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2월 23일 김영삼은 대통령에 취임했다취임한 지 13일 만인 3월 8일 권영해 국방부 장관을 청와대로 불렀다아마 독대였을 것이다.

김영삼군인들은 그만둘 때 사표를 제출합니까?

권영해군대에서는 사표를 내지 않습니다명령 하나면 됩니다.

김영삼그래요그럼 됐구먼내가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오늘 바로 바꾸겠습니다당장 예편하라고 하세요.

김영삼은 가장 강력한 무력집단인 군대의 수뇌부를 해체하기 시작했다-39면, 사회적 성취의 기반-역량의 의미 中

   

거침없이! 군사 쿠데타의 육묘장이며 잠재세력인 하나회 해체는 시작되었다검찰마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눈치로 사는 때였다최동석은 성취 예측 모형』 1장에서 YS를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개혁을 단행한 대통령으로평가한다공과(功過)가 극과 극이나 인정할 건 인정하고 있다. 시대가 소명을 만들고 그것을 할 때 인물이 탄생한다

그래요그럼 됐구먼.‘ 이 대목을 읽다 나는 문득 9년차 전쟁이 한창이던 트로이아 해변 어디쯤으로 간다, 시간여행이다. 생각처럼 앍기가 쉽지 않다는일리아스』 2(2/24)의, 전반부 어디쯤이다.  2권 대부분은 이 책읽기의 악마의 코스라는 함선 목록인데바로 그 앞의 에피소드다. 테티스의 청원에 잠 못 드는 제우스는 아가멤논에게 승리를 확신하게끔  거짓 꿈을 보낸다. 아가멤논은 원로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기획한다여기에는 공격 전에 전사들의 사기를 가늠하기 위한 트릭이 있다. “우선 관례에 따라 말로 그들을 시험해보고자 나는(아가멤논) ..달아나자고 권할 테니" 그대들(참석한 군 지휘관들)은 말로 그들을 제지해보라는 것. 

전사들의 마음을 읽는 절차다.  그들의 마음을 얻는 과정이다. 트로이아군보다 숫적으로 열 배나 많은 그리스연합군이지만 전사들의 전투의지가 해이된 상태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함선들과 막사들에서 떼 지어 회의장으로 몰려온 전사들은아가멤논의 철수 선언에 술렁인다. 환호가 분명한 이 분위기돌이킬 수 없다곧이어 전사들은 함선들을 끌어내리고 그간의 전리품을 챙기는 등 귀향을 서두른다아킬레우스 없이도 전투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가 없는 전투에서 승리는 상상할 수 없다. 아가멤논이라고 별 수 있겠어,! 아가멤논의 오만에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전투 파업을 선언한 상태(1)아가멤논이 대규모  공격을 히려는 이유, 아킬레우스와의 대결에서 실추된 권위 등, 만회하려면 반전이 필요했다. 최고사령관이니 인간들의 왕이니 뭐니 해도 아킬레우스 없인 안 돼!‘전사들의 마음은 그렇게 흔들렸고 돌이킬 수 없는 상태다.

 

원로들의 회의에 참석했던 장수들에게도 철군(撤軍)은 기정사실이다. 사태 수습에 공식처럼 오뒷세우스가 등장한다. 모든 전사들이 다시 모인 회의장. "이의 있습니다!‘" 당당하게 오뒷세우스에게  맞서는 전사가 있다. 테르시테스(Thersites)수다쟁이지껄이는 사람. 그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한 그리스군 중 제일 못생긴 사내였으며유명한 독설가다평소에 그가 말칼을 날리는 상대는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였고, 두 지휘관의 미움을 샀다이번엔 아가멤논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가장 아픈 데를 후빈다. 그대 혼자서 붙들어놓고 사랑을 즐길 젊은 여인을 원하는 것이오?” 이어 아킬레우스를 변호하며 겁쟁이이며 수치 그 자체라며 아가멤논을 비난한다.

