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은 결국 완독하지 않았다. 읽은 책을 기록하는 엑셀 리스트를 찾아보니 작년 4월 중하순에 읽기 시작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고 보니 그 책을 심상하게 펼쳐보았다가 읽기에 가속이 붙어 업무적으로 바쁜 시즌이었음에도 불구하고(=그래서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시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까지 휴대폰을 놓지 못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전자책 어플에는 책의 74% 부분까지 읽은 것으로 나온다. 왜 나는 그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까.

 

다른 책의 경우에도 진도의 8부 능선을 다 넘어서는 끝내 읽지 못한 적이 더러 있으니 그 책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그 책을 읽으며 중간 중간 밥알에 섞인 모래알 같이 걸리는 지점이 더러 있었다. 그러면 선택을 해야 했다. 책을 끝까지 읽고 전반적으로 괜찮았지만 이러이러한 지점은 걸렸다라고 감상을 남기든가, 인류의 고전으로 남을 책이어도 내 성에 차지 않는 지점이 있으므로 지금 여기서 당장 책읽기를 그만두든가. 나는 선택을 하기는 했다. ‘애매한선택.

 

김영하는 책을 읽는 데에서조차 다른 사람이 그 책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신경쓰지 말자고 제안했다. 아니, 강력히 권고했다. (그의 산문집 말하다에 이런 내용이 있을 텐데, 정확히 찾아볼 수가 없다. 양해를.) 그러나 나는 그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 그 책을 읽다 의구심이 든 순간, 나는 가장 쉬운 길,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뭐라고 했을까를 찾아보았다.

 

인터넷서점의 서평은 칭찬 일색이어서 별 가치가 없었고(특히나 시장에서 한창 상한가를 친다는책들의 서평은 서평이란 말이 무의미할 정도로 비평값이 없다), SNS를 찾아봤다. 이런 식의 모래알은 보통 공감을 얻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어서, SNS에나 한두 마디 끄적이는 식으로 적어놓았을 확률이 높다. 역시나,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있다고! 그 모래알이 밥알이 아니고 모래알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는 이렇게나 집단주의적인 사람이다. 나 자신의 판단조차 그대로 믿지 못하고 동조하는 의견을 내는 사람을 반드시 한 사람이라도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

  

  

내가 그 책에서 느낀 모래알은 두 가지.  

 

첫째, 미리 찾아본 부정적 평에 따르면 비유가 과도하다라고 했지만 나는 그게 딱히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의 구절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자신도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행복감에 젖은 강 씨는 매일 밤 봉긋하게 솟은 가슴처럼 부푼 꿈속에서 잠이 들었다.”

 

전후 맥락을 따져 보아도(그냥 사기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는 중이었다), 비유의 원관념(부푼 꿈속)이 가진 성질을 생각해 보아도, 부적절한 비유라는 건 명확해 보인다. 내가 훌륭한 책에 구절 하나 트집 잡는 쫌생이인가? 평균 중년 남성의 젠더 감수성이라는 건 이 정도라고 양해를 해 주어야 하나? (74%까지 읽는 동안 전자책에 표시한 메모를 보니 빻음5’까지 있다. 위와 같은 표현이 저것 하나뿐 만은 아니었다고 그 당시에도 생각했던 것이다)

 

둘째, 저자의 능력은 뛰어나 보인다(그러니까 책도 썼겠지). 그러나 그 뛰어남을 자신하는 것이 지나쳐 다른 사람들은 가벼이 여기는 본질을 나는 꿰뚫어 본다고 드러내는 부분이 있었다. 인권운동가들을 유독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로 보는 시각이 아주 적나라했는데, 여기에 대한 내 대답은 두 가지. “그 사람들이 그걸 모를까요?”(책을 읽을 때 든 일차적 반문), 그리고 님이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게 직업이듯 인권운동가는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활동을 전방위적으로 하는 게 직업인데요?”(글을 쓰며 떠올린 반문)

 

보통 다른 사람이 모르는 걸 나는 알지라는 태도는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태도다. 그런 태도는 재수도 없거니와,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실은 그런 사람들이 더 모른다.

  

  

어찌 되었든, 전자책에는 접었다 편 책 모서리도 없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남은 26%를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로 좋은 책이라면 그럴 수 있다. 수년에 걸쳐 읽는 명작도 존재하는데, 하물며 한 권짜리 책이야. 그러나 나는 끝내 이 책을 읽지 않기로 선택했다. 일주일 전 총선의 결과 때문이다.

