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아니, 증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존재 자체로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러지 못한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쩌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비상식과 불평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꼭 편지 같다. 친애하는 당신에게 하고 나는 말할 테다. 이름 없는 당신에게라고. 이름을 붙이면 ‘당신’을 실제 세계에 연루시키게 될 텐데, 그러면 훨씬 더 위험해지고, 훨씬 더 부담이 커진다. 저 바깥 세상에, 당신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그 누가 알겠는가. 당신, 옛날의 고리타분한 사랑 노래들처럼 그냥 당신이라고 부르련다. 당신은 꼭 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당신은 수천 명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린 건 아니다, 나는 당신에게 말하겠다.

당신이 내 말을 들을 수 있다고 가정하련다.

하지만 소용없다. 당신은 듣지 못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시녀이야기, 72페이지)

 

21세기 어느 날의 미국. 지구는 전쟁과 환경오염, 온갖 성질환으로 출생률이 급격히 감소했다. 이런 불행의 시대를 누군가는 권력을 잡는 기회로 만든다. 대통령은 사라졌다. 국회는 해산됐다. 가부장제와 성경을 근본으로 한 전체주의 ‘길리아드’가 일어났고, 국민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했다. 특히 여성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으면서 체계화하여 관리했다. 통제하고 착취했다. 평화롭게 살던 여성 오브프레드는 갑자기 이름도, 가족도,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리고 사령관의 ‘시녀’가 되어 감시당하고 살아가면서, 사령관의 아이를 임신하도록 강요당한다. 그게 ‘시녀’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존재 이유였다. 평범하게 자유를 누리며 국가의 일원으로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던 여성들이 한순간 모든 권리를 빼앗긴 채 한 인간으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게, 상상이 되는가? 갑자기 여성의 은행 계좌는 압류되었고, 기혼 여성의 모든 금융자산은 남편에게 귀속되었다. 여성들은 모두 직장에서 해고되었고, 한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한 삶이 시작되었다. 남성에 의해 지배받는 세상이 왔고, 여성의 신분은 몇 가지로 구분되어 관리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통제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가 누구를 소유하고, 누가 누구한테 어떤 짓을 해도, 심지어 살인을 해도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던가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구는 앉을 수 있고 누구는 꿇어앉거나 일어서거나 다리를 활짝 벌리고 드러누워야 한다는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진짜 문제는 누가 누구한테 어떤 짓을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다 마찬가지라는 말만큼은 절대 내 앞에서 하지 마라. (시녀이야기, 233페이지)

 

읽으면서 착각을 했다. 혹시 신분 계급이 있던 우리나라의 과거 어느 시대, 양반과 천민의 구분으로 인간 차별을 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던 시절이 생각났다. 뭐가 다른지 한참을 찾고 있는데도 답을 알 수 없었다. 오브프레드가 있던 시설의 시스템이 오직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으로만, 그녀들의 자궁만 존재할 뿐이다. 여성을 아이를 낳는 도구로만 여기면서, 통제하고 교육하면서 각 사령관의 집으로 보내는 게 ‘아주머니’들의 역할이었다.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삶 따위는 없다. 쾌락의 요소를 철저히 제거한 상태로, 은밀한 욕망이 꽃필 여지도 전혀 없이, ‘시녀’들은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한, 오직 남자들의 종족 번식을 위해 존재하며 삶을 멈췄다. 시녀들은 원래 이름을 빼앗겼다. 그녀들이 배속된 가정의 남성 이름을 따 '오브000'으로 불린다. 오브프레드, 오브글렌… 처럼, 프레드의 시녀, 글렌의 시녀.

 

21세기의 대한민국은 계급이 없을까? 여성과 남성의 차별이 없을까? 오브프레드의 시대와 다르지 않을까? 소설은 2195년의 어느 날 열린 심포지엄에서 길리어드 시대에 ‘시녀’였던 어느 여성의 녹음을 들려준다. 그 여성이 오브프레드라고 추정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역사의 기록쯤으로 여기면서도 확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불분명한 출처의 기록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불임이 여성의 탓은 아니면서도, 불임의 여성을 다른 여성의 자궁으로 대신한다. 환경오염이나 성병, 핵전쟁으로 세상이 물든 게 여성의 탓인가?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 세상은 불임의 원인을 여성에서 찾고, 여권 신장에서 불안을 느끼며 성경에 바탕을 둔 세상을 만든다. 아이를 낳는 도구로 만든 ‘시녀’를 사령관의 집에 보내고, 기한 안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유배지로 보내서 핵폐기물을 치우는 인생을 만든다. 그러다가 시름시름 앓으면서 죽어가겠지.

