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종말은 투표로 결정되었습니다
위래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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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황금가지 출판사의 서평단 이벤트에 당첨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하였습니다.


11월에 반소매 셔츠를 입을 정도로 덥다니. 이렇게 마음속으로 놀란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한파특보라니. 기후위기를 더 자주, 더 강렬하게 체감하는 만큼 종말을 상상하는 빈도도 잦아졌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본인의 상상만큼 종말을 진심으로 믿지는 않는 것 같다. 마치 내 살아 있는 동안 종말이 오기야 하겠어?’라는 식으로. 마치 태어날 때부터 죽을 운명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처럼.


부정해도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대로라면 인류 모두가 종말 코앞까지 가게 될 수도 있는데, 진짜 종말의 순간이 찾아온다면 나는,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거대한 운명 앞에서의 선택이라는 주제는 이미 많은 영화에서 채택되었을 만큼 서사적으로 매혹적인 아이디어지만, 영화를 안 보는 나같은 사람은 책이나 보다가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인류의 종말은 투표로 결정되었습니다는 인류 종말을 주제(테마)로 한 여섯 편의 단편 기획선이다. 사람도 저마다 삶을 꾸리는 방식이 제각각이듯 여섯 편의 단편에 묘사된 종말의 원인도, 종말을 맞이하는 태도도 제각각이다. 이 인간적인 서사의 태도들이 마음에 든다.

 


죽이는 것이 더 낫다에 묘사되는 종말은 운석이나 외계인 같은 외부 요인의 개입 없이 인류의 일부 개체가 종말을 직접 결정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불러온 재앙(스불재)’의 표본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해주의’, 그러니까 사람을 죽이는 게 결과적으로 이득이다라는 사상이 책을 매개로 전파된다. 사상에 도취된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많아진다. “워킹 데드와 같이 미디어에 표현된 좀비의 변형된 버전인 셈이다. 사상의 디테일은 생략되어 있는데(이를테면 ’, ‘어떤 측면에서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나은지) 단편의 분량과 서사의 전개를 고려하면 탁월한 전략이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무에 가려 숲을 못 보면 안 되니까, 그렇게 망했다는 것이 요점이니까.


서평단 이벤트 공지를 통해 책 제목을 처음 접하고 솔직히 떠올린 생각은 시대정신이 투표만능주의라 미디어에서도 살인 투표니 오디션이니 하더니만 이제는 종말까지 투표로 정하네였다. 그런데 투표로 정해지는 인류 종말의 아이디어가 담긴 표제작(이라면 표제작) 침착한 종말을 읽다 보면 시종일관 느껴지는 분위기가 제목의 어그로와는 딴판이라 일종의 배신감(?)마저 든다. 미래 사회에는 일주일에 고작 2, 그것도 8시간 미만을 일하고 여유 시간에는 각자 보내고 싶었던 시간을 보낸다. 예전 유행했던 슬로건처럼 저녁이 있는 삶을 마음껏 누리는 셈이다. 대신 그 저녁의 끝에는 종말이 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한 번 경험하면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나는. 아마도 인류 종말이라는 전 지구적 이벤트 앞에서 우리의 현실은 작품에서 묘사된 것만큼 다소 우왕좌왕하며 나아가지 않을까.


종말은 인류라는 종()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이벤트다. 적용 범위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존재의 끝이라는 차원에서 죽음은 종에 속한 개체가 맞이하는 개별적인 종말이다. 캐시는 종말의 스펙트럼이 개인을 접점으로 교차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숙고하게끔 한다. 불행을 예견하여 피하도록 한 것과 비극을 포함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결과론적으로 같은 사실을 공유하는 동전의 양면이다.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무거운 분위기이지만, ‘종말이라는 사태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를 상기한다면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주인공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네필()의 마지막 하루에서도 종말의 직전까지 삶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이어진다. ‘시네필스러운농담이 유쾌한 분위기로 군데군데 깔려 있는데, 덕분에 진성 시네필이 아니라 작품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패러디된 영화 원작의 결을 알아차리지 못한 내 입장에서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트위터(현재 ‘X’라고 불리는)를 하는 시네필이라면 작품 곳곳에 포진한 은유와 패러디, 농담을 만끽하며 마음껏 즐길 수 있으리라 본다. 물론 시네필이 아니어도 괜찮다.


멸망을 향하여는 게임 마니아(그냥 겜덕이라 쓸게요)라면 한 번쯤 해 보았을 법한 상상을 기반으로 한다. ‘만약 지금 내가 하는 게임이 서비스 종료를 한다면, 게임 속 캐릭터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소설의 무대는 서비스 종료를 앞둔 게임 속 세계이며, 소설은 비인기캐의 관점에서 세계가 어떻게 닫히는지를 종말전후로 드러내 보인다. 파국은 예정되어 있고 그 경로를 틀어버릴 수는 없다는 점에서 게임 속 캐릭터와 사람은 닮았다. 어쩌면 유한한 운명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게임의 세계를 창조하고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위바위보 세이브 어스는 제목 그대로 가위바위보가 인류 종말을 앞에 두고 지구를 구하는 문제로 격상하게 된 이야기다. 가위바위보에서만큼은 100%의 절대적인 승률을 가지고 있지만, 그 외에는 이렇다 할 것 없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한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영웅이 되는지, 어떤 방식으로 영웅의 성장 서사를 수용하고 또 어떤 식으로 비껴가는지를 다루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제가 주제인지라 책을 덮고 나면 자연스럽게 숙연해진다. 아무래도 개체로서의 내가 맞이할 끝도 생각하게 되니까. 내 예정에 없는 삶을 간접적으로 겪어 보는 것이 독서가 가져다주는 효용 중 하나라면, 이 책의 수록작을 읽으며 예정된 에 대해 미루어서 체험하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니 나는 가치 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이야기해도 되겠다.

