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정말 뜨거웠다.

어딘가에서는 조금 무섭게 소나기도 내렸다는데, 여긴 아직...

 

비를 좋아하지 않으니 장마를 기다리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이런 더위에 소나기도 한번쯤은 보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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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청소노동자예요! -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찾은 엄마의 파업 이야기 희망을 만드는 법 9
다이애나 콘 글, 프란시스코 델가도 그림, 마음물꼬 옮김 / 고래이야기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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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나... 내 주변의 아이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느낀 것은, 언젠가부터 외동아이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꼭 그래서인 것은 아니겠지만 아이들의 모습에서 심각한 개인주의나 이기심을 보게 될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함께 보는데 익숙하지 않고 오직 나를 먼저 보는, 혹은 나만 보는 사고방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볼 때는 섬뜩하면서 위험을 느끼기도 한다. 북적거리는 집안이나 학교, 나눠 먹거나 함께 해야 하는 것이 어떤 예의처럼 자리 잡았던 시절, 그래서 ‘함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오래전 그때, 내가 자라던 시절을 기억한다. 내가 자라온 환경만 해도 어김없이 그랬으니까. 먹고 사는 문제가 1순위였던 그때, 가난 때문에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말끔한 양복을 입고 출퇴근하고 남들에게 명함 내밀기 좋은 직업이 아니라, 기름때가 절은 옷을 입고 출퇴근하는 아버지가 창피하다고 생각했던 철없는 때이기도 했다. 이미 그 시간을 지나와 훌쩍 자라고 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창피한 게 아니라 노동의 아름다운 흔적이었다. 굳은 살이 되어 갈라진 손바닥과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작업복의 기름 얼룩이 삶에 있어서 '고마움' 그 자체였을 텐데 말이다. 그런 의미를 이제와서야 알게 됐다. 힘든 하루 노동의 끝에서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풍경, 하루의 노고를 칭찬해주는 담소, 힘들지만 아침 출근길이 마냥 행복함을 알아주는 사이로 이어지는 관계의 흐름이었다. 그랬기에 사람 사이가 더욱 돈독했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누군가 손을 내밀면 잡아줄 줄 아는, 언젠가 나도 그 손을 내밀어야 할 때가 있다는 공감을 자연스럽게 배우는 시간이었기에 말이다.

 

처음에는, 이미 무슨 내용인지 다 알고 있는 이 책이 자칫 무겁게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했었다. 노동자의 권리나 모두가 한목소리를 내기 위해 연대를 형성하는 과정이 이 책을 읽을 아이들에게 너무 어려워서 거리감 있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는 노파심이 있었다. 하지만 웬걸, 막상 읽고 보니 너무 진중해서 무거운 게 아니라, 굉장히 쉽게 풀이된 다큐멘터리 한 편 보는 것 같아서 집중할 수 있던 책이다. 어려운 말로 포장한 게 아니라 누가 봐도 이해가 가능하게 하는 쉬운 설명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우리 엄마는 청소노동자예요!』라는 제목을 바로 내 옆에서 주인공 카를리토스가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카를리토스에게 느낀 긍정마인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린 나이의 카를리토스에게 엄마가 건물의 청소노동자라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친구들에게 감추고 싶은 비밀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너무나도 당당하게 엄마의 직업을 외치는 소년의 목소리가 우렁차다. 내가 잠깐이나마 가졌던 선입견들은 모두 기우였다.

 

 

 

 

 

카를리토스의 엄마는 로스앤젤레스 시내의 건물 청소부다. 남들이 모두 잠드는 밤에 출근해서 건물 안의 모든 것이 반짝반짝 빛나게 닦아낸다. 그리고 통이 터올 때 퇴근하고, 카를리토스의 등교를 봐주고, 집안일을 하고, 잠이 든다. 그러던 엄마가 청소노동자의 파업에 동참하게 된다. 노동자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에 파업이라는 선택을 한 것이고, 이건 카를리토스의 엄마뿐만 아니라 모든 청소노동자가 겪는 불공평한 처우이기에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한 일이다. 청소노동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파업에 함께하고, 뜻을 모아 같이 외치기 시작한다. 엄마는 그 파업의 이유와 과정을 아이에게 설명해주고, 아이는 엄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시선을 갖게 된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의 파업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동참한다. “나는 엄마를 사랑해요. 우리 엄마는 청소노동자예요!” 라는 외침으로 엄마의 행진을 같이 한다. 아주 씩씩하게!

