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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해마다 봄이 오면 참고서 따위를 모아 폐지했다. 책장 정리도 했다, 아이들이  아직 학생일 때. 떡 본 김에 지내는 제사,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책들 함께 정리하는 책들의 장례식,  소멸의 의식이었다. 올해는 늦은 봄 주말에야 짬을 내어 책을 정리했다. 그렇게  공선옥의 장편소설 영란』을 만났다. 친구의 선물이었다.  소장할 책인데, 절판이라, 택배로 보낸다. 읽어보아라, 아니 꼭 읽고 만나자 했다. 목포 원도심 여행 가이드는 기꺼이 맡을 것이니, ‘꼭 읽고 오렴’, 조건이었다.

50 : 50. 당일은 출장, 다음 날 하루는 휴가, 그렇게 12일 여행 겸 출장이었고, 친구가 속한 업체 방문이었으므로 친구는 월차를 내고일을 마치자마자 곧장 목포로 달렸다. 하지만 도착했을 때는 땅거미가 내려, 다도해의 일몰 풍경은 포기해야 했다. 항구에 있는 H모텔에 방 두 개를 잡았다. 하나는 우리 부부 다른 하나는 친구와 그곳 후배가 묵을 예정이었다. 이곳 사장님은 고향이 신안(군)의 어느 섬이래, 손님이 많을 때나 적을 때나 늘 두세 개의 방을 남겨 둔다고 해. 폭풍우로 배가 끊겨 발이 묶인 고향 사람들을 위한 배려란다.

멋지네, 지금도 그럴까? 그런 얘기를 나누면서 예약된 횟집을 찾았다. 민어회 등을 ‘6시 내 고향처럼 차리는 곳, 너무 잘 알려져 목포기행의 필수 코스가 된 민어의 거리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당연히 그 집인가 보다 했는데, 친구가 안내한 곳은 널리 알려진 ○○횟집 바로 옆집이었다. 4인상에 15만원이었던가, 맞춤한 가격에 부딤 없이 민어회 풀코스를 위해 네 사람이 모였다는 듯이. ‘어느 집도 안면 있는 건 아니고, 이곳 지인들 따라 몇 차례 오간 곳'이라고 했다. 다만 옆집 상호가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을 뿐.


“‘이름이 뭐여?’ 나는 이름을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왠지 모르게 쑥스러웠다. 내가 머뭇거리자, 할머니가 말했다. ‘누가 물으면 인자부터 영란이라고 해불제 뭘.’”(61)

목포 선창의 허름한 영란여관. 여관과 식당을 겸하고 있는 할머니가 무심코 붙여준 이름 영란’, 서울내기인 는 낯선 곳에서 그렇게 영란으로 살아간다. 친구는 내가 당연히 숙제를 해온 것으로 알았겠으나, 출장 준비하랴, 그래도 여행이니 이것저것 챙기랴, 일상 업무까지 사실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주인공 두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가 있는 덕수궁 대한문 부근에서 만나는 장면이 나와, 작품 속 시간을 떠올렸던 기억이 난다. 이후 작품 속 공간(배경)이 목포라는 데까지도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목포를 다녀와 나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영란은 우리집 책장 어딘가에 꽂혀 한두 해를 살았던 모양이다,


여행 이튿날, 친구 후배는 출근하고 우리 일행 셋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목포해상케이블카였다. 북항 터미널에서 출발하여 유달산 중턱 정거장에 잠시 정차했다가 고하도 승강장(종)까지를 왕복하는 코스다. 가는 길 케이블카 안에서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를 보았다.  고하도 해변 길과 산길을 걷는 것까지 일정을 소화한 우리는 돌아오는 케이블카에 탔다. 그런데 갑자기 유달산 정차장에서 내리자는 것이다. 북항에 주차한 차는 한 사람만 택시로 이동하여 가져오면 된다는 것. 그렇게 산 중턱에서 목포 원도심까지 도보로 이동하였다.  길이 있는 듯 없는 듯, 조금 내려오니 유달산 둘레길을 만나고, 더 내려가니 목포 원도심에서 대반동(목포해양대학교가 있는)을 오가는 고갯길 정상이다. 케이블카를 오가면서 살핀 풍경 속으로 문득 들어와 버렸다는 느낌 그 자체만으로 신기한 일인데, 친구는 정상에 있는 자그마한 수퍼에 들러 음료든 아이스크림이든 하나씩 먹고 내려가자는 것(손님이 뜸해 그곳에 아이스크림은 없었다). 70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사장님과 친구는 아는 사이인지이런저런 안부를 나누었다.


