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 도자기로 보는 조선 시대 삶과 예술 사회와 친해지는 책
조은수 글.그림, 최석태 감수 / 창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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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을 잔뜩 심어주기에 충분한 이 책의 제목인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2』를 보고, 나 역시도 긍정적인 호기심과 함께 이 책을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기기 시작했다. 이미 1편(풍속화)으로 만났던 이 책의 좋은 효과로 인해 호감을 가지고 있던 데다, 좋은 기회로 내 손에 들어온 이 책(2편)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흥미로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과 표지, 내용을 읽어가면서 가장 많이 떠올린 것은 마당 한편에 자리한 엄마의 장독대와 언니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처음으로 만들어온 그릇이었다. (언니는 도예를 전공했다.) 엄마의 장독대에 즐비한 항아리들이 왜 굳이 자리를 차지하면서 불편하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몰랐는데, 항아리가 숨을 쉬고 있기에 보관이 더 잘된다고 말하던 엄마의 말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 겨울김장을 위해 가을에 미리 사둔 왕소금을 항아리에 넣어놓고, 잘 말린 나물들을 항아리에 넣어놓는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보면, 처음 넣을 때 그 상태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진짜 항아리가 숨을 쉬고 있었나? 그리고 언니가 초보자의 솜씨로 가장 먼저 만들어온 이 그릇도 딱히 정해진 용도나 의미도 없었던 것 같은데,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 집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흔하게 사용하는 플라스틱의 용이함과는 다르다는 것을 저절로 느끼게 된다.(가끔 내가 군것질을 할 때 애용하는 그릇이다. ^^) 실제로 구매해서 쓰는 사기그릇보다도 더 오래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호감과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릇을 바라보게 되기는 한다. 모양이 똑같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지만, 손이 먼저 가게 되는 것.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도자기는 튼튼하기도 하고(물론 떨어뜨리면 깨지기도 하겠지만), 사용 목적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다 다르다. 시대에 따라, 문화의 교류의 범위에 따라 모양이나 무늬가 다르기도 하다. 처음 어떻게 해서 이런 그릇을 사용하게 되었는지, 어떤 과정으로 변화되고 발전되어 왔는지, 우리 조상들이 이런 그릇(도자기라 부를 수 있는)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 다양함을 이 책을 통해서 같이 배울 수 있다.

복 받으세요~!
말 그대로 문화유산, ‘도자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굉장히 엄격하고 예스럽고, 박물관을 연상하기 마련인데-실제로 이름 있는 도자기는 박물관에서 만나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막상 펼친 첫 페이지부터 느낄 수 있는 것은 친근함이었다. 상당히 서민적이었고, 우리네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 그대로의 바람이 담긴 기원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그릇에 복을 담아내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릇의 바닥에는 ‘복(福)’을 쓰고, 그릇에다가 음이 똑같이 ‘복(蝠)’으로 불리는 박쥐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그렇게 긍정적인 의미의 바람들을 담은 마음을 동식물로 표현하여 그릇에 그려내었다. 물고기나 연꽃, 매화, 연꽃과 함께 있는 백로 그림 등을 일상생활에 매일 함께 하는 그릇 안에 그려내면서 그네들의 삶의 기원을 함께 담아냈다.

에헤라디여~ 흥겹구나!!
코발트라는 광물로 만들어진 파란색 물감, 그 비싼 물감이 아낌없이 쓰였던 청화 백자가 많았던 조선 시대였다. 특히 왕실에서 사용하던 도자기들은 그 위엄과 아름다움, 귀한 잔치에서나 볼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도자기의 무늬에서도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것과 차별화를 두었는데, 용의 그림이 많았고, 용의 발톱은 그 도자기를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그 수가 다르다는 것도 기억해둘만한 내용이다. 새해가 되면, 신령스러운 동물이라고 해서 호랑이를 용과 함께 그려 대문에 붙이기도 했다. 사옹원(조선 왕실의 음식과 잔치를 담당하던 관청)에서 사용하던 도장은 위엄 있는 동물인 사자 장식을 붙여넣기도 했다. 하지만 또 재치 있게, 그렇게 그려 넣은 동물들의 모습을 다양한 표정으로 보이게 만들기도 하는 걸 보면 선조들은 그 잔치와 기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즐길 자세가 충분히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