 


p.s. 별을 한 개 뺀 이유는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하다 싶은 초반부의 오탈자 때문이다. (2쇄에는 고쳐졌으리라 생각합니다. [갑자기 존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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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태양이 하늘 이편에서 저편으로 자리를 옮김에 따라(물론 천문학의 관점에서 본면 지구가 스스로 도는 위치에 따라라고 써야겠다) 날이 저물고 다시 날이 밝는다. 이것은 어떤 날이라고 해서 다른 여느 날과 달리 특별해지지 않지만, 일상적 시간의 흐름에 인간의 역법(曆法)을 얹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왠지 오늘 저녁은 한 해가 속절없이 저물었다며 쓸데없이 비감에 빠지기 좋은 시간인 것이다.

 

작은 성취를 기억하며 한 해를 살자!고 기운차게 써 놓고는 한 해 동안 서재 글을 쓰지 않았다. 자녀를 돌본다고 휴직했으면서 블로그 활동이 더 활발해지면 혹여 육아휴직하는 남자는 정작 육아를 안 하고 자기계발을 한다는 통념을 강화하는 데 내 사례가 쓰일까 사뭇 자제한 면이 있다(작은따옴표 안 문장의 사례는 불행히도 많다). 생활 패턴이 상대적으로 단조로워지다 보니 글 쓸 거리와 의지가 달려서인 면도 있다(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래도 연초에 이정표를 세운 덕에 한 해를 목표한 대로 살았는지 돌아볼 수 있는 것은 좋다(연초의 나 잘했다).

 

1.작년보다 책 많이 읽기: 어쩌면 향후 10년간은 이보다 더 읽지 못할 정도로 많이 읽었다. (122)

(한 해 동안 읽은 책 권수로 한 사람의 독서량을 평가하는 데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쭉 회의적이다. 위의 122권은 상대적으로 텍스트의 양이 적은만화(27)와 어린이용 동화(4) 포함한 수다.)

2.술술 읽히는 책과 더불어 깊이 있는 양서를 시간 들여 읽기: 에세이 위주로 읽고 시간을 들여 읽으려던 이론서들은 여전히 지그시 바라만 보고 있다. 저거 언제 한 번 봐야 하는데... 하면서.

3.가능한 한 비건 지향 실천하기: 가능한 만큼 했다. 자녀도 배우자도 없는 시간에 짬짬이 비건 식당에라도 좀 더 가 볼 것을 그랬다고 소소하게 후회한다. 회사에서는 다시 논비건(인 것)처럼 살아야 할 테니 하루 한 끼라도 가능하면 비건식을...

4.날 풀리면 운동하기: 했을 리가?

5.작은 성취를 기억하기: 출근하는 대신 가족과 여행을 많이 간 것이 공동 성취라면 성취겠다.

 

집 안에 책을 둘 곳이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로 전자책을 자주 읽었고, 종이책은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내돈내산내읽’(내가 돈 내고 내가 산, 내가 읽은) 종이책은 헤아려 보니 네 권이다. 전자책도 처음에는 예산을 쪼개어 사서 보다가, 그 다음에는 공공 전자도서관을 이용하다가, 하반기에 가서는 통신사 제휴가 되는 유료 구독 서비스에 다다라 이것저것 집히는 대로 찜해 놓고 읽었다. (유료 구독 서비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다. 일단 별도 요금 없이 쓸 수 있다니 쓴다만, 저작자나 출판사에 정산은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그러나 굳이 확인하지 않는.)

 

새해에는 모두가 복 많이 받고 바라는 모든 일이 되기를 바란다고 쓰면 거짓말이다. 바라는 모든 일을 되는 대로 이루면 안 되는 이들은 아득바득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한다. 분노가 차오르다 못해 냉소에 빠지지는 말아야 할 텐데. 주위에도 실망하지 말아야 할 텐데. 잠깐 깨친 듯 하다가도 다시 기대를 하고 이내 실망을 하고 냉소에 찬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조금 더 복을 나눌 수 있기를, 그리하여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아래에서 조금은 더 일이 잘 풀리는 느낌이라는 복을 받기를. 이 정도만 바란다.

한 해를 살아서 남는 게 거의 없다 느껴졌다면 8할은 가사(家事) 때문이겠지만 이 역시 거짓말이다. 우리 집 아이에게는 비록 잔소리하는 아빠가 남았더라도, 지금 당장 정리할 수 없는 무언가는 올 한 해의 결과로 남았을 것이다. 쓰다 만 책읽기의 생각 타래는 언젠가 다시 서재에 정돈된 형태로 풀 수 있기를 바란다. 시계를 보니 그 사이에 남은 2022년은 더 어두워졌다. 곧 다시 날이 밝을 이다. 그게 2022년이 아닌 2023년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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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전의 일요일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러 점심시간 즈음에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건너편 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문득 햇살이 따스함을 느꼈다. 그 온도 덕에 마음이 아주 여유롭게 누그러졌고, 급기야는 평소에 하기 어려운 생각에까지 기분이 다다랐다. 지금, 그러니까 빌린 책 다섯 권 중 대출기간 안에, 심지어 한 차례의 기간 연장 없이 완독한 네 권을 반납하러 가는 이 순간은 해가 바뀌자마자 이뤄낸 작은 성취를 확인하러 가는 순간이다. 전날인 토요일 새벽에 이 글 초고를 쓸 때는 마음의 절반이 파도에 휩쓸려 나가고 어쩌고 했었는데 ㅋㅋ (역시 새벽에 쓰는 글은 좋지 않다) 이런 성취감은 정말 오랜만, 어쩌면 거의 느껴본 적 없었던 성질의 것이라 낯선 한편 반가웠다. 그나저나 어떻게 내 독서 속도는 이렇게 빨라질 수 있었을까?



결말까지 다다르는 과정을 추리 소설처럼 흥미 있게 쓸 자신이 없어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지금은 회사 일을 쉬는 중이다(퇴사 아님). 기록이 있어서 찾아보니, 작년 2분기서부터 이 일(폭탄처리반)에 대해 지독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나 보다. 시민으로서의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잡소리에 그딴 잡소리 집어치시구요라고 대응해야 하는데, 직업인으로서의 나는 불편을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고객님 소리부터 먼저 하고 있으니. 요새는 소비자 마케팅에서도 고객은 왕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트렌드에서 밀려난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이 일이 내 일이어야 하지? 회의는 꼬리를 물었고, 비록 전문기관에서 상담을 받지는 않았지만 나의 내면이 소진되고 있다는 느낌만은 비교적 명확히 감지했다. 소진된 내면은 누가 대신 채워주지 않으므로, 배우자와 상의 후 해가 바뀐 후부터 회사 일을 잠시 쉬게 되었다. 아무튼그렇게 됐다.



