생활이 목표하는 바가 단순해지다 보니 단순한 사고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시 읽기가 그 경향에 맞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것이 낫겠다.

  그러니까, 예전에 시를 조금 읽긴 읽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시와 거리를 두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는 초심자를 위한 시‘선’집도, 눈 밝은 시 마니아를 위한 시집이나 시 ‘전’집도 애매하기만 하다. 초심자와 마니아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나 같은 독자에게 다시 시 읽기의 즐거움을 매개해 줄 책이-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없었다.

 

  『詩누이』의 저자는 시인이다. 시인은 아무래도 시와 친연한 사람. 시를 보는 안목이 빤하지는 않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시와 너무 친연하고 익숙한 나머지 시가 막연히 어렵고 낯선 사람들에게 어떤 고난이도의 ‘과제’를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가질 수 있다(“어때요. 참 쉽죠?”). 시의 목록을 찬찬히 보았다. 앞의 기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과 뒤의 우려가 현실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낌적으로’ 느낄 수 있다.

  ‘느낌적으로’라는 말은 중요하다. 학교에서는 언어와 사물이 일대일로 대응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과 사람의 일, 세계에서 목격하는 사물과 현상들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언어를 현실에서 단박에 찾아본 일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원래 세계는 복잡하다. 그리고 우리는 늘 그 복잡함에 어울리는 언어를 찾지 못해 주저하기 마련이다. 그저 ‘느낌’으로 우리 주위의 감정과 일과 사물과 현상을 파악할 뿐이다. 그 주저하는 가운데, 언어의 첨단을 탐색하는 시도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시(詩)다. 그래서 시의 언어는 ‘느낌적’이다. 어떠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詩누이』의 그림은 시의 이러한 ‘느낌적’인 성격과 어울린다. 시와 최소한의 연결 고리를 가지고 풀어가는 에피소드도 있고, 시의 구절을 이미지화한 에피소드도 있고, 시의 이미지를 고유한 서사로 변주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들 그림-이야기는 시의 해석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중고등학생 시절에 받았던 시 교육을 생각해 볼 때 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가 그림 안에 숨어 있을 것도 같지만, 그런 것 없다. 이 포근한 만화는 우리로 하여금 시를 더 잘 ‘느끼게끔’ 해 주는 역할을 할 따름이다.

책 띠지에 있는 ‘토닥토닥’이라는 단어가 나로 하여금 이 책의 성격을 오해하게 할 뻔했다(띠지에 있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시로 ‘마음의 온도’를 맞춰주는 싱고의 ‘토닥토닥’ 웹툰 에세이). 그러니까, 섣불리 자신과 독자를 위로하려 하는, ‘힐링’ 계열의 책으로 잠깐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생각이 짧았다. 시는 아무 것도 단정하지 않는다. 앞서 나는 이 책의 그림(자꾸 그림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저자님께 양해를!)이 시의 성격과 어울린다고 했는데, 단일한 해석을 내리거나 섣부른 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책의 그림과 시는 닮아 있다. 그러므로 또한 어울린다.

  “이 책에서 봤던 시와 그림이 떠오른다면, 그것대로 보람”일 것이라는 저자는 마음껏 보람을 느껴도 좋을 것 같다. 나만 하더라도, 이 책의 그림에서 보았던 차분한 유머에 피식거렸던 순간, 시와 그림의 절묘한 컬래버레이션에 나지막이 감탄을 내뱉던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책의 유일한 결점(?)이라면, 제목이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어떠한 ‘느낌’. 짐작건대, 대다수의 기혼 여성들에게 ‘시’자가 앞에 붙은 존재들은 마냥 편한 느낌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댁, 시누이 등등……. 부디 그러한 ‘느낌’ 때문에 이 책이 일부 독자들에게 부수적인 외면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객쩍은 생각을 해 본다. 이런 시누이라면, 시를 즐거이 나눌 수 있는 누이-언니라면 나로서는 언제나 환영이다.

