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말리온 아이들 창비청소년문학 45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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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하게 보이는 학교를 취재하겠다는 것은 용기일까, 아니면 무모한 행동일까.
프리랜서로 일하는 다큐멘터리 피디인 ‘마’는 어느 섬에 자리한 로젠탈 스쿨을 취재하기로 결심한다. 이번 취재는 로젠탈 스쿨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학교이기에 더 이슈가 되기도 할 테지만, ‘마’ 자신에게도 꼭 필요한 재기할 수 있는 기회이기에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줄 저 줄 붙잡아서 만든 기회다. 그런데 로젠탈 스쿨의 교장은 촬영에 대해 제한하는 범위가 너무 넓었고 이상하다 못해 수상했으나, ‘마’는 교장의 제한 범위를 수용하고 취재하기로 한다. ‘마’ 자신과 촬영감독 딱 두 명만 섬에 들어가는 조건, 통신기기 사용금지, 취재가 허용된 장소와 학생만 취재 가능, 미리 허락되지 않은 취재나 촬영은 불가. 이거 정말, 학교 맞아?

‘마’가 취재하기로 한 로젠탈 스쿨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을 받아주고 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다시 사회에 나갔을 때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 뒷받침 해주는 교육을 하는 학교라고 했다. 이건 교장이 말하는 내용이고, 실제로 ‘마’가 그 학교를 취재하고 지내면서 느낀 것은 조금 다른 분위기였고, 그랬기에 교장과의 취재 허용 범위에 대한 약속을 어기고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게 되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지독하게 교육 받은 것처럼 일률적으로 행동하고, 각이 잡힌 듯한 분위기처럼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고, 공부를 하는 것 같으나 뭔가 부족한 것 같고. 무엇보다, 무언가가 폭발하기 일보직전인 것처럼 아이들은 침묵하고 외로워하고 적응한 것처럼 보이는 로젠탈 스쿨만의 방식을 다 흡수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마’의 촉은 더 발달하고 지난달 자신이 사직서를 낸 일과 관련된 기억이 떠오르면서 이번 로젠탈 스쿨의 일을 조금 더 깊게 파헤쳐보기로 한다. 하지만 ‘마’가 예상했던 것보다 로젠탈 스쿨은 상당히 다른 곳이었다. 단단한 껍질 속의, 학교를 가장한 무허가 인신매매 노동력 착취 같았다.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하여 좋은 결과가 생기거나 능률이 오르는 현상을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하는데,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의 실험으로 증명되었기에 로젠탈 효과라고도 한다. 이 책의 배경으로 나오는 로젠탈 스쿨의 이름은 거기에서 따온 것이다.
“한 인간에게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을 믿으며 기대하면 언젠가 그 결과가 재능의 발현과 목표달성으로 나타난다는 로젠탈 효과 이론을 바탕으로 세워진 학교는, 그 이론 자체만으로는 일반적인 교육 현장과 다를 바가 없다. 굳이 이곳으로 한정할 것 없이 학교란 기관이 원래 학생들에게 일정한 과업의 수행을 기대하며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소기의 성과를 거두게 할 의무가 있지 않던가.” (42페이지)
읽기 전에는 이 책의 제목인 <피그말리온 아이들>에서 조금은 긍정적인 이야기가 들려올 거라 생각했었는데,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에서 조금은 답답함을 함께 가지고 읽어가야만 했다. 믿고 바라는 대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 그 결과로 조각상이었지만 결국에는 간절한 기대로 살아 있는 여인이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피그말리온 효과는 어느 정도 가능성 있는 변화를 기대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로젠탈 스쿨 안의 아이들은 그 피그말리온 효과를 부정적으로 적용시킨 예처럼 보였다. 기계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던 아이들의 행동과 태도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던 피그말리온 효과를 다른 의미로 적용해서 새기게 만들었다. 조각상과 사랑에 빠지는 낭만적인 조각가로 묘사되는 피그말리온은 다른 의미로 해석하자면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적용시키려는 독재자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내용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아이들을 이용하는 교장은 피그말리온이었고, 불우한 과정을 거쳐 로젠탈 스쿨까지 오게 된 아이들은 교장을 은인으로 알게 된 상태로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다고 믿어가면서 생활해 온 조각상인 것이다. 결국은 부모가 지은 죄들로 고아원으로 가거나 홀로 남겨진 상태에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한 채로 로젠탈 스쿨로 입학한 아이들은 피그말리온이 조각한 조각상이 되어 세상으로 나갈 자신의 인생이 썩 괜찮은 삶으로 탈바꿈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게 그 아이들의 잘못은 아니다. 열 몇 살의 나이로 세상 속에 홀로 던져지듯 버려진 인생보다는 누군가가 내민 손을 감사히 붙잡아서 살아가야 할 것이 그때 그 아이들이 바라는 삶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길들여지듯이 축적되어온 고개 숙인 삶이 아이들에게 익숙해져서 사리판단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고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좀먹는 것들의 횡포는 누가 벌하고 누가 죄를 받게 해줄 수 있을까.