회사 일 대신 집안 살림을 이전보다 더 꼼꼼히 꾸리고 자녀를 돌봐야 한다. 이러려고 쉰 거니까. 책을 읽을 절대적인 시간은 많아졌다고 볼 수 있지만 정리된 글을 계획된 일정에 맞추어 올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 체력이 늘면 집안을 돌보고 읽고 쓰는 세 가지 일을 멋지게 동시다발적으로 하겠지만, 지금은 우선 앞의 두 가지에 초점을 두었다. 읽어야 뭐라도 쓸 수 있다. 여하간, 내 서재를 찾아 주시던 고마운 분들이 하나도 없게 되기 전까지는 뭐라도 쓰는 게 일종의 예의이겠다.



구정도 지났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치껏 안다. 새해가 시작된 지 한 달도 더 지난 지금 새해 어쩌구를 글로 적거나 말로 올리는 것은 서로 계면쩍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도 나는 예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에 비해 눈치가 없으므로 새해 다짐을 굳이 이야기해야겠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차피 못 지킬 새해 목표 왜 세우나가 새해를 맞이하는 나의 기본 태도였다. 그러나 며칠 전 불현듯 이 문구가 드러내는 태도가 어차피 죽을 거 왜 사나의 수많은 변주일지도 모른다는, 그러니까 의미도 통찰도 없는 허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후 2022년 새해의 첫째 다짐은 자동적으로 새해를 맞이해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일에 굳이 초 치는 사람이 되지 말자가 되었다. 초를 칠 기회 자체를 만들지 않으니 아직까지는 잘 지키고 있다.



목표는 지키기 위해 세우지만 달성 여부에만 초점을 맞추면 세우나 마나 한 목표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목표는 원대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강박은 민족적인 것이어서 쉽게 떨치기 어렵겠지만(대학은 SKY를 목표로 해야 인서울이라도 간다, 대기업 목표로 해야 갓생 아니더라도 현생이라도 산다, 등등), 사소한 충족감이 나를 스스로 인정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새해 2월에 들어서서도 사그라들지 않은 새해 다짐은 이렇다. 1. 작년보다 책 많이 읽기(2021년에는 58권을 완독했다), 2. 술술 읽히는 책과 더불어 깊이 있는 양서를 시간 들여 읽기(알라딘 서재의 많은 분들이 참여하고 있는 여성주의 책 읽기 대상 도서를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몇 권 샀었으나 생활을 핑계로 읽지 못했음을 뒤늦게 고백한다), 3. 가능한 한 비건 지향을 실천하기, 4. 육아 가사 시간 외에 운동하기( 풀리면 ……), 5. 작은 성취를 기억하기.



새해 다짐은 일석이조식으로 달성할 수도 있다. 가령 이런 것. 하루는 내가 요리한 알배추찜을 배우자가 매우 맛있게 먹었다. 요리라고도 할 것이 없는 아주 간단한 인터넷 레시피였지만, 비건 레시피로 배우자도 만족하며 먹을 수 있는 한 끼를 만들고 같이 나누었다는 게 소중한 순간으로 다가왔다. 비건 지향을 실천하면서(3), 배우자가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알게 된 것이다(5).



새해에 빌려 대출 기간 동안 열심히 읽고 반납한 책 네 권은 이렇다.





『내 손으로, 교토+오사카』는 이다(2da) 작가가 교토, 오사카 여행기를 손그림과 손글씨로 옮겨 작업한 일기다. 실은 이 전에 작가의 최근작인 『기억나니? 세기말 키드 1999』를 먼저 읽은 것을 먼저 언급해야겠다. 비록 내가 작가와 동년배는 아니지만 그 시절 하면 어렴풋이 기억날 법한 것들의 질감이며 분위기며 하는 것들을 죄다 소환해내는 작가의 기억의 세세함에 읽는 내내 감탄뿐이었다. (나에게는 없는 종류의 것이므로) 그런데 책 말미에 작가께서 『내 손으로, 치앙마이』를 영업하시기에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영업을 받아들였고, 집 앞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지를 검색해 보았으나 없었기에 불행 중 다행으로 비슷한 계통인 『내 손으로, 교토+오사카』 를 빌리게 된 것이다.


손으로 쓴 일기를 그대로 옮긴 듯한 콘셉트를 극한으로 실현시켰는데 단지 콘셉트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교토 여행을 처음 계획할 때의 일부터 시작해서 1112일의 일정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일면식도 없는 작가의 일기를 이렇게 함부로(?) 봐도 되나 싶은 디테일들이 책 구석구석에서 아른거리고, 책을 덮고 나면 안 그래도 가고 싶은 여행이 더 가고 싶어진다. 현재 품절되었으니 소장은 어렵고 인근 도서관에서 찾아보시기를.




『물속을 나는 새』는 펭귄 연구자로 익숙한 동물행동학자 이원영이 남극에서 연구하며 관찰한 펭귄의 생태를 에세이 형태로 전하는 책이다. 사실 그는 까치가 사람을 개별 개체 수준에서 인식할 수 있다는 이른바 까치 연구 로 유명하다던데, 워낙 과학에 문외한인지라 최재천 교수 유튜브에서 관련 내용을 보기 전까지는 몰랐었다.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o6Z6m9sp44w) 책에서는 여기에 더해 인간과 비교적 교류가 덜했던, 남극에 서식하는 조류(도둑갈매기, 펭귄)도 개별 개체 수준에서 사람을 인식할 수 있다고 소개하니, 새 머리라는 욕은 실상 새에게도 모욕인 셈이다.


