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전의 일요일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러 점심시간 즈음에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건너편 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문득 햇살이 따스함을 느꼈다. 그 온도 덕에 마음이 아주 여유롭게 누그러졌고, 급기야는 평소에 하기 어려운 생각에까지 기분이 다다랐다. 지금, 그러니까 빌린 책 다섯 권 중 대출기간 안에, 심지어 한 차례의 기간 연장 없이 완독한 네 권을 반납하러 가는 이 순간은 해가 바뀌자마자 이뤄낸 작은 성취를 확인하러 가는 순간이다. 전날인 토요일 새벽에 이 글 초고를 쓸 때는 마음의 절반이 파도에 휩쓸려 나가고 어쩌고 했었는데 ㅋㅋ (역시 새벽에 쓰는 글은 좋지 않다) 이런 성취감은 정말 오랜만, 어쩌면 거의 느껴본 적 없었던 성질의 것이라 낯선 한편 반가웠다. 그나저나 어떻게 내 독서 속도는 이렇게 빨라질 수 있었을까?



결말까지 다다르는 과정을 추리 소설처럼 흥미 있게 쓸 자신이 없어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지금은 회사 일을 쉬는 중이다(퇴사 아님). 기록이 있어서 찾아보니, 작년 2분기서부터 이 일(폭탄처리반)에 대해 지독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나 보다. 시민으로서의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잡소리에 그딴 잡소리 집어치시구요라고 대응해야 하는데, 직업인으로서의 나는 불편을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고객님 소리부터 먼저 하고 있으니. 요새는 소비자 마케팅에서도 고객은 왕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트렌드에서 밀려난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이 일이 내 일이어야 하지? 회의는 꼬리를 물었고, 비록 전문기관에서 상담을 받지는 않았지만 나의 내면이 소진되고 있다는 느낌만은 비교적 명확히 감지했다. 소진된 내면은 누가 대신 채워주지 않으므로, 배우자와 상의 후 해가 바뀐 후부터 회사 일을 잠시 쉬게 되었다. 아무튼그렇게 됐다.



회사 일 대신 집안 살림을 이전보다 더 꼼꼼히 꾸리고 자녀를 돌봐야 한다. 이러려고 쉰 거니까. 책을 읽을 절대적인 시간은 많아졌다고 볼 수 있지만 정리된 글을 계획된 일정에 맞추어 올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 체력이 늘면 집안을 돌보고 읽고 쓰는 세 가지 일을 멋지게 동시다발적으로 하겠지만, 지금은 우선 앞의 두 가지에 초점을 두었다. 읽어야 뭐라도 쓸 수 있다. 여하간, 내 서재를 찾아 주시던 고마운 분들이 하나도 없게 되기 전까지는 뭐라도 쓰는 게 일종의 예의이겠다.



구정도 지났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치껏 안다. 새해가 시작된 지 한 달도 더 지난 지금 새해 어쩌구를 글로 적거나 말로 올리는 것은 서로 계면쩍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도 나는 예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에 비해 눈치가 없으므로 새해 다짐을 굳이 이야기해야겠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차피 못 지킬 새해 목표 왜 세우나가 새해를 맞이하는 나의 기본 태도였다. 그러나 며칠 전 불현듯 이 문구가 드러내는 태도가 어차피 죽을 거 왜 사나의 수많은 변주일지도 모른다는, 그러니까 의미도 통찰도 없는 허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후 2022년 새해의 첫째 다짐은 자동적으로 새해를 맞이해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일에 굳이 초 치는 사람이 되지 말자가 되었다. 초를 칠 기회 자체를 만들지 않으니 아직까지는 잘 지키고 있다.



목표는 지키기 위해 세우지만 달성 여부에만 초점을 맞추면 세우나 마나 한 목표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목표는 원대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강박은 민족적인 것이어서 쉽게 떨치기 어렵겠지만(대학은 SKY를 목표로 해야 인서울이라도 간다, 대기업 목표로 해야 갓생 아니더라도 현생이라도 산다, 등등), 사소한 충족감이 나를 스스로 인정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새해 2월에 들어서서도 사그라들지 않은 새해 다짐은 이렇다. 1. 작년보다 책 많이 읽기(2021년에는 58권을 완독했다), 2. 술술 읽히는 책과 더불어 깊이 있는 양서를 시간 들여 읽기(알라딘 서재의 많은 분들이 참여하고 있는 여성주의 책 읽기 대상 도서를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몇 권 샀었으나 생활을 핑계로 읽지 못했음을 뒤늦게 고백한다), 3. 가능한 한 비건 지향을 실천하기, 4. 육아 가사 시간 외에 운동하기( 풀리면 ……), 5. 작은 성취를 기억하기.



