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엔 먼 미래라 실감할 수 없는 죽음, 그러나 죽음 앞에 예외는 없다. 그것은 원초적인 인간의 두려움, 한계인데, 멀리 있다고 생각하기에 두려움으로 당장 받아들이지 않을 뿐. 평균 수명은 자꾸만 늘어나고 있고, 때문에 자연을 지배한 인간은, 이 우주의 주인공이라고 되는 양 멈추어야 할 때 멈추는 법이 없다. 그것이 오만인데, 간략하게 우리 인류가 이런 오만으로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 어떤 경고음이 들려오는지 그런 설정에서 정리해보려 한다.


이 전쟁은 실제일까? 그리고 왜 일어났을까?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1권에서 27년 전쟁(기원전 431~404)의 역사 쓰기에 앞서 그리스 역사를 살핀다. 그리고 이 전쟁(트로이아 전쟁)이 일어난 배경, 아니 '인간들의 전쟁이 왜 발생하는지'를 고찰한다. 역사에 편입시키기엔 신적인, 신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1)실제일까, 에 대한 반증은 페르시아의 두 차례에 걸친 그리스 침공이 아닐까. 2)왜 일어났을까와 관련하여, 에우리피데스가 나름 해석했는데, 비극 <헬레네>다. 전쟁 발발의 도화선인 그 헬레네는, 트로이로 간 헬레네는 그저 환영일 뿐이었다는 설정, 여기서 제우스의 전쟁 기획설에 설득된다. 사람들을 좀 솎아내자. 트로이아 전쟁은 그런 이벤트였던 것이다.


'대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제우스는 청동 인류를 멸망 시키기 위한 기획을 실행한다. 앞서 거론한 트로이아 전쟁 취지와 다를 바가 없다. 제우스가 대홍수를 일으켜 청동 종족을 멸하고자 할 때, 이들 부부는 프로메테우스의 조언에 따라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는다(『그리스 신화』1.7.2.).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가 낳은 딸 퓌르라와 프로메테우스 아들 데우칼리온 부부다. 이들은 믿는 이들 혹은 믿는 서양인들의 시조다. 이름 그대로 신들의 계보는 신들 족보이니까, 이렇게 되었다고 해요, 하는 것이고, 그것이 구약인가, '노아의 방주' 신화다. 철학과 종교가 한 맥락이다. 다른 버전은 영화 <2012>, SF영화 <엘리시움> 등 



전쟁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총칼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경제 붕괴로 인한 기아, 또 하나 전쟁의 단골 손님 질병, 원인모를 전염병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 바다를 영토 삼아 싸우는 아테나이 제국은 해볼만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농지를 내어주고 도심으로 소개시킨 피란민 사이에 전염병아 돌아 전의를 상실한다. 이 전쟁의 지휘관 페리클레스마저 전염병으로 사망한다. 

인류의 대전환기를 이끈 것은 코로나19였다. 벌써 4년째다. 3월 10일 0시 기준, 전 세계 코로나증-19 누적사망자는 600만 2,311명, 누적확진자수는 4억 4,280만 6,223명이란다. 기원 전(BC)과 후(AD)로 나누듯, 코로나19는 또 다른 인류사를 가르는 기준이 될 참이다. 『코로나 사피엔스』 이후 달라지는 세계 속 국내 상황을 진단한다. 관련 책들 중 『공간의 미래』에 주목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인간(人間)의 간은 사이 간(間)이다. '간'은 관계 그 이상의 의미다. 인격(人格)은 또 어떤 가, 나무(木)와 나무가 일정한 거리 유지를 해야 모두 생존하듯이 인간 삶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부의 총량이 늘어났음에도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가 극대화된 세계 곳곳은 아미 전쟁 중이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왔다. 누군가의 기획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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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30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번역은 반역인가-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박상익 지음, 푸른역사, 2006-02-10 초판출간 2006년) 표지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태다. "지금까지 번역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더디지만 꾸준히 그리고 정확히 번역을 하고자 노력해온 저자 박상익은 ‘번역은 반역이 아닐 뿐더러, 우리는 그들처럼 번역의 근원적 문제를 따지고 있을 팔자가 아니다’고 꼬집는다."(이 책의 출판사 책소개 중) 그러나 번역가들을 위한 환경은 거의 나아지지 않았고, 물가인상을 감안할 때 그나마 지급되던 번역지원금도 줄어든 상태. 박상익은 이 책의 전면개정판이라고 해야 할까, 나아지지 않은 번역 환경에 대한 격문을 담은 또 한 권을 책을 펴낸다.  

