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와중에 역사한당> 미션도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처음을 되새기는 의미로, 첫 미션 포스팅을 썼을 때와 그 내용을 떠올려 본다. 1주차 포스팅에 나는 고등학교 시절 사회탐구 과목으로 3사(국사, 한국근현대사, 세계사)를 선택했다고 적었다. 좋아하지 않는데 선택권이 있는 네 개의 자리 중 세 개를 역사 과목으로 채웠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왜 역사 과목을 좋아했을까?

 

  입시나 취직을 준비하는, 그러니까 수능이든 공시든 어떠한 필기시험을 치러야 하는 입장에서 공부에 대한 방법론은 거칠게 요약하자면 ‘암기’와 ‘이해’로 나뉜다. 암기를 먼저 하고 이해를 할 것이냐, 이해를 한 후에 암기를 할 것이냐. 시험을 더 이상 치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유의 선문답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수험생은 한 문제라도 더 맞추기 위해, 그리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에게 맞는 방법론을 하루라도 빨리 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내가 준비하는 시험의 강사들도 강의 첫 시간에는 상기한 방법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쨌든 시험에 합격해야 할 거 아니냐고!

 

  역사 이야기를 하다 왜 뜬금없이 암기니 이해니 하는 이야기를 했을까? 정규교육과정을 지나온 우리들의 머릿속에는 기본적으로 ‘역사 과목=암기 과목’이라는 도식이 자리 잡고 있다. 주요 과목이 아닌데 다루어야 할 항목들은 많다. 인물, 사건, 연도, 왕조 및 단체명, 기타 등등. 그럼 주요 과목이 아니니 시험도 안 보거나 덜 봐서 다양한 역사관을 접할 기회로 삼으면 좋으련만, 이 과목도 시험을 본다! 그렇다면 안팎으로 말이 많은 역사적 사항을 바탕으로 시험 문제를 출제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누가 봐도 ‘객관적’이라고 인정될 만한 사항을 바탕으로 출제하는 것이 좋을까? 우리는 안다. 이상은 전자에 있었지만, 현실은 항상 후자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렇게 ‘역사=한 번 암기하고 말 것’으로 이해해 버렸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암기한 것을 쉽게 잊어버렸다. 시험을 더 이상 보지 않으므로.

 

  나 역시 이러한 혐의, 그러니까 역사를 역사로 대하지 않고 시험용 도구로 대한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머릿속에 내용을 ‘입력’하고 ‘보존’만 잘 하면 시험에서 두고두고 써 먹을 수 있고, 그 결과로 입시에서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3사’를 선택했던 진짜 이유다. (덧붙여, 국사는 당시 모 대학교 입시전형에서 사회탐구 필수과목으로 지정된 과목이었다. 모 대학을 가려면 국사를 억지로라도 좋아해야 했다. 내 경우, 억지 사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 기록에는 다양한 사람과 중요한 사건이 등장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역사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다.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이는 드물 터, 나는 대학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우리 역사의 다양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민족의식이 투철하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요새 그런 이들이 얼마나 있으랴마는). 당연히 우리 역사의 민족주의적 해석도 경계하는 편이다(환단고기에 열광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볼 때마다 ‘질색’한다). 나는 그저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찾고, 거기에서 현재와 미래에 필요한 통찰의 실마리를 발견하고자 할 뿐이다.

 

