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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에서 중요시하는 업무 능력 중 하나는 글쓰기이다. ‘글쓰기’라고 하니 너무 일상적이어서 업무의 연장선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표현이 없을까? ‘문서 작성 능력’ 정도가 좀 더 정확하겠다. 문서 작성은 글(문자)로 시작해 글로 끝나는데, 왠지 글쓰기와는 차원이 다른, 별도로 익혀야 할 새로운 능력 같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글을 잘 쓴다’는 평을 주위에서 곧잘 듣는다. 겉으로는 겸손하게 ‘아유, 아닙니다, 아직 더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라고 답한다. 속으로는 짐짓 뿌듯해 하며 생각한다. 정말 그런가?

  1n년 전에는 그랬는지도 모른다. 대학 입학 전까지 갈고닦은 온라인 논평 활동(=키보드 워리어질) 덕분인지, 별다른 고민 없이 글이 술술 써졌다. 지금에 와서야 현학적이라고 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그 당시 ‘내 기준으로는’ 나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좋기까지 한 결과물이 노력하지 않고도 쏟아졌다.

  ‘과거에 취한 자는 죽은 자다’라고 어떤 유명한 프로게이머가 얘기했다던가. 나는 정확히 그의 선언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업무 외적으로 글을 쓴 지도 오래 되었으면서 여전히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 말야...’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택도 없는 것을 안다. 아니까 오늘부터 뭐라도 써 보려고 한다. 이것도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언제 소리 소문 없이 그만둘지 모르지만.

  얼마 전 회사에서 신규직원 대상 교육을 진행했다. 나이가 들었는지, 아니면 아직 신규라 그런지, 이제는 자기계발 주제의 강의도 온순히 잘 듣는다. (아니면 대놓고 ‘노오력’이니 ‘아프니까 청춘이다’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지 않는, 최근 변화한 자기계발 분야 트렌드 덕분인지도.)

  얼마 전 강의인데도 대부분을 까먹었다.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내용이 있는데, ‘필요’와 ‘중요’의 구분이다. 강사가 든 비유는 이렇다. 세상에 필요한 것은 많다. 당장 물이 그렇다. 물은 절대적으로 우리 삶에 필요하다. 물 안 마시면 얼마 못 가 죽으니까. 그런데 ‘중요’는 ‘필요’와 다른 것이다. 이미 목마름이 해결된 사람에게도 물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지만, 더 이상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물은 필요한 것이니까 너는 물을 마셔야 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물 먹이는 짓이다.

  내가 까먹은 대부분에 물 비유의 결론도 있는데... 회사의 일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은 당연하니 누군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하라고 했던가? 강사님 죄송합니다. 좋은 강연이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데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왜곡의 소지를 남겼네요.

 

  다시 ‘글’에 대해 생각해 본다. 회사에서 업무를 진행하는 데 있어 ‘글’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 내부에서 필요한 글을 쓰는 능력의 계발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글과 능력이 퇴근을 함과 동시에 내 삶에서는 더 이상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물론 출근을 하며 다시 중요하다고 생각해 보려 애를 쓰긴 한다).

  필요하지만 내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글을 쓰느라, 누군가가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나에게 중요한 글을 쓸 기회를 생각하지 못하지는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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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글을 잘 쓰지 못하는 내가 자문자답해도 될까?

  두 가지가 같이 간다. ‘어휘’와 ‘구조’다.

  사람들은 흔히 창의성이 누구나 생각하지 못했던 비범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창의성은 이미 있던 것을 언제(어휘), 어떻게(구조) 가져오느냐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주장의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해, 글을 아주 잘 쓰는 이정모 박사님의 글 일부를 인용한다.

 

 

 

 

 

 

 

 

 

 

 

 

 

 

 

  “창의성이란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슨 괴상한 생각을 해내는 게 창의성이 아니다. 해 아래에 새로운 것은 없다. 창의성이란 있는 것들을 이렇게 엮고 저렇게 편집하여 새로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창의성의 근본 바닥에는 기억된 지식이 있다. 기억이 없으면 창의성도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창의성」,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중

 

 

  글의 앞부분에서 나는 내가 글을 잘 쓴다는, 주위의 견해를 빙자한 자기자랑을 인용한 적이 있다. (자의식이 항상 과잉 상태인 사람에게 칭찬의 말은 (어쩌면) 평생토록 기억된다. 그렇기에 ‘과거에 취한 자’의 비극은 앞으로 계속될지도.) 이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한데, 내가 회사 업무를 하면서 글에 써야 될 어휘와 구조를, 보통의 신규직원들보다는 조-금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럼 그 어휘와 구조를 어디서 배웠을까? 깜으로? 아니고, 역시 보통의 신규들은 굳이 안 했어도 될 경험을 하면서 체득한 것이다. (동기들 모임에 가 보니 내가 약간 중고신인처럼 느껴졌다)

 

  회사 사람들에게는 어쩌다, 옛날에 시를 쓴 적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마치 앞으로 시를 영영 쓰지 않을 사람처럼.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시는 어렵다고. 시를 쓰거나 썼다고 이야기하면 들을 수 있는 흔한 반응이다.

  흔한 반응은 괜히 흔한 반응이 아니다. 요즘 시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의외로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에게서도 나온다. 아, 옛날 시는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요즘 시는 난해해. 어려워.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해...

  일부는 사실이다. 두 번 세 번 읽어도 안 읽히는 시가 있다. 그런데 그게 온전히 그 개별 작품의, 또는 시라는 장르 자체의 잘못이냐라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독자 탓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 시대가 어느 시댄데 독자 탓을 하나, 하기를. 하나 정확히 해 두자는 것이다. 시의 스펙트럼은 넓다. 여기서의 ‘스펙트럼’은 대유에 가깝다. 가시광선은 눈에 보이니 좋고 X선은 오래 쬐면 인체에 유해하니 나쁜가? 시를 일직선상으로 줄 세울 수 없다는 점에서 시라는 장르에 보다 더 적합한 대유는 ‘프리즘’일지도 모른다. 여튼.

 

  다시 ‘어휘’와 ‘구조’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시의 어휘는 난생 처음 들어본 것이 의외로 별로 없다. 그럼에도 어렵게 읽히는 시들이 있다면, 그 문장과 행, 연의 구조를 유심히 살펴보길 바란다. 모 시인은 초기에 저도 모르는 새 ‘미래파’로 묶여 난해하다 소리를 듣는 게 그렇게 싫었다고 한다. 나는 그 시인에 대한 평론을 굳이 찾아보지는 않고, 시인의 시집을 주루룩 사서 주루룩 훑었다. ‘필’이 꽂히는 몇 편의 시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이 집에 자주 들르는 이유도 커다란 유리창 때문이라고 말했지. 망원경의 성능이 좋아질수록 밤하늘에 나타나는 별들도 많아지니까.

 

  뭐? 우리 동네에 커피 전문점이 부쩍 많아진 이유가 커다란 유리창 때문이라고? 백 년 전 젊은이들에게 유리창은 모던하고 신비로운 물체였어. 세상의 모든 골목에서는 유리창을 깨뜨린 아이가 혼쭐나는 날들이 백 년 동안 반복되었지 유리창은 있으나 없으나 똑같을 것 같은데.

 

  똑같다고 말할 때, 너는 잠깐 이 세상에서 가장 순진한 얼굴이 되었다. 이 바보야, 이렇게 환한 커피 전문점에서 유리창이 밤을 밀어낼 때, 어둠은 거울 속처럼 너의 얼굴을 가져간다.

 

  커피를 마시며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 이번엔 꼭 시험에 합격하여 공무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섯 시 정각에 퇴근하는.