『번역청을 설립하라-한 인문학자의 역사적 알리바이』(박상익 지음, 유유 2018-01-08)가 그 책인데, 12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은 국가의 번역지원사업(여느 기간산업과 다를 바 없건만)에 답답함을 토로하고,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까지 몸소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위 표지사진을 올리고, 표지 디자인 관련 에피소드를 밝혀 놓았는데, 안타까운 현실을 담고 있으면서도 흥미롭다. 


"이 책(『번역은 반역인가)의 편집이 다 끝난 후 편집자가 연락을 해 왔다. 표지 디자인을 맡기는 단계인데 디자이너에게 책의 콘셉트를 한마디로 뭐라고 전달하면 좋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각 "분노!"라고 대답했다. 한글이 자랑스럽다고 떠들어 대면서 그에 상응하는 한국어 콘텐츠 확충에는 무관심한 우리 사회의 이중성에 대한 분노가 이 책의 집필 동기였기 때문이다."



화질이 좋지 않아서인지, 표지디자인의 컨텝트인 '분노'가 어떻게 담겨 있는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켜켜이 쌓인 '스트레스'인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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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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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TV를 켤 수가 없었다. 뉴스 보기 싫어 인터넷도 하지 않았다. ‘근소한’이라는 말이 무색할 표차로 대선 결과가 엇갈리면서 패닉 상태였다는 이들의 토로다. 그런데 그 ‘한동안’이 오래 가지 않을 것 같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예측가능성 없는 당선자의 무리한 행보인데, 어떤 이들은 거두절미 ‘국방부 사건’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곧 이어질 지방선거다. 또 한 차례 표심으로 심판할 기회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분노란 똑똑 떨어지는 꿀보다 달콤해서 

인간의 가슴속에는 점점 커지는 법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2권 2장 ‘분노’)에서 『일리아스』(18권, 109~110행) 한 대목을 인용하고 “분노에는 (……) 즐거움이 수반된다.”며 ‘분노’라는 감정의 실체를 밝힌다. 분노에는 쾌감이 수반된다. 곧 분노는 욕구의 일종이라는 전제가 흥미롭다. [이거 뭐지?] 숱한 여론조사에서도 속내를 읽을 수 없던 2030여성들의 표심이 선거일에 임박해서야 한 후보 쪽으로 움직였고, 선거의 막판변수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진단은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석패하자마자 당일(2022.3.10.에 개설한 한 인터넷카페(네이버)에는 보름 정도에 15만 가입자를 넘길 만큼 문전성시다. 가장 핫(HOT)한 카페 1위로 떠오른 것. 필자도 며칠 후에 가입하여 가끔 눈팅하며 ‘좋아요’를 누르는 정도로 참여하고 있다. 2030여성들이 주도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카페에 참여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들 중 한 명일지 모를 우리 딸의 생각이 궁금해서다. 카페 이용규칙에는 ‘페미니즘’ 관련 항목도 있는데, 1)관련 이야기를 금지하자. 2)다른 단어를 쓰자(예: 이퀄리즘) 등 네거티브를 지양하기 위한 노력이 신선하면서도 선배 세대로서 반성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분노는 자신이나 자신의 친구가 까닭없이 명맥하게 멸시당한 것을 두고 

복수하고 싶어하는, 고통이 따르는 욕구다.”

(만약 분노가 그런 것이라면) 분노하는 사람은 1)인류 전체가 아니라 특정 개인에게 화를 낸다. 2)특정 개인이 분노하는 사람 자신이나 그의 친구를 해코지했거나 해코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3)이런 ‘모든 분노에는 언젠가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즐거움’이 수반된다. 왜 분노가 즐겁지?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달성할 수 없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분노하는 사람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목표로 삼는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은 즐거운 것이니까” 

그리고 앞서의 『일리아스』 한 대목을 인용한다. 사람들은 복수하겠다는 생각에 온 정신을 쏟기에 분노에는 쾌감이 따른다고 한다. 가능하다면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래도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대선이 끝났는데, 한 차례 복기는 필요하지 않을까. 