 

 

여당의 전례 없는 압승, 야당의 참패...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나는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는 한 지역구의 개표 결과를 유심히 지켜보다 쓴 입맛을 다셨다. 그 책의 저자는, 결국 당선되었다. 내가 절대로 표를 줄 일이 없는 당적을 가지고  

  

나는 따지고 보면 내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사후확신편향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후확신편향은 다른 말로 내 그럴 줄 알았어(I knew it)’) 결과를 다 보고 나서야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인과율의 실에 꿰는 일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별도의 성찰과 전망 없이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사후확신편향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정말로 자신이 처음부터그 일이 그리 흘러갈 줄을 알았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괜히 확신이라 하겠나. 당신에게는 성찰이 없다는 것도, 당신의 깊이는 얕다는 것도 결과가 나온 이후에는 말할 수 없다. 모든 것은 결과가 증명하니까.

 

그런데 그런 짓을 내가 하고 있다니. 나는 역시 이 세상에 흔한 군중1, 시정잡배1이다.

  

  

내가 요 며칠간 집중해서 완독한 에세이집(?)은 그 책과 공통점을 몇 가지 공유한다. 첫째, 저자가 소위 말하는 전문직이다. 둘째, ‘시장에서 상한가. 셋째, 다 읽고(혹은 읽는 도중에) 석연찮은 지점이 몇 있었다. (마음에 들어오는 구절도 몇 있었지만, 석연찮은 지점이 있었다는 문장 바로 뒤에 마음에 들어오는 구절을 붙이면 누가 그 진정성을 믿어줄까?)

 

내가 이 에세이집의 저자를 완전히 비토veto하지 않는 건 그가 아직은 당적이 없어서이기 때문일까? 이렇게 협의의 정치에 집착하는 소인배라니. 나는 내 일조차 앞으로 잘 소화해내기 글러먹은 모양이다.

  

  

에세이집까지 읽고 나니 저자의 전작을 모두 한 번씩은 읽은 셈이 되었다. 비교적 유망한 신진(?) 작가를 잘 발견하는 것은 중요하다. 몇 권 안 되는 책을 나올 때마다 읽고는 나는 떠오르는 대세 누구누구의 책을 모두 읽은 전작주의자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누구한테 할 수 있을까? 책 이야기를 대놓고 좋아하는 사람은 주위에 몇 없어 보인다)

 

시간과 돈, 에너지, 그리고 육아로부터의 해방(가장 중요하다)이 주어진다면 꼭 얻고 싶은 타이틀이 있다. 바로 강준만 전작주의자라는 타이틀.

 

하지만 내 독서 속도로는 남은 30대를 그의 역사 산책 시리즈 읽기에만 바쳐야 할지도 모른다. 많은 것이 제약되는 환경에서의 책읽기는, 선호하는 책의 주제나 유형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고 싶지만 현실은 다섯 시간 뒤의 기상을 걱정한다.

 

 

나는 왜 그 모래알이 씹히는 순간에 그 책의 모래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을까?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리만큼 의식하기 때문에, 모래알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 책을 좋게 보았던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것까지 염려했던 것일까?

 

개취로 모든 것이 용인되는 시절에 개취를 말하지 못하는 역설.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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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0 0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20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20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20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회사에서 중요시하는 업무 능력 중 하나는 글쓰기이다. ‘글쓰기’라고 하니 너무 일상적이어서 업무의 연장선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표현이 없을까? ‘문서 작성 능력’ 정도가 좀 더 정확하겠다. 문서 작성은 글(문자)로 시작해 글로 끝나는데, 왠지 글쓰기와는 차원이 다른, 별도로 익혀야 할 새로운 능력 같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글을 잘 쓴다’는 평을 주위에서 곧잘 듣는다. 겉으로는 겸손하게 ‘아유, 아닙니다, 아직 더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라고 답한다. 속으로는 짐짓 뿌듯해 하며 생각한다. 정말 그런가?

  1n년 전에는 그랬는지도 모른다. 대학 입학 전까지 갈고닦은 온라인 논평 활동(=키보드 워리어질) 덕분인지, 별다른 고민 없이 글이 술술 써졌다. 지금에 와서야 현학적이라고 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그 당시 ‘내 기준으로는’ 나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좋기까지 한 결과물이 노력하지 않고도 쏟아졌다.

  ‘과거에 취한 자는 죽은 자다’라고 어떤 유명한 프로게이머가 얘기했다던가. 나는 정확히 그의 선언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업무 외적으로 글을 쓴 지도 오래 되었으면서 여전히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 말야...’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택도 없는 것을 안다. 아니까 오늘부터 뭐라도 써 보려고 한다. 이것도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언제 소리 소문 없이 그만둘지 모르지만.

