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감정이 폭발할 때가 있다. 험한 말을 막 쏟아내고, 앞뒤 가리지 않고 지금의 것만 보면서 순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순간들 말이다. 작정하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어느 순간 내 안에 머무는 성격이 아닐까 싶다. 때로는 이 성격이 어떤 일을 그르치게 만들기도 하고, 중요한 순간에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이런 시행착오의 순간이 한 번씩은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 거 아닐까? 그럴 때마다 내 안의 내려놓음, 차분한 마음을 갖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니, 갖고 싶은 게 아니라 필요하다. 이 책에서는 이 순간을 내면의 고요라고 말한다. 스토아 철학에서 유래한 단어로 우리는 스틸니스라고 부른다.

 

살면서 굳이 이 스틸니스가 필요한 건지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소개해주는 여러 인물 사이에서 공통된 것이 바로 스틸니스였다. 타이거 우즈나 나폴레옹, 윈스턴 처칠이, 안네 프랑크, 케네디 대통령 등 유명인에게 내재한 내면의 고요가 그들의 성공과 성장을 이끌었다. 다른 누구와 견줄 수 없는 경지의 인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현명하고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정신을 만든 것이다. 특히 한 나라의 지도자였던 케네디 대통령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했던 나폴레옹 같은 이들에게는 냉정한 판단력이 필요했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판단하면서 흥분하는 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이야기들에, 우리 삶에서 스틸니스의 영역이 얼마나 광대하게 작용하는지 알 것 같다.

 

나폴레옹이 받은 편지를 바로 뜯어보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기억에 많이 남는데, 그에게 오는 편지를 나중에 뜯어보라고 지시하고, 나중에 그 편지를 뜯어볼 때쯤이면 편지 속에 적힌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결된 후라고 한다. 그가 개입하지 않아도 저절로 해결되는 일들에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까운 시간을 저절로 해결될 문제들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들이 어떤 양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니 해결되는 것들. 안다. 당장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지만, 결국은 해결된 문제들이라는 것을. 그러면서도 지금 당장 어떻게 하지 못하면 아등바등 몸부림을 치면서 조급해하는 게 또 우리의 성격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조급하게 발을 동동 굴러봤자, 해결될 것은 해결되고 해결되지 않을 것은 끝까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마주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인정하느냐에 그 순간이 어떻게 흘러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마음의 고요가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시시때때로 선택의 순간에 서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현명하고 냉정한 판단으로 좋은 결과를 도모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니었나 싶다. 감정적으로 흥분하고 결정해봤자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날 수는 없다는 것.

 

요즘의 나에게 때맞춰 잘 와주었다고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갑작스러운 일로 서울에서 몇 주를 보내고,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예정에 없던 일이다 보니 집안일을 제대로 처리하고 오지도 못했고, 짐도 제대로 꾸리지 못해 필요한 것들을 챙기지 못했다. 일상이 불편했고, 무엇보다 해결되지 않은 현재 상황이 불안만 증폭시켰다. 어떻게 하면 될까 계속 걱정하면서도, 막상 명확한 답이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기에 또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살면서 가장 싫어하는 말이 ‘어쩔 수 없지’였는데, 지금 이 상황에 가장 분명하게 할 수 있는 말이 그거였다. 어쩔 수 없지. 저자가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들이 처한 다양한 상황과 그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 보면서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냉정한 시선과 판단보다는 감정의 시선으로 결과를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 고요한 내면을 마주하면서 잘못된 선택을 할 리가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또 순간순간 감정이 앞서는 행동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고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또 한 번 시행착오를 반복하더라도 현명한 판단이 무엇인지 다시 배울 것만 같다.