20대 대선은 한판의 분노 마케팅이었다. 그 분노를 조직한 키워드는 ‘정권교체’였다. 정당의 목적은 정권을 잡는 것이므로, 대선에서 정권교체는 야당의 프리미엄으로 으레 상수로 작동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도 ‘정권교체’는 새로울 것도 없거니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직 대통령의 국정수행 평가가 역대 최고를 유지하고 있기에 의외였다. 결과적으로 이 키워드는 강력한 프레임으로 작동했다. [기승전‘정권교체’]였다. 수세에 몰린 여당은 ‘정치교체‘로 대응하고 늦었지만 ’통합정부‘ 카드로 맞섬으로써 그나마 근소한 차이로 석패하여 ’졌지만 잘 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식, 법과 상식] 판사들은 늘 ’법과 상식에 따라‘ 판결했다고 말한다. 이때 법은 성문법(成文法)이고, ’상식‘은 모든 경우(판례)를 글로 쓴 법률로 규정할 수 없으므로, 전통과 관습 등에 따르는 불문법(不文法)의 장점으로, 보완하였다는 의미에서 ’상식‘이다. 그런데, 상당수 판결도 그렇고 이 ’상식‘이 문제다. 지난 대선 과정을 복기하면서 ’상식‘ 운운하는 것은, 그것이 ’실제 그 자체‘이거나 ’실제 그런 것으로 보이‘거나 상식에 기반하여 프레임이 만들어지고, 프레임 전쟁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분노‘는 그렇게 ’상식‘을 주재료로 하여 조직되고 유포된다.  


’분노‘라는 감정을 설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첫 인용의 출처가 『일리아스』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그의 『수사학』은 『시학』과 떼어놓을 수 없는 쌍둥이 저작인데, 한국어 콘텐츠로 새로 태어난 두 고전이 한 권으로 묶이기까지, 거기에는 각별한 사연이 있다. 천병희 옮김 『수사학/시학』에서 『수사학』은 최초의 원전번역이다. 반면에 천병희 『시학』은 1980년대 어느 시점으로 거슬러가야 할만큼 천병희 선생의 대표 번역이었다. 그랬는데, 천병희 선생의 원전번역들을 꾸준히 출판해온 출판사(숲) 『수사학/시학』을 펴내면서, (문예출판사로부터) 시학의 판권을 가져와, 한 권으로 묶이게 된 것. 연구이든 창작이든 문학전공자들에게 『시학』은 지금도 전공필수 서적이기에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신학기에 움직이는 책이다. 

그런데 『시학』은 그리스 서사시와 비극 장르의 실체를 밝히는 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한다. 『일리아스』는 곧 서사시라는 장르 그 자체일 만큼 대표 텍스트이고, 신화와 비극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일리아스』의 주제가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잠시 『수사학』의 '분노'에 대입해보자.  

분노하는 사람(아킬레우스)은 1)인류 전체가 아니라 특정 개인(아가멤논 왕)에게 화를 낸다. 2)특정 개인(아가멤논)이 분노하는 사람 자신(아킬레우스)이나 3)그의 친구(파트로클로스)를 해코지했거나 해코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일리아스』의 시작이며, 끝이다. ’분노의 생성에서 소멸까지 그 과정이『일리아스』라는 진단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 몫의 전리품인 브리세이스를 빼앗는다. 아킬레우스에게 브리세이스는 ’사랑이면서 명예‘였다, 사람도 명예도 빼앗김으로써 아가멤논을 향한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생성된다. 『일리아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런데 그(아킬레우스)의 친구를 해코지한 이가 있다. 트로이아의 왕자 헥토르다. 이제 아킬레우스는 ’전투파업‘을 철회하는데 분노의 제1대상(주적)이 헥토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친의 죽음에 대한 복수[3)] 덕분에 『일리아스』는 끝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간다. 이처럼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또 하나의 『일리아스』의 시작이면서 끝이 된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또 하나의 『일리아스』의 시작이면서 끝]『일리아스』의 지은이로 확실시되는 호메로스(작가, 창작)는 대단하다. 지 작가에 못지않게 『일리아스』의 주제를 간파하고(『시학』)에서, 분노의 실체를 파악한(『수사학』에서) 아리스토렐레스(비평, 문학이론가)에게도 경의(敬義)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에게는 자신의 분노에 수반되는 “죽어도 좋을” 즐거움을 맛보았다. 호메로스는 그 분노를 창조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분노의 실체를 간파했다. 우리 독자들은 한글콘테츠로, 직거래 번역으로 태어난 『일리아스』와  『시학』과 『수사학』 덕분에, 분노의 주성분인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글을 맺으며, 인터넷에서 ’분노 마케팅‘으로 검색하니, 첫 화면에 ’분노 마케팅‘에 꼭 맞는 결과는 별로 없고 ’마케팅에 분노‘란 사례는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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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3-26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리아스』리뷰라면, 단행본 한 권을 쓰고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핑계 삼아, 길게 써보았다.