  『쟁점 한국사』는 이런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 한국사를 세 개의 시기(전근대, 근대, 현대)로 나누어 시기별로 여덟 개씩, 모두 24개의 주제를 다루었다. 교과서의 역사와 다른, 살아 있는 역사를 강조하다 보면 흔히 흥미 위주의 야사로 빠질 우려도 있는데 『쟁점 한국사』는 그러한 측면에서 균형감각을 잘 잡았다. 물론 주제에 따라 어떤 주제는 다른 주제와 일정 부분 겹치기도 하고, 하나의 사건이나 흐름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것도 있다. 이 많은 역사적 쟁점 중에서 독자와 공명하는 부분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 의외로(!) 전근대편에 있는 강종훈 교수의 「신라의 여왕 출현, 어떻게 가능했나」가 깊게 인상에 남았다.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지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바탕으로 ‘성골’과 ‘진골’의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설명한 것도 유의미했지만(이런 것들은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았다), 글 말미에서 과거사와 현재의 사회 현실을 잇는 통찰의 전형을 보았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핵을 앞두고 있다. 비선실세의 국정 농단이 폭로된 것을 계기로 상상을 뛰어넘는 실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무능과 후안무치의 대명사로 오래도록 역사에 남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녀의 몰락이 여성의 정치력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촛불집회 때 여성혐오 발언에 대해 항의 의사를 전달한 여성단체에게 ‘친박 페미’ 운운하는 딱지를 붙인 SNS 기반 논객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최근 TV 토론에서 성소수자 관련하여 실언을 한 유력 대선 후보를 두둔하며 마음껏 성소수자 혐오를 드러냈다. 역사적 관점이 없으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자신의 인식과 사고 체계가 어떻게 개선되어야 할지에 대해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는 국가가 무능하고 부패한 이들에 의해 어떤 식으로 망가질 수 있는지를 참담하게 목도했다. 어쩌면 이번 대선은 10년의 폐허 위에서 새 정부를 세우는, 또 하나의 역사적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모두 폐허 위에 서 있다. 우리 모두 그 동안 조금씩은 망가졌을 수도 있다(당장 유력 대선 후보의 발언도 5년 전보다는 후퇴한 수준이라 평가된다). 이제부터 망가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더는 폐허를 새로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에게 역사를 다시 돌아보고 미래를 대비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퇴보의 순간에 있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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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 「초혼」 中

 

 

  이 세상에 없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의 넋을 이승으로 부르는 절규. 「초혼」의 어조는 「진달래꽃」으로 대표되는 김소월의 시적 어조와는 구별되는 측면이 있다. 나 보기가 역겹다는 임에게 진달래꽃을 뿌리고 반어법을 구사하고 그러지 않는다. 곱게 돌려서 이야기하는 대신 떠난 사람을 직접적으로 목 놓아 부른다. 이 시만 보면 김소월의 시적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 자신으로 생각하는, ‘물아일체’의 진정성을 가진 이다.

 

  시인으로서의 김소월은 한국문학사에서 독보적 존재다. 하지만 김소월이 쓴 「초혼」의 시적 화자, 그러니까 대상 하나를 자기의 목숨(또는 정체성)과 동일한 무게로 두고 끊임없이 그 대상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갈구하는 사람도 한국 사회에 드문, 독보적 존재일까? 애석하게도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작년에 한 회고록이 출간과 동시에 때 아닌 ‘북풍’을 일으켰다. 회고록의 저자는 참여정부에서 외교부 장관을 했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참여정부가 UN 북한 인권 결의안 기권과 관련해 북한과 사전 연락을 주고받았다’라는 주장을 회고록에서 한 모양이다. 이 논란이 대선을 앞두고 대선 후보 TV 토론에서 다시 점화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합리적 보수’로 규정한 후보가 토론 초반에 이 회고록의 내용을 바탕으로 유력 후보를 공격했다. 이에 다른 후보가 ‘합리적 보수’ 후보를 비판했다. 비판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북한이 없었으면 보수는 선거를 어떻게 치렀겠어요?” (관련기사: http://omn.kr/n4pm)

 

  유력 후보 말마따나 ‘제2의 NLL’이라고도 할 수 있는 회고록 사태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써 놨지만, 정작 나는 회고록이 출간되었을 당시 해당 사안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연히 회고록도 읽어 보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생각했을 따름이다. 그놈의 북풍, 꺼지지도 않는구나. 그런데 이 지겹고도 식상한 북풍이 똑같은 내용으로 또 부는 것은, 대통령 선거 때문인가? 아니면 원래 한국에서 보수의 본질은 국내의 모든 정치적 현안을 어떤 방식으로든 북한과 연결 짓는 능력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한국의 보수파는 해외의 극우파에 가깝고, 한국의 진보파는 해외의 보수파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흔히 접한다. 아마도 한국의 정치 지형도가 보수파에 유리한 식으로 짜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희한한 기준으로 갈리기도 하는데, 그 기준은 바로 북한 문제다. 범세계적 평화와 인류 평등 실현에 앞장서야 할 것 같은 진보파가 정작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먼저 이야기하는 경우가 적으며, 반대로 국내의 정치 상황을 안정시키고 국익 실현을 최우선의 가치로 둘 것 같은 보수파는 북한 정권을 어르고 달래기보다 도발하고 대치하여 긴장 국면을 조성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 뒤틀린 기준은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역사의 상흔이다. 해방 후 신탁통치에 찬성하느냐(친탁), 혹은 반대하느냐(반탁)를 기준으로 좌익과 우익이 나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한국적 좌우익 구분 기준’의 기원이 된 것이다.