 

 

몇 페이지 안 되는 이 책을 읽고 있자니, 2011년 H대학교의 청소노동자 파업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청소노동자의 환경을 저절로 떠오르게 한다. 아마 그런 일(파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실제 그 일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었을 내용이었다. 노동시간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급여는 최소한의 생활을 어렵게 했을 뿐만 아니라 청소노동자가 일하는 환경이 그렇게 열악할 수가 없었다. 가장 최근에도 U대학, J대학, C대학병원 등 여전히 청소노동자의 파업은 계속 일어났다.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곳곳에서 불공평한 처우가 계속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이 책에서도 그렇지만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들이 특별대우를 원해서 시작된 게 아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생활조차 할 수 없는 환경의 개선과 고용불안에 떨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바라는 것이다. 그에 당연히 따라야 할 것이 기본적으로는 임금인상이고, 복지일 것이다. 그러한 외침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 노동자들의 연대다. 노동조합이 형성되고 같은 뜻이 뭉쳐 힘을 발휘하는 것. 한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최종 목적지로 도달하기에 앞서 가질 수 있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의 용기다. 나 혼자가 아닌 ‘함께’ 가는 사회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느낀 많은 것 중에서 가장 크게 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므로,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행진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므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삶에서 노동이 주는 기쁨을 제대로 찾아야만 하므로...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을 이들이 하고 있다, ‘함께’. 그래서 더욱 집중해서 듣게 되고 공감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한 ‘우리’의 일이 되는 것이니까.

 

요즘 부모들이 아이의 교육에서 고민하는 부분 중의 하나가 ‘자존감’이라고 한다. 자존감이라는 말에 많은 의미가 부여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며 가치 있는 사람이라 여기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기본이 아닐까 한다. 내가 생각할 때 (아이의) 자존감이란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기본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말하는 노동이라는 것은 그 행복한 삶을 만들어줄 요소 중의 하나다. 자기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노동의 가치를 배우며,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인간으로서 사는 삶을 영위하는, 곧 행복해지는 길을 걷기 위함이다. 카를리토스가 바라보는 엄마의 파업이 그러지 않았을까? 엄마가 바라는 행복한 삶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불평등한 처우에 목소리를 내고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이 어린아이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는데 그 궁금증은 곧 풀렸다. 엄마가 아이에게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 생각하면 되니까. 엄마가 파업에 참여하게 된 이유와 그 파업의 과정, 시위의 현장에서 보이는 진심이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되었을 거라고 믿는다. 카를리토스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점점 더 자라면서 경험하게 될 세상의 단면일 것이기에 꼭 한 번은 봐야할 이야기다. 이 세상을 살면서 당연하게 노동자로 살아가는 부모, 어른이 되어 노동자로 살아가야 할 아이가 같은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게 하는 게 이 책의 매력인 듯하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이에게, 그래서 꼭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노동자의 현실이기에...

 

 

그래, 우린 할 수 있어!

 

강철과 콘크리트 아래

흔들리는 밤의 그림자 아래 어른거리는

눈동자와 목소리와 팔, 팔꿈치와 무릎들

건물을 빛내고 우리 모두의 얼굴 위에 빛을 비춘다.

이름도 없이 조롱받고 무시당하지만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엄마와 아이들, 아빠와 삼촌들, 여러 가족들…….

그들이 모여 이 도시를 춤추게 한다.

정의롭고 두려움을 모르는 리듬에 맞춰

파업과 항의, 분노와 존엄의 춤을 춘다.

 

유리 사원 안에서 그들이 노동한다. 더러움을 닦아낸다.

진실된 사람들이 거리로 나온다. 미래로 향한다.

그리고 선언한다. 이제 그만! 우리가 닦은 것들, 거룩하도다.

 

청소노동자였던 내 아버지 알폰소에게 바친다.