 

  여기에 앉아 있으면 저녁 여섯 시 무렵부터 시작되는 마술을 볼 수 있지. 세상의 모든 커피 전문점 2층의 천장에 박힌 알전구들이 유리창 너머 허공 속으로 한 개씩 한 개씩 늘어서는…… 놀라운 광경을. 나는 저녁 여덟 시에 청색 하늘에 떠 있는 전구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친구를 한 명씩 한 명씩 잃어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유리창 너머에서.

 

  사람들은 백 년 동안 한결같이 유리창을 사랑했다는 생각이 들어. 유리창을 통과하여 찻집으로 날아든 하얀 새를 보면서, 유리창이 가짜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새가 가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마주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어.

 

 

 

 

  시를 열심히 쓰고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에 이런 시를 보았을 때는, 너무나도 좋은 감정이 생기는 것과는 다른 한편으로 ‘나는 이렇게 시를 절대 쓸 수 없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시와 거리가 생겨서인지는 몰라도, 좋은 시는 좋은 시대로 남겨두자는 마음이 먼저다. 그러고 보면, 시 합평 수업에서 어떤 선생님은 ‘너는 너대로 써야지’라고 했다. 원론적이면서 맞는 말이다.

  나대로 쓰는 것, 나다운 것이 무엇일지는 다른 문제이다. 나는 어쩌면 입사 준비라는 시기를 거치면서 시의 어휘와 구조를 많이 잊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게 중요한 것인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다. ‘나의 이야기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형식’이 시인 듯 보였지만, 사실 나의 이야기란 입사하고 일상을 살아내는 와중에 자연스레 탈각될 그 정도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형식에 대한 고민은 아직도 있다. 하다못해 이러한 글을 공개된 곳에 올리는 문제에도 여러 가지 생각이 딸려 있다.

 

 

 

 

 

 

 

 

 

 

 

 

 

 

 

  마음이 꺼지지 않을 당분간은 작은 시집을 간간이 읽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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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즉흥적으로 떠올린) 이 글의 제목은 ‘글 쓸 거리만 많고 본격적으로 쓴 글은 없어 우리 동네 도서관에 대해서라도 쓰자는 마음을 먹고 쓴 글’이었다. 사람들은 첫 문장을 읽고 생각할 것이다. ‘개그 센스가 되게 특이하네’. 또는 ‘되도 않는 개그 치네’. 내가 대학 다니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의 변주다. ‘ㅇㅇ야(ㅇㅇ선배). 너는 안 웃겨(요).’

 

  여튼, 처음에 떠올린 제목은 나의 심경을 잘 반영한다. 책과 글에 할애할 시간은 적은데 뭐라도 읽고 쓰고 싶고, 그 와중에 무엇을 쓰게 된다면 잘 쓰고 싶고. (날로 먹겠다는 심보 아니냐?) 아니, 책 한 권을 읽고 어떤 식으로든 쓰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그 책에 대한 인상이며 내용이며 다 잊는다는 그간의 경험칙상, 뭐라도 써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이 들자 나중에는 글쓰기가 숙제처럼도 여겨졌다. 숙제, 숙제라. 매 시간마다 제출해야 하는 숙제를 거의 안 해서 F 받고 결과적으로 졸업이 한 학기 늦어지도록 만들었던 졸업필수강의가 생각난다.

 

  그렇다. 숙제는 안 해 가면 페널티를 받지만 자발적인 글쓰기는 무기한 연기할 수 있다. 무기한 연기의 끝은 대부분, 경험칙상,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다. 아무리 내가 아마추어지만, 이대로 백년 천년 아무 것도 안 쓸 수는 없다. 글쓰기의 감각은 계속 갈고 닦지 않으면 퇴화되니까. (어떤 강의의 숙제든 성실히 해 가고, 글쓰기 숙제면 심지어 즐겨서 했던 1n년 전의 글이 때때로 지금의 그것보다 더 나아 보인다.)

 

 

  최근에 읽은 책, 혹은 읽으려고 빌린 책을 일별해 보았다. 마음 속 판단: ‘주제적인 측면에서 유사성 없음. 큰 주제로 글쓰기는 못 함’. 그렇다면 이 책들을 가지고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오래 생각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발상의 전환. 내용이 아닌 형식을 보자. 이 책들은 다 어디서 왔나? 내가 아껴 마지않는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도서관 이야기도 언젠가는 쓸 것이었으니, 오늘은 간략하게라도 적자.

 

 

  우리 동네 도서관을 내적으로 아끼는 가장 큰 이유는, ‘면학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아서이다. 무슨 소리일까? 열람실 어디를 보아도, 취업이나 자기계발을 목적으로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도서관에서 아예 금지를 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 도서관 열람실에서는 수험서를 볼 수 없다.

 

  더 많은 주민, 특히 조용히 공부할 환경이 필요한 이들에게 개방되어야 할 ‘공공기관’으로서의 책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얼마 전까지 ‘취준생’이었던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든다. 한편, 한 사람의 독서인의 입장에서는 ‘독서 환경을 조성하고 독서 문화를 보급하는’ 도서관 본연의 모습을 갖춘 곳이 의외로 드물지 않나, 그런 측면에서는 오히려 반길 만한 곳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취준생이었을 때에도 오롯이 독서를 위한 도서관이 있어 반가웠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서 취업 준비를 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생각이다.

 

  이 도서관에서 나는 비로소 ‘사회에서 탈락한 잉여존재’가 아닌, 한 명의 오롯한 ‘독서인’이 되는 것 같다. 불완전하고 흠 많지만 나름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책 읽는 사람.

 

 

  우리 동네 도서관은 반납일까지 책을 반납하지 못하면 두 가지의 후속조치를 선택할 수 있다. 그냥 연체한 일수만큼 책 못 빌리기. 또는 연체한 일수*책 권수*하루당 연체료를 계산해서 연체료를 내고 책 빌리기. 나는 후자를 주로 선택한다. 책 욕심이 없어지는 시기에는 전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이 글을 쓰는 오늘(9/28)은 반납일을 하루 넘긴 시점이다. 하루 연체료*3부터 시작되겠다.

 

 

  3주 전에 빌린 책은 총 세 권이다. 『헌법 쉽게 읽기』, 『소년의 레시피』, 그리고 제목을 밝힐 수 없는 한 권. 제목을 못 밝힌 이유는 뒤에서 적을 것이다.

 

 

 

  『헌법 쉽게 읽기』는 원래 대출 계획이 없던 책이었다. 그냥, 한때 공시생이었던 나의 눈에 띄어 빌리게 되었다.

 

 

  다른 시험의 법 과목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되지만, 공무원시험에서의 법 과목은 처음부터 끝까지 ‘암기’가 성패를 좌우한다. 조문도, 판례도, 그 배경을 알면(‘이해하면’) 좋겠지만 그 ‘이해’도 나중은 다 ‘암기’를 위한 것이고, 그렇게 암기된 것은 시험에서 정오를 빠르게 판별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르게 말하면, 조문이나 판례를 둘러싼 역사적, 사회적 맥락은 소거하는 편이 수험 공부에 도움이 된다. 사실은 다들 그렇게 하고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은 그에 대한 비판만 책 한 권이고(『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무엇이 문제인가?』, 김선수 대표 집필, 도서출판 말, 2015), 지금은 ‘사법농단’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고 있지만, 공시생에게는 그저 ‘위헌정당해산심판청구의 유일한 판례’로 기억될 뿐이다.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극복의 가능성이 있지만, 선발 시험이 공직자 또는 공직후보자를 맥락맹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구조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가질 만하다.