 

ps. 글의 제목은 블리자드 사의 게임 ‘오버워치(Overwatch)’ 등장 영웅 중 한 명인 트레이서(Tracer)의 대사("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이야!")를 변용했다.

 

 


 

*본 서평은 ‘<詩누이> 사전 서평단’ 활동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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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19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내용이 쉬울수록 좋아요. 그런데 내용이 쉬운 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아마추어 시인이 쓴 시가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천대받습니다. 표현이 어설퍼도 시를 읽을 때 좋은 느낌을 가졌다면, 그것도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인간의과도기 2017-06-19 23:56   좋아요 1 | URL
말씀해 주신 대로, 읽는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시는 좋은 시입니다. 몇몇 지하철 시나 SNS에서 공유되는 창작 시 같은 것들에서, 감정이 절묘하게 포착된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쉬운 시를 무시하는 경향은, 아무래도 중등학교에서 시를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문학 갈래‘라고 전제한 후 시 교육을 한 것에 따른 부작용 같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오는 자신의 느낌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읽지 않고 ‘여기 뭔가가 더 있을 거야‘라고 의심하고 고민하다 보니 결국에는 시 읽기를 포기해 버리는 거지요. 우리가 언제부터인지 잃어버린 ‘느낌적인 시 읽기‘에 이 책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귀한 댓글 감사합니다. :)
 
[eBook] 민주주의 잔혹사 - 한국 현대사의 가려진 이름들
홍석률 지음 / 창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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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유명 역사 강사의 강의 캡처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링크). 수능에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등장한 것에 불만을 토로한 수험생들의 반응을 전하며, 진정 역사에서 ‘중요한’, 또는 ‘중요하지 않은’ 인물은 누구인지를 되묻는 내용이다. 비록 그는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한국사 강의를 주업으로 하지만, 그런 그가 보기에도 ‘시험에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수험생들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새겨진 이름들을 ‘지나칠 정도로 가볍게’ 넘어가는 현실은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무시당하고 말 이름일지언정 역사에 남게 된다는 것은, 그것도 한 사람, 또는 그 시절의 단체명이나 사건, 운동 등의 이름이 오롯이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의미인지! 이름 한 번 불리지 못하고 사라져 간 많은 이들의 삶이 역사책에서 ‘이후 몇(십) 년 동안 과도기가 지속되었고, 사람들의 삶은 힘들어졌다.’ 식의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사례를 의외로 흔하게 본다(교과서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안다’고 말할 때의 평가 척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의 한 시기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누구이며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얼마나 아는지의 여부가 된다.

 

 

 

  이 사람 누군지 알아? 이토 히로부미? 안 되겠네. 민족의 역사도 모르는 매국노!

 

 

  서벌턴(Subaltern)이라는 개념은 우리말로 ‘하위자’ 또는 ‘하위주체’쯤으로 번역된다고 한다. ‘~고 한다’라고 앞 문장을 끝맺은 이유는, 학부 시절에나 개념을 얼핏 익혔을 뿐 개념의 정확한 정의나 관련된 논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이 주는 문제의식만은 이후 내 역사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엄연히 현실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라지는 이들은 누구인가? 왜 그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잊히는가?

  잠깐, ‘그들’이 잊힌다고? 나는 그럼 민중이 아니고 엘리트쯤 되나? 이쯤에서 질문을 수정해 본다. 민중의 정확한 이름은 무엇인가?

  우리는 민주주의를 공기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살고 있고, 그 바탕에는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피와 눈물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민중이 민주주의의 주체라는 것도, 권력의 근본이라는 것도 상식으로써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간 민주주의를 반추할 때 떠올리는 이름은 4.19 혁명의 김주열, 87년 항쟁의 김종철과 이한열, 이 정도다.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열사들의 이름값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민중은 그들의 피를 기억하고 그들과 ‘함께’ 이 땅의 민주화를 이끌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사실상 ‘들러리’ 취급을 받는다. 기껏해야 ‘몇십(또는 몇백)만’의 ‘인구수’로 다루어지는 게 현실이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민중이 잊힌 민주주의’라는 현실에서 비롯한다. 필자는 서문에서 말한다.