새해 다짐은 일석이조식으로 달성할 수도 있다. 가령 이런 것. 하루는 내가 요리한 알배추찜을 배우자가 매우 맛있게 먹었다. 요리라고도 할 것이 없는 아주 간단한 인터넷 레시피였지만, 비건 레시피로 배우자도 만족하며 먹을 수 있는 한 끼를 만들고 같이 나누었다는 게 소중한 순간으로 다가왔다. 비건 지향을 실천하면서(3), 배우자가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알게 된 것이다(5).



새해에 빌려 대출 기간 동안 열심히 읽고 반납한 책 네 권은 이렇다.





『내 손으로, 교토+오사카』는 이다(2da) 작가가 교토, 오사카 여행기를 손그림과 손글씨로 옮겨 작업한 일기다. 실은 이 전에 작가의 최근작인 『기억나니? 세기말 키드 1999』를 먼저 읽은 것을 먼저 언급해야겠다. 비록 내가 작가와 동년배는 아니지만 그 시절 하면 어렴풋이 기억날 법한 것들의 질감이며 분위기며 하는 것들을 죄다 소환해내는 작가의 기억의 세세함에 읽는 내내 감탄뿐이었다. (나에게는 없는 종류의 것이므로) 그런데 책 말미에 작가께서 『내 손으로, 치앙마이』를 영업하시기에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영업을 받아들였고, 집 앞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지를 검색해 보았으나 없었기에 불행 중 다행으로 비슷한 계통인 『내 손으로, 교토+오사카』 를 빌리게 된 것이다.


손으로 쓴 일기를 그대로 옮긴 듯한 콘셉트를 극한으로 실현시켰는데 단지 콘셉트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교토 여행을 처음 계획할 때의 일부터 시작해서 1112일의 일정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일면식도 없는 작가의 일기를 이렇게 함부로(?) 봐도 되나 싶은 디테일들이 책 구석구석에서 아른거리고, 책을 덮고 나면 안 그래도 가고 싶은 여행이 더 가고 싶어진다. 현재 품절되었으니 소장은 어렵고 인근 도서관에서 찾아보시기를.




『물속을 나는 새』는 펭귄 연구자로 익숙한 동물행동학자 이원영이 남극에서 연구하며 관찰한 펭귄의 생태를 에세이 형태로 전하는 책이다. 사실 그는 까치가 사람을 개별 개체 수준에서 인식할 수 있다는 이른바 까치 연구 로 유명하다던데, 워낙 과학에 문외한인지라 최재천 교수 유튜브에서 관련 내용을 보기 전까지는 몰랐었다.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o6Z6m9sp44w) 책에서는 여기에 더해 인간과 비교적 교류가 덜했던, 남극에 서식하는 조류(도둑갈매기, 펭귄)도 개별 개체 수준에서 사람을 인식할 수 있다고 소개하니, 새 머리라는 욕은 실상 새에게도 모욕인 셈이다.


저자가 남극에서 주로 연구한 펭귄 서식지에 가장 많은 펭귄이 젠투펭귄과 턱끈펭귄이고, 책에 실린 사진도 그 두 종의 펭귄 사진이 대부분이다. 덕분에 다른 건 몰라도 전 세계의 수십 종 펭귄 중 젠투펭귄과 턱끈펭귄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사실 골든리트리버와 포메라니언이 같은 여도 다른 인 것처럼, 큰 이름으로 펭귄이라 묶일 뿐 젠투펭귄과 턱끈펭귄 말고도 임금펭귄, 훔볼트펭귄 등 종이 다른 펭귄들이 저마다의 삶을 꾸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럴 뿐. 펭귄이 왜 주로 남극 및 아프리카 등 남반구에 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첫 번째 에세이의 제목이 펭귄 북극에 가다인데, 마지막(스무 번째) 에세이를 읽는 시점에 되돌아보면 사뭇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사는 방식』은 배우자가 빌려 와 달라고 전달해 준 책 옆에 꽂혀 있었다. 전미도서상 수상 작가인 시그리드 누네즈가 사회 초년생일 시절, 이미 거장인 수전 손택의 집에 같이 살던 시절을 떠올리며 쓴 회고록이다. 수전 손택의 저작을 읽기도 전에 회고록부터 읽는 것은 반칙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책이 얇으니까 금방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곧 오산으로 드러났다.


, 그러니까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해야 한다. 회고록이 지시하는 시대는 1970년대라는 것을. 그 시대로부터 달라진 것, 또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에 대해 명확히 전제하지 않는 한, 이 복잡하고 강렬하고 한편으로 모호한 회고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책을 덮고 나니, 예술의 강력한 옹호자이고자 했던 수전 손택의 저작을 에세이와 소설 가리지 않고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전에 이 회고록의 한 단면만을 가지고 그가 어떻다고 지금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명확한 반칙이다.




