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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평점 :
자갈 틈새로 작약이 자라고 있어요. 『그레이스』 첫 문장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시즌1, 6화 완결)에는 원작소설이 있다. 실화에 근거한 원작소설이 있다. 논픽션(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은 상상력의 한계, 그 임계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인지상정이라고 실제 역사는 매력 포인트, 때문에 드라마나 영화 선택에서, 이런 콘텐츠를 살피게 된다. 원작소설이 있나, 사실에 근거하였나. 탄탄한 스토리가 있다면 무작정 몰아보더라도, 발견 가능성이 높아 할애한 시간이 아깝지 않다. 그것이 실화에 근거한 원작소설이라면 금상첨화, 꽃 중의 꽃을 기대해도 좋다. 내게 소설 『그레이스』(Alias Grace), 드라마 <그레이스>(2017)가 그랬다. 드라마 전편을 시청하고 책을, 전자책을 구매했다. <미리보기>의 소설 첫 문장에 꽂혔기 때문이다.
"자갈 틈새로 작약이 자라고 있어요."
최면시술의 결정적인 순간의 그 시그널처럼, 소설 첫문장이 중요하다는 건 새삼 강조할 필요 없다. 심리학자 등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중요범죄를 저지른 재소자를 찾아가는 익숙한 장면, 때문에 다른 영화들을 떠올리다 드라마의 1/3 지점부터 집중하기 시작했다. 독백과도 같은 그레이스의 회고를 이끌어내고 그 기억을 따라가기에(시간 순) 드라마는 어쩔 수 없었으리라. 그레이스에게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직장이 되는, 키니어 나리 댁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풍경(드라마), 정원에 만개한 꽃이 장미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그런데 '작약'은 소설 분문에 무려 열여덟 차례나 등장한다(전자책의 미덕). 권말 <옮긴이의 말>에도 한 차례 더 등장한다.
"그레이스의 꿈에 빨간 작약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 한국어판은 두 권(그레이스1과 2),으로 출간(2012년)되었고, 드라마 오픈 시점의 개정판은 한 권으로 펴냈는데(2017년), 696쪽, 적지 않은 분량이다. 옮기는 데 상당 시간을 할애하였고 그 과정에서 옮긴이 나름의 '의견'이 없을 수 없는데, 이렇듯 자주 등장하는 작약에 대해 물음표 하나를 던질 뿐이다. 1843년 캐나다에서 실제 일어났던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미스터리 소설, 기묘한 매력을 지닌 여인 그레이스 마크스와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복잡한 욕망을 파헤치는 심리 소설이다. 실화 바탕, 미스터리. 심리 소설이기 때문에 할 말은 있지만 말하지 않는 선택을 하지 않았나. 소설 첫문장에 이어지는 대목이다.
"(자갈 틈새로 작약이 자라고 있어요) 헐거운 회색 자갈을 뚫고 올라온 그들은 뱀의 눈처럼 봉오리로 공기를 탐색하다 부풀어 공단처럼 반짝반짝하고 반들반들한, 짙은 빨간색의 큼지막한 꽃을 터뜨리죠. 그러다 산산이 땅으로 떨어져요."__1부 <삐죽빼죽한 테두리>(13)
직유에 동원된 '뱀의 눈'이나 '공단(貢緞: 무문無文의 주자직물朱子織物)까지 언급할 시간은 없다. '헐거운 자갈을 뚦고 올라온' 작약에서 핀 꽃이 '산산이 땅으로 떨어지는' 낙하(落下) 혹은 낙화(洛花) 등 섬세한 묘사에는 소설의 주제와 연관된 뭔가가 있다. 뭔가 있지만 그 무엇을 무엇이라고 이름하는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문득 사라질 것 같은 뭔가가, 있다. 이쯤에서 저자(마거릿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화일을 잠시 엿본다.
"1939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자랐다. 곤충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매년 봄이면 북쪽 황야로 갔다가 가을에는 다시 도시로 돌아오곤 했다. 이런 생활로 어울릴 친구가 별로 없었던 애트우드에게는 독서가 유일한 놀이였다."