저자가 남극에서 주로 연구한 펭귄 서식지에 가장 많은 펭귄이 젠투펭귄과 턱끈펭귄이고, 책에 실린 사진도 그 두 종의 펭귄 사진이 대부분이다. 덕분에 다른 건 몰라도 전 세계의 수십 종 펭귄 중 젠투펭귄과 턱끈펭귄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사실 골든리트리버와 포메라니언이 같은 여도 다른 인 것처럼, 큰 이름으로 펭귄이라 묶일 뿐 젠투펭귄과 턱끈펭귄 말고도 임금펭귄, 훔볼트펭귄 등 종이 다른 펭귄들이 저마다의 삶을 꾸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럴 뿐. 펭귄이 왜 주로 남극 및 아프리카 등 남반구에 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첫 번째 에세이의 제목이 펭귄 북극에 가다인데, 마지막(스무 번째) 에세이를 읽는 시점에 되돌아보면 사뭇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사는 방식』은 배우자가 빌려 와 달라고 전달해 준 책 옆에 꽂혀 있었다. 전미도서상 수상 작가인 시그리드 누네즈가 사회 초년생일 시절, 이미 거장인 수전 손택의 집에 같이 살던 시절을 떠올리며 쓴 회고록이다. 수전 손택의 저작을 읽기도 전에 회고록부터 읽는 것은 반칙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책이 얇으니까 금방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곧 오산으로 드러났다.


, 그러니까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해야 한다. 회고록이 지시하는 시대는 1970년대라는 것을. 그 시대로부터 달라진 것, 또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에 대해 명확히 전제하지 않는 한, 이 복잡하고 강렬하고 한편으로 모호한 회고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책을 덮고 나니, 예술의 강력한 옹호자이고자 했던 수전 손택의 저작을 에세이와 소설 가리지 않고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전에 이 회고록의 한 단면만을 가지고 그가 어떻다고 지금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명확한 반칙이다.




『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 설명서』는 문화연구가 최태섭의 근작인데, 부제 그대로다. 게임에 대해 궁금하지만 게이머들은 답해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답하는 책. 저자 자신이 게이머이기도 하고, 나도 한때 열성 게이머였던 만큼 빡빡 웃으며 읽었다. 예상 독자를 게임이 무엇인지 모르는 독자를 전제로 한 만큼 1(게임의 정의와 분류), 2(게이머에 대한 통계 분석), 3(게임 산업에 대한 분석)에서는 분석과 설명에 충실하다. 압권은 게임 및 게이머와 관련된 논란을 다룬 4장이다. 내가 빡빡 웃었다고 이야기한 대부분의 내용은 4장에 있다. 누군가는 진성 게이머의 입장에서, 안티페미 밈(meme)에 절여진 게이머들의 논리를 비판해 주길 오래 전부터 바라고 있었는데, 저자가 그걸 해냈다. 맞는 말들을 죄다 옮겨 적었더니 페이퍼 본문보다 많아져서 나중에 리뷰를 따로 쓰기로 하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 하나만 옮긴다. 소위 PC(Political Correctness)가 게임을 망친다게이머들의 주 논리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PC가 게임의 재미를 망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비백인이고 성소수자라고 한들, 〈슈퍼마리오〉가 재미없어질 수 있을까? 내 캐릭터를 흑인 동성애자 여성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몬스터헌터〉에서 빼앗을 수 있는 재미란 대체 무엇일까? 사실은 모두가 게임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OOO은 나야. 둘이 될 수 없어’라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폭력적인 게임이 모방 범죄를 낳는다는 주장에 대해, ‘게이머들에게는 판단력이 있으며, 게임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모방하고 싶어지는 건 아니’라는 유구한 방어논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201)




오랜만에 글을 쓰니 또다른 작은 성취를 이루었다는 기분이 든다. 사실 작년의 회사 생활에서 나를 가장 회의감에 들게 했던 것은,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생각에 빠지게끔 만드는 업무 환경이 아니었나 싶다. 그 때 내가 수전 손택의 다음과 같은 말을 접했더라면, 조금은 객관적으로 내 상황을 돌아볼 수 있었을까. 지나고 나서 하는 생각이니 부질없지만.


   수전은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에게 경멸을 당하는 것은 실제로는 큰 칭찬일 수 있다고

(『우리가 사는 방식』, 99)



그러니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쓴다. 다들 2022년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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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2-07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배추찜이 어떤 것일까요??? 혼자 막 생각하고 있어요!!! 무지 맛있을 듯!!! 암튼 소식 전해주셔서 넘 감사하고 제가 모르는 책을 많이 읽으셔서 또 주섬주섬. 마지막으로 올려주신 손택의 말은 제게 요즘 꼭 필요한 말이구요. 역시 인도님은 나를 위해 이 소중한 글을 쓰시게 된 것 같은 착각도 들고요, 암튼 우리 2022년은 좀 더 재밌게 살아봅시다!!! Best of luck in future endeavors!!!!!!👍 🍀

인간의과도기 2022-02-07 00:25   좋아요 0 | URL
제가 인터넷에서 본 레시피는 알배추 냄비 바닥 채울 만큼 연두 1~2큰술(없으면 국간장으로 대체) 국간장 1큰술 물 100ml 해서 코팅냄비에 올리고, 중약불에 끓여서 배추가 푹 익을 정도가 되면 먹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끓이는 시간은 체감상 최대 20분 정도 걸리고 물은 3~400ml까지 넣어서 약간 샤브샤브 느낌으로 드셔도 좋습니다. 간단한 레시피에 비해 맛이 있어서 나중에 라로님도 후기 나누어주시면 기쁠 것 같습니다.
본문에도 적었다시피, 착각은 아니시고, 제 글을 귀히 읽어주시는 분이니만큼 저도 조금 성실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팬데믹의 시절이 더 많은 무게를 얹기 전에 잠잠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올해는 조금 더 자주 뵈어요!