  얼마 전 회사에서 신규직원 대상 교육을 진행했다. 나이가 들었는지, 아니면 아직 신규라 그런지, 이제는 자기계발 주제의 강의도 온순히 잘 듣는다. (아니면 대놓고 ‘노오력’이니 ‘아프니까 청춘이다’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지 않는, 최근 변화한 자기계발 분야 트렌드 덕분인지도.)

  얼마 전 강의인데도 대부분을 까먹었다.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내용이 있는데, ‘필요’와 ‘중요’의 구분이다. 강사가 든 비유는 이렇다. 세상에 필요한 것은 많다. 당장 물이 그렇다. 물은 절대적으로 우리 삶에 필요하다. 물 안 마시면 얼마 못 가 죽으니까. 그런데 ‘중요’는 ‘필요’와 다른 것이다. 이미 목마름이 해결된 사람에게도 물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지만, 더 이상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물은 필요한 것이니까 너는 물을 마셔야 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물 먹이는 짓이다.

  내가 까먹은 대부분에 물 비유의 결론도 있는데... 회사의 일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은 당연하니 누군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하라고 했던가? 강사님 죄송합니다. 좋은 강연이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데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왜곡의 소지를 남겼네요.

 

  다시 ‘글’에 대해 생각해 본다. 회사에서 업무를 진행하는 데 있어 ‘글’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 내부에서 필요한 글을 쓰는 능력의 계발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글과 능력이 퇴근을 함과 동시에 내 삶에서는 더 이상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물론 출근을 하며 다시 중요하다고 생각해 보려 애를 쓰긴 한다).

  필요하지만 내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글을 쓰느라, 누군가가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나에게 중요한 글을 쓸 기회를 생각하지 못하지는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든다.

 

#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글을 잘 쓰지 못하는 내가 자문자답해도 될까?

  두 가지가 같이 간다. ‘어휘’와 ‘구조’다.

  사람들은 흔히 창의성이 누구나 생각하지 못했던 비범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창의성은 이미 있던 것을 언제(어휘), 어떻게(구조) 가져오느냐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주장의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해, 글을 아주 잘 쓰는 이정모 박사님의 글 일부를 인용한다.

 

 

 

 

 

 

 

 

 

 

 

 

 

 

 

  “창의성이란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슨 괴상한 생각을 해내는 게 창의성이 아니다. 해 아래에 새로운 것은 없다. 창의성이란 있는 것들을 이렇게 엮고 저렇게 편집하여 새로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창의성의 근본 바닥에는 기억된 지식이 있다. 기억이 없으면 창의성도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창의성」,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중

 

 

  글의 앞부분에서 나는 내가 글을 잘 쓴다는, 주위의 견해를 빙자한 자기자랑을 인용한 적이 있다. (자의식이 항상 과잉 상태인 사람에게 칭찬의 말은 (어쩌면) 평생토록 기억된다. 그렇기에 ‘과거에 취한 자’의 비극은 앞으로 계속될지도.) 이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한데, 내가 회사 업무를 하면서 글에 써야 될 어휘와 구조를, 보통의 신규직원들보다는 조-금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럼 그 어휘와 구조를 어디서 배웠을까? 깜으로? 아니고, 역시 보통의 신규들은 굳이 안 했어도 될 경험을 하면서 체득한 것이다. (동기들 모임에 가 보니 내가 약간 중고신인처럼 느껴졌다)

 

  회사 사람들에게는 어쩌다, 옛날에 시를 쓴 적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마치 앞으로 시를 영영 쓰지 않을 사람처럼.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시는 어렵다고. 시를 쓰거나 썼다고 이야기하면 들을 수 있는 흔한 반응이다.

  흔한 반응은 괜히 흔한 반응이 아니다. 요즘 시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의외로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에게서도 나온다. 아, 옛날 시는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요즘 시는 난해해. 어려워.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해...

  일부는 사실이다. 두 번 세 번 읽어도 안 읽히는 시가 있다. 그런데 그게 온전히 그 개별 작품의, 또는 시라는 장르 자체의 잘못이냐라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독자 탓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 시대가 어느 시댄데 독자 탓을 하나, 하기를. 하나 정확히 해 두자는 것이다. 시의 스펙트럼은 넓다. 여기서의 ‘스펙트럼’은 대유에 가깝다. 가시광선은 눈에 보이니 좋고 X선은 오래 쬐면 인체에 유해하니 나쁜가? 시를 일직선상으로 줄 세울 수 없다는 점에서 시라는 장르에 보다 더 적합한 대유는 ‘프리즘’일지도 모른다. 여튼.