유달산(해달 228m)의 생명력 넘치는 풍경, 항구도시 사람들의 정겹고 따스한 온기와 부대끼며 는 과거의 상처를 보듬고 영란으로 살기 시작한다. 그렇게 영란으로 거듭난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몇 년째, 물놀이 사고(익사)로 보낸 어린 아들, 곧이어 차량 전복사고로 곁을 떠난 남편까지, 혼자 남은 나, 곁을 떠난 가족들의 빈 자리를 항구의 사람들이 채우기 시작한다. 목포의 영란여관’(에서)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수옥, ‘를 보며 가슴을 두근대는 완규, 그의 여덟 살배기 조카 수한, 치매 걸린 어머니와 사는 슈퍼 안주인 조인자 등등. 그리고 지고지순한 청각장애인인 모란, 그 딸을 묵묵히 돌보는 모란의 아버지 황진생이 있다.  친구는 설명하지는 않았다.  최근에 읽으면서 대반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하나뿐인 구멍가게 가, 황진생과 그 딸 모란이 사는 집(모델)이었음을  깨닫는다.


내가 맞춤 가이드라고 했잖아! (사실은 소설을 다 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어) 가게 주인은 나하고 사돈네 팔촌쯤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작가가 거기(원도심) 상당히 머물렀던 것 같아. 그래서.”

친구도 원도심에 일정 기간 살았는데, 소설 영란속 공간(배경)의 디테일은 상상 이상이라고 했다. 고갯마루 가게를 나와 옛 목포제일여고를 왼쪽에 끼고 내려오는 길, 목포의 사업가가 생전에 살았다는 저택(일부는 성옥기념미술관으로 개방, 저택은 <장군의 아들> 촬영), 등산로 초입의 목포근대역사관1(드라마 <호텔 델루나> 촬영지), 노적봉까지 둘러보고 전날 들렀던 민어횟집 부근, 목포 원도심을 찾으면 으레 걷는 코스까지. 12일 일정은 끝났다.

목포근대역사관1(옛 목포 일본영사관) 앞 대로변에는 돌기둥이 서 있고 <國道 1·2號線 起點 紀念碑 >(국도 1·2호선 기점 기념비)라는 상당히 복잡한 한자가 새겨져 있다. 목포에서 신의주까지(국도 1호선), 목포에서 부산까지(국도 2호선), 우리나라 1·,2번 국도가 시작되는 곳이면서 끝나는 기점이 거기 있었다. 친구가 그 기념탑을 배경으로 우리 부부더러 사진 한 컷을 촬영하자고 한 뜻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영란에게 항구 목포는 삶의 끝이면서 새로운 시작이었다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미안하고 감사해, 친구가 마련한 문학기행의 마침표를 이제야 찍는다.


너무 늦지 않게 민어회 먹으러 가자던 약속 아직 못 지켰네.”

, 그렇지 뭐. 그나저나 코로나 때문에 고생이 많다.”

K-드라마도 아닌데 K-드라마인 줄 안다. 최근에 OTT드라마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파친코>의 일부 배경(부산 영도)이 목포 원도심이란다. 목포근대역사관(1) 건물을 왼쪽에 끼고 노적봉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문득 스치는데, 검색해보니 그렇더라고. 다음 목포기행은 좀 더 풍성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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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5-13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란』종이책은 절판 상태이네요. 전자책은 살아 있고.. 링크가 종이책으로 걸려서 적습니다.

2022-05-13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속에 눈썹을 두고 왔어 

찾으러 갈까

 