 

  한편으로는 공시를 준비하면서 법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도가 높아졌다. 법은 쓰는 말 자체가 어렵다. 그렇다 보니 정보의 불균형이 극심하게 일어나는 분야이기도 하다. 소수의 ‘법 기술자’들이 보편적인 법 감정을 무시하고, 그것을 ‘니네가 법을 잘 몰라서 그래’라고 합리화하는 풍경을, 그간 많이 봐 오지 않았나. 아는 게 곧바로 힘이 되지는 않지만, 힘의 가능성은 품게 할 수 있다. 공시생이 아닌 지금의 처지에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헌법 쉽게 읽기』는 제목에서도 쉬이 짐작할 수 있듯, 대한민국 최고의 법이지만 이것이 우리 실생활과 어떤 식으로 연관을 맺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헌법 교양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장과 제2장의 조문 중 일부를 그 조문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례와 함께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완독한 지 3주 가까운 시간이 흘러, 책을 읽었던 당시의 감정을 정밀하게 복각하는 것은 어렵다. 아래는 그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방점을 찍었던 사례 두 개.

 

 로스쿨 입학을 준비하던 엄 모 씨는 각 학교의 입학 전형을 살피던 중 이화여자대학교의 입학 전형을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남성인 그는 이화여자대학교 로스쿨에 지원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로스쿨의 정원은 100명인데, 매년 100명의 여성만 이화여자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할 수 있고 그만큼 남성의 자리가 줄어든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엄 모 씨는 이화여자대학교 로스쿨 입학 전형이 남성의 평등권을 침해했다며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엄 모 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평등권의 침해 요소는 있지만 전체 로스쿨 정원 2,000명에 비해 이화여자대학교 로스쿨의 정원은 100명으로 비율이 매우 낮고, 엄 모 씨는 이화여자대학교 외에도 나머지 1,900명의 정원에 지원할 수 있기 때문에 기본권 침해 정도가 매우 미미하다고 판단했다(헌재 2013.5.30. 2009헌마514). 평등권을 침해받기는 했지만 참을 만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헌법이 규정하는 평등은 절대적 평등이 아닌 상대적 평등이다. 모든 차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합리적 근거가 있는 차별은 가능하다. (...) 차별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합리적 근거는 ‘적극적 우대 조치Affirmative action’다. 불평등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일시적 불평등 조치는 불평등이 아니라는 것이다.

(...) 매년 남성에 못지않은 비율로 여성 법조인이 배출되고 있지만 2017년 9월 현재 대법관 13명 중 여성은 3명, 헌법 재판관(현재 1명 공석) 8명 중 여성은 1명에 그친다. 고위 법관과 검사 사정도 비슷하다. 이처럼 여성의 지위가 현저히 낮은 법조계에서 25개 로스쿨 중 1곳, 2,000명의 로스쿨 학생 중 100명을 여성에게 부여한 것을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 주장하기는 어렵다.

 

(p.82~85, 「여성만 들어갈 수 있는 로스쿨은 차별일까?」 중)

 

  ‘역차별’ 운운하는 ‘일부’ 남성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보장될 것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수가 많아지면 거기에만 ‘역차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교사, 공무원, 법조인, 등등. 노동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직군에 여성 종사자 수가 많다고 거기에 남성도 더 뽑아달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를 자주 보는가? 그 ‘일부’들이 자주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빈곤의 여성화’이다. 참고로 빈곤의 여성화는 1970년대부터 제기된 개념이다.

 

 

  다소 거북스러운 표현이지만 “군대에서 죽으면 개죽음”이라는 말이 있다. (...) 군대에서 죽었을 때 적정한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것은 헌법 규정 때문이다. 헌법 제29조 제2항은 군인 등이 전투나 훈련 중 사망해도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매우 특이한 조항이다. 같은 조 제1항이 국가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하고 있는데, 바로 다음 항에서 군인은 배제하기 때문이다. (...)

  유독 군인만 국가배상청구권에서 배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헌법이 형식에 어긋나면서까지 군인의 국가배상을 직접 제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의문은 헌법 제29조 제2항의 연혁을 살펴보면 쉽게 풀린다. 헌법 제29조 제2항은 1972년, 제8호 헌법에 처음 도입되었다. 제8호 헌법은 소위 유신헌법이라 불린다. (...) 1972년이라는 시대적 배경도 중요하다. 당시는 1965년부터 시작된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 막바지였다. 이듬해인 1973년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한국은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미국의 상당한 경제원조를 받는 등 경제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한국의 베트남 파병의 결정적 계기가 된 브라운 각서의 주요 내용은 미국의 경제원조였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베트남전쟁 상이군인이나 전사자의 유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국은 베트남에 32만 명에 달하는 군인을 파병했다. 이 중 5,000여 명이 전사했고 1만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들이 모두 국가배상을 청구한다면 적지 않은 금액을 지출해야 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한 직후인 1967년, 국가배상법을 개정해 군인 등의 국가배상을 제한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해당 조항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대법원 1971. 6. 22. 선고 70다1010 전원합의체 판결). 헌법재판소가 1988년 개소開所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대법원이 위헌 법률 심판을 맡고 있었다. 대법원의 결정까지 무시할 수 없었던 박정희 정권은 고민에 빠졌지만 곧 묘수를 찾아냈다. 법률이 헌법에 위반된다면 법률 자체를 헌법에 넣어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헌법이 헌법을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헌법 제29조 제2항(당시는 제26조 제2항)은 1972년, 유신헌법과 함께 헌법에 들어오게 되었다.

 

(p.240~244, 「군대에서 죽으면 개죽음인 이유」 중)

 

 

  물론 군인의 부상이나 사망 시 보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관계 법률이 따로 있다. 하지만 그 법률을 통해 보상을 받으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는 불가능하다는 것. 이유는 위에서 인용한 대로, 유신 그 분 덕분.

  

  왜 나는 이 부분에 방점을 찍었을까. 오늘은 일단 개인과 구조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할 계획이 있다는 것만 밝혀둔다.

 

 

『소년의 레시피』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처음 보고, 한 번 읽어봐도 괜찮겠다 싶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사지는 않고,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렸다. 다행히 도서관에 소장본이 있었다.

 

  지은이는 남편, 그리고 아들 둘과 함께 살고 있다. 지은이는 요리를 못 한다. ‘안’은 의지 부정이고 ‘못’은 능력 부정이라고 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다. 처음에 ‘안’이었다가 나중에 ‘못’이 된 것도 아니고 그냥 처음부터 ‘못’이었고 쭉 ‘못’이다. 집안의 식사는 처음에 줄곧 남편이 담당해 왔고, 이제는 첫째 아들 ‘제규’가 지은이 집안의 저녁 식사를 책임진다.

 

  ‘제규’가 저녁 식사를 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무의미한 ‘야자’를 하기가 싫었다. 둘째, 자신이 저녁 식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단순하지만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제규’는 고등학교 입학 세 달만에 야자를 그만두고 집안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일을 하게 된다.

 

  여기까지 읽는데 뭔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야자를 빠지겠다는데 그 단순한 이유를 듣고 선뜻 허락한 담임선생님도 그렇고, ‘제규’가 무슨 일을 하겠다고 하든 마음속으로부터 인정하고 공부를 닦달하지 않는 지은이와 지은이 남편도 그렇고. 내가 너무 갇힌 세계에서 모범생처럼 살다 보니 이러한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한 상상력도 없어졌나 싶어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끊임없이 다른 사람, 특히 내 아이와 비슷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다른 아이와 특질이나 성격을 비교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해서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나는 왜 내 고유한 육아 철학이 없을까’ 하고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가정을 내내 부러워하고, 내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하고 그랬다.