 

“‘민주주의 잔혹사’라 할 때 이는 한국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탄압, 국가폭력 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혹은 희생된 사람이 여전히 가려지고, 역사에 잘 기록되지 않는 것 역시 잔혹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책은 주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건’에 대한 ‘잘 모르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4.19 혁명의 결과가 무엇인지, 5.18이 어떤 날인지, 6월 항쟁이 대략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정도는 이미 잘 안다고 생각한다(여담이지만, 나의 학부 시절 때도 5.16과 5.18을 구분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기사가 교내 신문에 나고 그랬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 때 억울하게 끌려간 삼청교육대원들에 대한 진상조사가 아직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 4.19 혁명 때 이승만 하야를 분명하게 외친 이들이 마산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라는 이야기, 산업화 시대에 ‘민주노조’를 이루려 노력했던 이들이 여성 노동자들이며 그들이 정부, 한국노총 및 남성 노동자들에게까지 핍박받았다는 이야기들은 생소할 것이다.

  역사 주체의 행위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면 그 주체는 역사의 진보와 발전에 있어 수행한 역할이 미미한 것일까? ‘그렇다’라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어떤 주체와 그 주체의 행위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부차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관련 기록이 부족한 것이다.

  승자는 패자의 역사를 끊임없이 지워내는 한편, 자신의 역사를 치장하여 더욱 빛나도록 한다. 5.16 군사정변 관련자들은 ‘4.19 혁명 이후 사회는 어지러웠고 기존 정권이 부정과 부패로 얼룩졌으므로 불가피하게 새로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라는 식으로 ‘거사’를 일으킨 이유를 댔다. 이러한 서술이 민주화 도래 이후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으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내가 군인이던 2010년대에도 버젓이 군 정신교육 자료라는 이름으로 유포되고 있었다. 군 정신교육을 진지한 마음으로 듣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민주시민과 국가를 수호한다는 집단에서 왜곡된 역사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설마, 지금도 정신교육 내용이 그러하려나). 개인적으로는 군사정변 관계자들이 내걸었던 명분이 그 당시의 실제적인 정치적 상황과 얼마나 괴리가 있는지를 낱낱이 지적하는 5장의 내용이 이 책의 백미라고 생각했다.

  아, 직전의 서술은 취소해야겠다.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중심과 경계를 구분 짓고 있었다. 이 작은 책에서조차! 어느 것 하나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외면했던 작은 역사들, 그 역사에서 살던 소외된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의 명료한 뜻을 지금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역사적 가능성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우리가 미래의 역사를 준비하는 데 있어 좀 더 넓은 시선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역사를 다루는 데 있어 가정법은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 명제는 반만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명제는 우리나라가 저 고구려 때와 같이 드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등과 같은 민족주의적, 영웅주의적 사관을 포기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역사적 가능성을 소거해 버림으로써 일반의 역사의식을 결과 중심적으로 굳어지게 한다. 역사가 과거를 토대로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정의에 가깝도록 역사를 체화할 필요가 있다. 주변부를 배제했던 민주주의의 지난날, 그 잔혹한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은 가능성의 호출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형식적 민주주의를 맞이한 지 이제 겨우 30년 지났다. 그 중 10년 가까이는 말 그대로 민주주의의 형식적 껍데기만 남은, 민주주의가 사실상 뒷걸음질하던 시절이었다. 김광석의 노랫말처럼, ‘이제 다시 시작’일 뿐이다. 위대한 몇 사람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결코 위대하지 않은, 평범해서 눈에 띄지 않는 민중들이 만들어가는 역사에도 이제는 주목해야 한다. 사실, 그 역사는 우리가 만드는 역사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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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로스트 한국말’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이 영상(링크)에서 말을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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