 

  다시 ‘어휘’와 ‘구조’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시의 어휘는 난생 처음 들어본 것이 의외로 별로 없다. 그럼에도 어렵게 읽히는 시들이 있다면, 그 문장과 행, 연의 구조를 유심히 살펴보길 바란다. 모 시인은 초기에 저도 모르는 새 ‘미래파’로 묶여 난해하다 소리를 듣는 게 그렇게 싫었다고 한다. 나는 그 시인에 대한 평론을 굳이 찾아보지는 않고, 시인의 시집을 주루룩 사서 주루룩 훑었다. ‘필’이 꽂히는 몇 편의 시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이 집에 자주 들르는 이유도 커다란 유리창 때문이라고 말했지. 망원경의 성능이 좋아질수록 밤하늘에 나타나는 별들도 많아지니까.

 

  뭐? 우리 동네에 커피 전문점이 부쩍 많아진 이유가 커다란 유리창 때문이라고? 백 년 전 젊은이들에게 유리창은 모던하고 신비로운 물체였어. 세상의 모든 골목에서는 유리창을 깨뜨린 아이가 혼쭐나는 날들이 백 년 동안 반복되었지 유리창은 있으나 없으나 똑같을 것 같은데.

 

  똑같다고 말할 때, 너는 잠깐 이 세상에서 가장 순진한 얼굴이 되었다. 이 바보야, 이렇게 환한 커피 전문점에서 유리창이 밤을 밀어낼 때, 어둠은 거울 속처럼 너의 얼굴을 가져간다.

 

  커피를 마시며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 이번엔 꼭 시험에 합격하여 공무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섯 시 정각에 퇴근하는.

 

  여기에 앉아 있으면 저녁 여섯 시 무렵부터 시작되는 마술을 볼 수 있지. 세상의 모든 커피 전문점 2층의 천장에 박힌 알전구들이 유리창 너머 허공 속으로 한 개씩 한 개씩 늘어서는…… 놀라운 광경을. 나는 저녁 여덟 시에 청색 하늘에 떠 있는 전구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친구를 한 명씩 한 명씩 잃어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유리창 너머에서.

 

  사람들은 백 년 동안 한결같이 유리창을 사랑했다는 생각이 들어. 유리창을 통과하여 찻집으로 날아든 하얀 새를 보면서, 유리창이 가짜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새가 가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마주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어.

 

 

 

 

  시를 열심히 쓰고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에 이런 시를 보았을 때는, 너무나도 좋은 감정이 생기는 것과는 다른 한편으로 ‘나는 이렇게 시를 절대 쓸 수 없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시와 거리가 생겨서인지는 몰라도, 좋은 시는 좋은 시대로 남겨두자는 마음이 먼저다. 그러고 보면, 시 합평 수업에서 어떤 선생님은 ‘너는 너대로 써야지’라고 했다. 원론적이면서 맞는 말이다.

  나대로 쓰는 것, 나다운 것이 무엇일지는 다른 문제이다. 나는 어쩌면 입사 준비라는 시기를 거치면서 시의 어휘와 구조를 많이 잊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게 중요한 것인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다. ‘나의 이야기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형식’이 시인 듯 보였지만, 사실 나의 이야기란 입사하고 일상을 살아내는 와중에 자연스레 탈각될 그 정도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형식에 대한 고민은 아직도 있다. 하다못해 이러한 글을 공개된 곳에 올리는 문제에도 여러 가지 생각이 딸려 있다.

 

 

 

 

 

 

 

 

 

 

 

 

 

 

 

  마음이 꺼지지 않을 당분간은 작은 시집을 간간이 읽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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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사정으로 알라딘 서재에서의 글쓰기 활동을 중단하고자 합니다.

사정이 회복되면 활동을 재개하고자 하나, 빠른 시일 내에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친구분들의 좋은 글에 '좋아요'를 찍는 정도는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제 자신이 글이나 댓글을 쓰지는 못할 것입니다.

본래 개인적인 사정은 글에서 어느 정도 밝히려고 했으나, 비극 포르노를 제공한다는 생각이 들어 밝히지 않습니다.

 

얼마 되지 않지만, 제 서재를 찾아주신 분들께 그간 감사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는 일 모두 잘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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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2-29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ㅠㅠㅠㅠ 얼른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2017-12-31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22-01-21 0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도 넘 오래 걸리시네요. ㅠㅠ 새해 인사는 설날 하기로 할게요. 잘 지내시는 겁미꽈??