라로 2022-02-07 18:19   좋아요 0 | URL
연두 사서 만들어 볼게요!! 정말 넘 간단하네요.ㅎㅎㅎㅎㅎㅎ
양배추로 해도 될까요?? 냄새가 나서 안 될까요??^^;;
암튼 올해는 좀 더 자주 보자고 하셨으니 믿고 또 믿겠어요!!^^;;;

인간의과도기 2022-02-09 16:47   좋아요 0 | URL
알배추 대신 포기김치를 써도 무방한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양배추로 바꾸게 되면 아무래도 포토푀 같은 느낌으로 조금 맥락이 다른 요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식재료에 대한 식견이 부족해서 정확히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요ㅠ

양치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역시 호언장담은 하는 게 아니다. 지난주에 한 고마운 이웃님의 격려 넘치는 댓글을 보고 주중에 또 다른 글을 쓸 수 있을 거라 자신했지만, 웬걸. 결국 ‘12회 연재는 성사되지 못했고, 그 다음 주도 다 넘어가는 지금에 와서야 부랴부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지난 번 글의 제목에 기록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데, 사실 이것은 반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의 영향이다. 왜 반쯤이냐면, 당시 글을 쓸 때는 저 책을 사 두기만 하고 읽지는 않은 상황이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 훑어본 책의 앞머리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저자의 성실히 기록하는 태도에 감명을 받아서. 독서기록을 업데이트하며 책의 제목을 다시 확인해 보니 제목으로 쓰인 문장 마지막에 마침표(.)가 있다. 마침표까지가 표제인 것이다. 어쩌면, 자주 계획대로 되지 않고 처음의 뜻이 흐지부지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짧은 기록이나마 성실하게 맺음을 하겠다는 태도를 권하는 저자의 결연함이 제목의 문장에 반영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짐작해 본다.

    

 

 일기 쓰기야말로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르게 시작할 수 있는 날입니다. 어제를 되돌려 살 수는 없으니, 그저 오늘부터 기록해나가면 돼요. (p. 31)

 

목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옛말이 으레 그렇듯 일정 부분 사실을 반영한다(‘100% 사실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을 유의하자). 나는 실존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목수가 아닌 관계로 연장 탓부터 하고 보는 사람이다. 무슨 말이냐면, 책에서 언급한 5년 일기의 필요성을 절절히 공감하면서도(‘맞아, 그런 기록이 있다면 미래의 나에게 정말 소중할 것 같아!’), 작가가 추천한 구체적인 아이템이 갖추어지기 전까지는 쓸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서 차단했다는 뜻이다(‘그래도 형식도 없이 5년 일기를 시작하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그런 고로 지금 쓰고 있는 5년 일기는 20213월 하순 경부터 시작한다.

 

여하튼 내 기록이 이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아지다 보니, 남에게 보여도 괜찮은 기록과 그렇지 않은 기록을 구분하게 된다. 후자의 기록에 담긴 내용이 음습하고 반사회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나에게도 나만의 심리적인 방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일상적인 기록의 가치는 시쳇말로 요즘 SNS에서 난리 난(=알라딘 서재의 이웃들 사이에서 근자에 자주 언급되는)’ 작가인 이주윤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 나이를 먹을 만치 먹었을 테니 다른 사람들은 내 고민에 큰 관심이 없다는 실상을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니 친구를 붙잡고서 인생의 고단함을 털어놓는 쓸데없는 과정은 과감히 생략하고 일기에다 한풀이를 해보시기를 권한다.

한 줄도 좋고, 열 줄도 좋고, 오조 오억 줄도 좋다. ‘부담 없이 일기를 쓴다면 쓸거리가 넘쳐난다에 내 손목과 내 아이패드 프로와 애플 펜슬을 건다. 왜냐하면 아까도 말했다시피 살다 보면 거의 매일, 하루에도 두세 번씩 힘든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p. 124-125)

 

 

 

책은 짧은 에세이니까 금세 읽을 수 있었고, 읽고 난 소감은 뭐랄까, 일 때문에 처음 만난 사람이랑 회식 자리에서 어쩌다 2차까지 같이 남아 별 말 다 듣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을 간만에 느꼈달까(지금은 회사에서도 5인 이상 집합금지 덕분에 회식 안 한다). 요즘 출판 트렌드에서는 이 정도로 자기를 까발려도(?) 허용이 되는구나 싶다가도, 편집자랑 출판사가 사전에 손을 봤으니까 독자들이 이 정도까지 읽을 수 있는 거겠지, 라는 생각도 들고. 부정적이지는 않은 흥미로운 독서 경험이었다. 이 책을 읽고 작가의 다른 책에도 관심이 생겨 서점에서 저자의 나머지 책을 모두 샀다, 는 것이 글값에 상응하는 바람직한 결말이겠으나,

    

 

 

사실은 이전에 전자책으로 사 둔 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을 먼저 읽었다. 맞춤법 책을 이렇게나 차지게 쓸 수 있다니, 감탄하며 읽었지만 사실을 하나 뜬금없이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의 주요 독자가 아니었다.

 

나는 사실 그런 직업이 있다면- ‘문법 경찰을 하고도 남았을 사람이다.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고 했던가, 한글 맞춤법을 오래 공부하다 보니 맞춤법을 안() 지키는 사례들이 아주 거슬렸다. 문법 경찰을 사임(?)한 이유는 두 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수 없어 해서(나는 타인의 평가를 많이 의식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법 단속에 걸리면 사실 나도 다 피해나갈 수 없어서(이럴 때 동종/유사업계 사람들이 자주 쓰는 레퍼토리: “국립국어원 원장님도 띄어쓰기 다 모른대요!”). 

 

각설하고, 작가의 차진 맞춤법 설명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하나의 키워드(=딴생각)가 있었으니, 바로 주 독자의 역설(또는 목적의 역설)’이다. 읽으면서 글이나 말은 읽거나 듣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으면 발화가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그런데 어떤 책은 주 독자를 확실히 고려했는데도 주 독자로 상정한 이들이 읽지 않는다. 나는 감히 이야기하건대 그건 작가의 문제가 아닌, ‘아무 생각 없이도 잘들 살아가는예상 독자의 문제다. 세상에는 책 안 읽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마치 페미니즘 도서는 한 글자도 보지 않으면서 양성의 평등, 성별 간 화해 어쩌고 나불대는 남자들처럼. 어떤 식으로 알려줘도 알아먹을 생각을 안() 하는 오빠들에게 최소한의 맞춤법을 주입시키겠다는 것이 책의 목적인데, 과연 그 오빠들중 이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교육은 인간은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대전제로 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고, 어떤 독서는 교육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래도 한 명의 오빠가 이 책으로 구원받는 게, 공리주의적으로 보았을 때 한국 사회의 엔트로피 감소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바가 있겠지?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적어도 이 책의 작가는 잘못한 것이 없다.