『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 설명서』는 문화연구가 최태섭의 근작인데, 부제 그대로다. 게임에 대해 궁금하지만 게이머들은 답해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답하는 책. 저자 자신이 게이머이기도 하고, 나도 한때 열성 게이머였던 만큼 빡빡 웃으며 읽었다. 예상 독자를 게임이 무엇인지 모르는 독자를 전제로 한 만큼 1(게임의 정의와 분류), 2(게이머에 대한 통계 분석), 3(게임 산업에 대한 분석)에서는 분석과 설명에 충실하다. 압권은 게임 및 게이머와 관련된 논란을 다룬 4장이다. 내가 빡빡 웃었다고 이야기한 대부분의 내용은 4장에 있다. 누군가는 진성 게이머의 입장에서, 안티페미 밈(meme)에 절여진 게이머들의 논리를 비판해 주길 오래 전부터 바라고 있었는데, 저자가 그걸 해냈다. 맞는 말들을 죄다 옮겨 적었더니 페이퍼 본문보다 많아져서 나중에 리뷰를 따로 쓰기로 하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 하나만 옮긴다. 소위 PC(Political Correctness)가 게임을 망친다게이머들의 주 논리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PC가 게임의 재미를 망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비백인이고 성소수자라고 한들, 〈슈퍼마리오〉가 재미없어질 수 있을까? 내 캐릭터를 흑인 동성애자 여성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몬스터헌터〉에서 빼앗을 수 있는 재미란 대체 무엇일까? 사실은 모두가 게임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OOO은 나야. 둘이 될 수 없어’라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폭력적인 게임이 모방 범죄를 낳는다는 주장에 대해, ‘게이머들에게는 판단력이 있으며, 게임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모방하고 싶어지는 건 아니’라는 유구한 방어논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201)




오랜만에 글을 쓰니 또다른 작은 성취를 이루었다는 기분이 든다. 사실 작년의 회사 생활에서 나를 가장 회의감에 들게 했던 것은,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생각에 빠지게끔 만드는 업무 환경이 아니었나 싶다. 그 때 내가 수전 손택의 다음과 같은 말을 접했더라면, 조금은 객관적으로 내 상황을 돌아볼 수 있었을까. 지나고 나서 하는 생각이니 부질없지만.


   수전은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에게 경멸을 당하는 것은 실제로는 큰 칭찬일 수 있다고

(『우리가 사는 방식』, 99)



그러니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쓴다. 다들 2022년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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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2-07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배추찜이 어떤 것일까요??? 혼자 막 생각하고 있어요!!! 무지 맛있을 듯!!! 암튼 소식 전해주셔서 넘 감사하고 제가 모르는 책을 많이 읽으셔서 또 주섬주섬. 마지막으로 올려주신 손택의 말은 제게 요즘 꼭 필요한 말이구요. 역시 인도님은 나를 위해 이 소중한 글을 쓰시게 된 것 같은 착각도 들고요, 암튼 우리 2022년은 좀 더 재밌게 살아봅시다!!! Best of luck in future endeavors!!!!!!👍 🍀

인간의과도기 2022-02-07 00:25   좋아요 0 | URL
제가 인터넷에서 본 레시피는 알배추 냄비 바닥 채울 만큼 연두 1~2큰술(없으면 국간장으로 대체) 국간장 1큰술 물 100ml 해서 코팅냄비에 올리고, 중약불에 끓여서 배추가 푹 익을 정도가 되면 먹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끓이는 시간은 체감상 최대 20분 정도 걸리고 물은 3~400ml까지 넣어서 약간 샤브샤브 느낌으로 드셔도 좋습니다. 간단한 레시피에 비해 맛이 있어서 나중에 라로님도 후기 나누어주시면 기쁠 것 같습니다.
본문에도 적었다시피, 착각은 아니시고, 제 글을 귀히 읽어주시는 분이니만큼 저도 조금 성실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팬데믹의 시절이 더 많은 무게를 얹기 전에 잠잠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올해는 조금 더 자주 뵈어요!

라로 2022-02-07 18:19   좋아요 0 | URL
연두 사서 만들어 볼게요!! 정말 넘 간단하네요.ㅎㅎㅎㅎㅎㅎ
양배추로 해도 될까요?? 냄새가 나서 안 될까요??^^;;
암튼 올해는 좀 더 자주 보자고 하셨으니 믿고 또 믿겠어요!!^^;;;

인간의과도기 2022-02-09 16:47   좋아요 0 | URL
알배추 대신 포기김치를 써도 무방한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양배추로 바꾸게 되면 아무래도 포토푀 같은 느낌으로 조금 맥락이 다른 요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식재료에 대한 식견이 부족해서 정확히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요ㅠ

양치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