 

오직 출산의 도구로 존재하는 여성의 삶이 과거의 어느 시대의 기록이라는 전달은 끔찍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아이를 갖기 위한 성행위에 세 명이 등장한다는 거다. 사령관과 시녀와 사령관의 아내는 아이를 잉태하려는 행위에 같이 참여한다. 불임인 사령관의 아내는 시녀의 뒤에서 단단한 벽처럼 자리하고, 시녀는 사령관과 마주하며 성행위를 한다. 감정은 없다. 쾌락도 없다. 오직 아이를 만들기 위한 의식으로 여긴다. 웃긴 것은, 계급의 위에 있는 이들은 시녀나 다른 이들을 무시한다. 그들의 일상을 위해 존재하는 여러 가지 도구 중의 하나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아이 문제에서만큼은 시녀의 자궁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에 남편의 아이를 갖기를 원하면서도 남편의 내연녀를 보는 듯한 시선을 던진다.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해도 아무렇지 않은 존재로 말이다. 사령관의 아내는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에 필요한 도구(?)를 들이면서도, 그 도구를 존중할 마음은 전혀 없다. 사령관도 마찬가지. 그의 유희를 위한, 과거의 어느 시절에 성행했지만 지금은 금지된 것들을 은밀하게 즐기기 위한 파트너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출산 과정 역시 기가 막힌다. 마치 대리모의 출산에 참여하듯,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자세를 취하며 출산의 고통에 동참한다. 진짜로 출산하는 것처럼. 자기 것이 아니면서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온전히 자기 인생의 한 장면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들의 이기적인 세상에 희생되는 많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고민한 결과로 소설은 에필로그에서 독자에게 그 과정을 이해시킨다. 한 여성의 목소리로, 그 시대의 진실인지 아닌지 모를 이야기로, 그러나 의심의 여지 없이 진실로 믿고 싶은 역사로 말이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누군가 만든 체제가 운영되고 있을 뿐인 세상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오브프레드가 남긴 목소리는 간절하다. 지금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누군가는 들어줄 거로 믿고 남긴 이야기다. 목숨이 위태로운 그 순간에도 이렇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 지금 이후로의 여성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저자의 말처럼, ‘여성의 삶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으면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 다시 반복될 것’이라고 했다. 그걸 증명하는 게 이 소설의 결말이기도 하다. ‘길리어드’가 무너지고 당시의 자료들은 폐기된다.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의 삶과 고통은 아무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길리어드’ 시대의 숨기고 싶은 폭력은,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듯이. 이런 비슷한 장면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은가?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을 상담하던 의사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김지영의 상황과 상태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이해해주면서도, 아이 때문에 선택한 자기 아내의 경력 단절을 아파하면서도, 의사는 다짐한다. 임신 때문에 그만두는 여직원의 후임은 미혼으로 구해야겠다고. 그래서 우리는 반복해야 한다. 계속 말해야 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더는 불합리와 불평등으로 고통 받는 여성의 삶을 이어갈 수는 없으니까. 우리 인생이 암흑이 아닌 빛으로 남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오래전에 샀는데도 미루기만 했던 이야기를 드디어 읽어냈다. 혹시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뭇거리던 소설을 그래픽 노블 출간 때문에 핑계 삼아 같이 읽게 된 거다. 이미 영화나 발레, 오페라로 보여줬던 이야기는 아마 몇 번을 다시 봐도 충격일 듯하다.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기에 몇몇 장면을 찾아봤다. 생각보다 소설의 장면들을 잘 담아놓았다는 느낌에, 언젠가는 드라마로도 만나고 싶어졌다. 피를 보는 것 같은 빨간 드레스, 그와 상반된 하얀 두건은 누구도 그녀들을 침범할(볼) 수 없다는 분위기다. 그녀들의 시선은 오직 드레스에 감춰진 채로 보이지 않는 발끝의 어느 부분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의 인간이되 인간다움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어디서 이런 설정이 등장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몇 페이지 넘기지 않고서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1985년에 써졌다는 이 소설은 21세기를 통과하는 지금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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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18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픽노블의 그림이 제가 책 읽으며 떠올렸던 바로 그 장면이라 놀랐어요. 같은 책을 읽은 것일테니 당연한거겠지만요. 그림이 참 사실적이네요.