 

  『쟁점 한국사: 현대편』에 수록된 정병준 교수의 「해방과 분단의 현대사 다시 읽기」에서는 해방 공간의 운명을 가로지른 몇몇 역사적 순간 혹은 주체를 조명한다.

  첫째, 한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논의치고는 내용적 측면과 시기적 측면 모두 적절하지 않았던 모스크바 회담 결정.

 

  “모스크바 회담에서 한국 문제는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고, 간단하게 처리되었다. 만약 양국이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직후에 대한정책을 결정했다면 국내에서는 그에 대한 저항이나 반발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중략) 모스크바 결정은 시기적으로 너무 지체된 정책적 결정이었고, 내용적으로 실현불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한국인들이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둘째, 모스크바 결정 이후 각국의 진영 논리와 이해 관계에 따라 한국 문제를 자의적으로 처리하고자 한 미국과 소련.

 

  “미국과 소련은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미국은 4대국과 협의하는 신탁통치 단계에서 미․영․중 대 소련의 3대 1 대결구도로, 국제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소련은 오랜 식민통치를 겪은 한반도에서 계급 문제와 민족 문제가 폭발 일보 직전이므로, 임시정부 수립 단계에서 큰 방향에서의 좌파적 정권, 즉 친소적 정부가 수립될 수 있다고 판단, 국내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보았다. 미국은 국제적 우위를, 소련은 국내적 우위를 자신의 정책적 지렛대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셋째, ‘소련은 신탁통치,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했다던 동아일보의 계산된 오보.

 

  “한국인들은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도 않고 이 보도에 격렬하게 반응했다. 이 보도에 기초해서 신탁을 반대하는 반탁, 신탁을 주장하는 소련에 대한 반소, 공산주의에 대한 반공이 반탁운동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즉 반탁=반소=반공운동이 된 것이다. 사실 반탁의 핵심논리는 한국인들이 즉시 독립할 자격이 있으므로 이를 부정하는 외세를 배격하고 즉시 독립하겠다는 반탁=반외세 즉시 독립이 타당했다. 그러나 전혀 사실과 다른 반소․반공이 핵심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모스크바 결정의 사실 확인도 이뤄지지 않았다.

(중략) 반탁운동은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과 1919년의 3․1운동에 비견될 정도로 민족주의 에너지가 가장 강력하게 집결된 사례다. 이렇게 집결된 에너지가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의 에너지 대신 즉시 독립을 향한 긍정의 에너지로 폭발했다면, 한국현대사의 방향은 달라졌을 것이다.”

 

  필자는 모스크바 회담 결정 내용이 반탁운동으로, 종국에는 분단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에 대한 원인으로 당시 한국 사회 정치 지도자 계층의 권력투쟁을 든다.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의 정치 세력 보전을 위해 지지층이 결집된 지역에서 운신했을 뿐, 조국 통일을 위해 대국적으로 움직이려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니까 이해가 된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한반도의 정치 지도자들은 모두 한반도를 무대로 자기 이익의 최대 실현만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 ‘리바이어던’의 재림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이 상태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모습으로까지 이어져 왔다. 북한, 친북, 종북, 부르다가 내가 죽을 그 이름이여!

 

  요새 한국 문단에서 제일 잘 나가는 장강명 작가는 작년에 통일 한국의 미래를 가상으로 다룬 장편소설 『우리의 소원은 전쟁』을 출간했다. ‘우리의 소원은 전쟁’이라니, 한국의 보수파들이 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줄기차게 이야기했던, 최근에는 눈치 보여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했던 바로 그 메시지 아닌가! 그러나 정작 작가는 소설 출간과 관련해 진행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밝혔다.