 

  문장은 짧고 평이하면서 나름의 탄력이 있다. (누구의 글처럼) 늘어지지 않는다. 그 짧은 문장들 사이로 지은이의 유머 감각이 내비친다. 정도가 일관된 나머지 ‘일상이 너무 휙휙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뭐 내 일상도 나한테나 의미 있지 구구절절 쓴다고 남이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다만 레시피 부분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제규’의 오리지널 레시피 노트가 이런 식인지, 아니면 ‘요알못’인 지은이가 ‘제규’를 인터뷰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축약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재료의 ‘분량’이 없다. 이건 꽤 치명적이다. 이러면 레시피로써의 기능을 못한다.

 

  여하튼 ‘제규’는 꽤 멋진 사람이다. 친구들과 다 놀러 다니면서도, 자신의 요리에는 집중할 줄 아는 그 모습도 그렇고, 요리에서 ‘자기만족’과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을 모두 발견한 것도 그렇고. 나는 그맘때쯤 야자는 야자대로 하면서 집이 학교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학교 식당에서 석식 안 먹고 굳이 집까지 와서 라면 끓여먹고 그랬었는데. 철딱서니가 없었다.

 

 각설하고, 글 전반에 흐르는 풍요롭고 밝은 기운이 플러스(+)가 되었다가, 레시피의 ‘비실용성’ 때문에 마이너스(-)가 되어서, 이 책을 최종적으로 구입할지 안 할지는 ‘잠정 보류’ 상태다.

 

 

  요리 얘기가 나왔으니 내 개인적인 이야기로 사족. 어제(9/27)는 요새 체력적으로 힘들어하는 배우자와, 요새 부쩍 고집이 세진 아이가 같이 먹을 수 있도록 점심으로 나주곰탕을 했다. 고기와 향신 채소를 물에 넣고 한 시간 20분을 끓이면 된다, 는 부분만 기억한지라 정오가 다 되어서야 장을 봐 왔는데, 문제가 있었다. 핏물 빼는 시간이 1~2시간이라는 부분을 내 뇌가 선택적으로 기억 탈락시킨 것이다. 다행히 아주 늦지는 않게 곰탕을 끓여 세 식구가 사이좋게 먹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주곰탕의 꽃말은 ‘오래 끓인 고깃국’이다. 배우자는 ‘고기가 부드러워서 좋다’고 이야기했다. 고기야 뭐... 어떻게 먹어도 맛있을 테니까(배우자와 나 모두 결혼 전엔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결혼 후에는 둘 다 이상하다 싶게 고기를 자주 찾는다. 덕분에 아이도 고기 채소 가릴 것 없이 다 잘 먹던 시기를 지나 채소는 뱉고 고기만 찾아 먹는 아이로 크고 있다).

 

 

  제목을 밝힐 수 없는 책은 SNS에서 언급이 된 것을 보고 도서관에서 빌렸다. SNS에서 비혼모 당사자 이야기가 화제였던 때였다. 이 책은 그 흐름에서 언급되었다. 비혼모 당사자 이야기를 다룬 참고사례라고.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읽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서문을 쓱 들추어보고는, 읽기를 포기했다.

 

  이 어린 친구들이 제대로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줄긋기입니다. ‘키스, 성관계, 동거’와 같은 항목은 ‘짜릿함, 행복’ 같은 내용하고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임신, 출산, 불행’ 같은 내용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더욱이 ‘에이, 그런 일이 설마 나한테 있을라구’ 하고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소녀들은 그런 실수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솔직한 성관계를 가졌다는 실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사소한 행동 하나가 몰고 올 수 있는 폭풍 같은 결과들에 대해 무심했던 것이 실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던 냉혹한 현실들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이 자신의 행동과 결과에 책임질 줄 알고, 인간 경시 풍조에 물들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나가는 행복한 사회의 주역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엮은이-

 

(p. 4~7, 「책머리에」 중) 

 

 

  SNS에서 본 비혼모 당사자의 이야기 중에서 인상적인 지점이 하나 있었다. 비혼모 공동체와 페미니즘은 사실 친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고. 책임이 일방에 과도하게 지워지고, 그 책임을 어떤 식으로 수행해 가든 지속적으로 지탄과 조롱, 몰이해의 대상이 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것조차 버거운 개인은 어떤 지점에서는 사회적 맥락에 어두워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개인을 돕고 그 개인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맥락맹인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내가 책을 읽지 않은 이유다.

 

  이 책의 초판은 15년 전에 나왔고, 개정판이 나온 지도 10여 년이다. 비성년 임신 문제에서 ‘남자 책임’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다. 지금은 그때보다야 나아졌겠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후퇴한 것도 같고,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서울지방조달청 옆에 있는, 여성가족부 산하 양육비이행관리원이 문득 떠오른다. 그 기관의 일은, 잘 진행이 될까. 책임을 지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치는 전(前) 양육자들을 지긋지긋하게 보다 지친 실무자들이, 어느 순간에 맥락맹을 자처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새벽에 두 시간이 넘도록 글을 쓰다 잠을 잤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오후에 글을 다시 쓰니 글이 더 길어진다. 이러다 글을 매듭지을 수는 있을까? 오늘이 지나면, 연체료가 두 배가 된다. 예약도서가 어제 도착했다는데, 빨리 책을 반납하자. 연체료를 낸 다음, 도착한 책을 빌리자. 새 독서를 시작하고, 적당한 시간을 둔 뒤 또 새로운 글을 쓰자.

 

 

 

  그나저나 이렇게 긴 글을, 누가 금요일 저녁에 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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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9-28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제가 읽습니다! 언제나 과도기님을 지켜보고 기다리고 있는 사생팬 1번이요!

인간의과도기 2018-09-28 23:22   좋아요 0 | URL
긴 글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syo님의 댓글이 저로 하여금 다음에도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끔 합니다. 주말 잘 보내시기 바라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알라딘 서재에서의 글쓰기 활동을 중단하고자 합니다.

사정이 회복되면 활동을 재개하고자 하나, 빠른 시일 내에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친구분들의 좋은 글에 '좋아요'를 찍는 정도는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제 자신이 글이나 댓글을 쓰지는 못할 것입니다.

본래 개인적인 사정은 글에서 어느 정도 밝히려고 했으나, 비극 포르노를 제공한다는 생각이 들어 밝히지 않습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제 서재를 찾아주신 분들께 그간 감사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는 일 모두 잘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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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2-29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ㅠㅠㅠㅠ 얼른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017-12-31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관광의 섬 제주도의 업장들 중에는 노키즈존이 그렇게나 많단다. 관광객들 중에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관광객도 적지 않을 텐데, 그들을 거르고도 이럭저럭 장사가 잘 된다는 뜻이리라.

  이런 현실을 감안해, 제주도 여행을 계획한 한 양육자는 아이를 둔 부모들은 헛걸음 방지 차원에서,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맞는 ‘맞춤형 정보’ 검색 차원에서 참고할 수 있도록 ‘제주도 노키즈존 리스트’를 만들어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링크). 혹여나 엉뚱한 업장이 리스트에 올라 불의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리스트 작성자는 해당 업장에서 ‘직접’ ‘최근에 올린’ 노키즈존 공지를 하나하나 확인, 대조한 후에 리스트를 뽑았다. 9월 초의 일이다.

  이 ‘노키즈존 리스트’가 새삼 논란이 되었다. (국민일보 기사) (한국일보 기사) 논란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왜 노키즈존으로 자기 업장을 운영하려 하는 사람들의 가게를 ‘블랙리스트’화하느냐?” (‘리스트’에 올라간 업장 중 한 곳의 주인이 리스트 작성자에게 항의한 데서 논란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출처를 찾을 수 없어 ‘충분히 그러했을 수도 있겠다’라는 가능성으로만 남겨둔다.)