 

저자는 앞서 나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들려주면서, 그들이 내재한 고요의 모습을 보게 했다. 집중력과 창조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주변의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에 파고드는 모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말한다. 그 힘을 스틸니스라고 부르며, 그들은 내면의 고요 힘으로 인생을 이끌어나간다.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그들의 성장을 이끄는 좋은 과정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 안에 스틸니스를 장착하는 게 쉬워 보이는데, 사실 처음부터 내면의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이 방법을 배우는 게 문제의 해답이 되면서, 우리가 잘 성장하고 좋은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열쇠가 되는 거겠지. 이 책에서 처음 들은 이름인 야구선수 숀 그린은 슬럼프를 겪으면서도 조급함보다는 불교의 사상에 기댔다고 한다. 마음이 급해지면 시선이 좁아지기 마련인데, 그는 머릿속을 비우면서 내면의 고요를 찾았던 거다. 빌 게이츠가 혼자 숲에 들어가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 윈스턴 처칠이 틈틈이 그림을 그리는 것, 나폴레옹이 편지를 바로 읽지 않으면서 중요한 일을 고를 수 있었던 것 등을 보면 무슨 상황에서건 우선순위를 제대로 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 같다. 집중해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을 가장 잘 나아가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고만고만해 보이는 여러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그 문제들은 저마다 자기가 중요하고 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는 그렇게 우선순위를 경쟁하는 목소리와 신념에 이끌린 채 너무 많은 방향으로 끌려간다.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일 앞에는 수많은 장애물과 적이 깔려 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선하고 악한 충동 사이에서, 야망과 원칙 사이에서, 우리가 되고 싶은 존재와 실제로 그 존재가 되기까지 겪어야 할 어려움 사이에서 격렬한 내전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이러한 전투에서 이러한 전쟁에서 고요는 아주 많은 것들이 달려 있는 강이자 철로의 교차점이다. 고요는, 열쇠다.

그러니까 고요는, 거의 모든 문제를 푸는 핵심이다.

더 나은 부모, 더 나은 예술가, 더 나은 투자자, 더 나은 운동선수, 더 나은 과학자,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 인생에서 우리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는 열쇠인 것이다. (스틸니스, 23~24페이지)

 

우리 안의 스틸니스가 발휘하는 때는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직면했을 때다. 그러니 평소에 얼마나 내면의 고요를 잘 찾아낼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인생에서 마주하는 많은 문제와 선택의 순간을 현명하게 해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가 아직 다 찾지 못한 내 안의 가능성을 찾게 해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 영혼, 몸의 영역이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 저자는 우리의 정신을 시끄럽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우리의 영혼이 분노나 욕망에서 멀어져야 하고, 무엇보다 생각한 것을 몸으로 움직이며 실천하면서 우리 안의 고요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산책이나 걷는 것, 충분한 휴식과 수면은 우리 몸을 진정시키고 편하게 만든다. 그때 생기는 고요가 또 한 번 우리의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다.

 

누구나 바란다. 내 인생이 더 완전해지기를, 누구보다 만족한 삶이었기를. 언젠가 죽음을 마주할 우리지만, 지금 마주해야 할 현재의 우리 하루하루가 중요하다. 그래서 지금을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 순간을 잘 채우고 싶어진다.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가는 것인지 묻고 싶을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을 건너가는 방법이 듣고 싶을 때마다 펼쳐보고 싶은 책이다. 좋은 문장이 너무 많았고, 특히 지금처럼 힘들다고 여기는 때 내 안의 고요를 찾는 것만이 답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당장 눈앞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조급해할 게 아니라, 한 발짝 떨어져서 지금의 상황을 마주하는 시선을 가지고 싶다는 바람이다. 거리를 두니 보이는 것들, 시간을 두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을 거다. 그렇게 우리는 내면의 고요를, 현명한 판단을 하나씩 찾아가면서 인생이 흐르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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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아니, 증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존재 자체로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러지 못한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쩌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비상식과 불평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꼭 편지 같다. 친애하는 당신에게 하고 나는 말할 테다. 이름 없는 당신에게라고. 이름을 붙이면 ‘당신’을 실제 세계에 연루시키게 될 텐데, 그러면 훨씬 더 위험해지고, 훨씬 더 부담이 커진다. 저 바깥 세상에, 당신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그 누가 알겠는가. 당신, 옛날의 고리타분한 사랑 노래들처럼 그냥 당신이라고 부르련다. 당신은 꼭 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당신은 수천 명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린 건 아니다, 나는 당신에게 말하겠다.

당신이 내 말을 들을 수 있다고 가정하련다.