"원망하되 전쟁에는 일절 관여하지 마라." 아들에게 여신 테티스는 당부했다.(1권) 이 어미에게 '계획이 있다.'.  너의 분노를 이해하지만 (아들의 성정을 알기에)  한두 발 물러서서 관전만 하라.  아킬레우스는 말씀을 받아들였다. 테르시테스는 그런 아킬레우스마저 소환한다.  "아킬레우스는 마음속으로 노여워하기는커녕 태연했소. 그렇지 않았던들."(67면)  아가멤논-오뒷세우스 VS 테르시테스-아킬레우스'라는 연대와 갈등 전선이 형성된다. 그리고 침묵하는 다수, 전사들이 있다. 우리도 이 전쟁의 당사자라는 발견. 아킬레우스는 전투 파업을 선언했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그리고 인간 테르시테스는 전쟁 반대를 외친다.  말은 못해도 대다수 그리스군 전사들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고향마을죽음이 내일모레인 부모님늙어가는 아내와 눈에 밟히는 자식들훗날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반대하는 그리스 곳곳 시민들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전력 우위만으로 전투(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전력에는 군사력이, 군사력에는 군사들의 사기(전투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 에피소드에 이어지는 생소한 지명(地名낯선 인명(人名)투성이인 <함선 목록>은 무력시위쯤으로 보면 된다앞세워야 할 것은 승리겠다는 전사들의 열망이니까오뒷세우스는 국면을 잘 수습하고 대규모 전투가 재개된다머지않아 아킬레우스도 전투파업을 풀 예정이다그런데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의 입장에서 일련의 사태(1권에서 2권 전반)를 복기해보자.

전쟁 중 명령불복종엔 엄혹한 처벌이 따른다충무공은 난중일기(혹은 영화 <명량>)에 탈영병 등을 즉결 처분(참수)한 기록을 남겼다아가멤논은 왜아킬레우스의 전투파업을 방치하고일개 전사인 테르시테스를 처분하지 않았을까군인들은 그만둘 때 사표를 제출합니까?‘ 대한민국 군()의 통수권자(統帥權者)인 대통령이 정말 몰라서  물었을까알 수 없다전시(戰時아니라고한반도는 지금도 휴전(休戰상태다다만쿠데타와 유사 쿠데타로 집권을 연장한 군인 정치의 날들의 너무 길었다다음(Daum)에서 문민 대통령이라고 검색하면 김영삼‘ 아니냐고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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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번역 일리아스 / 오뒷세이아 세트 - 전2권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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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에서인지 북리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미국의 대학교 리드칼리지는 해마다 입학선물로 책 두 권을 선물한다.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세트>. 리드 칼리지(Reed College),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사립 리버럴 아츠 칼리지다. 신입생들에게 인문학 수업은 선택 아니고 필수다. 신입생들은 서양고전학 입문인 인문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 의무다. 

선물 구성, 알겠다. 학생들은 3학년 때 논문 자격시험에 붙고, 4학년 2학기 동안 교수들과 함께 연구한다. 학생들은 졸업논문을 완성한 다음, 논문 주제뿐만 아니라 이전에 들었던 수업 내용들까지 포함하는 구술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 학교의 학생 대 교수 비율은 9:1이고 토론식 수업을 강조한다.

애플 스티브 잡스는 이곳에 철학 전공으로 입학하지만 곧 중퇴한다. 학부생 1447(2017년 기준)이고 교직원이 164(교수, 2010)이다. 소수정예 같은데, 비율 9:1은 환상이다. 학비 부담 때문에 중퇴하고 도강하였던 스티브 잡스를 이해할 수 있다. 입학선물부터 커리큘럼까지, 인문학을 제대로 공부해야 졸업할 수 있다. 하나에서 열을 읽는다.

입학 선물과 스티브 잡스(전기물덕분에 이 학교에 관심을 가졌다. 한동안 내게 이 학교 이름은 리드(READ) 혹은 리드(LEAD)였다. 최근에야 잘못 알고 있음을 알았다. 1908년에 세워진 이 학교 이름은 컬럼비아강의 무역업자였던 시메온 가넷 리드로부터 따왔다. 내 유산을 포틀랜드 시민들의 교육과 문화발전, 시민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써주세요. 아내 아만다 리드가 남편의 유언을 실행했다. 리드(LEED) 부부가 남긴 그들의 유산이 부럽다.

일리아스오뒷세이아, 어느 것부터 읽어야 하냐, 행복한 고민이다. 하나는 하드하고 하나는 소프트하다 등 의견은 분분하다. 순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서양 고전 읽기 0순위가 두 고전이라는 점은 동서양이 거의 일치한다. 동양고전학 입문인 인문학 수업이 필수인 그런 대학이 우리에게 있다면, 입학선물로 제공할 책 두 권이 무엇일까?