 

  “보수진보를 떠나서 북한이 비정상국가고 세계 최악의 인권 유린 국가인 건 맞다. (중략) 다만 그것과 우리가 북한과 대화를 하고 지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양립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관련기사: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3543)

 

  TV 토론이 끝났다. 정책과 상관없는 네거티브 공방만 오갔다는 언론의 평가가 있다. 언론이 뭐라 하든, TV 토론에 나선 다섯 명의 후보 중 한 명은 대통령이 되어 향후 5년간 국정의 기본 방향을 정할 것이다. 부디 그 때에는 10년 전에 참여정부가 북한에게 어떻게 했는지의 문제 같은, 민생과 1도 상관없는 쟁점이 지금보다는 덜 전파되길 바란다. 부디 그 때에는 북한 문제에 따른 해외 정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국민 모두에게 실질적으로 이득이 될지 보수파와 진보파가 모두 ‘합리적’으로 방법을 궁리하길 바란다. 지금은 21세기고, 지금의 대중은 오보 하나에 쉽사리 입장이 나뉘었던 해방 직후의 대중이 아니다. 대중은 민생과 동떨어진 ‘북풍’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어디서부터 불어오는지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

 

 

* ‘이 와중에 역사한당’ 3주차 미션: ‘한국의 진보 보수를 나누게 된 역사 쟁점’ 포스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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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십수 년이 지나면 거의 모든 역사 교과서에서 2017년 3월 10일을 중요하게 언급할 것이다. 시민의 승리, 명백한 승리였다. 애석하게도 나의 세대는 그날 이전까지는 이런 승리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87년 민주화 항쟁과 그에 따른 학살자의 퇴진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 20대는 1년을 제외하고는 보수 정권 하에서 보냈다. 2008년의 촛불은 정권을 교체하는 동력이 되지 못했고, 후일에 오명을 뒤집어썼다. 우울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은 국정농단의 장본인이 물러나 구속되었고, 새로운 정치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이제야 봄이라 할 만하다.

 

  아직도 서울시청 부근에 가면 소위 태극기 집회가 열리는 모양이다. 그 한줌의 지지자들이 있다고 해서, 대통령 탄핵이 있게 만든 국정농단이 우리 사회의 쟁점으로 떠오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상식은 갱신된다. 갱신의 과정에서는 불필요한 쟁점을 상대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국정을 제멋대로 하면, 법에 의한 심판을 받는다. 시민의 상식이었고, 우리는 그날 상식의 실현을 목격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전보다 상식적인 사회가 되었으니 시민들의 불행도 줄어들까? 적폐만 청산되면 시민의 상식은 자동으로 갱신될까?

 

  2016년 5월 17일. 한 여성이 강남역 근처의 공중화장실에서 남성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다. 내가 이날 목격한 것은 한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느끼는, 실재적인 공포였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다.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경찰은 사건 용의자에게 조현병 증세가 있었으며, 따라서 여성혐오 범죄라고 볼 수 없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일부 성차별주의자들은 그 발표를 그대로 믿기로 했다. 어쩌다 정신병 있는 사람에게 잘못 걸린 피해자에게는 애도를 표하지만, 남성혐오로 사건의 논조를 끌고 가는 언론과 그에 동조하는 ‘메갈’, ‘페미’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운운하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남녀 간에 정말로 아무 문제가 없고 평등을 이룩했는데 일부 극성 ‘페미’들이 문제일 뿐인 걸까? 그래서 2015년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주목받고 다양한 페미니즘 운동이 확산되니 ‘쟤네들 남혐한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조롱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쉽게 낙인찍을 수 있었기에 여성의 삶과 고난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고 외면해 버리기로 한 것일까? 정말로?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늦은 밤에 택시를 탈 때, 처음 보는 건물의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새벽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퇴근할 때, 자취방에 나 혼자 있을 때, 나는 내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내가 남성이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해 끝없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삶, 존재에 대해, 생김새에 대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온갖 평가를 주위로부터 끊임없이 듣는 삶, 참다 참다 참지 못하고 감정을 표출하면 ‘예민하다’라고 쉽게 딱지 붙여지는 삶, 이것은 적어도 시민의 삶은 아니다. 국가가, 시민 공동체가 여성을 진정 같은 시민으로 대우했는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일이다.

 

  여러 측면에서 논의하고, 문제점을 수정해나가야 한다. 내가 관심을 갖는 부분 중 하나는 남성 집단의 반지성주의에 관한 것이다. 최근의 독서시장 경향을 보면 ‘시장에 2030 남성은 없다’고 해도 될 정도다(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1611011744501&pt=nv). 책을 읽지 않으니 개념과 개념 사이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니 ‘여성혐오’라는 개념을 가지고도 ‘난 여자 좋아하는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라는 흰소리가 2년째 도돌이표로 나오지 않느냔 말이다.