2022-03-27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솝우화>만이 아니라도 가끔씩 짧은 우화를 모티브로 정기적인 글을 써보려하는데 쉽지 않다. 오늘은 이솝우화 중 한 편을 골라 필사하는 심정으로 입력해보았다. <217. 늑대와 양들>이다. 258편의 이솝우화 전편을 번역한 것 중 217번째 글이다. 

"늑대들이 양 떼를 습격하려 했다. 그러나 개들이 지키고 있어 양들을 수중에 넣을 수 없자 늑대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꾀를 쓰기로 했다. 늑대들은 양들에게 사절단을 보내 개들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늑대들의 말인즉, 개들이 그들 사이의 적대관계의 원인이니만큼 개들만 넘겨주고 나면 그들 사이에 평화가 찾아오리라는 것이었다. 양들이 앞일을 내다보지 못하고 개들을 넘겨주자 늑대들은 힘들이지 않고 양들을 차지하게 되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양 떼를 마구 도륙했다." -<217. 늑대와 양들>,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정본 이솝우화>>(천병희 옮김)


일단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안정적인 삼각 구도가 깨진 것이다. 개와 늑대, 개와 양, 양과 늑대는 나름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힘겹지만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늑대들과 양들의 협정으로 가장 먼저 피해를 본 것은 개들, 그 다음이 양들이지만 결국 늑대들도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개들에 이어 양들까지 잡아먹은 것은 졸은데, 무슨 냉장고나 냉동고가 있어, 그 많은 양의 먹을거리를 보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당수는 썩어 부패할 것이며, 곧이어 궁핍의 시간들이 찾아올 것이니까. 앞서 <216. 늑대들과 개들이 서로 화해하다>에는 늑대들과 개들이 협약을 하지만, 결국 개들부터 죽이고 양들을 잡아먹는다는 늑대들의 성공스토리가 담겨 있지만, 거시적으로 늑대들도 굶어죽지 않았을까 싶다. 

이 우화에 대한 교훈이 "이와 같이 나라도 민중의 지도자들을 아무 생각 없이 쉽게 내주면, 나라 자체가 머지않아 적의 수중에 넘어간다는 것이다."이지만 '견제와 균형'이 왜 필요한지를 역설하고 있는 듯하다. 양들에게 개들의 존재는 굳이 사자성어를 찾자면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다소 억지 같지만 늑대들에게도 개들의 존재는 순망치한이라 할 수 있다. 두 세력 사이의 경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록 굶는 날이 좀 있더라도 기회를 엿보면서 개들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틈새를 노려, 양들을 포획하는 지속가능한 사냥이 가능했으니까.