하지만 소용없다. 당신은 듣지 못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시녀이야기, 72페이지)

 

21세기 어느 날의 미국. 지구는 전쟁과 환경오염, 온갖 성질환으로 출생률이 급격히 감소했다. 이런 불행의 시대를 누군가는 권력을 잡는 기회로 만든다. 대통령은 사라졌다. 국회는 해산됐다. 가부장제와 성경을 근본으로 한 전체주의 ‘길리아드’가 일어났고, 국민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했다. 특히 여성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으면서 체계화하여 관리했다. 통제하고 착취했다. 평화롭게 살던 여성 오브프레드는 갑자기 이름도, 가족도,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리고 사령관의 ‘시녀’가 되어 감시당하고 살아가면서, 사령관의 아이를 임신하도록 강요당한다. 그게 ‘시녀’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존재 이유였다. 평범하게 자유를 누리며 국가의 일원으로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던 여성들이 한순간 모든 권리를 빼앗긴 채 한 인간으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게, 상상이 되는가? 갑자기 여성의 은행 계좌는 압류되었고, 기혼 여성의 모든 금융자산은 남편에게 귀속되었다. 여성들은 모두 직장에서 해고되었고, 한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한 삶이 시작되었다. 남성에 의해 지배받는 세상이 왔고, 여성의 신분은 몇 가지로 구분되어 관리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통제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가 누구를 소유하고, 누가 누구한테 어떤 짓을 해도, 심지어 살인을 해도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던가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구는 앉을 수 있고 누구는 꿇어앉거나 일어서거나 다리를 활짝 벌리고 드러누워야 한다는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진짜 문제는 누가 누구한테 어떤 짓을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다 마찬가지라는 말만큼은 절대 내 앞에서 하지 마라. (시녀이야기, 233페이지)

 

읽으면서 착각을 했다. 혹시 신분 계급이 있던 우리나라의 과거 어느 시대, 양반과 천민의 구분으로 인간 차별을 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던 시절이 생각났다. 뭐가 다른지 한참을 찾고 있는데도 답을 알 수 없었다. 오브프레드가 있던 시설의 시스템이 오직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으로만, 그녀들의 자궁만 존재할 뿐이다. 여성을 아이를 낳는 도구로만 여기면서, 통제하고 교육하면서 각 사령관의 집으로 보내는 게 ‘아주머니’들의 역할이었다.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삶 따위는 없다. 쾌락의 요소를 철저히 제거한 상태로, 은밀한 욕망이 꽃필 여지도 전혀 없이, ‘시녀’들은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한, 오직 남자들의 종족 번식을 위해 존재하며 삶을 멈췄다. 시녀들은 원래 이름을 빼앗겼다. 그녀들이 배속된 가정의 남성 이름을 따 '오브000'으로 불린다. 오브프레드, 오브글렌… 처럼, 프레드의 시녀, 글렌의 시녀.

 

21세기의 대한민국은 계급이 없을까? 여성과 남성의 차별이 없을까? 오브프레드의 시대와 다르지 않을까? 소설은 2195년의 어느 날 열린 심포지엄에서 길리어드 시대에 ‘시녀’였던 어느 여성의 녹음을 들려준다. 그 여성이 오브프레드라고 추정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역사의 기록쯤으로 여기면서도 확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불분명한 출처의 기록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불임이 여성의 탓은 아니면서도, 불임의 여성을 다른 여성의 자궁으로 대신한다. 환경오염이나 성병, 핵전쟁으로 세상이 물든 게 여성의 탓인가?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 세상은 불임의 원인을 여성에서 찾고, 여권 신장에서 불안을 느끼며 성경에 바탕을 둔 세상을 만든다. 아이를 낳는 도구로 만든 ‘시녀’를 사령관의 집에 보내고, 기한 안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유배지로 보내서 핵폐기물을 치우는 인생을 만든다. 그러다가 시름시름 앓으면서 죽어가겠지.