하지만 독서에만 집중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물과 생태에 대한 관찰력도 함께 갖추었다고 본다. 물레나물목>작약과>작약속인 작약(芍藥; Peony root), 여러해살이풀로 5월이나 6월에 꽃이 피는데 색깔에 따라 홍작약과 백작약이 대표적이다. 이와 비슷한 때 잎이 나고 꽃을 피우는 사촌쯤 되는 식물이 있다. 모란(牡丹; Peony)이다. 역시 물레나물목>작약과>작약속이다. 영어이름에서 보듯, 둘은 사촌 간인데 모란은 작약과 클라스가 다르다. 무엇보다 작약은 여라해살이 풀인데 모란은 낙엽 활엽 관목으로, 나무다. 모란은 잎이 지면 두툼한 가지들을 펼친 채 겨울을 난다. 봄이 오면 줄가에 새순이 돋아 자라고, 곧이어 꽃을 피운다. 그러나 작약은 겨울이 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죽었다가) 자갈이 짓누르고 있음에도 그 틈새를 뚦고 새로운 줄기가 자라기 시작한다. 그 해의 생명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
작약은 해마다 봄이 오면 오로지 땅 속 뿌리의 힘에만 의존하여 새싹을 틔우고 줄기를 형셩한다. 그래서 영어명에서 'Peony'에 'root'가 추가되는 것. 실제로 모란은 뿌리가 깊지 않아, 재배 시 작약 뿌리나 모란 줄기에 접붙이는 방식으로 번식한다. 재래종 모란의 실생묘나 작약을 대목으로, 9월에 접붙인다. 작약 대목은 활착률은 좋으나 수명이 짧고 모란 대목은 활착률을 나쁘나 수명이 길다. 야생의 고욤(산감나무)에 품종이 우월한 감나무 줄기를 접붙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양질의 수확물(열매)을 위해 야생이 강한 종의 뿌리를 이용하는 것.
들 다 화려한 꽃을 피우고, 뿌리를 약재로 쓰지만, 작약이 약용(藥用)이라면, 모란은 뿌리를 약재로 쓸 뿐 아니라 크고 화려한 꽃으로 유명하여, 화단이나 정원에 관상(觀想)용으로 재배하였다. 해서 모란은 ‘꽃 중의 왕'이라고 ‘화중지왕(花中之王)’ 혹은 ‘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향’이란 뜻의 ‘국색천향(國色天香)’ 등으로 불렸다. 꽃말에서도 모란은 '부귀, 왕자의 품격'인데 작약은 '수줍음'이다. 제대로 자란 모란은 상당히 큰 키를 자랑하며 봄이 오기 전부터 지난 해 꽃을 떠올리면서 기다리게 만든다. 그런데, 작약은 말라비틀어진 줄기마저 제거했다면 어디 심었는지, 어디에서 줄기가 솟구칠지 알 수 없다. 이처럼 해마다 낯설게 등장하기에 정작 본인은 늘 수줍어할 수밖에. 화단이란 공간에서 모란이 정규직이라면 작약은 비정규직쯤에 해당한다.
자기나 나나 다를 바 없는 하녀이건만 선임이라는 이유로, 토머스 키니어 씨의 하녀 낸시는 안방마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누가 보아도 나리의 정부이기도 하다. 키니어의 집에 도착한 그레이스의 눈에 낸시의 위치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같은 을이면서 갑질을 서슴지 않는 낸시, 이어지는 작약을 언급하는 대목은 이렇다.