일리아스오뒷세이아라는 거대한 봉우리 사이 가슴골처럼 깊은 길, 서양 고전을 만나러 가는 항해는 역풍과 함께 시작된다. 남쪽 인민들은 (중국이 아닌) 북한 땅을 거쳐 가는 백두산 트래킹을 선망한다. 북한 국민들은 한라산에 로망이 있다. 한반도 최북단 백두산, 최남단 한라산처럼 언젠가는 한두 차례, 몇 번이고 오르고 싶은 산들, 서양인들에게는 자부심 자체이고 우리에게도 일리아스『』오뒷세이아는 대체로 그렇게 다가온다. 한두 차례는 제대로 읽어야 한다, 생각하는 그런  책이다. 

 

(닮은 듯 아니 닮은 듯 언젠가 진안 마이산 지나며 떠올린, 사진_진안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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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5-01 1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 개인 의견으로는 ‘일리아스‘를 먼저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두 내용이 별개인 듯 하지만 그래도 시간적으로 연결됩니다**
오뒷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과 지옥여행에서 트로이 전쟁에 같이 참여한 사람들을 계속 만나거든요~~

Meta4 2022-05-01 12:15   좋아요 1 | URL
저도 님과 의견은 다르지 않습니다. 문득 시작되지만 그래도 일단 산행을 시작했으면 낮은 봉우리라도 끝까지 오를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죠.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독서였더란 말입니다. 제대로 읽기 위해서 알아야 할 정보(주석들이)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실눈 뜨고 일단 세계에 빠져드는 방법에는 말 그대로 공간을 따라 시간을 따라 가는 로드무비, 기행수필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엉뚱하지만 두 권을 동시에 읽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도 있답니다.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폴로도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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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불문고대 그리스와 로마 고전들을 읽노라면 항해 관련 장면, 용어, 비유가 곧잘 있다. 나는 늘 이물과 고물 사이에서 배회한다, 배의 머리와 배의 뒤쪽 사이에서. 이물은 선두(船頭), 고물은 선미(船尾), 하면 명확한데 순우리말 사랑 때문? 읽을 때마다 헷갈린다이물은 늘 이물(異物정상적이지 않은 다른 물질)로 거기 어디쯤 있다.  

또 있다. '선두맡'이다, 바다가 있는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 익숙한. 어린 시절 좀 쓰던 말인데, 최근 검색에도 내가 아는 용법을 찾지 못하였다선두맡이란 배(풍선돛단배)들이 정박하는 포구바다로 나갈 때는 그물 등 어구를 싣고 , 돌아와 그날 혹은 그때 잡은 생선들을 내리는 그런 곳선창(船艙)의 다른 이름이었다머리맡의 ''처럼 선두맡은 뱃머리들이 그 머리를 기대는 그런 곳쯤이 아니었을까. 

비닐하우스 농사로 요즘이야 딱히 농한기가 없다. 당시 아버지는 농한기가 되면 바다로 나가 한동안 뱃사람이 되기도 했다배가 들어올 즈음이면 1킬로미터 가까운 거기까지, 대바구니를 들고 선두맡으로 갔다당신이 품삯으로 받을 크고작은 생선들을(대체로 상품성은 떨어지는집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그땐 없었던 생각이지만 무사귀환한 가장의 안전을 확인한다는 의미도 없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냥 선두맡이었을 뿐이다짧게는 한 나절길게는 며칠을 거친 파도와 씨름하여 고단했을 어선들이 마침내 돌아와 뱃머리(선두)를 기대고 쉬는 집, 선두맡그곳은 포구였고규모만 달랐을 뿐 요즘의  항구였다.  그때 우리 가족에게우리 이웃에게 바다는 늘 풍요로운 반찬이었다선두맡은 내 유년 시절 아련한 그리움이며 재현불가한 선미(鮮味)이다.