  배우자와 나는 이 논란을 접하고 동시에 탄식했다. “하나만 해라 하나만.”

 

  사실 나는 이것도 양육자들이 꽤 많이 양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키즈존 업장들이 자신들의 운영 방침을 신속히 바꿀 가능성은 멀어 보이니(한국일보 기사의 여론조사 결과를 참고하자면, 아직까지 노키즈존 반대보다는 찬성 의견이 더 우세하다), 노키즈존이라는 기상천외한 형태의 차별을 전면 반대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우선 ‘문전박대’당하는 경험이라도 사전에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현실적으로 부담이 덜한 선택지이다.

  그래서 노키즈존을 노키즈존이라 불렀사온데, 노키즈존이 아니라 하시면… 이것을 자영업자 혐오라 말하시면…….

  아, 노키즈존 업장 사장님들, 혹시 이겁니까? 내 맘에 들지 않는 부류의 손님군을 내 손으로 직접 쫓아내는 데서 오는 쾌감을 경험하고 싶어서? 그래서 양육자들로 하여금 “넌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라는 대사를 말하게끔 하고 싶어서? 노키즈존이 차별인 건 알겠는데(남들이 차별이라 말하니까), 대놓고 ‘나는 차별주의자다’라는 이미지가 붙는 건 싫어서? 그래서 ‘은밀하게 위대하게’ 양육자들을 차별하고 싶어서?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로 흔히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대비 또는 예측한다’라는 ‘과거-현재-미래’론을 든다. 과거보다 진보한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의 한 단면을 보면, 그 시대의 내적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종종 우스워진다. 그렇지만, 각종 차별을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그 차별이 기괴한 논리로 뒷받침되던 시절, 이제는 지나간(혹은 지나갔다고 믿고 싶은) 시절을 역사 기록의 형태로 다시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그때 그 사람’들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우스운 모습, 과거의 과오가 현재에도 다른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의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역사 공부의 목적 중 하나다.

 

 

 

나는 작금의 노키즈존 논란을 접하며, 최근 읽은 『소비의 역사』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흑백분리가 ‘합법’이던 시절의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겨우 반 세기 전쯤 이야기.

 

 

 

  자유노동자가 된 흑인들은 이제 상품과 소비의 세계에서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상점 같은 소비 공간은 일터나 가정보다도 훨씬 더 백인과 마주칠 확률이 높은 곳이었다. 그런데 백인들은 흑인들이 자기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흑인을 교묘하게 배제함으로써 소비의 장에서까지 그들을 소수자로 남겨두려 했다. 이를 위해 백인들은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이라는 전략을 내세웠고, 이는 노예해방 후 이루어진 차별의 근본적인 기제가 되었다. 말이 좋아 분리평등이지 실제로는 분리와 불평등을 조장하는 수많은 인종차별적 규범과 법령이 만들어졌다.

  흑인과 백인은 같은 숙소 건물에 묵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고, 극장에서도 백인은 1층, 흑인은 2층에 완전히 따로 앉아야 했다. 화장실이 별도로 만들어졌던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음수대에서조차 흑인은 ‘유색인종 전용colored only’이라고 쓰인 수도꼭지만 사용할 수 있었다. 버스나 열차에서는 흑인용 좌석이 분리되어 지정되었을 뿐 아니라, 병원에서조차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대기하며 백인 환자의 진료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중략) 이런 식의 차별은 심지어 죽어서까지 계속되었다. 흑인은 백인과 같은 묘지에 묻히는 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앨라배마 주의 버밍엄 시는 1950년에도 새로운 분리법(Birmingham Segragation Law)을 추가하여 흑인과 백인이 야구, 축구, 농구 등의 스포츠를 함께 즐기는 일을 금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흑인이 상품과 소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오직 불평등의 원칙을 순순히 받아들일 때만 가능했다. (396-398, 강조는 인용자)

 

 

  노키즈존 리스트를 반대하는 의견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고 한다. ‘노키즈존이라 하더라도 아이 없이 양육자들끼리만 올 수도 있고, 테이크아웃을 해서 갈 수도 있지 않느냐. 왜 굳이 리스트를 만들어 공유를 하나.’

  → 아, 네, 그래서 노키즈존 계속 하는 게 좋다고요? 저는 안 갑니다. 내가 왜 굳이 불평등을 ‘감수’까지 해 가면서, 말로 설명하기조차 싫은 굴욕감과 모욕감과 그 외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그 업장을 이용해야 합니까?

 

  흑백분리가 ‘분리평등’이라는 미명으로 위장된 시대를 살았던 흑인들도, 그들에게 주어진 불합리와 차별을 더는 받아들이기만 할 수 없었다. 소비는 평등하게 하지만 불평등한 차별을 받는 괴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차별받느니 소비하지 않겠다’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1950년대부터는 흑인인권운동이 시작되면서 ‘분리평등’ 원칙에 근거한 수많은 불평등에 대해 저항하는 목소리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먼저, 흑인들이 백인과 가장 자주 접촉해왔던 상업 공간, 즉 백인 소유의 상점에서 일어났던 차별들이 구체적인 불만 사항으로 공론화되었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 1960년대로 접어들자 미시시피주에는 수년 동안 계속된 흑인인권운동의 영향이 만들어낸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그 결과의 하나로 많은 도시에서 백인 소유 상점에 대한 ‘보이콧(불매운동)’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 운동을 가장 적확하게 대변하는 슬로건은 “차별을 사지 맙시다Don't Buy Segregation”였다. (399-400, 강조는 인용자)

 

 

  노키즈존의 찬성 논리 중 가장 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아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다. 아이가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데 말리지 않는 일부 무개념 엄마(꼭 이럴 때만 엄마 찾더라)들 때문에 노키즈존이 필요한 것이다.’

  한 마디로 ‘그럴 만하니까 그러는 것이다’라는 논리인데, 이 ‘그럴 만하니까’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얼마나 자의적인지는, 백인들이 흑인 소비자를 공공연하게 차별하며 내세웠던 논리를 보면 알 수 있다.

 

 

  백인들은 흑인들에게 물건을 팔면서도 그들이 돈만 생기면 마구 돈을 써대는 무절제한 존재이자 고상한 취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천박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했다. 상점 주인들은 흑인 손님이 오면 싸구려 옷만 잔뜩 골라서 내주곤 했는데, 특히 형형색색의 옷을 내놓으며 흑인들에게는 이런 옷이 잘 어울린다는 식으로 대하곤 했다. 더 심각한 차별은 흑인에게는 옷을 입어보는 일조차 금지한 것이다. 흑인은 무언가를 훔쳐갈 것이라는 의심을 받은 탓에 원천적으로 탈의실 사용이 불허되었다. 심지어 모자를 써볼 수도 없었는데, “흑인들의 머리카락은 언제나 기름기로 떡칠되어 있어서 모자를 망가뜨린다”는 이유에서였다. (399-400, 강조는 인용자)

 

 

  아이를 데려가면 노키즈존이니 오지 말라 하고, 그래서 안 간다고 하면 업장 혐오라고 하는 이 놀라운 이중 잣대는, 사실 백인들로부터 수입해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도 업장에서 흑인을 실컷 차별해 놓고, 막상 불매운동을 벌이니 자신들의 행동을 돌아보는 대신 흑인들을 비난하고 탄압했다.