- 루이스 로드리게스의 시에서 -

 

 

카를리토스가 직접 만들고 거리의 시위 현장으로 나가 두 손으로 들고 있던 "나는 엄마를 사랑해요. 우리 엄마는 청소노동자예요!" 라는 팻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었다. 파업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보다 파업이 왜 시작되었는지 그 이유부터 보게 하는 내용에 저절로 시선이 가게 하는 강한 메시지였다. 이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고 행진하게 하는 그 불공평의 원인, 과정, 결과까지 한눈에 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행동이 아니다. 같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분명하게 보장되어야 할 권리를 찾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누구 한 명, 특정인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더욱 돋보인다.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와 함께 혼자가 아닌 ‘함께’인 삶, ‘함께’인 세상을 들려주는 이야기여서 더 반갑기도 했다. 게다가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점에서 그 생생함을 각인시킨다. 내가 살고 있는 지구촌 어느 곳에서 일어난 일, 모두가 힘을 합쳐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며 애쓰던 시간이 사실이라는 것. 그 결과가 너무 아름다워 노동자들 스스로에게 저절로 자존감과 용기를 주고 있다는 게 감동이다. 비단 이미 성장해버린 어른들 세상에서의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 아이가 살아가는, 살아갈 세상의 현재 모습이다. 그래서 카를리토스의 엄마가 더욱 힘을 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지금 보여주는 이 모습이 엄마의 행복과 함께 카를리토스의 행복까지 주관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 아이가 자라서 경험하는 사회에서의 올바른 태도를 배워가고 있는 시간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려고만 하는 내용이 아니어서 더 좋았다. 나의 일이 아니면 상관없다는 사고방식으로 그냥 지나치기 쉬운 문제를 같이 보게 해줘서 고마웠다. 마냥 재미로만 만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함께 읽으면서 만나게 될 이해가 절실히 느껴진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알면서도 설명해주기 어려워 입만 벙긋거렸던 기억도 나고, 아이가 알아주었으면 싶은 부모의 삶도 같이 보여주고 있어서 공감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아이들이 자기 자신의 행복만큼이나 세상 속에서 이뤄가는 관계에 대해, 연대에 대해 이 책을 통해 더 배우고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황폐해진 삶, 장애에 대한 편견, 성폭력에 대한 예방과 대처법 등등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을 보는 시선을 말하는 <희망을 만드는 법> 시리즈의 아홉 번째 이야기다. 세상의 모든 편견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건강한 가치관을 형성하기 위함이라는 취지로 시작되었던 이 시리즈가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알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웠던 이야기, 몰라서 그냥 지나쳤던 이야기, 살면서 조금 더 배려하고 배워야 할 일들을 계속 들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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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랩소디 - 2014년 제1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재민 지음 / 나무옆의자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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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해 글을 쓴 거라는 생각에 조금 더 분명한 어떤 증명 혹은 분석을 듣고 싶었던 듯하다. 정재민의 소설 『보헤미안 랩소디』는 나에게 그런 기대감으로 읽게 아였다. 그 누구보다 법에 대해 잘 알 거라는 생각에, 판사가 법과 정의에 관해 썼다는 이 소설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의사의 오진(?), 그로 인해 한 생명의 죽음, 개인에게는 분노를 일으킬만한 사건이다. 하지만 그 분노가 정의를 대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기가 어렵다. 그 분노는 복수를 꿈꾸게도 하고 체념하게도 만들지만, 그 가운데서 복수를 한다는 게 정의와 동의어로 들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 부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주인공에게 복수를 생각하게 만든 사건, 그 사건에 대한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이나 결과를 정의라고 부를 수 있는지.

 

우연처럼 듣게 된 한 마디가 시작이었다.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오랜 시간 꾸준히 진료를 받던 어머니가 어느 날 암으로 죽었다. 어머니의 암 투병을 이미 알고 있던 주인공 하지환 판사는 어머니가 암으로 죽은 줄로만 알았다. 맞다. 어머니는 암으로 죽었다. 그런데 그 암의 발병 원인이 어머니가 오랫동안 진료받던 류마티스 관절염이란 병 때문이라는 것은 의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처방받은 약을 꾸준히 먹으면서 위에 무리가 왔고 위암을 얻었다는 게 된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류마티스 관절염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고 놈이 노쇠하면서 생기는 평범한 퇴행성관절염이었다. 지방의 소도시인 신해시에서 우동규라는 류마티스 권위자(?)에게 꾸준히 진료받고 처방받은 결과다.

 

이제야 그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한다. 어머니의 죽음 후에 시작된 그 진실을 드러내려 애쓰던 시간의 이야기를, 친구인 황동혁의 부음을 듣고 2년여 만에 다시 신해지로 내려온 지금에서야...