“우리 땐 더했다, 너네는 약과다. 태평천국인 줄 알아라.” (122페이지)
이 한마디 말로 한 여학생의 구조요청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다가 끔찍한 일을 목격한 ‘마’가 로젠탈 스쿨의 일에 개입하게 된 것은 어쩌면 ‘마’의 마음속에 몇 년 동안 뿌리 내리고 있던 죄책감을 씻기 위한 행동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마’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만 알게 되었을 뿐이다. 무엇이 그런 사회구조를 만들었는지 누가 그것을 강요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는 사실들이었다. 나 역시도 그 안에서 일조한 사람이기도 하기에 ‘마’의 마음과 죄책감을 아주 모른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만으로 긍정적인 분위기를 기대하면서 읽어보고 싶었던가 보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고 내용 또한 끔찍했다. 그렇다고 해서 눈 감고 그냥 넘어가고 모르는 척 해야 할 내용도 아니었기에 꽉 막힌 속을 끌어안고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누구에게 조각상의 복종을 강요한 피그말리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내내 우울했다. 비단 아이들과 학교, 선생님 사이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므로.

학교라는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비리, 사육하는 듯한 느낌까지 들게 했던 감옥 같았던 학교, 그리고 그 안에서 세상으로 나가 인간다운 삶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길들여졌을 여린 아이들. 이미 세상에서 홀로 남겨져 한 번의 상처를 가진 아이들에게 몇 겹의 딱지를 더 얹어주었던 이들의 횡포는 언제쯤 사라질 것인지를 묻고 싶게 만들어주던 책이었다. 또 그 안의 어느 한 구석에서라도 자리하고 있을 ‘나’라는 어른의 위치까지도 다시 점검하게 만들어준 이야기였다. 이젠 제발 그러지 말기를, 그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판타지 같았지만 뚜렷하게 현실적인 이야기.

오늘 오랜만에 큰조카(고2)를 만났다. 아마도 거의 석 달 만인 것 같다. 아침 7시에 학교를 가고 밤 10시에 모든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면 금방 11시를 넘긴다고 했다. 주말에 개인서클활동을 하는 지역청소년신문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월요일. 맛있는 것을 사준다고 해도 시간을 내달라고 사정해야 할 정도로 빠듯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내신이 대부분 다 나와 있어서 진로를 정할 학교가 어느 정도는 정해졌다는 말에 나는 놀라기만 했다. 요즘 아이들의 대학입시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었기에 다른 것은 딱히 묻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학교도 중요하지만 진학하고 싶은 학과를 중심으로 정했으면 좋겠다는 말만 했다. 다행히도 조카아이는 자신이 진학해야할 학과를 정해놓은 상태에서 그 다음으로는 학교를 선택하기 위해 일 년여 남은 수능준비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했다. 방학도 없이 새벽에 나가 한밤중에 집에 들어갈 조카아이를 생각하니 지금 그 아이가 바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 부모나 지금 자신이 속해 있는 학교의 분위기에 따라 끌려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더라. 적어도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고 이렇게 혹은 저렇게 되기를 바라는 조각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건네주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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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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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께에 밀려 손대기 힘든 마음이었다가 어느 순간 그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몰입하게 되는 책이 있다. 내가 만난 이 책 『알렉스』가 그랬다. 표지마저 눈길을 끌어 더더욱 궁금증으로 시작한 책이었는데 결국 그 궁금증을 해결해주면서 동시에 눈물마저 흐르게 하는 이 책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그녀, 알렉스가 저질러놓은 일들의 결과만으로는 아무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알렉스가 살아온 그 시간에 대해, 감춰진 의미들에 대해 알아야만 이해할 수가 있다. 이 책의 내용도, 알렉스의 이야기도.