 

매달 비용이 아깝기도 하여(시간이 더  그럴 것인데)  OTT서비스를 만끽한다이등병 시절 보초 수준의 경계다. 최근 <트로이왕국의 몰락>(영국드라마, 2018)을 봤다. 회당 60분씩 8부작러닝타임 480 드라마다. 2004년 개봉 <트로이> 196(3시간 16)보다 할애한 시간 상당하다덕분에 서사시 <일리아스>는 물론이고 전후의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포함되어 있다드라마 <트로이>의 미덕이다더 이상 볼 장이 없음에도 1회당 60분 남짓은 드라마를 16부작까지 꼭 채우는 국내산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그들이 아르고스()에서 출항해 재차 아울리스()에 도착했을 때 함대는 역풍에 묶였다그러자 칼키스가 말하기를아가멤논의 딸들 중 가장 예쁜 딸을 아르테미스에게 제물로 바치기 전에는 더 이상 항해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후반요약적게는 열두 척에서 많게는 100척 이상까지트로이로 출항해야 할 그리스 곳곳에서 소환된 함선들이 출항하지 못하고 있다그곳아울리스 항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아버지는 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이었다드라마는 필요 이상으로 이 대목에 집중한다아울리스 선두맡에서 있었다는 일에 대해서.

도서관 서지 목록에 가까운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하자앞서 언급한 신화의 요약본까지 수록한 책 후반부를 읽다문득 발견한다여기에서 역풍이 분다.’는 적절하지 않다는 주석이다그가 역풍에 묶였다.’로 옮긴 이유다.

 

역풍의 그리스어 ‘aploia’는 항해할 수 없음이란 뜻으로 바다의 잔잔함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당시의 항해술로는 노를 저어 에게 해를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사전적 정의로 역풍(逆風)이다. ‘역풍이란 한자어 의미까지 여기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대체로 역풍에 대한 오해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다바람이 필요한데 필요한 바람이 오지 않는다서핑하기에 딱 좋을 만큼 포구로 몰아치는 그런 파도가 아닌 것이다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고 하지 않나맥락은 맥락이다. 아가멤논은 무플과 싸운 것이다무플 때문에  무단히 세 딸 중 장녀 이피게네이아를 인간 제물로 바치면서너의 전쟁은 나의 전쟁우리의 전쟁으로 바꾸는 나쁜 아버지가 되어야 했다.

 어선에 동승한 적 없으니잘 모르지만 버스에 동승한 아버지로 짐직하건데 거의 모든 탈것 들에서  멀미가 유난했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갈 수 있는 배 위에서의 인생도 그랬으리라. 동쪽 나라트로이로 가는 대장 함선에서 아가멤논의 심사는 대체로 복잡하였고신화와 서사시와 비극들 사이에서변명하거나 변론을 하는 고전들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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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문현미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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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동물원 그 옆 어딘가 종합병원이 있다면  응급실 옆에는 어김없이 영안실(장례식장)이 있다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장례식장은 낡은 문법처럼 응급실 가까이에 있다. 장편소설이라는데 제목 때문에 수상록인지, 아니면 생활 속 잠언들 모음집인지, <말테의 수기>는  늘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다가온다. 그래도 분명하게  아로새겨진 부분이 있다. 첫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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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민음사

"그래이곳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펭귄 클래식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모여든다하지만 나는 도리어 죽기 위해서 모인다는 생각을 한다."(문예출판사)

그래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으로 온다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모두 죽어 가지 싶다."(열린 책들)


한 작품이지만 옮긴이, 옮긴 때 , 펴낸 데가 저마다인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는 출판사들의 이 책 첫 문장은 이렇다(이하 몇몇 인용은 민음사 번역을 따라간다). 좋은 작품에는 늘 있지만 그것이 번역되었을 때는 실감하기 힘든 것,  번역본임에도 문장과 문장 사이, 문장들에서 발견하는 리듬감이다. 시인의 산문이니까,  필치에 운문의 리듬이 배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말테'를 '릴케'로만 바꿔어놓으면, 소설보다는 수상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 이 특별함, 뭘까?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좀 마땅찮은 부분이 있다.  오히려 작가의  삶, 그 이력을 참고하면서 부분 부분 빛나는 대목들을 이해하는 식으로 발견의 방향을 바꾼다.  