박연준의 시 <침대> 부분. 도발적인 시상 포착이 뛰어난 시인, 시인다운 시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와 저 혼자 툭, / 떨어질 때가 있다" 시집 베누스 푸디카에서 발견한 이 시의 첫 부분도 쎄다. 한때 자연방목 꽃사슴 목장을 자주 오갔다. 가파른 산을 낀 22만 평 넘는 목장에는 수백 마리 꽃사슴이 자라고 있다(고 했다). 가까이 그리고 먼발치에서도 그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100% 자연방목은 아니라, 동한기 등 야생 먹이가 귀할 때는 사료를 제공한다. 의존성이 생겨 급이할 때가 있다. 사슴들은 그런 관리자에게는 경계를 늦춘다. 하지만 낯선 이들에겐 곁은 물론 한두 끼 굶을지언정 급이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업무상 사진이 필요했다. 지붕이 뚫린 차량 밖으로 몸을 내밀고 최대한 서행하면서 촬영을 시도했다. 그렇게 100미터쯤 전방 들판에 노니는 사슴들을 만났다. 찰칵!, 순간 셔터음을 들은 것처럼, 사슴들은 숲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스포츠 모드라야 했어) 이어진 컷들은 피사체가 흔들려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200여미터를 달리던 사슴들, 말 그대로 '사슴처럼' 달리던 사슴들이 산기슭에서 문득 멈춰 선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다. 차알~, 그렇게 필요한 사진 한 장을 세이브했다. "선생님, 미안해요. 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운전석 생산자가 들려준 얘기다. "녀석들은 무섭게 달리다가 잠시 멈춰요. 그리고 뒤를 돌아봐요. 바로 그 순간 녀석들은 총을 맞아요." 사냥꾼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이란다. 노련한 사냥꾼은 바로 그 순간을 느긋하게 기다린다, 했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노루나 고라니들을 곧잘, 그렇게 만났다. 하지만 사슴(꽃사슴)은 교과서()에서 먼저 만났다. 분명하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왜 달리기를 멈추고 잠시 돌아보는 것일까? 그렇게 하게 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둘 중 하나이거나 둘 모두라고 생각했다.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달콤한 먹을거리(풀들), '내가 왜 달려야(에너지 낭비) 하지, 위험은 사라졌나 확인하려고. 하지만 '무엇'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는 왜 그런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해석에 필자처럼 사슴을 국어 교과서에 먼저 만난 분들의 아쉬움 없지 않으리라.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 그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가 더, '무척 높은 족속에게'는 걸맞다. 사슴들은 늘 그렇게 바라보아야만 한다. 사물이나 추억에 대한 그리움. Homesickness 또는 Nostalgia', 향수(鄕愁) 때문이었을까? 면벽 선승처럼 씨름하는 화두쯤은 아니지만 사는 동안 문득 내겐 화두 한두 개 쯤으로 있다. 3~4월 다 자란 꽃사슴의 뿔은 떨어지는데, 녹각(鹿角)이다. 노천명은 '향기로운 관()'으로 읽었다. 새로 자라난 뿔은 6~7월이면 가장 크고 화려하게 자라고, 이후부터 녹각이다. 이즈음 5월에서 6월 사이 말랑말랑한 뿔을 채취하는데, 새로 자란 사슴의 연한 뿔, 이것이 녹용(鹿茸)이다. () 위에 자란 풀(), 죽순(竹筍과 생리와 채취 시기에서 다를 바가 없다.

 

여기까지, 어린이들도 접근 가능, 이제부터는 잔혹한 동화다. 이즈음 먹을거리를 찾아 꽃사슴들은 속속 급이(급식) 장소에 도착한다. 먹을거리도 차츰 달콤하였다. 이번엔 그냥 돌아갈 수 없다. 수금할 시간. 마취총에 사슴들은 쓰러지고, 두꺼운 천막 위로 옮겨진다. 모든 생명에게 삶은 전쟁, 야전(野戰) 침대다. 생산자는 전기톱으로 사슴의 연한 뿔을 자른다. 피가 흐른다. 지혈을 한다. 해주는‘. 동안 깨어나지 못한다. 후숙이 덜 된 바나나를 만지는 촉감, 최고급 녹용은 그렇게 생산된다. 인위이지만 내겐 카이로스. 다가가 촬영한다. 오얏꽃(자두나무의 )들의 낙화, 꽃비 내려 꽃사슴이 되었구나. 만져본다. 오얏꽃은 조선 왕실의 문양. 그들의 벛꽃이 아니다. 오얏꽃과 벚꽃, 꽃들의 한일전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작품 자체, 작품 '' 자체만 보자 그랬다. 뉴크리시티즘(신비평)이다. 첫째, 작품 외적 요소는 배제하고 작품 자체만 볼 것. 둘째, (사람) 작가의 삶을 작품에 결부하는 것도 금물, 기타 등등.

김지하 시인이 어제 작고했다. 명복을 빈다. 젊은 날, 이후로도 오랫동안 우상이었던 선배 시인의 다른 견해(모습)에 입은 상처는 여전하다. 애증이다. 애증이니까 사람이었다. <사슴>의 노천명만 보자는데, 노천명의 <사슴>이 보인다. <타는 목마름으로>의 김지하만 보고 싶다. 안 된다. 나만 그러한가?

 

102. 샘물가의 사슴과 사자(이솝 우화, 천병희 원전 번역)

사슴이 목이 말라 샘물가에 갔다. 사슴은 물을 마신 뒤 물에 비친 제 그림자를 보았다. 사슴은 크고 여러 갈래로 뻗어 있는 제 뿔이 자랑스러웠지만, 가늘고 약한 제 다리들을 보고는 몹시 속이 상했다. 사슴이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사자가 나타나 사슴을 쫓기 시작했다. 사슴은 도망치기 시작해 사자를 크게 앞질렀다. 사슴의 힘은 다리에 있고, 사자의 힘은 심장에 있기 때문이다. 빈 들판에서는 사슴이 사자를 앞질러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무가 우거진 곳에 이르러 뿔이 나뭇가지에 엉기자 사슴은 더 이상 뛰지 못하고 잡혔다. 숨이 끊어지려는 순간 사슴이 중얼거렸다. “불쌍한 내 신세야! 내가 불신했던 다리는 나를 구해주었는데, 내가 믿었던 뿔이 나를 죽이는구나!