실종된 한 남자의 아버지가 한 여자를 납치하면서 이유를 알고 싶어지게 하는 이야기가 시작이다. 왜 그녀를 납치했는지, 그녀를 납치한 그 남자는 누구이며 어떤 관계인지를 알아가야 할 것들로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런데 단순히 한 여자의 납치사건으로 알고 수사를 시작한 일들이 점점 다른 방향으로 간다. 납치되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탈출한 그녀의 신원은 아무도 파악할 수조차 없었고, 납치한 이의 행방은 묘연하다. 뭐, 결국엔…….

그녀의 이름이 나탈리이자 레아이자, 로라, 줄리아, 엠마, 끌로에인 이유. 정작 자신의 본명인 알렉스라는 이름은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난다. 알렉스는 매번 다른 이름으로 남자들을 만나고, 그 남자들을 살해한다. 살해 방법도 잔인하다. 연장을 이용해서 머리를 강타하고 마지막에서는 꼭 입안으로 농축된 아황산을 들이 붓는다. 그녀는 왜 그 남자들을 살해했을까, 많은 살해 방법 중에서도 유독 그런 잔인한 방법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읽는 내내 갖게 한다. 도대체 왜?

그게 추리소설의 매력인 것 같다. 모든 사건을 앞에 두고 궁금해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그리고 독자는 그 이야기의 시선들을 저절로 따라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특이나 이 소설은 계속되는 살인의 나열에 속이 거북하기까지 해지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읽어갈 수밖에 없었다. 잔인한 그녀의 살인을 즐겁게 구경하는 것이 아닌, 그 이유를 끝까지 함께 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카미유 반장의 죽은 모친이 남긴 그림 경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카미유 반장의 사적인 이야기와 알렉스의 이야기 그리고 수사과정이 타이밍 절묘하게 교차적으로 들려온다. 카미유 반장이 들려주던 자신의 슬픈 이야기는 어머니가 남긴 그림을 처분하면서 모든 아픔을 내려놓는 과정이었고, 알렉스의 살인과 수사과정이 진행될수록 드러나던 알렉스의 이야기는 상처로 더 깊게 들어가는 계단이었다. 그렇기에, 아픔과 슬픔 그 사이에서 축적된 분노, 결국은 그 분노를 터트려야할 시기가 오고야 말았기에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모든 장면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살인이 정당화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왜?’라는 의문에 마침표는 찍어줄 수 있기에, 그 ‘왜?’에 대해서 독자로 하여금 눈물과 분노가 동시에 터트려지게 만드는 공감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씁쓸할 뿐이다. 세상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이 책 안에 농축되어 꾹꾹 눌러서 가득 담겨 있는 것만 같다.

처음 남자에게 납치된 상태에서 알렉스는 묻는다.
"왜 나인가요? 왜 하필 나예요?"
남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왜냐면...... 너니까."

계속되는 살인에서 죽어가는 남자들은 알렉스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왜 나인가요? 왜 하필 나예요?"
그럼 알렉스는 그 남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겠지.
"왜냐면...... 너니까."