    

 

 

 

이전에 알라딘 북펀딩으로 받아본 수화 배우는 만화를 작년에 읽다 중도에 놓았던 적이 있어서, 다시 읽기를 시도했고 마무리를 지었다. 배움을 통해 무엇을 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수어를 배우기 시작한 작가의 경험을 그린 일상만화인데, 가볍게 보는 중간에도 성찰하게 되는 지점이 많았다. 하긴, 나의 일이 아니라고 가볍게볼 수 있는 남의 일은 없다. 작가가 흔치 않은 됨됨이를 지닌 신실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이 책을 읽는 중에 시선을 돌린 현실에서는 장애인들이 투쟁하고 있었다. 나는 그 투쟁에 시혜와 연민의 무게 없이 온전히 연대할 수 있을까.

    

 

 

 

 

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초판이 2008년에 나왔고 2012년에 개정한 저자의 출세작을 전면 개정한 자본론입문서다. 나는 이제 자기 객관화를 대학생 때보다는 잘 한다. 이 책을 쉽게 읽고 주요 논지를 이해한 건 사실이지만, 자본론원전의 문으로 곧장 돌격할 정도의 지적 수준을 담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에서 저자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평균 수준의 상식과 이해도를 가진 학생들과 강사가 강의에서 만나는 형식을 빌려 내용을 서술하는데, 그 서술 방식이 내 생각을 엉뚱한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강의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지 실제 강의록을 바탕에 둔 것이 아니기에 강사의 말이든 학생의 말이든 저자의 목적의식을 부각하기 위해서는 결국 저자가 계획한 대로서술의 흐름이 흘러가야 한다. 강의 중간에 학생들이 내놓는 반론도, 허를 찌르는 듯한 돌발성 질문도 사실은 예측 범위 내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자본론을 처음 접하는 학생인 것처럼 캐릭터를 표현했지만 왜 내 눈에는 운동권 학생처럼 보였을까.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그건 아마도 내가 과거에 꿘이었기 때문이겠지?

    

 미국이 일으키는 숱한 전쟁도 따지고 보면 결국에는 돈벌이를 위한 것이잖아요. 군수 자본의 욕망 탓에 전쟁까지 나고.

 

이게 여러 학생중 한 명의 말이고, 말만 놓고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인데, 나는 왜 이렇게 이 말이 꿘들이 애용하는 레퍼토리의 하나처럼 보일까 궁금했던 것이다. 나빴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회사에서든 뉴스에서든 가는 데마다 부동산 얘기하고 주식 얘기 하는 데에 넌더리가 나서 그랬는지, 이런 꿘들의 대화가 과거의 흥취를 불러일으키는 신선한 맛이 있었다. ‘이거 완전 NL 아니냐고 ㅋㅋㅋ혼자서 막 이러면서 읽고.

 

 

그래도 오늘은 일기까지 써도 2주 전보다 30분 정도는 일찍 자겠다. 이번 주말에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마저 읽고 새로 찜해 둔 책들 빌려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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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3-29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과도기 님, 페이퍼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특히나 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에 대한 글은 적극 동의하며 읽었네요. 앞부분 읽으면서 그렇지, 페미니즘을 알아야 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 책을 안읽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부분도 언급해주셨네요. 하하.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 마저 읽으시고 새로 찜해둔 책들도 빌려와서 또 읽으시고, 글 또 써주세요, 인간의 과도기님! 즐거이 반가이 읽겠습니다!

인간의과도기 2021-03-29 19:39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락방님! 사실 글을 쓰면서도 페미니즘을 알고 실천하는 문제에 스스로 떳떳할지 자문도 들었습니다만^^; 계속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기록해 나가려고 합니다.
오늘은 아직 월요일이라 주말에 책을 읽겠다는 의지가 충천하네요. 덕분에 계속 쓸 수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람돌이 2021-03-29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오빠를 위한 맞춤법 글에서 그 오빠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지적에 빵 터졌네요. ㅎㅎ 문법 경찰을 사임한 이유도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네 다른 사람들이 재수없어하면 사임해야죠. 뭐 저도 그래서 사임한 것들이 좀 되는거 같습니다. ^^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에 대한 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는 저 책 제목이 너무 맘에 안들어서 안읽었거든요. 그럼 저 책 이해 못하면 난 원숭이보다 못한 지능 보유자가 되는거 아냐라는 걱정에 말입니다. ^^

인간의과도기 2021-03-29 19:43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람돌이 님.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이 10년도 더 전에 나온 책이니만큼, 직관적인 제목에 대해 지금 기준에서는 호불호가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 책의 진짜 복병은 진보적 사상에 대한 독자의 편견이나 선입견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그 부분을 감안하고 읽는다면 입문서로서 수준급 책입니다!

라로 2021-03-29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다리던 글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기다릴만해요, 늘!!👍
그런데 님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이 들었는데요, 인도님이 <문법경찰>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주시면 넘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가능한 날이 오기를. 제가 그 글을 읽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립니다. 😍👍

인간의과도기 2021-04-01 12:33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라로 님! 예전보다는 상대적으로 꾸준히 쓰는 만큼 밑천이 예상보다 일찍 바닥나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요즘인데, 그 걱정이 덕분에 잠시 가셨어요. 문법 경찰을 하기에는 현업(?)에서 손 뗀 지가 되어서 이제 경찰학교 학생도 못 될 듯 합니다ㅠ

2021-03-29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01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02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21-10-2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도님!!!! 왜 이렇게 안 보이십미꽈??? 저 매일 기다리는뎅,,힝 참다가 댓글달아요.ㅠㅠ

2021-10-28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록은 정직하다. 지난번의 글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곽재식 작가의 책을 리스트에 포함했다. 며칠 후 북플에서 알림을 받았다. 띵동(실제로 이런 어플 알람이 울리지는 않는다), 당신은 곽재식 작가의 마니아가 되었습니다. 글을 많이 쓰면 다방면의 마니아가 되는 것이 북플의 구조라는 것쯤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알라딘 서재의 어딘가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재야고수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글을 적게 쓰지만, 어쨌든 그 적은 글 중에서 반복적으로(또는 변주하여) 언급한 작가나 작품, 분야가 있을 테니. ‘저자/아티스트로 구분해 보았을 때 나는 장강명, 정세랑, 곽재식의 마니아라고 한다. 하하. 어쩜 이렇게 소름 돋게 잘 맞을까. 대놓고 이 작가를 좋아한다라느니 요새 이 작가를 많이 읽는다라느니 하는 말을 한 적은 없지만(내 성정상 앞으로도 그런 말은 다른 사람 앞에서 못 한다), 사실 말이나 글에서 개인적 취향이나 호불호를 꽤 직접적으로 드러낸 것은 아닐는지.