 

사슴은 초식동물. 살기 위해 뜯어야 한다

그런 삶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 목은 그렇게 길어졌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다리가 길어졌다

다리가 길어지는 동안, 멀어지는 지상의 풀들을 먹기 위해 모가지가 길어졌다

이상은 생태에서 추출한 꽃사슴들, 그들의 해부학적인 슬픔이다

우리가 혹은 내가 삶의 시간 어디쯤, 꿈속에 두고 온 것은 무엇일까

그런 줄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그 무엇, 그것은 일종의 ○○은 아닐까?

김지하는 노쳔명은 그리고 나는?


꿈속에 눈썹을 두고 왔어

찾으러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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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5-09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당리에서의 나의 죽음은
출렁이는 가래에 묻어올까, 묻어오는
소금기 바람 속을
돌 속에 흐느적거리고 부두에서
노동자가 한 사람 죽어 있다
--김지하 <용당리에서> 앞부분

프레이야 2022-05-11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지하 시인 별세 소식 들으며 역시 끝이 좋아야, 끝까지 좋아야 한다는 교훈을 떠올렸어요.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박연준 시집 담아갈게요 표지가 이쁩니다.

Meta4 2022-05-13 22:34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아직도 살아서 인생의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아직 경기가 진행 중인데 어떤 선수를 우승했다고 선언하며 영관을 씌워주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하고 효력도 없지요.˝ 인용 때문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살피는 중인데, <솔론 전>의 한 대목이 생각나 입력해봅니다. 자기보다 행복한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여행 중이던 솔론이 있다면서, 크로이소스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솔론이 그에게 한 말이지요. 감사합니다.
 

드넓은 운동장 둘레에는 개교 즈음에 심었다는 벚나무 고목들이 자라고 있다. 벚꽃으로 유명해서 꽃필 무렵이면 축제가 진행되는 곳 중 하나인 고장. 싸리비로 꽃잎을 쓸어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뒤돌아보면 감당할 수 없는 꽃잎들이 흩날리고 더러는 흩어져 있다. 당시는 국민학교 지금 초등학교의 청소 시간, 야외 청소를 울력처럼 하던 봄날 난감했던 기억이다감독은 동급생이었는데, 좀처럼 통과시켜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러려니, 웃고 넘길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군사문화의 얼룩이 초등학교에까지 아로새겨진 때였고, 공정이나 이의제기는 통하지 않았다. 영화(1992)로도 제작된 소설(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한 장면(유리창 닦기)을 언급해야 좀 실감이 날까.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진 않았어!' 그 시절을 지켜본 아이의 동무가 마흔 살을 넘긴 어느 날 동창회 자리에서 건넨 소회란다. 아이는 서울에서 갓 전학을 온 '한병태'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엄석대’(소설 속) 무리의 견제 대상이고 늘 지는 쪽이었다. ‘석대는 육성회장의 아들이었고, 아이는 육상회비마저 제 때에 내지 못하거나 선생님이 슬쩍 내주시곤 했다육셩회장(育成會長), 근동의 유지, 알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기득권이며, 토호(土豪), 때론 정치인이라는 얘기였다


석대는 단 한 번도 아이의 성적을 따라잡지 못했다. 석대의 난동이 왜 하필 아이에게 집중되었는지, 자꾸 생각해도 원인은 이것뿐이었다. 아이의 선생님들은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바로잡아주지 못하는선생님도 더러 있구나! 희망을 만나기도 했다. 공부 오로지 공부밖에 없다, 힘이 더 센 것도 아니고, 부모가.. (이쯤하자) 아쉬운 것은 또 있다. 왜 반장을 성적순으로 맡게 했는지. 반장(선거) 때문에 새 학년 새 학기면 새로운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1학기도 그냥 석대가 하면 안 되나요?” 아이는 못하시는담임에게 청원하기도 했다.