남은 건 투명하게 드러나야 할 진실과 처벌일 텐데,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인과응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긴다. 마지막 장의 문구처럼 진실보다 정의라는 미덕이 제대로 발휘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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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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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포함된 구성원 관계에서의 일은 지극히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아니, 너무 자주 그렇다. 객관적인 눈으로 봐야함에도 불구하고 핏줄이나 지연 관계에서는 법도 규칙도 무시하는 일들이 종종 그대로 진행될 때가 있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는 문제일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사람이니까 그럼 안 되는 일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이름부터 우아한 디너(만찬).
파울과 세르게 형제 부부가 디너를 즐기기 위해 만난다. 예약조차도 어려운 레스토랑에서.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살짝 감춰둔 상태로 천천히 식사를 즐기기 시작한다. 이들 형제의 너무나도 다른 성격과 위치(형은 차기 총리 후보, 동생은 전직 교사이면서 현재 무직)는 식사 내내 보이는 말투와 행동으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으며, 특히나 인격적인 장애를 가진 동생 파울의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정작 이들이 보여주고 있던 것은 살짝 가면을 하나씩 쓴 것 같은 모습들이었고, 이들이 그 가면을 벗어야만 하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면서 이들이 즐기기 위해 모였던 그 자리의 진짜 의미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당신이 자식을 지독하게도 사랑한다면?
어떻게 키우고 어떻게 가르쳐야 옳은 것인가를 냉정한 시선으로 보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파울과 세르게 형제 부부가 디너를 위해 만난 그 자리는 사실은 각자의 자식들이 저지른 만행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의논하기 위해 만난 자리였는데 자신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욕심에 바탕을 둔 그 대응책은 차라리 눈을 감고 싶어지게 만들 정도로 잔인하고 분개할만한 방식이었다. 곧 총리가 될지도 모를 세르게는 갑작스러운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세르게의 아내 바베테는 총리부인이라는 명함을 포기할 수 없어서 그런 세르게를 저지하고자 한다. 파울은 자기가 가르친 방식대로 행하는 아들의 잘못된 방식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파울의 아내 끌레르는 오직 제 자식을 감싸기 위해 세르게의 얼굴에 상처를 입힐 지경에 이른다. 잘못된 것에 대해 잘못을 지적해주는 것이 어른이고 부모일 텐데, 이들의 자식 사랑은 너무도 끔찍하고 자신들이 가지는 위치에 대한 욕심은 너무나도 커서 옳은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 같았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오직 하나였으므로. 내 자식은 무조건 감싸야 하고, 내가 가진 것을 절대 놓을 수는 없다는 마인드.

이들의 욕심을 한 번 더 보여주는 대목은 정치를 하는 형인 세르게가 이미지 관리를 위해 입양한 아이를 키우고 있는 모습과 함께 보여주었던 쇼맨쉽이었다.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닌 필요에 의한 입양과 철저한 계급사회를 그대로 아이들에게도 적용시켜 살아가게 만들었던 점이, 결국은 그런 거짓된 마음과 모습들이 일을 더 크게 만들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테지.

 

읽다보면 우습기까지 하다. 도대체가 어디까지 갈 셈인지 몰라서 책장을 덮을 수 없게 만들었다. 끝까지 그들의 행보를 따라가 보고 싶어지게 만들기까지 하더라. 그래서 결과까지 보고나서야 그들을 독자인 내가 심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멈추지 못하고 계속 그 길로 가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심판을 내려야 할지 내 머릿속은 갑자기 차가워지기도 했다. 온기로는 이들의 모습들을 덮어줄 수 없었기에. 인간이, 부모가,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에 철저하게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때로는 팔이 바깥으로도 굽을 줄 알아야 한다.
이들 형제의 아이들의 저지른 일들은 ‘그래, 숨겨두자.’하는 것으로 덮어야 할 일이 아니다. 이미 파울의 아들 미헬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꼭 그때여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더 이상 나아가기 전에 딱 그때 그 순간, 해야 할 일. 미헬에게는 누군가와의 공유로 덮어둘 범죄가 아니라, 그 잘못을 가르치고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어야 하는 때였다. 힘을 가진 자가 밟아 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잘못한 것은 인정하게 만들고 반성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가르쳐 주어야 할 때.
일부러 부러뜨리지 않는 이상 팔은 안으로 굽는다. 하지만 안으로 굽는 그 팔이 때로는 바깥으로도 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있다. 그건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해 마지않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가능해지는 일일 수도 있다. 내 아이가 지금 성장해가는 인성과 미래를 위해서라면 팔을 부러뜨려서라도 바깥으로 굽게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무엇이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지는 알고 있는 현명함이 있으니 가능한 일 아닌가?

두 시간에 가까운 식사 자리에 동참하면서 소화는 잘 되었는지 모르겠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그 이름도 기억하기 힘든 럭셔리한 메뉴로, 우아한 분위기에 가식적인 미소를 띤 채, 양도 적어 입에 닿기도 전에 사라질 음식들로 식사는 잘 하셨나?
가끔은 답답하고, 가끔은 나의 일로 생각하게 만들고, 가끔은 흥분의 도가니로 빠지게 만드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소화제를 미리 준비해두고 읽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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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나체들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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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편한 소설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끝까지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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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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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가 아닌 그들의 진짜 사랑을 듣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사랑이 오롯이 담긴 책이라기에 궁금했는데 이런 느낌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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