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작정하고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최근 읽은 몇 권의 책에서 재능에 관한, 그 재능이 발휘하는 천재성에 관한 언급을 계속 보게 되었다. 그 재능이란 것이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능력으로 타고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느 쪽으로든 분명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그때의 감정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휘둘리는 판단일 수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때로는 긍정적으로 끄덕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그 화살을 나 자신에게 돌리기도 한다. 나에게 오지 않은, 오지 않을 그 어떤 것에 대해 조급함 보다는 좌절이 먼저 찾아오는 듯하다. 안 보면 그만인 것을, 안 해도 별 상관없는 일들 앞에서 괜한 감정만 소모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뻔하게 나올 수 있는 답은 하나인 것 같다. 각자의 색깔이 있다, 저마다 더 잘하는 게 있다, 괜찮다... 물론, 괜찮을 거다. 그래야만 한다. 안 그러면 자신에게 없는 것에 대해, 그걸 가진 사람을 보면서 생기는 그 부러움을 어떻게 감당하고 추스를 수 있겠나. 또 그런 감정을 어떻게 감당하느냐 하는 것 역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걸 좀 객관적으로 보고 넘어가고 싶어진다. 모두가 다 같을 수는 없으므로, 어떤 현상쯤으로 보고 넘기고 싶은 것.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 나를 죽이지 않고 흘러갈 수 있는 방법 같아서. 외모든 타고난 재능이든 살면서 배운 현명함이든, 각자의 몫인 듯하다. 그 몫을 감당하는 것 역시도...

 

 

 

8살, 6살 남자 형제 조카가 있다. 큰 아이는 쌍꺼풀이 없는 눈, 동그란 얼굴, 보기 좋게 통통한 체형이다. 작은 아이는 쌍꺼풀이 있는 눈, 약간 갸름한 얼굴, 조금 마른 체형이다. 딱 봐도 알겠지만 두 아이의 외모가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다. 형제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내 눈에는 두 아이의 얼굴이 닮아서 분명 형제라는 게 느껴지는데 보통 첫눈에는 전혀 다른 아이들로 보이기도 한다. 바로 그 외모 때문에. 첫눈에 작은 아이는 누가 봐도 잘생겼다, 예쁘다, 라는 말을 듣는다. 여러 명이 있어도 유독 눈에 띄는 얼굴이다. 그에 반해 큰 아이는 그저 평범한 외모다. 내 눈에 큰 아이가 더 귀엽고 예뻐 보인다. 실제로 나는 큰 아이를 더 예뻐한다.(비밀) 하지만 작은 아이와 함께 있으면 큰 아이가 옆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못 알아본다. 분명 같이 있는데 작은 아이에게 먼저(아니면 작은 아이에게만) 말을 건다. 외모에 대한 칭찬은 기본이면서 관심을 쏟는 상황...

어느 날 큰아이가 엄마(내 여동생)에게 심각하게 얘기했다고 한다.

“엄마, 나는 얼굴을 바꾸고 싶어요.”

큰 아이에게 어떤 얼굴로 바꾸고 싶으냐고 물었단다.

(이 질문을 할 때까지 심각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가 하는 말이니 웃으면서 그런(얼굴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엉뚱함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00(작은 아이)의 얼굴로 바꾸고 싶어요.”

전해 듣는 나도 가슴이 철렁했다. 이제 겨우 8살 아이가 동생과 함께 있을 때, 혹은 동생에게만 몰리는 시선에서 뭘 봤기에 그런 말을 할까 싶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엄마, 나는 이름을 바꾸고 싶어요.”

(큰 아이의 이름은 수학을 공부할 때 나오는 이름이다. 혹시나 학교에서 친구들의 놀림이 되었나 싶은 마음에 걱정했단다.)

어떤 이름으로 바꾸고 싶으냐는 엄마의 물음에 아이가 대답한 건,

“00(작은 아이의 이름)으로 바꾸고 싶어요.”

라고 말했단다.

