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중요시하는 업무 능력 중 하나는 글쓰기이다. ‘글쓰기’라고 하니 너무 일상적이어서 업무의 연장선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표현이 없을까? ‘문서 작성 능력’ 정도가 좀 더 정확하겠다. 문서 작성은 글(문자)로 시작해 글로 끝나는데, 왠지 글쓰기와는 차원이 다른, 별도로 익혀야 할 새로운 능력 같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글을 잘 쓴다’는 평을 주위에서 곧잘 듣는다. 겉으로는 겸손하게 ‘아유, 아닙니다, 아직 더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라고 답한다. 속으로는 짐짓 뿌듯해 하며 생각한다. 정말 그런가?
1n년 전에는 그랬는지도 모른다. 대학 입학 전까지 갈고닦은 온라인 논평 활동(=키보드 워리어질) 덕분인지, 별다른 고민 없이 글이 술술 써졌다. 지금에 와서야 현학적이라고 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그 당시 ‘내 기준으로는’ 나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좋기까지 한 결과물이 노력하지 않고도 쏟아졌다.
‘과거에 취한 자는 죽은 자다’라고 어떤 유명한 프로게이머가 얘기했다던가. 나는 정확히 그의 선언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업무 외적으로 글을 쓴 지도 오래 되었으면서 여전히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 말야...’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택도 없는 것을 안다. 아니까 오늘부터 뭐라도 써 보려고 한다. 이것도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언제 소리 소문 없이 그만둘지 모르지만.
얼마 전 회사에서 신규직원 대상 교육을 진행했다. 나이가 들었는지, 아니면 아직 신규라 그런지, 이제는 자기계발 주제의 강의도 온순히 잘 듣는다. (아니면 대놓고 ‘노오력’이니 ‘아프니까 청춘이다’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지 않는, 최근 변화한 자기계발 분야 트렌드 덕분인지도.)
얼마 전 강의인데도 대부분을 까먹었다.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내용이 있는데, ‘필요’와 ‘중요’의 구분이다. 강사가 든 비유는 이렇다. 세상에 필요한 것은 많다. 당장 물이 그렇다. 물은 절대적으로 우리 삶에 필요하다. 물 안 마시면 얼마 못 가 죽으니까. 그런데 ‘중요’는 ‘필요’와 다른 것이다. 이미 목마름이 해결된 사람에게도 물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지만, 더 이상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물은 필요한 것이니까 너는 물을 마셔야 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물 먹이는 짓이다.
내가 까먹은 대부분에 물 비유의 결론도 있는데... 회사의 일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은 당연하니 누군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하라고 했던가? 강사님 죄송합니다. 좋은 강연이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데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왜곡의 소지를 남겼네요.
다시 ‘글’에 대해 생각해 본다. 회사에서 업무를 진행하는 데 있어 ‘글’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 내부에서 필요한 글을 쓰는 능력의 계발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글과 능력이 퇴근을 함과 동시에 내 삶에서는 더 이상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물론 출근을 하며 다시 중요하다고 생각해 보려 애를 쓰긴 한다).
필요하지만 내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글을 쓰느라, 누군가가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나에게 중요한 글을 쓸 기회를 생각하지 못하지는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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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글을 잘 쓰지 못하는 내가 자문자답해도 될까?
두 가지가 같이 간다. ‘어휘’와 ‘구조’다.
사람들은 흔히 창의성이 누구나 생각하지 못했던 비범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창의성은 이미 있던 것을 언제(어휘), 어떻게(구조) 가져오느냐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주장의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해, 글을 아주 잘 쓰는 이정모 박사님의 글 일부를 인용한다.
“창의성이란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슨 괴상한 생각을 해내는 게 창의성이 아니다. 해 아래에 새로운 것은 없다. 창의성이란 있는 것들을 이렇게 엮고 저렇게 편집하여 새로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창의성의 근본 바닥에는 기억된 지식이 있다. 기억이 없으면 창의성도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창의성」,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중
글의 앞부분에서 나는 내가 글을 잘 쓴다는, 주위의 견해를 빙자한 자기자랑을 인용한 적이 있다. (자의식이 항상 과잉 상태인 사람에게 칭찬의 말은 (어쩌면) 평생토록 기억된다. 그렇기에 ‘과거에 취한 자’의 비극은 앞으로 계속될지도.) 이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한데, 내가 회사 업무를 하면서 글에 써야 될 어휘와 구조를, 보통의 신규직원들보다는 조-금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럼 그 어휘와 구조를 어디서 배웠을까? 깜으로? 아니고, 역시 보통의 신규들은 굳이 안 했어도 될 경험을 하면서 체득한 것이다. (동기들 모임에 가 보니 내가 약간 중고신인처럼 느껴졌다)
회사 사람들에게는 어쩌다, 옛날에 시를 쓴 적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마치 앞으로 시를 영영 쓰지 않을 사람처럼.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시는 어렵다고. 시를 쓰거나 썼다고 이야기하면 들을 수 있는 흔한 반응이다.