 

사회적으로 의사는 환자들의 생명, 신체를 다루는 최상의 전문가로 존경받는 존재이다. 환자들은 의사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의 건강을 의사에게 맡긴다. 의사라면 양심과 전문 지식에 따라 환자들의 질병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최적의 치료 방법을 선택해야 하며, 환자들에게도 자신의 질병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줄 책임이 있다. 그러나 본건의 피해자 우동규는 환자들의 신뢰를 악용하였다. 이상, 지금까지의 수사 결과 스무 명의 피해자들에 대한 피의자 사기 혐의가 충분히 인정된다는 판단으로 기소 의견으로 송치한다. (130페이지)

 

과연 진실이 드러날 수 있을까?

지환이 어머니의 죽음의 원인을 알고 분노했을 때, 진실을 밝히겠다고 분노했을 때, 의롭지 못한 이 모든 상황을 고소하겠다고 다짐했을 때,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나는 불안했다. 지방의 작은 병원 하나, 권위를 내세워 환자들에게 거짓 병명과 위협과 공포를 선사했던 의사가 전부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멀쩡한 사람들을 빠져나오지 못할 병에 묻어버린 의사의 뒤에 어떤 배경과 욕심을 바탕으로 한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을지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점쟁이처럼 알아낸 게 아니다. 현실을 살면서 내가 본 것들이 그런 노파심을 만들고 있다. 그건 사실이었다. 판사로서 앞으로의 행보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이 싸움을 지환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워야만 했던 지환의 마음이 보이기에 지켜볼 수밖에... 하지만 정의는 쉽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환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사건은 흘러가고 좌절한다. 지환은 정신분석을 통해 자신의 내적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지경에 이른다.

 

개인의 분노와 복수심이 정의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나는 그렇다, 아니다, 로 말할 수는 없었다. 분노로 시작한 복수가 결과적으로 정의를 끌어낼 수도 있고, 복수가 복수로 끝날 수도 있음을 알기에 어느 한쪽으로만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이 소설에서 내가 주인공을 통해 본 것은 그런 나의 개인적인 생각에 변화를 일으켰다. 주인공 지환이 분노로 시작한 복수는 정의를 향해 가고 있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 정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과정을 이야기하고 싶다. 개인의 욕심을 위해 사기 의료도 서슴없이 행하는 사람에게, 개인이 시작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복수는 감정적인 흥분으로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같은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림으로써 함께 바로잡고 싶은 정의였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환의 어머니처럼 의료 사기를 당하고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고 있는 사람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기에, 그 사람들과 뜻을 함께하면서 바로 잡고 싶었던 거라고,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복수와 다른 사람의 피해를 막으면서 사기성 짙은 의료행위의 단절을 보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 우동규를 둘러싸고 있는 그 끈끈한 연결고리들, 언론이나 정치, 사법, 종교, 의료 기관까지 그 정의를 묻어버리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정의를 이루겠다고, 진실을 밝히겠다고 자신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 일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는데도 전혀 나아갈 수 없는 모습에 답답하고 막막한 현실 속 세상을 보게 한다. 선배, 동문, 상사, 지인 등등 언제 연결되었던 적이나 있었던가 싶은 사람들이 좋은 결말을 보자고 연락해오는 모습이 추했다. 우동규의 사기를 방관하다 못해 동조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서로서로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리베이트를 받아도 우리 약을 써주면 좋은 거고, 환자를 망가뜨리고 있어도 병원에 꼬박꼬박 나와 진료비를 내주니까 좋은 거고, 명의라고 소개되는 감투로 인해 쌓이는 재력과 권력이 좋은 거고...

 

바로 눈앞에 진실이 보이는데도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로 그 진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봐야만 하는 것일까. 법이 그 공정한 절차를 통해서도 적용되지 않음을 본다는 건 아이러니다. 주인공인 판사가 그걸 확인하는 과정이 그래서 더욱 씁쓸했다. 권력이라면 권력일 수도 있는 배경을 가진 사람조차 그 공정함을 적용받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벌을 받는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그게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 것을 봐야 하는 것. 정의가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정의가 무엇인지 묻고 싶은 의문을 갖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그 물음을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는 판사에게 묻고 있음이다. 그런데 그 판사조차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아니, 주지 못한다.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들려주고 있음에도, 그래서 그 정의를 묻고 있는 의문에 대한 답이 절실함에도, 답을 주는 것이 어렵다.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 보고 있는 현실, 믿기 어렵겠지만, 그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정의에 대한 물음이자 한 개인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이야기다. 상처의 깊은 뿌리가 온전하게 뽑히지는 않았어도, 그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함께 드러내고 치유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부모로부터 시작된 유년기의 상처는, 상처인 줄도 모르고 커지다가 성인이 된 후에도 영향을 미친다. 주인공이 정신분석 치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도 그 상처의 근원이었다. 결국은 그 시작을 찾아내어 끌어내고 치유해야 다음 행보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셈이다.