 

 

  흑인의 불매운동은 백인 상점주와 정치가 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흑인들이 분별없이 돈을 써대는 집단이라고 생각해왔기에 흑인들 스스로 소비를 통제하며 집단행동에 나선 사실이 몹시 뜻밖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종분리철폐운동이 내세운 다른 저항에 비해 상점 앞 시위는 사소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대신 백인들은 이런 불매운동은 외부에서 온 선동가들이 벌인 것이라고 떠벌리면서 참여자들도 금세 질려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보이콧은 몇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고, 상점 주인들은 경제적 압박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 인권운동이 강렬해지면서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긴자이 고조된 도시에서는 KKK단과 시의회 등이 나서서 백인들에게 피켓 시위가 벌어지는 가게를 멀리하라고 권고했다. 자칫 그곳에서 흑백 간의 충돌이 일어날 경우 언론에 알려질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상점에는 흑인뿐 아니라 백인 손님마저 끊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급해진 상점들은 자기 가게는 안전하다는 내용을 신문에 광고하며 손님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중략) 하지만 불매운동은 계속되었고, 발길을 끊은 백인 고객도 별로 늘어나지 않자 상점주들은 흑인 시위자들을 영업 방해 혐의로 고발하기 시작했다. (402-403, 강조는 인용자)

 

 

  백인들의 반발이 어떤 식으로 있었는지에 대한 서술이 더 이어지지만, 백인들의 행태가 우리 사회의 차별주의자들을 떠올리게끔 하니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굳이 인용하지는 않겠다(정 궁금하시면 책을 직접 찾아 보셔도 좋다. 조만간 이 책에 대해 리뷰를 하나 쓸 것인데,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좋은 책이다.).

 

  아, 그래서 미국에서의 이야기는 결말이 어떻게 되었냐고요?

 

  십여 년도 더 전에 미국 고등학교에서 수학할 때, 내가 가장 재미있게 공부한 과목은 미국사(American history)였다. 미국도 한국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보다 더 ‘국가’를 강조하는 가치관이 뚜렷하다 보니, 미국사 교과서의 서술이 ‘국뽕’에 찬 것은 아닐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500년도 안 되는 ‘비교적 짧은’ 역사이지만 그 안에는 개척주의, 식민지 시절, 제국주의, 전쟁, 다원화사회 등의 테마가 모두 녹아들어가 있다. 그 테마 중 어느 하나라도 간과하고 지나갈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기록한다. 당연히, 저 흑백분리 시절의 ‘분리평등Separate but Equal’도 ‘그런 것이 있었다’라고 적는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의 설명을 덧붙인다. ‘그것은 부끄러운, 말도 안 되는 과거였다’라고.

 

  노키즈존이 사업자의 자유라고 하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사회학자 오찬호는 여기에 이렇게 되묻는다. “사업자의 권리가 '사회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패러다임'을 벗어나 있을 수 있을까요?”(원본 링크)

  ‘그래도 노키즈존이 흑인 차별 같은 건 아니지 않냐’라고 이야기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맞는 이야기다. 완전히 같지는 않다. 전자는 법적으로까지 보장되지는 않은 사업자의 재량이고, 후자는 법적으로 보장된 백인 사업자의 권리였으니까. 그러나 노키즈존과 ‘분리평등’은 본질적으로 같다. 차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굳이 차이를 구분해 이야기하자면, 전자는 ‘법적으로 아직은 보장되지 않은 차별’이고, 후자는 ‘법적으로 보장된 차별’이라는 점일 테다.

  나는 먼 훗날, 한국사 교과서의 사회문화사 부분에서 ‘2010년대 들어 사회적 지위에 따른 차별이 가속화되었다. 아이를 동반한 보호자가 입장할 수 없는 ‘노키즈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같은 문장을 보고 싶지 않다. 내 생애의 일부분을 거대한 차별의 흐름 속으로 밀어넣고 싶지 않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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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9-26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뭐라뭐라 댓글 쓰다가 결국 이 글의 반복을 쓰고 있는 것 같아 다 지웠어요.
:)

인간의과도기 2017-09-26 15:18   좋아요 0 | URL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와 배우자에게 요 최근에 노키즈존 논의만큼 분노를 일으키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다음 세대에서는 차별이 당연한 것으로 학습되지 말아야 할 텐데 말이죠 ㅠ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읽고 표시할 수 있는 가장 큰 찬사로 생각합니다. ^^ 남은 하루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2017-12-22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3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리베카 솔닛은 “남성 페미니스트의 역할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지 마세요.” 1) 이민경은 페미니즘에 동참하고자 하는 남성에게 제시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음의 네 가지를 들었다. “여성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주변의 혐오발언을 저지하기 / 무심코 판단하는 위치에 서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고,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페미니즘을 만들어가기 / 남성으로 살아오면서 당연하게 누린 특혜를 본인의 언어로 재구성하고 다른 남성에게 설명하기 / 기득권자란 기본적으로 가부장제의 가해에 동조하는 입장임을 다른 남성에게 설득하기”(빗금 표시는 인용자) 2)

 

  기득권자는 자신이 기득권자인 줄 모른다.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체한다.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자’라는 단어가 ‘정치경제적 상위 지위를 획득한 계층’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다 보니, 정치와 경제 이외의 영역에도 기득권자가 있을 거라 상상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기득권은 어디에나 있다. 엄연히 있다. 작년, 피해 호소인들의 고발로부터 점화된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생각해 보면 기득권자의 ‘피해자 코스프레’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문인들은 대개 자신들을 정치경제적 기득권과 대항하는, ‘시대의 양심’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정치경제적 기득권과 적극적으로 야합하는 문인도 있지만). 그러나 문단 그 자체만 보면 어떤가? 최근 징역형을 선고받은 배용재는, 이런 말한다고 하나도 미안하지 않지만, ‘끗발 있는’ 문인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춘문예로 등단한 ‘문단 시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 과도한 특권을 부여해주었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는데, 그깟 등단이 뭐라고 채 인간도 안 된 나부랭이들이 왜 비범한 예술가로 대접받는가? 글을 잘 써서 그렇다고? 웃기지 마라. 미학적 가치로 따지면 예전에 문필 활동 접었어야 할 ‘문인’의 수가 두 손으로 꼽아도 모자라다. 이건 사회문화적 기득권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자면 ‘한국 남자’는 반박할 여지가 없이 사회문화적 기득권자다(물론 한국 여성의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를 생각해 볼 때 정치경제적 기득권자이기도 하다.). 동일한 사안을 두고 ‘그대가 단지 여자/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결과나 평가가 천양지차로 달라지는 것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남자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들이 생각하기에 기득권자란 정치경제적으로 ‘끗발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인데,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처지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전 같이 안정된 직장이 보장된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도 가는데’, 여성들은 계속 자신들의 삶이 불평등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메갈’을 찾는 것이다. 예전엔 여자들이 이렇게 ‘과격’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운운하면서.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 그러니까 성 평등 이슈를 틀어막는 용도로 메갈 어쩌고 하는 ‘한국 남자’들을 ‘비겁하다’고 규정한다.

  규정하는 것은 쉽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래서, 나도 ‘한국 남자’인데, 구조적인 성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할까? ‘한국 남자’인데?

 

 

 서민 교수는 페미니스트로 살기를 지향한다. 그에 따르면 여성혐오적 언행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동조하거나 (심지어) 침묵한 사람도 큰 틀에서 보면 여성혐오의 ‘공범’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 남자’들의 여성혐오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한국 남자’들의 사례를 인터넷에서 수집해서 왜 이것이 여성혐오인지를 친절하게 해설해 준다. 페미니스트인 이상 여성혐오에 동참할 수는 없으니, 이 책을 쓴 것이 그 나름대로의 페미니즘 실천이리라.