흔한 반응은 괜히 흔한 반응이 아니다. 요즘 시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의외로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에게서도 나온다. 아, 옛날 시는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요즘 시는 난해해. 어려워.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해...
일부는 사실이다. 두 번 세 번 읽어도 안 읽히는 시가 있다. 그런데 그게 온전히 그 개별 작품의, 또는 시라는 장르 자체의 잘못이냐라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독자 탓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 시대가 어느 시댄데 독자 탓을 하나, 하기를. 하나 정확히 해 두자는 것이다. 시의 스펙트럼은 넓다. 여기서의 ‘스펙트럼’은 대유에 가깝다. 가시광선은 눈에 보이니 좋고 X선은 오래 쬐면 인체에 유해하니 나쁜가? 시를 일직선상으로 줄 세울 수 없다는 점에서 시라는 장르에 보다 더 적합한 대유는 ‘프리즘’일지도 모른다. 여튼.
다시 ‘어휘’와 ‘구조’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시의 어휘는 난생 처음 들어본 것이 의외로 별로 없다. 그럼에도 어렵게 읽히는 시들이 있다면, 그 문장과 행, 연의 구조를 유심히 살펴보길 바란다. 모 시인은 초기에 저도 모르는 새 ‘미래파’로 묶여 난해하다 소리를 듣는 게 그렇게 싫었다고 한다. 나는 그 시인에 대한 평론을 굳이 찾아보지는 않고, 시인의 시집을 주루룩 사서 주루룩 훑었다. ‘필’이 꽂히는 몇 편의 시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이 집에 자주 들르는 이유도 커다란 유리창 때문이라고 말했지. 망원경의 성능이 좋아질수록 밤하늘에 나타나는 별들도 많아지니까.
뭐? 우리 동네에 커피 전문점이 부쩍 많아진 이유가 커다란 유리창 때문이라고? 백 년 전 젊은이들에게 유리창은 모던하고 신비로운 물체였어. 세상의 모든 골목에서는 유리창을 깨뜨린 아이가 혼쭐나는 날들이 백 년 동안 반복되었지 유리창은 있으나 없으나 똑같을 것 같은데.
똑같다고 말할 때, 너는 잠깐 이 세상에서 가장 순진한 얼굴이 되었다. 이 바보야, 이렇게 환한 커피 전문점에서 유리창이 밤을 밀어낼 때, 어둠은 거울 속처럼 너의 얼굴을 가져간다.
커피를 마시며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 이번엔 꼭 시험에 합격하여 공무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섯 시 정각에 퇴근하는.
여기에 앉아 있으면 저녁 여섯 시 무렵부터 시작되는 마술을 볼 수 있지. 세상의 모든 커피 전문점 2층의 천장에 박힌 알전구들이 유리창 너머 허공 속으로 한 개씩 한 개씩 늘어서는…… 놀라운 광경을. 나는 저녁 여덟 시에 청색 하늘에 떠 있는 전구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친구를 한 명씩 한 명씩 잃어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유리창 너머에서.
사람들은 백 년 동안 한결같이 유리창을 사랑했다는 생각이 들어. 유리창을 통과하여 찻집으로 날아든 하얀 새를 보면서, 유리창이 가짜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새가 가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마주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어.
시를 열심히 쓰고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에 이런 시를 보았을 때는, 너무나도 좋은 감정이 생기는 것과는 다른 한편으로 ‘나는 이렇게 시를 절대 쓸 수 없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시와 거리가 생겨서인지는 몰라도, 좋은 시는 좋은 시대로 남겨두자는 마음이 먼저다. 그러고 보면, 시 합평 수업에서 어떤 선생님은 ‘너는 너대로 써야지’라고 했다. 원론적이면서 맞는 말이다.
나대로 쓰는 것, 나다운 것이 무엇일지는 다른 문제이다. 나는 어쩌면 입사 준비라는 시기를 거치면서 시의 어휘와 구조를 많이 잊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게 중요한 것인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다. ‘나의 이야기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형식’이 시인 듯 보였지만, 사실 나의 이야기란 입사하고 일상을 살아내는 와중에 자연스레 탈각될 그 정도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형식에 대한 고민은 아직도 있다. 하다못해 이러한 글을 공개된 곳에 올리는 문제에도 여러 가지 생각이 딸려 있다.
마음이 꺼지지 않을 당분간은 작은 시집을 간간이 읽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