 

뒤늦게 알게 된 진실로 겪는 감정의 소용돌이, 그로 인해 찾으려 애쓰던 정의까지 다양하면서도 깊은 문제들이 우리 현실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불행은 늘 나에게 찾아올 수 있고, 삶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비록 그게 절망이라 할지라도, 불확실한 정의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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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 좋은 방
용윤선 지음 / 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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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줄, 한 페이지 읽다가 결국에는 구매해버렸다. 차분한 그 느낌에, 커피향에, 어딘가 구석으로 처박혀 있으면서 함께 하고 싶은 글.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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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작정하고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최근 읽은 몇 권의 책에서 재능에 관한, 그 재능이 발휘하는 천재성에 관한 언급을 계속 보게 되었다. 그 재능이란 것이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능력으로 타고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느 쪽으로든 분명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그때의 감정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휘둘리는 판단일 수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때로는 긍정적으로 끄덕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그 화살을 나 자신에게 돌리기도 한다. 나에게 오지 않은, 오지 않을 그 어떤 것에 대해 조급함 보다는 좌절이 먼저 찾아오는 듯하다. 안 보면 그만인 것을, 안 해도 별 상관없는 일들 앞에서 괜한 감정만 소모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뻔하게 나올 수 있는 답은 하나인 것 같다. 각자의 색깔이 있다, 저마다 더 잘하는 게 있다, 괜찮다... 물론, 괜찮을 거다. 그래야만 한다. 안 그러면 자신에게 없는 것에 대해, 그걸 가진 사람을 보면서 생기는 그 부러움을 어떻게 감당하고 추스를 수 있겠나. 또 그런 감정을 어떻게 감당하느냐 하는 것 역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걸 좀 객관적으로 보고 넘어가고 싶어진다. 모두가 다 같을 수는 없으므로, 어떤 현상쯤으로 보고 넘기고 싶은 것.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 나를 죽이지 않고 흘러갈 수 있는 방법 같아서. 외모든 타고난 재능이든 살면서 배운 현명함이든, 각자의 몫인 듯하다. 그 몫을 감당하는 것 역시도...

 

 

 

8살, 6살 남자 형제 조카가 있다. 큰 아이는 쌍꺼풀이 없는 눈, 동그란 얼굴, 보기 좋게 통통한 체형이다. 작은 아이는 쌍꺼풀이 있는 눈, 약간 갸름한 얼굴, 조금 마른 체형이다. 딱 봐도 알겠지만 두 아이의 외모가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다. 형제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내 눈에는 두 아이의 얼굴이 닮아서 분명 형제라는 게 느껴지는데 보통 첫눈에는 전혀 다른 아이들로 보이기도 한다. 바로 그 외모 때문에. 첫눈에 작은 아이는 누가 봐도 잘생겼다, 예쁘다, 라는 말을 듣는다. 여러 명이 있어도 유독 눈에 띄는 얼굴이다. 그에 반해 큰 아이는 그저 평범한 외모다. 내 눈에 큰 아이가 더 귀엽고 예뻐 보인다. 실제로 나는 큰 아이를 더 예뻐한다.(비밀) 하지만 작은 아이와 함께 있으면 큰 아이가 옆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못 알아본다. 분명 같이 있는데 작은 아이에게 먼저(아니면 작은 아이에게만) 말을 건다. 외모에 대한 칭찬은 기본이면서 관심을 쏟는 상황...

어느 날 큰아이가 엄마(내 여동생)에게 심각하게 얘기했다고 한다.

“엄마, 나는 얼굴을 바꾸고 싶어요.”

큰 아이에게 어떤 얼굴로 바꾸고 싶으냐고 물었단다.

(이 질문을 할 때까지 심각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가 하는 말이니 웃으면서 그런(얼굴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엉뚱함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00(작은 아이)의 얼굴로 바꾸고 싶어요.”

전해 듣는 나도 가슴이 철렁했다. 이제 겨우 8살 아이가 동생과 함께 있을 때, 혹은 동생에게만 몰리는 시선에서 뭘 봤기에 그런 말을 할까 싶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엄마, 나는 이름을 바꾸고 싶어요.”

(큰 아이의 이름은 수학을 공부할 때 나오는 이름이다. 혹시나 학교에서 친구들의 놀림이 되었나 싶은 마음에 걱정했단다.)