2022-02-01 1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 종류의 SNS를 사용한다. 알라딘 블로그까지 하면 세 종류지만, 이건 이제 막 시작했으므로. 쨌든. 이들 SNS의 초기 타임라인을 구성한 건 N년 전의 나인데, 지금의 나와는 정치적 성향이나 가치관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 역시 다르다. 그 결과 내 SNS 타임라인에서는 주요 대선후보의 지지자들을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2번 빼고.

  링크한 기사에서는 '대선 과몰입' 현상을 이야기한다. 멋대로 요약하자면, 대선 과몰입이란 지지하는 후보가 비판받는 것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때로는 그 후보를 위해 자발적으로 준-선거운동을 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기사 말미에는 전문가의 의견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는 이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한편 이에 따른 해결책으로 '인터넷으로부터의 도피'를 제시한다.


  SNS가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한 만큼, SNS 정체성(identity)을 둘러싼 담론도 많이 생산된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SNS 정체성 담론의 전환적, 보편적 패러다임이 제시되지 않았다고 본다. SNS 정체성과 기존의 정체성 사이의 관계가 서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사실 잘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기존의 관습 체계, 그러니까 SNS가 지금처럼 익숙하지 않았던 몇 년 전까지의 생각하던 습관에 따라 SNS를 오프라인으로부터 쉽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이라 여긴다. SNS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 중 하나가 '확증 편향'이라는 데에서도 이런 일반적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오프라인과 달리' 자기의 선호 체계에 따라 인간관계를 재구성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니 이 얼마나 편협하냐, 라는 생각. 실제로 이 비판은 현상의 경향성을 일정 정도 반영한 것이기는 하다.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도 자신의 입장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져 버리니 말이다. (요즘 내 SNS 타임라인을 보면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다.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이 비판은 인간관계의 본질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인간관계는 스트레스다.' 사고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의 말도 경청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온다. 나만 하더라도, 모 SNS에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럴 듯한 흰소리로 여성 문제를 호도하는 '자칭 전 논객'을 볼 때마다 '피꺼솟'한다. (알라딘에는 자신의 저서 비판에 장문의 분노를 리뷰랍시고 직접 올리신 분이기도 하다. 페미니스트를 그렇게 싫어하시면서 '페미니즘의 포비아 확산'에 관한 책 어쩌구 '~~~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으로 곧 출간하신다는 그 분!!!) 그럼에도 그의 SNS 팔로우를 끊지는 않는다. 내 인성이 훌륭해서는 아니다. 다만 남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확증 편향의 오류에 빠지고 싶지는 않다.


  물론 안다. SNS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달게 받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 좋자고 하는 건데, 굳이 스트레스 받아야 하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 나 하나 무기를 내려놓는다고 뭐가 바뀌나? 하는 회의적인 생각도 든다. 사실 나부터가 은연중에 스트레스를 받아 왔는지도 모른다. 당장 이렇게 누가 읽을지도 모르는 글을, 이런 황금 같은 주말에 길게 쓰고 있지 않은가(물론 나는 수험생이므로 주중/주말 구분이 의미 없다).


  탄핵이라는 역사적 전환기 이후의 첫 대선이니만큼 이 대선은 중요하다. 각 후보 지지자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후보들에게는 나름의 한계가 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 한 명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려 한다. 정치가 진정 차악을 선출하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수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부딪쳐야 한다. 어떤 지점에서 후보를 비판하고 어떤 지점에서 후보를 지지하고 수용하기로 할지, 왔다리 갔다리 하는 생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 속에 이미 들어 있다. 이 말에는 '수용'에 무게추가 쏠려 있긴 하지만, 정당한 비판이라면 그 비판을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

 

  글 쓰느라 나 혼자 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 할많하않.

 

  *사족: 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칠 때 '예상 독자를 고려하라'고 한다. 이 글을 누가 읽을 것인지 염두에 두고 써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당초 이 글은 내가 이용하는 한 SNS에서 특정 후보를 과도하게 지지하는 지인의 말이 날이 갈수록 과격해지기에 그가 한 번 보았으면 해서 썼다. 누가 어떻다, 이런 이야기를 글에 쓰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는 내 글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글을 약간 고쳐서 다시 썼다. 그의 구체적인 말들이나 가치관을 여기에 그대로 옮기면 그야말로 '뒷담화'가 되는 것이니, 진짜로 여기까지.

 

  인생은 고통이다. 할많하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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