작가가 글을 쓸 때에는 읽을 사람을 머릿속에서 미리 정한다. 이른바 독자의 상정(想定)’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쓸 때, 필자가 머리 속에서 정하고 있던 독자는 어린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글의 일부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어린이 독자를 갖게 되었다.” -이문열, 머리말에서


어린이용으로 다시 써야 한다어린이들에게 맞게 문장 구조를 손보고 낱말을 바꾸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작가는 새로 펴내는 책(소설머리말에서 사정을 밝혔다이미 상정한 독자가 바뀔 수 있을까그렇게 독자의 연령층을 낮춘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라떼는식 푸념 하나를 더 얹는 것 아닐까. 그렇게 소설은 애초에 상정한 대로(초판 출간 1987), 작품 속 시절 전후를 살았던 독자들에게 잔혹한 동화로 평가받은 것 아니었을까. 이솝(아이소포스)이 살아 돌아와 21세기 한국 어린이를 위해 자신의 우화를 다시 쓸 수 있을까? 불가하다. <소설원론> 강의, 교수가 그랬다. 소설에서는 작가의 말까지도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이제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는 거의 없다

 

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그해  서울에서 국제도서전이 있었어. 상당한 규모였지. 전단지를 무차별 살포하는 수준, 

부수가 장난이 아니었지. 거의 모든 판촉물이 들어갈 수 있는 가방, 배보다 더 큰  배꼽 사은품을 만들기도 했고.”

100만 부가 넘는 매체를 인쇄하는 중에 사고를 발견했다. 어른이 된 아이는 그 무렵 어느 매체의 팀장이었다. 담당 팀원(실무)들이 있고 바로 위에 과장, 그 위에 전결인 부장이 있었지만, 인쇄감리까지 맡은 실무책임이기에 캄캄해진 하늘이 무너지고 있었다. 간지로 끼워 넣은 엽서에서 발견한 오자(誤字). ‘벚나무벗나무으로 인쇄되고 있었다. 대형 인쇄소 부근에서 거기 영업본부장과 식사를 하다가 발견한 것. 공교롭게도 엽서였다, 신규 독자를 가늠할 수 없는. 

어느 해 봄밤, 벚꽃이 만개한 여의도 축제 현장을 한 바퀴 돌고 해물파전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아이가 들려준 두 번째 이야기다. 나의 벗이 벚나무 아래에서 벗과, ‘벗나무와 벚나무 사이에서 거듭 경험한 일종의 트라우마. 그날, 인쇄소의 영업본부장이 들려주었다는 위로의 한마디를 빠뜨릴 뻔했다. “가을날 공원에서 낙엽 쓸기와 같은 것 아닐까요(교정이란 것이).”

 

플라톤은 여든에 죽을 때에도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흔아홉까지 살았고, 아흔넷에 자신의 가장 유명한 작품을 썼다. 고르기아스는 두 사람을 한참 어린애로 보이게 하는데, 그는 백일곱 살까지 살았고 죽는 날까지 일에 매진했다.”(439면 마지막 단락)

<13. 보브와르처럼 늙는 법>을 읽는 중이었다다음 440면  중반쯤을 읽어가는데 뭔가 이상했다. 소크라테스가 99세까지 살았다고, 가장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고? 내가 아는 그 소크라테스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무심코 지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를 하도 많이 만나(주석을 포함하여) (기원전) ‘469에서 399’라는 숫자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출생을 기원전 470년으로 보기도 한다). 

생몰연대에 ‘9’가 유난히 많아 어느덧 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99까지를 지나친 이유이기도 했다. 내가 아는 소크라테스는 70년 전후를 살았는데……그런 소크라테스가 작품을 남겼단다. 이 소크라테스가 그 소크라테스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저자가 인용한 구절이, 언급하는 인물들까지 원본 텍스트(출처)가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그리스 로마 에세이에 수록가 분명했다. 책을 찾아 살핀다마침 이 책(익스프레스)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참고하던 참이었다. 예상대로 이소크라테스


이소크라테스(Isocrates, 기원전 436-338)는 아테나이 웅변가로 그의 연설들은 실제로 연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읽히기 위하여 씌어진 만큼 일종의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노년에 관하여」, 옮긴이 주석

요즘을 살아간다면 이소크라테스는 대통령 연설담당(Speech writer비서관이지 않을까? 그가 말년에 남겼다는 역작은 판아테나이코스. 소크라테스(Socrates)는 평생 말(말씀)하였을 뿐이고, 한 것이나 하신 것으로 여겨지는 말씀을 담은 글()은 여든 살까지 살았다는 제자 플라톤이 남겼다.