어떤 이름으로 바꾸고 싶으냐는 엄마의 물음에 아이가 대답한 건,

“00(작은 아이의 이름)으로 바꾸고 싶어요.”

라고 말했단다.

그러니까, 큰 아이가 생각했을 때 작은 아이의 외모가 질투의 대상이었을까. 굳이 보고 싶지 않아도, 같이 다닐 때마다 항상 사람들의 관심이 저절로 쏠리는 동생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렇다고 그 질투 때문에 동생을 함부로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저 평범한 형제 사이로 보인다. 같이 놀고, 장난치고, 먹고, 돌봐주고. 그런데도 가슴 속에 담아두는 상처가 생기기 마련인가보다. 외모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나 무심코 던지는 한 마디 때문에.

큰 아이는 4살 때 한글을 더듬더듬 익히기 시작하더니 곧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그 아이가 한글에 대해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주변의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일찍 한글을 알았구나, 하는 정도였다. 꼼꼼한 성격에 종이접기에 취미를 붙였다. 지금은 책을 보고 종이접기를 즐길 정도가 된 듯하다. 얼마 전에 와서 접어준 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나는 손으로 하는 건 정말 못한다. 내손만 닿으면 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수준이다.) 요즘 아이들 종이접기 수준이 다 그 정도인가 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닐 것이다. 엄청나게 말을 안 듣는 개구쟁이이기도 하지만, 차분하게 뭔가를 하는 모습이나 공부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게 저 아이의 장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큰 아이가 가진 장점이 반짝반짝 빛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본다.

반면 작은 아이는 아직도 한글을 잘 모른다. 겨우 자기 이름을 쓰는 정도다. 그런데도 당당하다. 형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서, 형이 귀찮아하면 “나는 책을 못 읽으니까 형아가 읽어줘야지!” 라며 큰 소리 친다. 얌전하게 앉아서 뭘 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다. 뭘 하더라도 항상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굳이 공부 쪽으로 생각해보자면, 작은 아이는 공부보다는 다른 것을 더 개발하도록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정도? 이 아이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혼나서 울 때 말고는 항상 웃고 있다. 뭐가 그리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도 모르겠다. 항상 웃고 있어서 웃는 모습이 이 아이의 일상처럼 보인다. 어쩌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게 이 아이의 장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 한글을 몰라도, 공부를 못 해도, 이 아이만의 매력이 넘치는 모습을 더 많이 봤으면 좋겠다.

 

 

 

 

 

 

 

 

 

 

 

 

사쿠라기 시노의 <순수의 영역>과 히가시노 게이고의 <몽환화>를 읽으면서 두 아이를 많이 생각했다. 너무 다르게 보이는 두 아이의 장점이 앞으로 어떻게 작용할지 궁금하면서 살짝 두렵기도 했다. 혹시라도 그 장점이 다른 이유로 방해받고 묻힐 수도 있을까봐... 두 작품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는 많고 다양했지만 유독 내 눈에 들어왔던 단어 두 개, 소설 속에서 ‘재능’과 ‘천재’라는 단어가 풀어내는 그 욕망과 무모함이 어떤 결말을 만들어낼지 궁금하게 했다. 예상했을 수도 있지만, 그 욕망의 끝은 결코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 끝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번쯤은 갈망하는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손을 뻗고 싶은 것이 인간의 모습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본다고 해도, 내 몫이니까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상을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 아닐까 하고. 그러면서도, 그럼 안 된다는 생각에 그 위험을 붙잡아야 하는(붙잡는 척하는) 것이 이 마음의 아이러니다. 어떤 게 맞는 거라고 앞으로도 분명하게 말하기 어려울지도 모를...

 

 

가능하면 챙겨보고 싶은 TV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진짜사나이>의 군대 무식자 헨리도, 음악 천재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손대는 악기마다 연주할 수 있는 놀라움을 발휘하면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그는 더 이상 ‘군대 무식자’라는 수식어보다 ‘음악 천재’라는 수식어가 앞서 오는 사람이 되어 버린 듯했다. 그럴 때마다 쌍엄지를 추켜들도록 만들더니 요즘에는 방귀를 조절하지 못하는 민망함으로 함박웃음을 주더라. 방귀에 대해 심각한 대화를 해야 할 정도로(혹 그게 예능의 설정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음악 천재도 방귀 조절을 못하는 단점 하나 있을 수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배시시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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