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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랩소디 - 2014년 제1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재민 지음 / 나무옆의자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해 글을 쓴 거라는 생각에 조금 더 분명한 어떤 증명 혹은 분석을 듣고 싶었던 듯하다. 정재민의 소설
『보헤미안 랩소디』는 나에게 그런 기대감으로 읽게 아였다. 그 누구보다 법에 대해 잘 알 거라는 생각에, 판사가 법과 정의에 관해 썼다는 이
소설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의사의 오진(?), 그로 인해 한 생명의 죽음, 개인에게는 분노를 일으킬만한 사건이다. 하지만 그 분노가
정의를 대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기가 어렵다. 그 분노는 복수를 꿈꾸게도 하고 체념하게도 만들지만, 그 가운데서 복수를
한다는 게 정의와 동의어로 들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 부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주인공에게 복수를 생각하게 만든 사건,
그 사건에 대한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이나 결과를 정의라고 부를 수 있는지.
우연처럼 듣게 된 한 마디가 시작이었다.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오랜 시간 꾸준히 진료를 받던 어머니가 어느 날 암으로
죽었다. 어머니의 암 투병을 이미 알고 있던 주인공 하지환 판사는 어머니가 암으로 죽은 줄로만 알았다. 맞다. 어머니는 암으로 죽었다. 그런데
그 암의 발병 원인이 어머니가 오랫동안 진료받던 류마티스 관절염이란 병 때문이라는 것은 의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처방받은 약을 꾸준히 먹으면서 위에 무리가 왔고 위암을 얻었다는 게 된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류마티스 관절염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고 놈이
노쇠하면서 생기는 평범한 퇴행성관절염이었다. 지방의 소도시인 신해시에서 우동규라는 류마티스 권위자(?)에게 꾸준히 진료받고 처방받은 결과다.
이제야 그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한다. 어머니의 죽음 후에 시작된 그 진실을 드러내려 애쓰던 시간의 이야기를, 친구인
황동혁의 부음을 듣고 2년여 만에 다시 신해지로 내려온 지금에서야...
사회적으로 의사는 환자들의 생명, 신체를 다루는 최상의 전문가로
존경받는 존재이다. 환자들은 의사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의 건강을 의사에게 맡긴다. 의사라면 양심과 전문 지식에 따라 환자들의 질병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최적의 치료 방법을 선택해야 하며, 환자들에게도 자신의 질병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줄 책임이 있다. 그러나 본건의 피해자
우동규는 환자들의 신뢰를 악용하였다. 이상, 지금까지의 수사 결과 스무 명의 피해자들에 대한 피의자 사기 혐의가 충분히 인정된다는 판단으로 기소
의견으로 송치한다. (130페이지)
과연 진실이 드러날 수 있을까?
지환이 어머니의 죽음의 원인을 알고 분노했을 때, 진실을 밝히겠다고 분노했을 때, 의롭지 못한 이 모든 상황을
고소하겠다고 다짐했을 때,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나는 불안했다. 지방의 작은 병원 하나, 권위를 내세워 환자들에게 거짓 병명과 위협과 공포를
선사했던 의사가 전부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멀쩡한 사람들을 빠져나오지 못할 병에 묻어버린 의사의 뒤에 어떤 배경과 욕심을 바탕으로 한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을지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점쟁이처럼 알아낸 게 아니다. 현실을 살면서 내가 본 것들이 그런 노파심을 만들고 있다. 그건
사실이었다. 판사로서 앞으로의 행보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이 싸움을 지환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워야만 했던 지환의 마음이
보이기에 지켜볼 수밖에... 하지만 정의는 쉽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환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사건은 흘러가고 좌절한다.
지환은 정신분석을 통해 자신의 내적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지경에 이른다.
개인의 분노와 복수심이 정의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나는 그렇다, 아니다, 로 말할 수는 없었다. 분노로
시작한 복수가 결과적으로 정의를 끌어낼 수도 있고, 복수가 복수로 끝날 수도 있음을 알기에 어느 한쪽으로만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이 소설에서
내가 주인공을 통해 본 것은 그런 나의 개인적인 생각에 변화를 일으켰다. 주인공 지환이 분노로 시작한 복수는 정의를 향해 가고 있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 정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과정을 이야기하고 싶다. 개인의 욕심을 위해 사기 의료도 서슴없이 행하는 사람에게, 개인이
시작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복수는 감정적인 흥분으로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같은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림으로써 함께 바로잡고
싶은 정의였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환의 어머니처럼 의료 사기를 당하고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고 있는 사람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기에, 그 사람들과 뜻을 함께하면서 바로 잡고 싶었던 거라고,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복수와 다른 사람의 피해를 막으면서 사기성 짙은 의료행위의
단절을 보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 우동규를 둘러싸고 있는 그 끈끈한 연결고리들, 언론이나 정치, 사법, 종교, 의료
기관까지 그 정의를 묻어버리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정의를 이루겠다고, 진실을 밝히겠다고 자신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 일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는데도 전혀 나아갈 수 없는
모습에 답답하고 막막한 현실 속 세상을 보게 한다. 선배, 동문, 상사, 지인 등등 언제 연결되었던 적이나 있었던가 싶은 사람들이 좋은 결말을
보자고 연락해오는 모습이 추했다. 우동규의 사기를 방관하다 못해 동조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서로서로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리베이트를 받아도
우리 약을 써주면 좋은 거고, 환자를 망가뜨리고 있어도 병원에 꼬박꼬박 나와 진료비를 내주니까 좋은 거고, 명의라고 소개되는 감투로 인해 쌓이는
재력과 권력이 좋은 거고...
바로 눈앞에 진실이 보이는데도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로 그 진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봐야만 하는 것일까. 법이 그
공정한 절차를 통해서도 적용되지 않음을 본다는 건 아이러니다. 주인공인 판사가 그걸 확인하는 과정이 그래서 더욱 씁쓸했다. 권력이라면 권력일
수도 있는 배경을 가진 사람조차 그 공정함을 적용받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벌을 받는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그게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 것을 봐야 하는 것. 정의가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정의가 무엇인지 묻고 싶은
의문을 갖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그 물음을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는 판사에게 묻고 있음이다. 그런데 그 판사조차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아니, 주지 못한다.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들려주고 있음에도, 그래서 그 정의를 묻고 있는 의문에 대한 답이 절실함에도, 답을 주는 것이
어렵다.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 보고 있는 현실, 믿기 어렵겠지만, 그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정의에 대한 물음이자 한 개인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이야기다. 상처의 깊은 뿌리가 온전하게 뽑히지는 않았어도, 그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함께 드러내고 치유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부모로부터 시작된 유년기의 상처는, 상처인 줄도 모르고 커지다가 성인이 된 후에도
영향을 미친다. 주인공이 정신분석 치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도 그 상처의 근원이었다. 결국은 그 시작을 찾아내어 끌어내고 치유해야 다음
행보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셈이다.
뒤늦게 알게 된 진실로 겪는 감정의 소용돌이, 그로 인해 찾으려 애쓰던 정의까지 다양하면서도 깊은 문제들이 우리 현실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불행은 늘 나에게 찾아올 수 있고, 삶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비록 그게 절망이라 할지라도, 불확실한 정의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