"저는 작약을 곁눈질해요. 이상한 일이거든요, 지금은 4월이고, 작약은 4월에 꽃을 피우지 않아요. 그런데 제 바로 앞쪽 길가에 세 송이가 자라고 있지 뭐예요.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한 송이를 건드려 봐요,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나는데, 알고 보니 조화예요." __1부 <삐죽빼죽한 테두리> 13면
모란과 작약은 5~6월에 꽃이 피지만, 모란이 조금 앞서 개화기를 4~5월로 보기도 한다. 물론, 작가는 작약을 언급할 뿐 모란을 거론하지 않는다. 다만, 나리 댁에서 발견한 작약꽃 세 송이는 곧 조화(造花)로 판명되지만, 그해 4월 열여섯 살 손여 그레이스가 문득 마주친 작약꽃, 철 이른 작약꽃은 그녀의 눈에 실제의 모란꽃으로 다가왔으리라, 낸시의 존재감은 그랬다. 중국과 한국 등 동양에서 모란은 부귀와 더불어 장수를 상징하는 꽃이다. 그래서 회갑(요즘은 가족 행사지만)이나 칠순 등 장수를 기념하고 기원하는 행사(상차림)에는 주인공 뒷면에 모란병풍을 세웠다. 근래에 말이 많지만 홍도, 목포, 영산포(나주) 등 홍어가 특산물인 전라도 서남권에서는 피로연에 홍어가 없으면 잔치를 인정하지 않는데, 모란병풍도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행사에서 그런 역할을 했다. 이처럼 대접을 받는 모란의 영광 뒤에는 비교대상으로 작약이 있지 않을까? 그레이스는 첫직장은 친절한 부자인 파킨슨 저택이다. 여기에서 동료이면서 절친, 사수이며 한 침대를 쓰던 메리를 만나 행복한 시절을 보내지만, 메리는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그레이스의 이직에 결정적인 요인이다. 요절한 메리의 장례식 풍경이다.
"애그니스가 장례를 도와주었어요. 우리는 마님의 허락 아래 정원에서 딴 꽃을 관에 넣었어요. 6월이라 줄기가 긴 장미와 작약이 만발했는데, 하얀 꽃만 골라서 땄죠, 저는 시신 위로 꽃잎도 흩뿌리고 제가 만들어 준 바늘 쌈지도 관에 넣었어요. 빨간색이라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으니 몰래 넣었죠. 그런 다음 메리를 기억할 수 있게 뒷머리를 한 움큼 잘라서 실로 묶었어요."__7부 <지그재그 울타리> 169면
이번에는 백작약이 등장한다. 안데르센의 단편 <빨간 구두>에서처럼 장례나 예배에서 빨간 색은 금기라, 작약도 흰 꽃잎만을 골라서 딴다. 홍작약, 백작약이지만 그래도 작약꽃은 빨간 색일 때 작약답다. 이제 이 소설에서 '작약'의 생태는 본래 의도했던 바, 외연을 확장한다.
"꽃이 아니면 좋겠는데……. 하지만 지금이 그 빨간 꽃이 자랄 철이다. 공단처럼 반짝이는, 물감을 뿌린 것 같은 빨간 작약. 그들이 자라는 땅은 공허, 텅 빈 공간과 침묵이다. 나는 나한테 뭐든 말 좀 해 봐 하고 속삭인다. 공단 같은 빨간 꽃잎을 떨어뜨리며 침묵 속에 느릿느릿 꽃을 가꾸기보다는 대화를 하는 게 낫다." __9부 <하트와 모래주머니> 215면
꽃필 무렵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 작약들이 자라는 땅은 공허, 텅빈 공간과 침묵이다. 석방 이후 그레이스의 실제 삶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30년 넘는 수감 생활을 포함하지만 그래도 '작약'보다는 '모란'처럼 오래, 예기치 않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았다. 드라마에서도 나름 안정을 찾은 그레이스의 이후 생활상이 소개된다. 소설은 그 즈음을 이렇게 다룬다. 여기, 이제 '그녀의' 그림 같은 정원(풍경)에도 작약꽃이 가득 피어 있다. "그레이스의 꿈에 빨간 작약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직 열여섯이 안 된 나이로 나리 댁의 기다란 앞길을 처음 걸어 올라갔던 날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났네요. 그때도 6월이었는데, 저는 지금 우리 집 베란다에 내놓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어요. 늦은 오후이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평화로워서 그림 같아요. (중략) 마지막으로 꽃을 피우는 작약도 한창인데, 분홍색과 하얀색 변종이고 꽃잎이 아주 빽빽해요. 제가 심은 게 아니라 품종은 모르겠어요. 그 향기를 맡으면 키니어 나리가 면도할 때 썼던 비누가 생각나요. __15부 <천국의 나무>에서(5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