구단씨 2020-03-18 14:04   좋아요 0 | URL
잔인하면서도 놀랍고, 굉장히 기억에 많이 남는 장면이었거든요.
한 사람의 존재감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이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사두고 뒤늦게 읽었다가 충격이었습니다...
 


콜롬비아 산타 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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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오피아 구지 모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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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의 졸림을 이기려고 눈을 부릅뜨면서, 저녁 일일 드라마의 오늘 분량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엄마 얼굴을 보고 있다. 웃음이 난다. 졸리면 그냥 주무시지, 기어코 본방 사수하겠다면서 주인공의 복수를 흥미진진하게 보고 계신다. 일상의 낙이 매일 저녁 방송하는 TV 드라마를 보시는 건데, 그게 그렇게 웃기다. 마치 그걸 보지 않으면 하루를 마무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인지... 옆에서 조용히 앉아 이 책을 읽고 있다가 가만히 눈을 감고 상상해봤다. 엄마가 돌아가시면 나는 엄마의 무엇을 갖고 싶을까 하고. 저자는 엄마의 유골을 갖고 싶었다는데, 나는 엄마의 무엇을 갖고 싶은지 계속 생각하고 있다.

 

 

제목만 들으면 무슨 스릴러인가 싶겠지만, 유골의 주인이 엄마라는 걸 알게 된다면 놀라움과 궁금증이 먼저 생길 거다.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어야 이런 말이 가능할까. 혹시 경험해본 사람은 조금 알까? 막 화장터에서 나온 유골을 담은 유골함을 손에 들면 따뜻하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적당한 온도다. 온돌방에 앉아 있는 느낌으로 따뜻하다. 만약 내 엄마의 유골이 그런 느낌이라면, 한 번쯤 그 유골함을 꽉 안고 싶어질 것 같다. 엄마를 안는 기분으로, 이게 마지막이구나 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말이다. 사랑하는 엄마를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저자의 저 말을 듣고 나니 궁금해졌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어야 엄마의 유골을 먹고 싶다는 생각마저 하게 되는 것일까.

 

저자는 엄마의 유골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엄마의 유골을 먹고 싶다고. 눈동자가 떨릴 정도로 엽기적인 말로 들리지만, 엄마를 자기 몸의 일부로 만들고 싶었다는 의미를 알게 된다면, 이상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문장 그 자체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순간의 마음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 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지만, 이 강렬한 감정이 부르는 아픔을 알 것 같아서다. 사랑하는 엄마의 부재, 더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슬픔이 어느 정도일지, 한 번쯤은 상상해 보고 싶지 않은가? 상상과 현실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겠지만,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감정을 알기에는 상상만 한 게 없으니. 나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수시로, 계속 상상한다. 내 엄마와의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하고 맞이해야 하는지를.

일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죽음을 볼 때마다, 그 죽음의 대상이 엄마가 될 때를 생각해 본 적이 많다. 특히 언젠가부터 엄마의 병원행이 잦아질 때마다 생각은 극단적인 쪽으로 기운다. 작가 자신이 20대에 겪은 혈액 질환 때문에 엄마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았기에, 그 이후로도 엄마의 존재는 남달랐을 것 같다. 저자의 엄마는 위암 말기 선고를 받는다. 아들을 사랑하고, 한없는 애정과 격려를 보내며 아들의 삶을 응원했다. 그런 엄마가 암이라니, 더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말기 선고를 받고 나니 이제 엄마의 병을 고치기보다는 엄마의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해드려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저자와 애인은 엄마의 병간호를 하고, 긴 시간 엄마를 돌보면서 지쳐갈 때쯤 엄마와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이 글은 저자가 의사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메모해 두던 것이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어떤 순간의 기록이라고 생각하면 그 기록을 읽는 것에서 그만이겠지만, 그 대상이 엄마라면, 부모라면 의미가 달라진다. 더는 볼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큰 슬픔인지 아는 사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개를 끄덕이면 슬픔에 공감하는 이들, 참 많을 것 같다.