그러니까, 큰 아이가 생각했을 때 작은 아이의 외모가 질투의 대상이었을까. 굳이 보고 싶지 않아도, 같이 다닐 때마다 항상 사람들의 관심이 저절로 쏠리는 동생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렇다고 그 질투 때문에 동생을 함부로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저 평범한 형제 사이로 보인다. 같이 놀고, 장난치고, 먹고, 돌봐주고. 그런데도 가슴 속에 담아두는 상처가 생기기 마련인가보다. 외모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나 무심코 던지는 한 마디 때문에.

큰 아이는 4살 때 한글을 더듬더듬 익히기 시작하더니 곧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그 아이가 한글에 대해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주변의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일찍 한글을 알았구나, 하는 정도였다. 꼼꼼한 성격에 종이접기에 취미를 붙였다. 지금은 책을 보고 종이접기를 즐길 정도가 된 듯하다. 얼마 전에 와서 접어준 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나는 손으로 하는 건 정말 못한다. 내손만 닿으면 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수준이다.) 요즘 아이들 종이접기 수준이 다 그 정도인가 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닐 것이다. 엄청나게 말을 안 듣는 개구쟁이이기도 하지만, 차분하게 뭔가를 하는 모습이나 공부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게 저 아이의 장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큰 아이가 가진 장점이 반짝반짝 빛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본다.

반면 작은 아이는 아직도 한글을 잘 모른다. 겨우 자기 이름을 쓰는 정도다. 그런데도 당당하다. 형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서, 형이 귀찮아하면 “나는 책을 못 읽으니까 형아가 읽어줘야지!” 라며 큰 소리 친다. 얌전하게 앉아서 뭘 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다. 뭘 하더라도 항상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굳이 공부 쪽으로 생각해보자면, 작은 아이는 공부보다는 다른 것을 더 개발하도록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정도? 이 아이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혼나서 울 때 말고는 항상 웃고 있다. 뭐가 그리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도 모르겠다. 항상 웃고 있어서 웃는 모습이 이 아이의 일상처럼 보인다. 어쩌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게 이 아이의 장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 한글을 몰라도, 공부를 못 해도, 이 아이만의 매력이 넘치는 모습을 더 많이 봤으면 좋겠다.

 

 

 

 

 

 

 

 

 

 

 

 

사쿠라기 시노의 <순수의 영역>과 히가시노 게이고의 <몽환화>를 읽으면서 두 아이를 많이 생각했다. 너무 다르게 보이는 두 아이의 장점이 앞으로 어떻게 작용할지 궁금하면서 살짝 두렵기도 했다. 혹시라도 그 장점이 다른 이유로 방해받고 묻힐 수도 있을까봐... 두 작품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는 많고 다양했지만 유독 내 눈에 들어왔던 단어 두 개, 소설 속에서 ‘재능’과 ‘천재’라는 단어가 풀어내는 그 욕망과 무모함이 어떤 결말을 만들어낼지 궁금하게 했다. 예상했을 수도 있지만, 그 욕망의 끝은 결코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 끝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번쯤은 갈망하는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손을 뻗고 싶은 것이 인간의 모습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본다고 해도, 내 몫이니까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상을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 아닐까 하고. 그러면서도, 그럼 안 된다는 생각에 그 위험을 붙잡아야 하는(붙잡는 척하는) 것이 이 마음의 아이러니다. 어떤 게 맞는 거라고 앞으로도 분명하게 말하기 어려울지도 모를...

 

 

가능하면 챙겨보고 싶은 TV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진짜사나이>의 군대 무식자 헨리도, 음악 천재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손대는 악기마다 연주할 수 있는 놀라움을 발휘하면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그는 더 이상 ‘군대 무식자’라는 수식어보다 ‘음악 천재’라는 수식어가 앞서 오는 사람이 되어 버린 듯했다. 그럴 때마다 쌍엄지를 추켜들도록 만들더니 요즘에는 방귀를 조절하지 못하는 민망함으로 함박웃음을 주더라. 방귀에 대해 심각한 대화를 해야 할 정도로(혹 그게 예능의 설정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음악 천재도 방귀 조절을 못하는 단점 하나 있을 수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배시시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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