 

  부디, 나의 다음 세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우리 사회가 강남역 살인 사건의 성격이 ‘여혐’인지 아닌지에 대한 쟁점을 정리하고 다음 단계의 상식을 갱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최근 우리 사회, 특히 남성들이 성 인식에 관해 반동의 양상을 보이는 것 같아 심히 걱정이 된다. 내 배우자는, 내 딸은, 나의 여성 동료 및 선후배들은 이런 사회에서 잘 살 수 있을까?

 

  * ‘이 와중에 역사한당’ 2주차 미션: 내가 생각하는 ‘쟁점으로 남을 오늘의 역사’ 포스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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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말에 배우자와 함께 오찬호 선생님의 『대통령을 꿈꾸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출간 기념 강연을 간 적이 있다. 강연의 주제는 왜 한국 사회에서 소위 ‘공시(공무원 시험)’ 열풍이 생겨났는지, 공시 열풍을 있게 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 논의한 책의 내용을 핵심적으로 요약한 정도였는데, 강연에서만 언급된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오찬호 선생님이 한 공시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단다. 그에 대한 공시생의 답: “최순실이 누구예요?”

 

  여기까지 읽은 사람 중 누군가는 공시생의 몰역사적 인식에 대해 고상하게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요지는 그게 아니다. 그만큼 ‘평균적인 인간의 삶’을 위해 청춘들이 바치고 있는 열정의 정도가 기이할 정도로 크다는 것. 위에서 언급한 공시생은 공시 준비를 위해 모든 사회적 커넥션을 끊어버렸었다고 하니 말이다. 어쨌든.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마냥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나도 현재 공시생과 비슷한 수험생인데, 수험생이든 아니든 간에 지금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역사적 관점이 희한할 정도로 없거나 망가진 사람들을 주위에서 생각보다 자주 목격한다. 그러다 보니상식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굳이 쟁점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기대되는 것들조차도 논란과 쟁점의 대상으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최근에 광주 학살의 주범인 사람과 그 부인이 나란히 회고록과 자서전을 펴냈다. 상식적인 사회라면 ‘미친X이 욕먹고 오래 살더니 흰소리를 지껄이네’ 하고 무시해야 하는 게 맞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의 해당 도서 서평란을 보니 그 추종자들이 학살범 찬양과 광주 비하 등 차마 입에 담기 싫을 정도의 쓰레기들을 서평이랍시고 도배를 하고 자기네들끼리 추천을 남발한 것이었다. 그걸 본 내 첫 심정은 솔직히, 암담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지금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는데도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 적폐가 청산되기는커녕, 그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이라고, 독재도 당연했던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국정 교과서가 정부에 의해 무리하게 추진되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국정 교과서는 사실상 불발되었지만, 검인정 기준이 사실상 국정 교과서의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아 이대로라면 무늬만 검인정인 교과서들이 학교 현장에서 사용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국정농단을 저지른 무리들은 지금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지만, 법의 심판이 능사만은 아니다. 최근에 회고록을 펴낸 학살범도 법적으로는 ‘사면’됐다. 그렇기에 지금,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미 있는’ 역사적 쟁점을 가리고 토론하여 역사와 사회에 대한 올바른 기준과 평가를 내리는 일이다. 국정 교과서를 추진했던 무리들의 입에서 나오는 그 ‘올바른 역사’ 말고.

 