 

중국 춘추 전국시대 말, 진나라 헌공은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여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먼저 괵(虢)나라를 치고 우나라를 칠 계획이었다. 그런데 괵나라와 진나라 사이에 우나라가 있어, 헌공은 우나라에 신하를 보내 길을 통과 시켜줄 것을 청했다. 그때 우나라의 궁지기가 진언을 했다. “전하, 절대로 진나라에 길을 내어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 "괵 나라는 우 나라에 울타리와도 같다. 만약 괵 나라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면 우리 우 나라도 망하게 된다." 결국 우려가 현실이 되어 진나라는 괵 나라를 치고, 여세를 몰아 우 나라까지 정벌하게 된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유래다.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상태는 좀 다르지만 소비에트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군사력 2위의 러시아와 EU(유럽연합) 사이에 지정학적 리스크를 안고 지내다가 마침내 폭발한 경우이기에 그렇다. 아직 종전선언도 못한 한반도 역시 지정학적 리스크를 안고 살아간다. 한 나라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에도 '순망치한'처럼 정권를 잡은 주체가 누구냐를 떠나서, 여와 야를 떠나서 흔들리면 "다 죽는" 절대적인 영역이 있다. 안보와 외교가 그렇다. 또한 경제도 상보적으로 이들 분야와 뗄 수 없이 맞물려 있다.


기왕 인체와 관련 비유를 들었으니 하나만 덧붙이자. 


"인체 가운데 자연이 혀만큼 안전하게 울타리로 둘러친 부위는 없다. 자연은 혀를 지키기 위해 그 앞에 이를 배치했으니 말이다."(플루타르코스 <수다에 관하여> 3장) 


입술 다음이 치아인데 그 치아가 혀를 보호하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수다를 떠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씀이지만, 그것이 국가안보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든 말든, '고삐 풀린' 말을 두고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만 그랬던가, '순망치한'이 그렇고 그런 옛 경구가 아닌 상태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왼쪽 단행본은 현재 절판되고, <그리스 로마 에세이>에 플루타르코스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음. 주석이 오른쪽 페이지 아래에 잘 정리되어 있어, 편리함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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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22-03-21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용산 집무실 이전과 관련 ˝무능한 지휘자는 적보다 무섭다.-오자병법˝라는 말이 떠돌고 있던데.. 잘 읽었네요.

Meta4 2022-03-21 19:5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다시 읽다보니 우화 속에 평화라는 단어가 눈에 뜹니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 2020년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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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대선은 끝났지만, 국민통합을 이뤄야 하는 작금의 국내 상황도 한창 전쟁 중, 아니 이제 막 시작되었다. 두려움의 저편애 자신감이 있다. 막연한 두려움에 휘둘리는 것도 그렇지만 과도한 자신감도 무척 위험하다.] "두려움은 파괴나 고통을 야기할 임박한 위험을 생각할 때 느끼는 일종의 고통 또는 불안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해악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나 고통을 야기할 해악만 두려워하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 2권에서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 간파해야 할 인간의 감정들에 관해 고찰한다. 인용은 제2권 5장 '두려움과 자신감' 중 두려움에 대한 간명한 정의다. 필멸의 인간에게 죽음은 언젠가 다가올 위험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결국 죽을 것을 알지만, 죽음이 가까이 있지 않으므로 죽음에 무관심하다. 곧 우리는 (죽음처럼) 아주 멀리 있는(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큰 파괴력을 가지거나 우리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해악을 끼칠 능력이 있어 보이는 그런 것들이 두려운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 것들은 징후조차도 두렵다는 것. 이런 징후의 한 예로 "우리를 해코지할 수 있는 자들의 적대감과 분노가 있다." 나아가 우리를 해코지할 수 있는 자들이 느끼는 두려움도 마찬가지다.(수사학, 2권 제5장 두려움과 자신감(1382a~1383b) 앞부분 정리) 


[아주 멀리 있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과 더불어 <시학>을 썼고, <시학>을 집필한 동기가 그리스 비극이 가진 힘을 강조하기 위한 것 아닌가, 싶게 비극 장르, 그 작품들이 가진 미덕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반면 <수사학>은 좋은 문학작품이 가진 수사적인 면모(기술)를 간파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지, 그 노하우를 밝힘으로써 수사학을 학문 영역으로 편입시킨 저작이다. 그럼에도 <수사학>의 텍스트들은 그리스 비극이 가진 역동적인 힘을, 흔히 말하는 '드라마를 드라마틱하게' 즐길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다음은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메데이아>와 <휩폴뤼토스>의 줄거리이다. 두 작품의 등장인물이 가진 '두려움'의 실체를 잠시 살피고, 그것이 극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감상 포인트 하나를 정리해볼까 한다.(두 작품의 줄거리를 사진 촬영하여 올리는 것으로 했다.)  