 

기록은 정직하다. 엑셀로 쓰는 나의 독서기록에는 요즈음의 내 독서 패턴이 보인다. 주말에 서너 권의 책을 읽기 시작한다. 주중에는 잠잠하다. 지난 주말에 읽기 시작했던 (일부) 책들을 이번 주말에 완독하고, 완독하자마자 다시 새로운 책들로 넘어간다. ‘책은 영혼의 양식이다라는 말의 연장선상에서 보자면, ‘간헐적 폭식이 최근의 패턴인 셈이다. 심지어 첫 다섯 문장은 2주 전에 썼는데, 지금과 차이가 없다. 패턴은 꾸준히 이어진다.

 

기록은 정직하다. 안 쓰면 안 쓴 티가 난다. 글은 부재(不在)함으로써 주체의 여러 사정 중 하나(나의 경우는 게으름)를 증명한다. 내 알라딘 서재의 마지막 글은 3주 전에 쓰였다. 호기롭게 다짐하지나 말걸. 한 주마다 글을 쓰겠다고 하자마자 2주를 손 놓았다. 이렇게 허언 이력에 한 줄 추가. 2주 치 글을 안 썼으니 오늘은 A4 너덧 장 분량의 글을 쓸까? 그러나 내가 취업준비생 시절에 접하고는 지금까지 금과옥조로 여기는 말이 있으니, ‘오늘의 할 일이 밀렸으면 밀린 일에 미련 갖지 말고 내일의 할 일을 해라. (워딩은 정확하지 않다.) 나는 이 말을 기준 삼아, 지난 2주간 내 안에서 들끓었으나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옛 잡념들은 잠시 뒤로 하고 그간 읽은 책에 대해 지금정리한 감상을 괴발개발로 쓰든 뭐로 쓰든 일단 쓰는 게 낫지 않겠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로봇 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은 곽재식이 쓴 인공지능 교양서다. 이렇게 간단하게 소개하면 사실 곽재식 작가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 인공지능을 다룬 책들 중 근거 없는 상찬이나 비관 모두로 기울지 않는, 드문 균형감각을 지닌 몇 안 되는 저작이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 고백하자면, 책을 산 지는 오래되었으나(무려 1년이 넘었다) 바로 읽어볼 생각을 안 했던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전자책 치고는 분량이 많다는 것, 그리고 인공지능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작가가 어렸을 적에 처음 접한 컴퓨터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어 보였다는 것.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사실 다잡았다기보다는 , 곽재식 작가의 저작 중에 아직 내가 안 읽어본 게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이 책을 잡았을 때에는 앞서 말한 이유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담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전체적인 핵심과 이어지도록 글을 엮는 솜씨는 곽재식의 특기이고, 이렇게 짜임새가 있으면서도 빡빡하지 않은 글은 분량이 어느 정도이든 읽는 데 무리가 없다.

 

한국의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곽재식이 한국 사회에서 생활의 기반을 가지고 사는 것에 감사를 표해야 한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아니었으면 인공지능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두루 엮은, ‘한국적인 제언을 접할 수 있었겠는가? 내 말이 오버라고 생각된다면 이 책 1부를 어디 도서관에서라도 잠시 집어서 살펴보기 바란다. 그의 우려 중 몇 년 지나지 않아 비극적으로 현실이 된 것이 하나 있으니. 과학 소설 작가나 과학자는 예언자가 아니고 그들의 말이 미래에 모두 실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통찰은 최소한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일곱 개의 회의는 한 중견 회사에서 일어나는 암투를 그린 회사원 소설이다. 책의 두께가 무색할 정도로 휘릭휘릭 페이지를 넘기며 재미있게 읽었다. 만약 내가 사무실로 출근하는 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 소설은 덜 재미있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로서 실감하는 영역은 지금보다는 조금 더 좁았겠지. 일본에서 나쁜 것만 나중에 들여오는 게 한국이라더니, 읽는 내내 우리 회사 이야기인 줄 알았다... 라고 하면 우리 회사 사람들이 싫어하겠지? 사실 우리 회사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입에 침을 바를 만큼 좋지도 않다. 각설하고.

 

한자와 나오키를 읽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이케이도 준이 소설에서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의 소설에서 여성은 대개 주연(남자) 또는 조연(남자)의 바가지를 긁거나, 현실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역할을 맡는다. 일곱 개의 회의에는 그나마 여성 직원들이 사건을 전개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챕터가 하나 있지만, 뭐랄까, 왠지 전형적인 남자 캐릭터에 여성의 가면을 씌워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현실에도 당연히 나쁘거나 마음이 좁은 여성이 있겠지. 그런데 그런 말을 변명으로 삼기에는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들이 온갖 역동적인 방식으로 음모를 꾸미고 사회 생활을 하고 감정을 다 드러내고 인정 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문득 과거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들었다. (과거의 전철: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의 작가(일본인)가 극우 인사임이 밝혀졌을 때 느낀 난감함)

  

  

아무튼, 떡볶이는 항상 전자도서관에서 예약 신청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는데, 마침내 나에게도 차례가 와서 읽게 되었다. 뮤지션이자 책방 주인, 팟캐스트 진행자(아직도 하시나요?)이자 작가라는, 하나만 가져도 대단해 보이는 직업을 여럿 가지고 있는 그이지만 정작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를 처음 접했음을 고백한다. (오늘은 유난히 뜬금포 고백이 많네.)