폼 나게 한번 마셔(먹어)볼까~?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고, 늘 무언가를 마시면서 살아가는 일상에서 다양하게 만날 수 있는 병의 모양과 새겨진 무늬들이 특이했다. 특히 그 무늬들은 그 병이 사용되었던 시기의 시대적 배경들의 의미를 같이 담고 있어서인지 더욱 눈여겨 볼 수밖에 없었다. <끈무늬 병>은 기마민족이었던 몽골족의 특성상 말을 타고 다니면서 목을 축일 수 있게 말에 병들을 매달고 다녔던 것을 상징하고 있었고, <연못오리무늬 팔각병>은 대량 생산이 아닌 사람의 손으로 그려내기에 오직 하나의 무늬만이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오래도록 살기를 바라는 의미로 십장생을 그려 넣은 병 역시나 우리 고유의 무늬라고 할 수 있겠다.
단순하게 그냥 마시는 용도로 만드는 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우리 일상에서 항상 사용해왔던 병이 이렇게나 다양한 의미와 무늬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선조들이 참 위트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보는 재미와 마시는 즐거움을 동시에 선사하는 도자기들이 아니었나 싶다.

당신은 멋쟁이 선비~!
나도 가끔 책을 읽으면서 책갈피나 북다트, 메모지나 펜, 혹은 북커버나 북스탠드까지 책과 관련된 용품들을 구입할 때가 있다. 그냥 읽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이런 저런 이유로 필요한 일이 생기다보니, 하나의 세트처럼 책 관련 용품들을 소장할 때가 있는데 우리의 선비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 자연의 모양으로 만들어낸 붓걸이와 필통, 멋스러운 필세(붓을 씻는 그릇), 아기자기한 장난감처럼 보이는 연적, 조선시대 선비들의 고상한 취미로 여겼던 향로까지. 이상하게 이런 게 갖추어져 있으면 글도 잘 읽힐 것 같고, 선비의 맞춤형 아이템들이 제자리를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무얼 하나 하려면 구색을 맞춰놓고 시작하면 더 잘 될 것 같고, 더 유쾌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은 똑같았나 보다. ^^

우리, 저승까지 같이 갈래?
옛 여인들의 치장을 도왔던 분합이나 분항아리가 우리가 알고 있는 도자기들의 미니어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그릇에 화장도구를 넣어놓고 사용하면 더 예쁜 얼굴로 치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기대감도 갖게 만들기도 하고. ^^ 술이나 간장 물을 담아 옮길 때 사용하던 장군이란 것도 이번에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쓰임새가 다양했다. 보관뿐만 아니라 발효시키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비슷한 듯 하면서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나 무늬들이 더 눈길을 끌었다. 그림으로 그려 넣기도 하고 새기기도 하는 방식들이 비슷해 보이는 모양들에서 차별화를 두듯이 다르게 보이게 했다. 왕실에서 태어난 왕자나 공주들의 탯줄을 보관하는 태항아리는 그 용도와 함께 그 안의 슬픈 마음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고, 투각 기법(무늬를 뚫어내는 방식)으로 만들었던 도자기로 만든 베개는 ‘베고 자면 머리가 아프지 않을까?’하는 엉뚱한 걱정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내 눈에 가장 많이 담았던 것은 ‘명기’라 불리던 무덤에 함께 묻어 주던 물건들이었다. 그릇이나 인형의 모습을 한 채로 죽은 이의 무덤 안에 같이 들어가는 역할이었다. 살아있을 때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을 정도였다면, 정말 진지한 마음을 담아 함께 넣어준 것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저승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게 만들어주기 위한 배려였을까?

제사에 쓰이던 보와 궤(제사 그릇), 작(술잔), 대접(제사 전에 손을 씻는 용도), 자라병(술이나 물을 담음)과 같이 경건하게 사용되는 도자기들까지. 이름부터 낯설었지만, 그 용도와 역할까지 알게 되니 사뭇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옛날에 제사를 그리 많이도 지냈던 이유가 먹을 게 많지 않아서, 제사라는 구실로 먹을 것을 풍성해지게 하기 위함이었다니 먹고 사는 문제가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도자기’라고 하면 어느 장소(혹은 집안)의 내부 인테리어를 위해 뭔가 고급스러운 연출을 하기 위해 비치해놓는 소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거리감 있게, 박물관의 전시에서나 만날 수 있는 대상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만난 도자기는 우리 생활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양이나 용도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삶에서 특정 신분만이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들을 오래전부터 도자기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배울 수 있었다. 게다가 도자기의 무늬에서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어떻게 얼마나 멀리 교류가 이루어졌는지까지 알 수도 있었다. 이건 역사책에서도 배울 수 있는 한 부분이겠지만, 도자기 하나에서 그걸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닌가 싶다. 살아가는 장소, 시대, 인물이 다른데도 비슷한 무늬를 발견했을 때 유추할 수 있는 그 기대감은 아마 신대륙 발견만큼이나 놀랄 일일 것만 같다.