실수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잡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면 안 된다.  오탈자가 좀 있네요, 하면 될 것을 부러 글에 담는 이유다. 내가 읽은 책은 작년(2021말에 인쇄된 21쇄 반양장(초판1, 21428)이다. 25만 부 기념으로 발행했다는(2022-03-14) 양장본에 이 대목은 수정되었는지? 2(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만이 아니고 곳곳에 소크라테스가 출연하고, 제목에까지 소크라테스(마케팅)가 등장하는데, 치명적인 오류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주석은 길거나 짧거나 해당 페이지에 수록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생략했더라도(그곳 독서환경과 우린 다르다) 역주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리고 해당 페이지에 주석이 없다고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렇게  보일 뿐. 늦은 봄, 올해도 어김없이 벚꽃은 만개했다 한 달쯤 전에 졌는데, 친구의 아픈 벚꽃들까지 소환하다니, 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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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8 0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08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를 간다분노에 치를 떤다대상이 있다복수를 계획한다가능하다면.. 그 복수 달콤한 꿀이다단체여행을 할 때, 2인 1실로 하룻밤을 한 공간에서 동성의 파트너와 지낼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코를 고는 것은 아닐까내가 혹은 상대가나는 코를 골지 않는 편이지만가끔 심신이 무척 고단할 때는 그리한다는 것을 아침에 들어서 알고 있다양해를 구한다그런데 상대가 코를 골아 내가 잠을 설친 적은 많아도 내가 폐를 끼친 경우는 드물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그리고 상대도 그럴 수 있음을 늘 감안한다그러던 어느 날저편 침대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소리에 깨어났다찢는?  그 소리에 알맞은 단어를 아직 고르지 못하였다. 이를 가는 그 둔탁한 혹은 날카로운 소리그 소--름을 오랫동안 기억한다맺힌 게 많은신가 보다그럴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치료가 필요하다, 예방이 먼저라는 것 알면서도,  상대가 출장 파트너일 때는 밤새 할 일이 있다며 방 하나씩 잡는 식으로 숙면을 기약한다.

 

이를 간다그런데 녀석들을 그 흔적을 어김없이 남긴다나무 들보를 갉아놓거나 과실치상처럼 흙벽에 구멍을 뚫기도 한다구멍을 뚫기 위해 갉아내는 건 이해한다, 생존이니까하지만 갈아야 하니까 갈다가 바람벽을 망가뜨리는 건 용서할 수 없다주권 침해이면서 인권침해다. 요즘은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리지만 날마다 이런 흔적 때문에라도 쥐라는 동물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다이 작고 앙증맞은 동물은 거대한 부피의 들짐승을 맞닥뜨렸을 때그 이상으로 섬뜩한 뭔가를 준다지금이야 공간을 분리하는 재질들이 콘크리트이거나 금속류 등 그들이 흔적을 남길 여지는 거의 없다그러나 목재 건물은 사정이 다르다표면에 특별한 마감이 필요하다예나 지금이나 쥐는 유해동물로 분류된다퇴치하려면 그 흔적부터 찾아야 한다안 되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갈아야 하기 때문에 갈았을 뿐인데그런 빼박 증거에 그들의 종말은 가까워진다그리스적인(?) 비극이다때문에 녀석들은 이를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걷는다. 살기 위해 걷는다요즘 내게는 걷기가 그렇다 친구 얘기다고향마을에 몇 년 머물렀을 때란다보통 한적한 농촌마을이라고 하지만 결코 한적하지는 않았고요즘 그렇게 한적한 마을은 없다고 했다. 훌륭한 리뷰가 아닐 수 없다. 밭농사에 할 일이 많아 한여름에도 제초작업 등으로 쉴 틈이 거의 없는 아짐들 얘기다저녁 9시쯤이면 두런두런 길을 걸으며 나누는 대화가 창틈으로 들려오기 시작한다오늘 화제가 무엇인지는 파악할 수 없다금세 지나치기 때문이다. 8시 30분에 시작된 일일드라마가 끝난 때라는 것을 아는데칸트 선생의 산책을 떠올린다, 그처럼 시간를 맞추어도 될 정도란다온종일 뙤약볕 아래서 자기 몫 밭일을 하고논일하는 서방님들업무보조(데모도)까지 긴 하루, 일하다 보면 걷는 거리가 상당할 텐데 야밤에 시간을 내서 부러 걷는 것일까그 아짐들 나이 되니비로소 알겠더라, 생활가전들과 이동수단의 눈부신 서비스 덕분에 생활이 곧 걷기이던 건 옛날 얘기가 되었다는,  얘기다.

 

개울(흐르는 물이 그 수준)을 낀 천변이나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씩 걷는 사람들을 목격한다대체로 중년 이상이지만 연령층은 특정할 수 없다종아리는 제2의 심장이니까한쪽 가슴 어디쯤 심장에만 기대어 살았으니그간 고생했을 테니까, 부담을 덜어줄 필요가 있다그렇게 걷다가 생각한다씹는 것멸치나 북어포, 황태포나 말린 오징어건과류 등 씹어야 하는 먹을거리를 정기적으로 구입한다어떤 녀석들처럼 이를 갈기 위해서는 아니다. 아니 그럴 수 있다. 씹기와 건강(두뇌)의 친밀성,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씹기와 걷기가 심신 건강에 기여하는 점은 습성과 효과에서 유사하다오늘도 걷다가 잠시 개여울 가 벤치에 앉아 잠시 쉬고 있다귀를 쫑긋하지 않아도 아짐들의 얘기가 들려온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저녁 9시에 시작된 농촌마을 아짐들의 걷기에 대해. 씹으면서 걷고 걸으면서 씹지 않았을까악플보단 선플이 좀 더 많았기를오늘도 걷다,  홀로이 개여울에 앉아 하염없이 생각한다말로 버전이다.