-릴케는 51세가 되던 1926년, 스위스의 한 요양원에서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또 지붕이 없는 마차가 도착하는 걸 보았다포장을 열어젖힌 역마차로서 일반 요금으로 달린다임종 시간당 2프랑 꼴이다."(15면). "(오래된 디외 병원은지금은 559대의 침대에서 사람들이 죽어간다물론 공장과 같다이런 대량 생산에 있어서는 개개의 죽음이 알뜰하게 처리될 수가 없지만문제는 그것이 아니다양이 문제다오늘날 잘 마무리된 죽음을 위해 돈을 치를 사람이 누가 있을까아무도 없다빈틈없는 절차를 밟아 죽을 수 있을 만큼 돈을 가진 부자들조차도 죽음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냉담해지기 시작했다자기만의 죽음을 가지려는 소원은 갈수록 보기 드물어진다좀 더 지나면 자기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삶처럼 흔치 않을 것이다맙소사여기에는 없는 게 없다그저 와서 생을 발견하면 그만이다그저 그것을 기성복처럼 입기만 하면 된다.:(15~16면)

 

-사건이 아닌 상상과 기억의 단편만으로 삶의 본질과 인간 실존 문제를 탁월하게 형상화해 낸 일기체 소설릴케가 파리 생활의 절망과 고독을 통해 29살부터 쓰기 시작해 6년 뒤인 1910년에 출간했다. (책소개)  루 살로메와의 두 차례 러시아 여행에서 돌아온 릴케는 독일 화가마을 보르프스베데에 정착하였다그곳 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화가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게 되고(저자 소개)

"그 밖에 나는 또 무엇을 보았더라?"(10면),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왜 그런지 모르겠으나모든 게 지금까지보다 더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과거에는 항상 끝났던 곳에 이제 머물러 있지 않는다옛날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내면이 생겼다이제 모든 게 그곳으로 간다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모르겠다.(11~12) " "내가 이미 말했던가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그래나는 시작했다아직 서투르지만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 한다."(12면) "보는 법을 배우고 있는 지금나는 무언가 일을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28세가 되었는데 아무것도 제대로 해놓은 게 없다지금까지 해온 일을 돌이켜보자."(26면) "그러나 사람이 젊어서 시를 쓰게 돠면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되도록이면 오랫동안의미(意味)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 경험이기 때문이다.(26~27면)"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 릴케는 보헤미아 출신답게 평생을 떠돌며 실존의 고뇌에 번민하는 삶을 살았다(저자 소개)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불리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그의 가문은 철강업으로 부를 쌓았다. 191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상속을 거절했다공식적인 상속을 거절했는데도 그에게는 상당한 유산이 주어졌다비트겐슈타인은 그 재산마저가난한 유망 작가 후원에 기부했다그 첫 번째 수혜자가 바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다.(검색어 '릴케 비트겐슈타인')'"

"나는 아무도 아는 사람 없이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트렁크 하나와 책 상자 하나를 가진 채사실 어떤 것에도 호기심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다집도 없고 상속받은 물건도 없고 개도 없이 살아가는 생활은 도대체 어떤 생활일까최소한의 추억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어쩌면 사람은 그 모든 추억에 다다르기 위해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나는 늙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24면)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별 헤는 밤일부윤동주 시인이 1941년 11월 5일 지은 유작친구 정병욱과 아우 윤일주가 1948년 정리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간본) 31편 중 앞부분에 실려 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박인환 <목마와 숙녀>의 버지니아 울프와 더불어시인 릴케는 우리의 대표시에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소음보다 더 끔찍한 것이 있다바로 정적(靜寂이다"(11면),  "무서웠다사람이 한번 공포감을 느끼게 되면 그 공포감을 떨쳐내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 도시에서 병에 걸린다는 건 매우 혐오스러운 일일 거다."(14면).  "나는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무언가를 했다밤새도록 앉아서 글을 썼던 것이다. "(23-24면), "나는 여기 앉아서 한 시인의 작품을 읽고 있다열람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을 느낄 수 없다그들은 책에 몰두해 있다그러면서 마치 잠을 자다가 두 개의 꿈 사이에서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듯 책의 쪽수 사이에서 몸을 뒤척인다책 읽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게 너무도 좋다왜 사람들은 늘 책을 읽을 때와 같지 않을까?(4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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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옆에 영안실(장례식장)이 있다.  누군가는 마중을 위해, 또 누군가는 배웅을 위해 종합병원을 찾는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죽기 위해서 찾는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앞뒤처럼 붙어 있는 생의 터미널이다.  저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것이 있다. 어떤 이는 집념, 어떤 이는 집착이라고 한다.  나쁜 습관, 거기에는 늘 죽음이란 두 글자가 어른거린다그대언제까지나 살 것처럼 너무 자만하지 않는가좋은 습관이라고 늘 '까방권'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내게는 책읽기도 그 중 하나다.  발견을 위한 몸부림도 나쁘지 않지만, 나만의 삶에 더 집중해야 하지 않나하는 강박 혹은 반작용. 서른 즈음의 릴케에게서 어떤 터닝포인트(전환점)를 감지한다. 몇 마디로 정리하기 쉽지 않은, 너무 거창한가!     