 

떡볶이의 레시피 정리라든지, 떡볶이가 좋은 이유 1부터 10까지라든지, 뭐 이런 이야기는 아니고, 떡볶이를 느슨한 매개로 한 관계와 장소 등에 관한 이야기인데, 세상에, 나는 왜 요조의 책을 진작 볼 생각을 하지 않은 거지. 시쳇말로 느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단조롭거나 지루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오버하지도 않는, 이런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글이라니... 꼭 떡볶이 같다, 라고 하면 아주 진부한 감상이겠지? 나는 피자를 좋아하니까, 다양한 재료가 어우러지는 매력이 있는 피자가 생각나는 글이었다, 라고 하면 책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감상이겠지? 여튼, 나는 저자의 바람대로 책을 다 읽은 후에 국물떡볶이를 만들어 배우자와 같이 먹었다. (무늬만) 반골 독자 치고는 저자의 말을 잘 들은 흔치 않은 사례다.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이하 근방’)는 슈퍼히어로를 주제로 한 단편을 모은 앤솔로지다. 혹시나 나 같은 독자가 있을까봐 경고. 알라딘 책 소개 페이지의 두 번째 문장을 인용하자면, 이 책은 “2015년 출간되어 화제를 모은 이웃집 슈퍼히어로(이하 이웃집’)에 이은 두 번째 슈퍼히어로 단편집이다.” 감이 아직 오지 않는다면, 이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 중 절반에는 맨 끝에 이 작품은 이웃집에 수록된 A 작품의 (프리퀄/후속작)이다.’라는 안내 문구가 있다는 사실도 같이 알려 드린다. 물론 단편집의 작품 하나하나는 고유한 재미와 완성도가 있었다는 것을 (감히) 보장하며, 어떤 작품들에서는 일종의 경이로움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나같이 순서에 굳이 집착하는 독자라면, 꼭 유념을 해야 한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자, 이웃집도 읽어야 한다. 나는 분명히 예전에 이웃집도 종이책으로 산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없으니 도서관에나 가야 할 운명이다. 이웃집을 다 읽고 나면, 처음 근방을 읽을 때 내 머릿속에 드리웠던 맥락의 안개가 걷힌 다음일 테니 틀림없이 근방을 한 번 더 읽고 싶어질 테지. 아이고, 꼼짝없이 3회차 뛰어야 할 운명이다.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는 곽재식의 소설이 읽고 싶어서 선택한 책이다. 왜 이 책이 먼저였냐면, 연애담이 책의 주를 이뤄서라기보다는(이것도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동네 도서관에 있는 곽재식의 소설(앤솔로지 제외) 중 내가 안 읽은 유일한 책이어서.

간만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한편으로 지금의 삶을 문득 되돌아보고 성찰하게 되는 이율배반적(?) 경험을 선사해 준 작품들이었다. 성찰은 아래와 같은 대목에서 했다.

 

 

 

어쩌면 결혼이란 계속해서 고난과 역경이 찾아오기만 하는 그런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래도 한번 저질러보려고 한다. 아직 어린 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며 설레는 마음만으로 혼자서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에 그대로 밤을 지새울 수도 있었던, 그런 그녀와 결혼을한다는 것은, 뭐 하여간 대단한 행운이니까. 그리고 그 정도 행운이 주어져 있다면, 너와 함께 겪는 고난은 언제나 해볼 만한 도전이고, 너의 손을 잡고 같이 가는 역경은 항상 새로운 모험이지 않겠냐고

(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p.363)   

 

 

 

 

그리고 문제적 제목을 가진,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나에게 요새 무슨 책 읽냐고 묻는 사람은 지나가다가 님 정말 잘 생겼네요라고 말하는 사람의 수만큼 드물지만(그냥 없다는 얘기다), 그래도 만에 하나 진짜로 묻는다면 제목을 언급하기 참 조심스러워지는 책. 보통 궁금하지 않은데 무슨 책 읽냐고 나에게 물어볼 정도면 높은 확률로 연장자일 텐데, 그래도 나에게는 졸지에 물은 사람을 저렇게 추하게만들고 싶지는 않은 최소한의 사회생활 감각이 있다.

 

간만에 책을 읽으며 헛웃음을 터뜨리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작가의 올곧음과 유머 감각과 풍자 정신... 하여간 그 모든 것들이 기분 나쁘지 않은 직설로 툭툭 튀어나와, 전혀 생각도 않고 있던 부분에서 터지고 말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2년이 지났고, 나는 놀랍게도 정규직이 되었다. 그전에는 삶이 불안정하게 팍팍했다면, 이젠 안정적으로 팍팍했다. (「SF 클럽의 우리 부회장님」 中)

 

저번에 여기서 마셨던 걸로 가져와봐.”

젠장! 어마어마하게 진부한 말인데 진짜가 하니까 다르구나!

(「SF 클럽의 우리 부회장님」 中)

 

 

세상에서 제일 안 웃긴 일이 혼자 웃다가 자기가 웃은 이유를 남에게 처음부터 설명하는 일이다. 그런 안 웃긴 일 대신 할 수 있는 일은, 이 책 한 번 잡숴보라고 권하는 것뿐이다.

    

 

지금 이 글을 마치고 자리에 누우면 다섯 시간도 자지 못할 거다. 괜찮다! 나는 새벽까지 넷플릭스 보다가 두 시간 잔 적도 있으니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고 오늘은 다섯 시간 후면 이미 태양이 떠 있을 거다! 젠장!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까지 쓰는 걸 보니, 조선 태종이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놓고는 이거 적지 마라라고 한 말까지 곧이곧대로 기록해 놓은 사관 같기도 하다. 먼 훗날 이 글을 보면 한때 새벽까지 누구에게 보일지도 모를 글을 쓰던 때가 있었다고 잠깐 회고를 하겠구나. 기록은 이렇게 다시 한 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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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3-15 15: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님 정말 글 잘 쓰시네요!!! (누가 저에게 안 물어봤지만, 😅) 암튼 약속(?) 못 지킨 것은 용서해드릴테니 이번 주 하나 더 써줘요. (빚쟁이 된 듯한? 나는 빚쟁이였나??🤔)👍👍👍

인간의과도기 2021-03-17 23:10   좋아요 0 | URL
좋은 빚쟁이(?) 라로 님 덕분에 이번 주에는 가볍게 한 꼭지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남깁니다! 항상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