그리스 로마 에세이』  중 플루타르코스의 <수다에 관하여참고

건강한 수다는 있을까? 

없을 것 같다.  단언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중 <루소처럼 걷는 법참고

플라톤전집을 읽노라면 소크라테스처럼 걷는 법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건 내가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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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나는 종이다. 사람 없는 오래된 절에 있는, 미리 스위치를 눌러두기만 하면 시간과 횟수 정확하게 지켜 울리는 전자동 종이다. 오늘 나는 평소와 달리 자정이 조금 못 되어 제야를 알리기 위한 중후하고 엄숙한 소리를 마호로 마을로 보낸다.” _12월 31일 토요일, <나는 종(鐘)이다>에서, "나는 기계다."  


소설 『천일의 유리』(전2권)는 구성 자체가 독특하고 난데없는 에피소드를 만나, 따분할 때마다 펼치는 책이다. 이게 소설이 맞나, 여느 독자의 첫인상도 필자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하루에 한 꼭지씩 무려 1,000개의 퍼즐들의 첫문장은 ‘나는 □□이다’로 시작된다. 여기서 ‘□□’은 시점이며, 화자(話者)이다. 이번에는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 자정 즈음에 울리는 ‘종(鐘)’이 관찰자(시점)다. (내 구조의 비밀은 세상에 죄 알려지고 말아) “아무도 내 소리에 옷깃을 여미지 않는다.” 오로지 소년(요이치)과 그의 친구인 파란 새(큰유리새)가 ‘내 소리’에 어김없이 반응하고 “쓸쓸하네,”라며 운다. 이에 그들이 가련하여 나는 고백한다. 


“나는 결국은 괘종시계와 마찬가지로 그저 기계일 뿐이니까. 아무쪼록 가볍게 흘려버리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일부러 한 번, 즉 백아홉 번째 소리를 장치가 부서질 것을 각오하고 내 자신의 의지로, 고오옹, 하고 낸다.”  


#01. '괘종시계와 다를 바가 없다'며 자신을 비하하는 종이 108번 다음 한 번 더 울릴 대한민국 서울 종로의 종각에서는 33번, 일명 보신각 종소리가 울린다. 108번(백팔번뇌)처럼 타종 33회는 불교의 의식과 연관되어 있다. 원래는 절에서 아침저녁으로 종을 108번 울렸는데, 아침과 저녁 예불을 알리는 타종 횟수도 그렇고, 제야의 종도 33회로 간소화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 왜 하필 보신각 제야의 종이 33회인가 그 유래는 조선 건국 초기로 거슬러 오른다. 1396년에 한양성이 완성되고 종루는 1398년에 완공했다. 이때부터 새벽 4시에 33번(28수+중앙 별자리 5수) 타종하여 성문을 열고, 저녁 10시에는 28회(동서남북 별자리인 28수 반영) 타종하여 성문을 닫는 의식이 시작되었다는 것. ‘숭유억불(崇儒抑佛)’ 이념을 실천한 조선이지만 불교가 국교였던 전 왕조의 영향까지 무시할 수는 없지 않았나 싶다. 


#02. 타종 횟수 관련,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친구는 일행과 함께 전북 남원과 경남 함양의 경계에 있는 지금은 퇴락한 사찰을 찾은 적이 있단다. 찻길은 있지만 오가는 중에 차를 만나면 교행하기가 힘든 곳. 2박3일쯤 머무는데, 거기 한 처사(남자 신도)를 만난다. 숙식을 해결하는 대신 절 바깥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 다담(茶談)을 물리고 ‘차곡차곡(茶穀茶穀)’ 절차에 따라 곡차(穀酒)를 마시는데, 주지 스님도 속세에서 공수하는 곡차(막걸리)를 모른 척해주신다는 것. 하루에도 두세 차례씩 예초기를 가동하며 사찰 일원의 시설관리부터 정원사 노릇까지 하는 처사에게 월급을 대신한 일종의 배려였다. “여기서도 하는 일이지만……,” 

곡차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처사가 이전 절에서 머물던 이야기를 꺼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사찰인데, 처사는 거기에서도 비슷한 일을 했는데, 중요 일과 중 하나가 조석으로 예불을 알린 타종이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책이라고는 거의 없는 수납장에 가까운 책꽂이에서 종이컵 하나를 꺼내더란다. 구겨진 흔적이 역력한 그 종이컵에는 노란색이 선명한 굵직한 콩이 반쯤 담겨 있었다. 