 

늘 함께일 거로 생각했던,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헤어질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떠나간 이를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게 고통일지 기쁨일지 모르겠다, 아직은. 주변 많은 이의 죽음을 애도했고, 지금도 가까운 이의 백혈병 투병을 지켜보고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소식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지만, 아직은 그 슬픔을 100% 공감할 그릇을 갖지 못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아니었기에, 그저 누군가의 죽음 때문인 이별을 모르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 가까울 것이다. 그때마다 상상의 시간은 길어진다.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아마 그들도 이런 마음이겠지 하는 심정을 이해 하고자, 언제가 내가 마주할 엄마의 죽음을 마주하며 가슴을 단단하게 만들고자. 평소 엄마와 얘기하면서도 엄마의 죽음을 빼놓지는 않는다. 작년 말에는 엄마가 죽으면 가고 싶다는 봉안당에 미리 다녀왔다. 조건이 맞으면 좋은 자리에 계약해놓을까 했는데, 아쉽게도 엄마의 종교를 바꿔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 포기했다. 외삼촌(엄마의 오빠)이 계셔서 더 마음이 가는 곳이었는데,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엄마가 종교를 바꾸지 않는 이상 그곳으로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 얘기한다. 그곳에서 쉴 주인공인 엄마와 함께 말이다.

 

저자의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저자의 아버지는 뜻밖에 담담해 보였다. 아내의 죽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마는, 세상 이치가 다 그렇다는 표정으로 아내를 보내는 모습이 의연했다. 그런 아버지가 술이 늘고, 집안이 지저분해질 정도로 치우지 않고, 일상이 흐트러져 있었다. 겉으로는 자식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진심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슬픔은 누구나 똑같은 거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저자 형의 모습도 비슷했다.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리고 슬퍼하는 것으로 보였던 저자에게 시선이 쏠리곤 했는데, 정작 그 주변 사람들의 슬픔을 헤아리지 못했다. 장례식을 치르고 이런저런 정리를 하면서, 남겨진 이들이 감당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 보였는데, 그 이면의 표정을 미처 다 읽지 못했던 거다. 가족을 잃고 슬프지 않은 사람 없고, 엄마의 돌봄에 감사하지 않은 자식 없다. 그러니 엄마와의 영원한 이별은 생애 가장 큰 슬픔일 것이다.

 

 

엄마를 보내고 난 후의 이야기들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여기저기서 발견하는 엄마의 메모들, 엄마가 가꾸던 정원이 시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의 빈자리를 느낀다. 그러면서도 남겨진 이들은 또다시 주어진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한 번씩 떠오르는 기억들을 마주해야 하고, 울고 웃으면서 그 시간을 추억해야 한다. 엄마의 강요로 남겨두었던 정자를 꺼내 아이를 낳게 되면서 또 한 번 엄마의 고마움을 느끼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해 저마다의 의미를 쌓아간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더라도, 말론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더라도, 마음이 알고 느끼는 것들을 그렇게 적립하는 시간이었다.

 

몇 십 년을 엄마가 해주시는 밥 먹고 살다가, 이제는 조금씩 엄마와 떨어져서 지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엄마가 지금보다 덜 늙었을 때 따로 살아볼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 요즘이다. 언젠가 혼자서 지낼 엄마를 생각하니, 작년보다 한 살 더 나이 드신 엄마가 부쩍 더 늙어 보이는 건 왜일까. 같이 살 집을 알아보자고 해도 싫다고 하시고, 따로 살 집을 알아본다고 하니까 투덜투덜 서운해하시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덕을 부리는 엄마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이 복잡한 요즘이다. 같이 살자니 자식에게 부담이 될까 봐 싫어하시는 것인지, 따로 살자니 갑자기 혼자 지내는 일상이 겁이 나는 것인지. (사실 나도 많이 무서운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겁이 많아지고, 본인 스스로 결정하는 것보다 자식에게 물어보고 의지하는 모습이 늘어간다. 한때는 이 집의 가장이었던 당신. 이제는 본인이 돌봄을 받는 위치가 되었다는 게 슬프면서도 안도하는 걸 볼 때마다, 그동안 살면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와 힘듦을 겪었을지 새삼 알겠더라. 그래서 엄마의 지금 변덕을 다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홀가분함과 두려움 사이에서 서성이는 엄마, 당신의 두려움과 떨림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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