"너는 천년 만년 살 것처럼 행동하지 마라. 죽음이 지척에 있다.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동안 선한 자가 되라.”_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IV 17

그대들은 언제까지나 살 것처럼 살고 있고,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미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알지 못하지요.”_세네카,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03-4, 297


이상  『그리스 로마 에세이』  알라딘: 그리스로마 에세이 (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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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4-24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들 세 번째, ‘내게는‘을 ‘나는‘으로 수정했음을 밝힘. 이 글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와 맥락이 닿아 있는 옮김으로 받아들였기에..

Meta4 2022-04-24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트겐슈타인은 그 재산마저, 가난한 유망 작가 후원에 기부했다.
 

늦은 밤일지라도 전화를 받는 친구가 드물지만 있다. 좀 늦었지만 퇴근 중이다. 한 잔쯤 걸친 목소리다계속 다녀야할지 고민이다. 내게도 그런 고비가 몇 차례 있었지. 선생이 그러시더라.  측간(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어 봐야 냄새만 밴다, 라고 했지만 도움 될 것 같지는 않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할 일 한 것 아닐까,  그래도 마음은 편치 않다.  


354. 항아리들 

오지항아리와 청동항아리가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오지항아리가 청동항아리에게 말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헤엄치란 말이야가까이 오지 말고너와 부딪치면 나는 깨질 거야내가 본의 아니게 너와 부딪쳐도 그렇고.”


'날강도 같은 권력자의 이웃에 사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인생이 늘 불안하다.' 이솝우화 한 대목을 슬쩍 언급하지만 꼰대가 꼰대에게 하는 소리쯤으로 들릴 것이다. 시종일관 한 직장에서 일하고 정년퇴임을 한 이들이 느낄 허전함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 찾지마, 히말라야 산등성이 어디쯤에서 트래킹이나 하면서 살아갈거야,. 한 잔 하면 대학 산악반 시절을 떠올리며 호언장담하던 공무원은 지금 인테리어업자인 친구 회사에서 업무보조(데모도)로 일하는데, 일과가 끝나고 친구들과 마시는 막걸리 한 잔이 그렇게 달콤하단다. 청동항아리(갑)가 오지항아리(을)의 오지항아리임을 알고 협력을 이끌어낸다면 좋겠으나 사는 것이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다. 한두 차례 당한 것으로 액땜하려니 하지만, 늘 한 발 물러선 그 이력 때문에 유사한 처지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오뒷세우스는 집으로 가기 위해 무려 10년을 세상 곳곳을 떠돌아야 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던가. <일리아스>에서 지장(智將)으로 손꼽히는 활약을 하지만, 트로이아 입장에서는 그런 그가 얼마나 얄미웠겠는가. 트로이아 편을 들었던 신들도 저주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20년 만에 오뒷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간다.  이후 삶은 행복했을까?  이후로도 그는 그간의 행위를 정화하는, 자숙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서사시는 마무리된다.  


"퀴클롭스, 그대는 내 유명한 이름을 물었던가요? ..내 이름은 '나무도아니'요. 사람들은 나를 '아무도아니'라고 부르지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고 다른 전우들도 모두.' (오뒷세이아, 9권, 228면) 


평범한 삶 쉽지 않다. 기회에서 벌이에서 양극화는 심화될 조짐이니 더욱 그렇다.  궤도를 벗어났을 때에야  그렇고 그런 삶이 대단하게 다가온다. 내게도 꿈이 있었다. 지굼도 꿈이 있다., 라면 좋겠는데, 완료형 마무리가 씁쓸하다.      




친구야, 최근에 <노바디>란 영화를 보았어, 주말에 찾아서 보렴.  조심조심 살아, 어쩌겠어. 그리고 국내영화로 하나 더 추천한다.  <쏜다>(2006)이던가.  


아래, 영화 <노바디> 스틸 컷. 


아래, 영화 <쏜다> 도입부,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온 박만수 인생에 어느 날 갑자기 아내는 함께 사는 게 재미없다며 이혼을 요구하고 회사는 유도리 없다고 정리해고를 통보한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박만수는 평생 최선을 다해 모범적으로 살아온 인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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