 

 

 

 

  그러고 보면 나는 어떻게 페미니즘을 실천했나.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남자’이니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긴 했지만, 저 비겁한 무리들, ‘메오후’와 ‘쿵쾅쿵쾅’을 달고 사는 여성혐오자들을 인터넷에서 보면서, 적극적으로 그것에 대항하거나 맞서지는 않았다. ‘인터넷에서 여혐하는 xx들이 다 찌질하지 뭐’하고 무시했고, SNS에서 내 생각과 비슷한 페미니스트들의 의견을 소심하게 공유했다. 집에서는 배우자와 함께 집안일을 분담하고 있지만, 배우자가 좀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의 여혐 발언은, 내가 ‘급’이 안 된다는 핑계를 대고 제지하지 않았다(변명이지만, 수험 생활로 인해 만나는 ‘주위 사람’ 자체가 거의 없기는 하다). 아, 그러니까 나는 입만 산 페미니스트였던 거였다. 이러니 ‘페미니즘의 실천에 남성 페미니스트는 필요 없다(또는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도.

  남성은, 특히나 ‘한국 남자’는 페미니즘을 실천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인식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남자라서 여자에 비해 받은’ 차별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자꾸 군대 이야기하는 ‘군무새’들은, 여자가 군대 보낸 거 아니니까 정부 기관에 정중히 청원을 넣기 바란다. 아, 10만 명 넘게 청원을 넣었는데 대통령이 수석들과의 대화에서 그냥 웃고 넘겼다던가? 그럼 별수 없고.).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존재가 인식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가? 성 불평등을 인지하고 실천하는 ‘저마다의 속도’가 동일하지 않다면, 후열에 있는 남성들은 모두 ‘도태’되어야 하는가?

  페미니즘적 관점은 ‘학습’되어야 한다. 학습은,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모르면 외워서’ 될 문제가 아니다. 당장 서민 교수의 이 책에서도, 외우긴 했지만 응용이 완벽히 되지 않아 일부 ‘삑사리’가 난 부분이 있다.

 

가해자와 싸우는 과정이 고통스럽더라도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이 용기를 내주면 좋겠다. 그 싸움은 자신은 물론이고 직장 내 다른 여성들, 그리고 그 뒤 그 직장에 들어올 여성들을 위한 가치 있는 싸움이니까.(132)

-> 개인적으로 가장 뜨악하게 여긴 부분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대의를 위한 싸움을 종용할 수는 없다. 싸움은 힘들다. 몸과 마음이 갈려 나간다. 싸움의 당사자가 완전 소진되지 않도록, 주위에서는 연대와 지지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 있는 저자 자신도 팟캐스트 이후로 여성혐오자들의 공격을 받는 것이 힘들었을 텐데, 왜 여성이 성희롱을 당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해결의 공을 피해자에게 넘길까?

 

  남성 페미니스트의 의견은 불완전할 수 있다. ‘나는 무려 남자인데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했어, 그러니까 어서 날 칭찬해 줘!’라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나는 페미니스트에게 과도한 무결함을 요구하는 어떠한 추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페미니스트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낄끼빠빠’라는 조어가 나는 참 마음에 든다(한국어의 새말은 조어의 원리며 결과물이며 모두 경이롭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의 줄임말인데, 남성 페미니스트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싶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많지 않다. 여성이 한국 사회에서 받는 구조적 차별과 억압을 이야기할 때 남성으로서 ‘징징’대지 않는 것,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성차별 및 성희롱을 남의 일처럼 여기지 않고 함께 연대하는 것. 딱 이 정도다.

 

 

  ps. 저자가 알라디너, 그것도 꽤 오래전부터 활동한 알라디너이시라고 들었다(갑자기 존대). 이 책의 ‘비판적 지지자’를 자처하는 입장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해 보자면,

  다음부터 ‘나무위키’는 ‘성차별, 집단적 반지성주의, 반달리즘’ 등의 실제 사례로 가져올 게 아니라면, 인용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다른 주제도 아니고, 있지도 않은 ‘이퀄리즘’을 ‘집단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날조한 집단이 나무위키다.

 

  ps2. 배우자가 최근에 이야기하기를, 내가 결혼하고 지금까지 “집안일을 ‘도와 준다’”라는 표현을 두세 번 정도 썼다고 한다. 아주 명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한 번인데, 나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배운 대로 실천한다고 하지만 무의식의 깊은 곳까지 완전히 갱신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또 한 번 반성한다. 내가 누굴 비판하나. 나나 잘 할 것이지. 한국 남자로 태어난 이상, 내 안에 있는 성차별적 인식 및 여성혐오의 무의식, 그러니까 나에게 운명론적으로 주어진 ‘빻음’과는 평생 길항해야 하겠다.

 

  ps3. 늘 멋진 글을 쓰시는, 이 책을 선물해 주신 알라디너 분께, 고작 이런 감상밖에 남기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1) 2017년 8월 25일,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리베카 솔닛 내한 강연에서. 워딩은 정확하지 않으나, 맥락상 이러한 내용의 문답이었다.

2) 이민경,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페미디아, 2016, p.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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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9-25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멋진 감상 잘 읽었습니다. 저도 서민님의 이 책을 읽고 고개를 갸웃하고 흐음, 이건 아닌데, 라고 했던 부분이 몇 군데 있었거든요. 저기, 저 인용해주신 부분이 그런 부분 중 하나였어요. 용기를 내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그러니까 어떠한 취지로 저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알겠지만, 저 부분에서는 좀 아쉬웠어요.

오늘 아침만 해도 제 서재에 달린 댓글 읽고 또 힘이 빠졌는데(그렇지만 상처받지는 않아요), 이 멋진 글을 읽으니까 좀 기운이 나네요. 감상 고맙습니다!!

인간의과도기 2017-09-25 16:02   좋아요 2 | URL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상 독자로부터 호평을 듣는 것만큼 글쓴이에게 기쁜 일은 없지요.
한편으로, 다락방님의 댓글을 보니 페미니스트로서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똑같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해도 단지 제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용인되는 현상이 분명 있습니다. 페미니즘 논의장에서조차 남성으로서 가져가는 기득권이 있음을 저 스스로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습니다. 이것조차 ‘말뿐‘으로 끝나지 않게 더 반성하는 것은 덤이고요.
다락방님의 글과 말을 항상 지지합니다. 남은 하루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

cyrus 2017-09-26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이민경 님의 조언을 보게 되니까 제가 그동안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쓰면서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보이지 않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과도기 2017-09-26 04:08   좋아요 1 | URL
어쩌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문제점을 잘 보지 못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기에 반성이라는 덕목이 그만큼 귀하다고 여겨집니다. 저 역시 페미니즘의 한 부분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할 때, 이것이 혹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표현을 빌리자면-유사페미니스트나 안티페미니스트의 궤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아닌지 늘 고민이 되고는 합니다.
cyrus님의 페미니즘 글에는 분명 고유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의 글쓰기를 돌아보시는 모습에서 볼 때, 페미니즘을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동시에 cyrus님만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잘 실천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세상에 2017-09-27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성평등은 복합적인 문젭니다. 다름에서 파생되는 차이는 때로 필연적이기도 하고요.
그 차이점을 조율 해서 균형을 맞추는게 페미니즘이지 그저 막연하게 페미니즘 페미니즘 연호 해봤자 그냥 유사 페미니스트로 밖에 보이지 않아요 사실은.
그래요 너무 많은 자릴 차지하려 하지 마세요.
무작정 남성은 지배자고 가해자고, 여성은 종속적이고 피해자라 칭하는건 환원주의적 오류에 불과해요. 님은 진보적인 페미니스트 남성이 아니라 그냥 젠더 개념에 멈춰 계신거라고요. 개개인의 삶의 구성요인은 다원적이에요.
성별, 인종, 계급, 성적 지향성, 연령, 성경험의 유무, 장애 유무, 혼인 여부, 민족적 배경, 국적 등 모든게 동시 다발적으로 작용해서 개개인의 삶이 구성 되잖아요.
근데 님은 모두를 그저 성별이라는 프레임 하나로 이분법으로 떡하니 갈라다가 무슨 주인님 몫 챙기는 노비 마냥 그렇게 여성 상위적 사상으로 똘똘 뭉칠 필요가 있는건가요?
무지의 베일 속에서 평등히 살고 싶으시다고요?
남한을 포함한 다른 자유주의 국가에선 별 다른 방도가 안보이네요.
직시할건 직시하고 합의점을 찾아야죠.
그렇게 굴종적인 자존감은 같은 남성이 보기에 많이 애달픕니다. 힘내세요.