 

오직 출산의 도구로 존재하는 여성의 삶이 과거의 어느 시대의 기록이라는 전달은 끔찍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아이를 갖기 위한 성행위에 세 명이 등장한다는 거다. 사령관과 시녀와 사령관의 아내는 아이를 잉태하려는 행위에 같이 참여한다. 불임인 사령관의 아내는 시녀의 뒤에서 단단한 벽처럼 자리하고, 시녀는 사령관과 마주하며 성행위를 한다. 감정은 없다. 쾌락도 없다. 오직 아이를 만들기 위한 의식으로 여긴다. 웃긴 것은, 계급의 위에 있는 이들은 시녀나 다른 이들을 무시한다. 그들의 일상을 위해 존재하는 여러 가지 도구 중의 하나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아이 문제에서만큼은 시녀의 자궁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에 남편의 아이를 갖기를 원하면서도 남편의 내연녀를 보는 듯한 시선을 던진다.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해도 아무렇지 않은 존재로 말이다. 사령관의 아내는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에 필요한 도구(?)를 들이면서도, 그 도구를 존중할 마음은 전혀 없다. 사령관도 마찬가지. 그의 유희를 위한, 과거의 어느 시절에 성행했지만 지금은 금지된 것들을 은밀하게 즐기기 위한 파트너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출산 과정 역시 기가 막힌다. 마치 대리모의 출산에 참여하듯,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자세를 취하며 출산의 고통에 동참한다. 진짜로 출산하는 것처럼. 자기 것이 아니면서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온전히 자기 인생의 한 장면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들의 이기적인 세상에 희생되는 많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고민한 결과로 소설은 에필로그에서 독자에게 그 과정을 이해시킨다. 한 여성의 목소리로, 그 시대의 진실인지 아닌지 모를 이야기로, 그러나 의심의 여지 없이 진실로 믿고 싶은 역사로 말이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누군가 만든 체제가 운영되고 있을 뿐인 세상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오브프레드가 남긴 목소리는 간절하다. 지금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누군가는 들어줄 거로 믿고 남긴 이야기다. 목숨이 위태로운 그 순간에도 이렇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 지금 이후로의 여성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저자의 말처럼, ‘여성의 삶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으면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 다시 반복될 것’이라고 했다. 그걸 증명하는 게 이 소설의 결말이기도 하다. ‘길리어드’가 무너지고 당시의 자료들은 폐기된다.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의 삶과 고통은 아무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길리어드’ 시대의 숨기고 싶은 폭력은,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듯이. 이런 비슷한 장면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은가?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을 상담하던 의사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김지영의 상황과 상태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이해해주면서도, 아이 때문에 선택한 자기 아내의 경력 단절을 아파하면서도, 의사는 다짐한다. 임신 때문에 그만두는 여직원의 후임은 미혼으로 구해야겠다고. 그래서 우리는 반복해야 한다. 계속 말해야 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더는 불합리와 불평등으로 고통 받는 여성의 삶을 이어갈 수는 없으니까. 우리 인생이 암흑이 아닌 빛으로 남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오래전에 샀는데도 미루기만 했던 이야기를 드디어 읽어냈다. 혹시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뭇거리던 소설을 그래픽 노블 출간 때문에 핑계 삼아 같이 읽게 된 거다. 이미 영화나 발레, 오페라로 보여줬던 이야기는 아마 몇 번을 다시 봐도 충격일 듯하다.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기에 몇몇 장면을 찾아봤다. 생각보다 소설의 장면들을 잘 담아놓았다는 느낌에, 언젠가는 드라마로도 만나고 싶어졌다. 피를 보는 것 같은 빨간 드레스, 그와 상반된 하얀 두건은 누구도 그녀들을 침범할(볼) 수 없다는 분위기다. 그녀들의 시선은 오직 드레스에 감춰진 채로 보이지 않는 발끝의 어느 부분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의 인간이되 인간다움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어디서 이런 설정이 등장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몇 페이지 넘기지 않고서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1985년에 써졌다는 이 소설은 21세기를 통과하는 지금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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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18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픽노블의 그림이 제가 책 읽으며 떠올렸던 바로 그 장면이라 놀랐어요. 같은 책을 읽은 것일테니 당연한거겠지만요. 그림이 참 사실적이네요.

구단씨 2020-03-18 14:04   좋아요 0 | URL
잔인하면서도 놀랍고, 굉장히 기억에 많이 남는 장면이었거든요.
한 사람의 존재감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이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사두고 뒤늦게 읽었다가 충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