한 시대의 모습을 도자기 하나로 많은 이야기와 함께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하는 책이다. 항상 보아왔던 사물 하나로 이런 배움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어렵다는 선입견을 항상 가지고 있던 ‘역사’라는 과목에 대해 조금은 더 친근감 있게 만날 수 있게 만들고 있었다. 누군가가 구연동화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에 놀이처럼 즐길 수 있었고, 나덤벙, 홍귀얄-두 아이의 이름은 이 책 속에서 들려주는 도자기 기법에서 따온 것- 두 아이와 함께 도자기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차근차근 따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말처럼 쉽지 않은 박물관 관람을 이 책 한권으로 대신한 것 같기도 하다. 박물관의 도자기 방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구성에, 자주 접할 수 없는 이들에게 효과 만점일 것 같다.
초등 고학년 이상이 만난다면 큰 거부감 없이 배워가는 마음으로 접할 수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이 시리즈의 1편과 함께 만난다면 더할 수 없는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 박물관 견학 예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장 유익한 기회가 아닐까 싶다. 이 책 한 권 미리 만나고 가면 예습하고 간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지난주부터 아이들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우리 자랄 때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바쁘고 말로만 방학이지 실제 방학을 즐길 여유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아쉬운 시간이라도 조금 짬을 내서 이 책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박물관 탐험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
박물관으로 고고씽~!!!


덧1)
이 책이 읽어가고 배워가고 알아가는 재미는 더할 바 없이 좋았으나, 리뷰로 이 책을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책에 수록된 70여점의 그림들을 그대로 담아내지 않고서는 이야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리뷰를 쓰고자 하면서 저절로 느낄 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소장을 추천하고 싶다. 소개 글과 다른 이의 리뷰를 통해서는 이 책의 진짜 맛을 보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덧2)
이 책에서 들려주던 도자기의 여러 가지 기법들을 일부러 리뷰에 넣지 않았다. 하나하나 설명을 하자니 결국에는 이 책 한권을 옮겨놓고 싶어지는 욕심에, 이 책을 만날 수 있는 재미 하나를 뺐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이 단순하게 70여점의 도자기의 그림이 전부가 아니라, 다양하고 깊은 설명과 도자기가 그 다양함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그 기법들을 직접 눈으로 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 기법들을 설명해놓으면 자칫 이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가질 수 있을까봐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일부러 제외시켰다.
덧3)
거의 15년 만에 다시 만난 이 책의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풍속화와 도자기, 그 다음에는 무엇으로 선조들의 이야기를 계속 들려줄지 궁금할 수밖에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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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보다 - 동물들이 나누는 이야기
윤여림 글, 이유정 그림 / 낮은산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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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부터 너무 시끄러워 나가보니, 하늘에 까마귀 떼가 날고 있었습니다. 정말 하늘이 까맣게 뒤덮여 어두컴컴할 정도였어요. 그걸 보시더니 엄마가 ‘바람이 일어나겠구나.’ 말씀하십니다. 까마귀가 시끄럽게 날면 바람이 일어난답니다. 보통은 좋지 않을 일이 불어닥칠 것을 예견하는 의미의 말이죠. 그게 언제 적부터 들려오던 이야기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어른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까마귀가 그렇게 날고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강풍이 불었습니다. 방의 창문과 대문이 큰 소리를 내며 흔들릴 정도로 아주 센 바람이 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말이지요. 하늘이 온통 흐리고,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비가 갑자기 쏟아지더군요.