인간의과도기 2017-09-27 21:25   좋아요 2 | URL
아, 네. 제가 혹시 잘못 읽었나 싶어 달아주신 댓글을 여러 번 읽어 보았는데, 합리적인 척 하나마나한 헛소리 하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세부적으로 고려해야 할 게 많다는 사실을 제가 설마 모르고 이 글을 썼을까요? 그렇게 인간 삶을 구성하는 요소를 다양하게 고려하실 줄 아는 분이, 페미니즘은 ‘여성 상위적 사상‘이니 ‘이분법‘이니 하는 말로 못을 박아두시나요?
제가 위 댓글에서 사용한 ‘유사 페미니스트‘라는 개념은 정확히 님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진정한 페미니즘 찾으면서 현실에 존재하는 가부장제와 그로 인한 성차별을 애써 못 본 체하는 님같은 분 말이죠. ‘이퀄리즘‘이라고 하던가요 그쪽 동네에선?
자신의 단견을 애써 예쁘고 합리적으로 보이도록 포장하는 님을 보니 제가 더 애달프고 안타깝네요. 페미니즘의 ‘페‘ 자만 보여도 이렇게 찾아와서 본문과 상관없는 내용으로 공격하는 님같은 분을, 저는 본문에서 ‘비겁하다‘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이후에 댓글 달지 않겠습니다.

세상에 2017-09-27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을 잘 못 읽으신거 맞아요. 난 페미니즘이 여성 상위적이다거나 이분법적이라 한적이 없어요. 님의 생각에 대한 감상을 말 했을뿐 페미니즘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요 바르게 추구 된다면. 님이 생각을 잘못 하고서 잘못 받아들이는 수용체라고 말한거라고요.그런 생각으론 님은 페미니스트 일 수가 없어요.
합리적인 척 하나마나라뇨 정작 기본적인 독해부터 안되시는 분한테 내가 너무 무익한 언쟁을 시작했네요. 가부장제가 있는 만큼 그 반대의 형태의 가정도 있는거고요. 님이야 말로 진정한 페미니즘이 일궈놓은 성과를 다 배제하고 여성을 그저 보호 받아야 할 약한 존재로 상정하고 계신것 같아요. 그거 여성 입장에선 되게 듣기 거북한 내용이거든요 사실. 대화할 생각이 없잖아요. 솔직히 말해봐요. 여러 번 읽어 보았다뇨. 제대로 안 읽었잖아요.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글은 무슨 더러운 똥 보듯 겉핥기 식으로 보느라 제 논지를 다 놓치셨네요.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이 글은 그냥 영양가가 없어요. 요점도 없고 페미니즘인척 하려는 다른 뭔가에요.
그저 맹목적으로 자기 아들 좋은거만 떠먹이려는 대치동 아줌마 수준의 비합리적인 뒷바라지.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그정도로 해둘게요.
절 비겁하다고 규정 하시겠다고요?
있지도 않은 이퀄리즘에다가 절 갖다 붙이시겠다고요?
기도 안 차네요.

세상에 2017-09-27 21:4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첨언하자면 비판과 공격은 확실히 다른거라고 봐요.
이 정도 비판도 예상치 못하고 자기 의견 드러내시는거 아니잖아요.
모두가 같은 생각하면 토론과 언쟁은 없겠죠.
당황하셔서 말이 헛나왔다고 생각할게요.
제가 낯이 다 뜨거워지네요.

인간의과도기 2017-09-27 22:55   좋아요 2 | URL
아, 그러니까 제 글에서 ‘여성 상위적‘이고 ‘이분법‘적인 태도를 발견하셨다고 했는데, 지금 님의 이 댓글에 따르면 그 ‘여성 상위적‘ 태도라는 게 ‘여성을 그저 보호 받아야 할 약한 존재로 상정‘하는 거군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그러한 태도는 ‘시혜적‘이라고 명명하는 게 보다 정확하며, 저는 이 글에서 ‘시혜‘가 아닌 ‘연대‘를 이야기했습니다. 제한적인 조건에서 연대하자는 게 이분법에 따른 여성 상위의 추구입니까?
님의 원 코멘트를 보면 제가 환원주의적 오류를 범했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글에서 개인으로서의 남자/여자를 호명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페미니즘의 갱신을 위해서는 말씀해 주신 여러 요소의 고려가 필요하겠습니다만, 이 고려가 ‘구조적 가부장제의 철폐‘ 목적을 은폐하지는 않습니다. 아, 참고로 말씀드리면 가부장제는 현대 사회에 있어 가정 안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닙니다.
님은 님 편의대로 용어를 섞어 쓰고 있습니다. 토론의 첫 번째 전제는, 토론하고자 하는 개념 정의에 상호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몰이해를 비판하시고자 한다면 님이 생각하시는 개념, 님이 글 어느 부분에서 그러한 인상을 받았는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제가 님 말마따나 토론이든 뭐든 하지 않겠습니까?
제목을 ‘남성 페미니스트의 역할‘로 정했고 맨 마지막 문단에 제가 생각하는 역할을 정리했습니다. 이 글에 요점이 없다고 이야기하시는 게 합리적인 비판이신지는 스스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더군다나 ‘주인님 몫 챙기는 노비‘니 ‘굴종적인 자존감‘이니 이야기하시면서 비판과 공격의 차이를 이야기하시면, 저는 ‘모르겠다‘라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분명 페미니즘이 아닌 ‘이 글‘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셨으니, 저런 표현은 분명 저를 겨냥한 표현이실 텐데, 제가 기분이 나빠지고 안 나빠지고를 떠나서, 토론을 요청하는 표현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비합리‘의 상징으로 하필 ‘대치동 아줌마‘ 운운하시는 것은 제 입장에서야말로 기가 찰 일입니다.
글에서 언급한 책에 왜 ‘김여사‘가 문제적 표현인지 설명하는 글이 있습니다. 안 읽어보셨으면 한번 읽어보시기 바라며, 읽어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표현을 쓰시는 거라면, 님에게야말로 토론의 의지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zzovok 2017-09-30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너무 좋은글이에요. 잘읽었습니다! 과도기님 같은 남성 페미니스트가 많이 늘었으면 좋겠지만..너무 큰 기대일까요...현실이 참 씁쓸하네요..심지어 같은 페미니스트여도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 발언에 대한 온도차이가 매우 극명한것도 현실이구요 책도 좋았지만 리뷰를 읽으면서 또한번 생각하게 되는것 같아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위에 이상한 댓글은 신경쓰지마세요. 그래도 남성페미니스트라고 하니 메갈이니 쿵쾅쿵쾅이니 이런 저급한 말은 안나오네요ㅎㅎ..)

인간의과도기 2017-10-03 06:42   좋아요 0 | URL
개인적 사정으로 대댓글을 이제야 답니다. 힘이 되는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요 며칠간 제 자신의 말과 행동 사이 괴리, 실천의 온도차를 돌아보며 페미니스트가 맞는지 자문해 보았습니다. 여남 할 것 없이 자신 안의 여혐을 되돌아보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실천해도 지금보다는 나은 사회상을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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