  역사적 전환기에 타이밍 좋게 『쟁점 한국사』가 출간되어 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집에는 책 둘 공간이 부족해 전자책으로 샀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사회탐구 과목으로 3사(국사, 한국근현대사, 세계사)를 선택했었지만, 정작 국사, 그러니까 한국 전근대사(고대,중세,근세사)는 왜 배우는지, 빼곡하게 적힌 역사적 사건과 인물과 유적이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등의 의미와 학습 동기(?)를 찾기 어려웠던 과목이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포기하기도 했고(솔직히 입시가 걸려 있는데 점수가 제일 안 나와서 포기했다).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을 양으로 ‘이 와중에 역사한당’ 미션 부여 전부터 전근대편을 읽고 있다. 지금까지 읽고 있다는 것은 내가 전근대편 진도를 잘 못 나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책 속에서 어떤 쟁점을 발견하게 될지, 그 속에서 내가 찾을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 될지, 한 달 간의 역사 산책이 새삼 기대가 된다. (마무리가 급 상투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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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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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창의성을 길러주지 못하는, 틀에 박힌 교육’. 한국의 제도권 중등 교육에 붙은 가장 흔한 비판 중 하나다. 교육 문제에 있어 일종의 내부자라고도 할 수 있는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 교육에 대한 이 비판은 일반적인 만큼 무성의한 측면이 있다.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개성과 창의성을 반기기는 하던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은 아직도 한국 사회의 암묵지이며, 창의성과 열정은 정부와 기업이 국민과 직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레토릭으로 전유한 지 오래다. 그러나 개성과 창의성이 기발한 질문과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처음에 언급한 ‘틀에 박힌 한국 교육’이라는 언설은 결국 질문이 사라진 교육 현장, 질문의 실종을 당연하게 여기는 교육의 현실을 지적하는 것일 테다.

 

  책 제목은 참으로 정직하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라니. 의문문의 형식이지만 사실 무엇이 정말로 궁금하여 묻는 문장이 아니다. 이 문장에는 이미 ‘인간은 어떠한 대상에 대해-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질문을 던져야 한다’라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 해답보다는 질문이다. 해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닌, “본래의 질문을 정확히 파악”(97)하고 추구하는 일부터 선행해야 한다. 그렇기에 제목에서 방점을 찾는다면 ‘질문’이 아닌 ‘어떻게’일 것이다. 답이 정해진 질문, 질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질문이라기보다는 주장에 가까운’1) 질문, 하나마나한 질문 등의 ‘유사 질문’은 질문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텅 빈 말의 형식일 뿐이다.

 

  저자는 질문의 단초를 고전에서 찾았다. 너무 안전한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실 고전을 시대적, 역사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한 ‘2차 고전’은, 과장 조금 보태자면 고전의 수만큼 나왔을 것이니 그러한 생각이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책은 고전의 재해석에 관심이 없다. ‘재해석’이라는 개념 자체가 질문보다는 대답의 성격이 강하다. 저자는 자신의 고전 감상에 굳이 불필요한 무게를 싣지 않는다. 그저 한 명의 책 읽는 사람으로서 고전을 통과하고, 그 접점에서 발생한 생각의 실마리들. 그 실마리들을 저자는 잠시 붙들었다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다시 날려 보낸다. 또 다른 생각과 질문의 확산을 위해서. “영원히 반복해서 읽을 수 있으면서도 똑같이 두 번은 읽을 수 없는 책”(271)이 비단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긴의 경야』뿐이랴. 그렇게 생각하면, 이 책을 발판으로 독자들은 자신의 삶을 통과하는 고전 읽기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질문을 기획하는 데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도 있겠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저자가 다루고 있는 책은 고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2년 전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줌파 라히리의 소설, 거기다 아직 한국에는 출간되지 않은 다양한 저작들까지 망라한 저자의 독서 이력에서 부지런함과 기민함이 느껴진다. 그의 독서 리스트 중 내가 읽은 책은 거의 없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한 기민한 독서가의 독서 리스트를 공유할 수 있는 것에 나름의 기쁨을 느낀다.

 

  교수/학습 모형 중 ‘현시적 교수법’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발생하여 어떤 식으로 확산되는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지극히도 낮은 해상도의 글로 표현하기에는” “내 머릿속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수많은 생각”이 “너무나도 애매모호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254). 글을 읽을 때 어떤 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의 머릿속으로 일일이 들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자신의 사고 과정을 입으로 풀어 설명하는 것, 즉 ‘사고 구술’을 통해 배우는 사람에게 시범을 보이는 것이 현시적 교수법의 핵심이다. 이러한 교육학적(?) 시각에서 보자면, 이 책은 한 독서가의 사고 구술을 채록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함께 홀로”(25) 있으니 생각은 혼자서 한다. 그러니 책을 읽고 생각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참조할 수는 있겠지만, 전범(典範)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질문을 스스로 떠올리는 과정을 거치면 공동체의 질문 역시 단단해지고 정교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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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김현영,「질문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페미니스트 모먼트』, 그린비, 2017, p. 34.

 

 

*본 서평은 출판사 서평이벤트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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