[사진1은 <메데이아>의 줄거리다.] 

여기서는 크레온 왕이 가지는 '두려움'이 극을 전개하는(사건의 발단이랄까), 원동력이 된다. 조국와 부모 형제까지 배신하면서 이아손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그간 메데이아가 펼친 활약상은 더 이상 '미덕'일 수가 없다. 크레온은 이미 처자가 있는 이아손을 사위로 맡이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후계구도를 튼실하게 할 욕망에 사로잡혀,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였고, 메데이아와 두 아들만 추방하면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렵다. 지난 날 메데이아가 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쌓은 미덕은 이제 악덕이 되어야 하고, 그녀가 '요주의 인물'이며 공존할 수 없는 구실이 된다. 그 선택 때문에 애지중지하는 딸과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였음에도 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 '두려움' 이란 감정은 이렇게 극적으로 작동한다.

[사진2는 비극 <휩폴뤼토스>의 줄거리다.]

 파이드라는 전처 소생인 힙폴뤼토스에게 가진 연정 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이 가장 두려웠을 것이다. 유모를 통해 그 연심이 전달되었고, 힙폴뤼토스에게 그 마음을 들켰다는 사실 자체를 용서할 수 없다. 어쨌든 파이드라가 가진 두려움은 그 결과가 뻔히 보이는, 해서는 안 될 사랑을 하고 있다는, '안 봐도 비디오'처럼 예견된 그 자체가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해서는 안 될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것이었고, 제어할 수 없는 그 '두려움'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때문에 힙폴뤼토스가 부왕에게서 추방을 당하고 비극적인 결말에 이른다는 것은 파이드라의 고뇌에 비하면 '조연급'의 고민이다. 

(덧붙여) 두 작품의 결말, 그러니까 복수에서도 유사점은 있다. 메데이아는 사랑하는 '우리' 아들들을 죽임으로써 자식을 잃은 슬픔을 안고 평생 살아가게 함으로써 남편 이아손에게 복수한다. 파이드라는 제 목숨을 제물로 삼아 자기 사랑을 거부한 힙폴뤼토스에게 복수를 하는데, 궁극적으로 그 복수의 화살은 남편 테세우스(메데이아가 그랬듯이)를 향하고 있지 않았나, 그리 해석할 수도 있다(그냥 남편인 것이 야속한 것일까). 메데이아가 사건 발생 이후의 거취를 정해놓고 일을 도모했다면 파이드라는 문득 찾아온 <상사병>이 그랬듯이 대책 없이 일을 저질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식을 직접 죽여야했던 메데이아라고 행복했겠는가!  


[막연한 두려움도 과도한 자신감도 위험하다.] 

(맺으며)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 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진단에도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찰한 '두려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신흥 강국이 부상하면 기존의 강대국이 (느끼는 두려움 때문에) 이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발생한다는, 투퀴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 『에정된 전쟁』,그레이엄 앨리슨 지음),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 원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20대 대선은 끝났지만, 국민통합을 이뤄야 하는 작금의 국내 상황도 한창 전쟁 중,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의 건너편에 자신감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막연한 두려움에 휘둘리는 것도 그렇지만 과도한 자신감도 무척 위험하다. 

​"자신감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은 가까이 있고 두려운 것은 없거나 멀리 있다는 생각에 따른 기대이다. 자신감이 생기는 것은 두려운 것은 멀리 있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가까이 있을 때이다.".(위 <수사학/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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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3-21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사학/시학』(천병희 옮김),『펠로폰네소스 전쟁사』(천병희 옮김),『예정된 전쟁』(그레이엄 앨리슨 지음) 등이 연관 서적인데, 리뷰로 가는 바람에 여기 적어둡니다.

새우 2022-03-21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전쟁, 전쟁 같은 사랑이네여.

Meta4 2022-03-21 16:31   좋아요 0 | URL
[사랑은 전쟁]은 은유, 전쟁 같은 사랑은 직유인가요? 호메로스 서사시 가령, <일리아스>의 경우 직유와 은유의 구분이 없다고 한 어느 해설서 한 대목을 떠올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