“새벽에는 스물여덟 번, 저녁에는 서른세 번 종을 쳐야 하는데 내가 몇 번을 치고 있는지 늘 헷갈리는 거요,”

해서 마련한 궁여지책이 33개의 콩알이었다. 저녁 타종 때는 처사의 오른쪽 호주머니에 33개의 콩알이 담겨 있고, 한 차례 타종을 할 때마다 콩 한 알을 왼쪽 호주머니로 옮기는 식으로 숫자를 체크했다. 새벽종을 울리려 나갈 때는 책꽂이에 콩 5알을 남겨 놓고 나가는 식이었다는 것. “누가 세겠어, 그런데 아닙니다. 어느 날 새백, (타종이) 한 번인가 빠진 모양인데, 주지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한마디 하더라고요.” 친구는 33개의 콩알 사진을 촬영해 두었다고 보내주었다(사진). 새벽(朝)예불에 28회, 저녁(夕)예불에 33회, 조선의 보신각 타종 횟수와는 정반대다. 여기에도 뭔가 음모가 있는 것인가? 


#03. “백아홉 번째 소리를 장치가 부서질 것을 각오하고 내 자신의 의지로, 고오옹, 하고 낸다.” 원 플러스 원(1+1)도 아니고 투 플러스 원(2+1)도 아니고, 무려 백팔번뇌 플러스 원(108+1)이 새롭게 다가온다. 왜 108일까? 불교의 발생과 전파가, 인도 어디쯤에서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간 데는 이론은 없을 듯하다. 소설 『천일의 유리』(전2권) 시간 배경은 1987년~1989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천황이 죽고 새로운 천황이 즉위하여 연호가 바뀌는 격동기다. 그리고 그 종소리는 오늘 우리가 아는 여느 사찰이 아니라 오늘날도 여전한 일본의 절, 신사(神祀)에서 울려퍼진다. 

남산 아래, 해방촌에는 108계단이 있다.(331면) 용산고 뒤편 후암동 옛 종점에서 남산의 남사면 언덕 위로 오르는 긴 계단이 그렇단다. ‘108 계단’이라고 부르니, 108개의 계단이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막바지에, 이 108계단을 오르면 신사(神社)가 있었단다. 일본제국을 위해 생명을 던진 일본군들의 명복을 기리는 곳, 거기에 조선인들이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했다. 그 흔적이다. 이제 108이란 숫자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에도 계엄군 지휘본부를 옛 신사가 위치한 자리했다는, 조망이 좋은 산 정상에 설치한다. 전남 구례에 출장을 갔다가 지인의 안내로 손쉬운 등반을 한 적이 있다. 지리산 정상 가운데 하나인, 노고단 정상을 쉽게 오를 수 있다고. 정상 가까이 주차하고, 느리게 걸어도 왕복 두 시간쯤 발품을 팔면 정상에 다녀올 수 있다. 거기 S자 곡선 등산로를 가로지르는 지름길 나무(방부목) 계단이 있는데, 혹시 오를 때는 생각했는데, 내려올 때 따박따박 세어보니 계단 숫자가 108개였다. 숫자에는 의미가 숨어 있다, 그런 숫자가 있다. 


#04. 고대 그리스, 스파르테 정체의 초석을 다진 사람, ‘뤼쿠르구스 전’(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입법자 뤼쿠르고스에 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첫 문장)지만 숫자는 의외로 정확히 등장한다. 원로원의 원로는 28명. 그가 창설한 최고 의사결정 기구 원로원(비극의 상원) 원로는 28명.  28인가? 

1)(아리스토텔레스): 뤼코르쿠스와 결의한 30명 중 두 명이 겁이 나서 빠졌다(30-2=28) 

2)(스파이로스, 6*4=28): 처음부터 28명이었다. 7*4=28(28의 약수 중 28을 제외한 나머지 약수 1,2,4,7,14의 합이 28이므로 28은 완전 수)이다. 

그런데 정설은 있다. 이 책에도 있지만, 내(플루타르코스) 생각에, “뤼쿠르코스가 원로원 수를 28명으로 정한 까닭은 28명에 2인의 왕을 합하면 모두 30명이 되기 때문인 듯하다.”(28명+2명=30명의 원로들) 다음이 중요합니다. 28+2인의 왕들(씨족 1명, 부족 1명: 혈연 1인 지연 1인)의 세력(입지)을 반영했다는(플루타르코스 26~27면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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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2-23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콩알 사진을 올리다보니, 아마도 종이컵채 호주머니에 넣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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