사실 까마귀를 떠올리면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까마귀와 관련된 속담의 대부분도 좋지 않은 것에 비유한 것이 많지요. 그런데 까마귀는 까마귀만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아도 원래부터 까마귀가 해왔던 대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요. 그게 까마귀의 자리일 테니까요. 날개를 가졌으니 하늘을 날고, 가고 싶은 곳을 향해 날갯짓을 하고, 사람들이 좋지 않은 일을 예견하는 동물로 인식하더라도 그대로 살아가는 게 익숙한, 그래야만 하는 까마귀만의 자리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최소한의 자유는 있으니까요.

 

서점에서 이 책의 표지를 본 순간 저 눈망울과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 선해 보여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어서, 그 눈으로 보는 것을 저도 같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 책의 느낌을 ‘아름다움’으로만 생각하면서 펼쳐들었습니다. 아름다우면서 강함까지 동시에 보였던 그림들의 붓 터치, 동물원에서 마주하던 동물들을 이 책을 통해 다시 보게 된 반가움, 각각의 동물들의 특징을 잘 살린 글.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제가 이 책에 대해 읽지도 않고 먼저 가졌던 아름다움은 거기에서 잠시, 멈추었습니다. 동물들의 특징이나 생김새를 보고 끄덕끄덕하던 익숙함은 거기에서 잠시 멈추었고, 대신 그 자리에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자리했습니다. 입장료를 내고 동물원에 들어가고, 그림책에서나 만났던 다양한 동물들을, 아이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좋은(?) 의도로 동물들을 보면서 자리를 옮겨 다니고, 선심이라도 쓰듯 가지고 갔던 과자를 던져주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미처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동물원의 그 동물들과 저 사이에 존재하는, 우리(牛李)라는 상당히 높은 장벽이 하나 있었다는 것을요. 우리(동물들과 나)는, 우리(牛李)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왜 그동안 못하고 지내왔던 것일까요. 무의식중에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아예 그 우리(牛李)의 존재를 인식조차 하지 않고 동물원의 동물들을 보아왔던 것은 아니었는지 읽어가는 내내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우리(牛李) 안의 동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동물들은 당연하게 그 안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동물들은 자신들만의 색깔이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당연한 유전자로 받아들이는, 달리고, 날아오르고, 헤엄치고, 타고 오르는 동물들 그 고유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두 발로 서고 두 손으로 물건을 집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날갯짓이 없어도 몇 시간씩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다던 콘도르, 적이 나타나면 뒷발로 서서 개짓는 소리를 내면서 경고를 하는 프레리도그, 한 시간에 백 킬로미터의 속도로 빨리 달릴 수 있다던 치타, 이미터가 넘는 높은 바위도 훌쩍 뛰어 오르내리던 바바리양, 캄캄한 밤에도 소리 없이 사냥을 할 수 있는 올빼미, 무리와 함께 사냥하고 울어대는 소리가 노래로 들리는 늑대, 추운 북극에서도 눈보라를 헤치고 먹이를 찾는다는 북극곰, 조련사의 말을 너무 잘 알아들어 동물원의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돌고래, 힘이 좋은 긴 팔로 나뭇가지를 타고 다닌다던 긴팔원숭이, 먹이가 많은 호수를 찾아 한 번에 몇 킬로미터씩 날아간다는 쇠홍학.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 바로 다음에 아픈 마음을 갖게 하는 모습이 이어집니다. 날고 싶어도 날지 못하는, 뛰어 오르고 싶어도 뛰어 오를 일이 없는, 달리고 싶지만 작은 공간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은, 푸른 바다를 헤엄치고 싶지만 갈 수 없는, 무리들이 그리운 이 동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동물원 안의 동물들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아프리카 초원이, 깊고 푸른 바다가, 울창한 숲이, 편안한 집 같은 동굴의 천장이, 눈 덮인 설원이 그리울 것만 같습니다. 동물원 안에서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을 바라보는 인간들은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만 여겼습니다. 동물들은 그 안에서, 인간들은 그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익숙했습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그럴 권리가 있는 것 같이요. 인간은 걷고 달리고, 노래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자유롭게만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만 생각하면서 그 동물들을 보고 있었나 봅니다. 긴 장벽 같은 우리(牛李)를 사이에 두고 동물들과 우리가 바라 볼 때, 우리는 그 동물들이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바라보았습니다. 그 반대의 시선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로 말이지요. 그 안의 동물들이 볼 때 우리들은 안에 있는 존재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동물들을 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 같이요. 서로가 서로를 다르게만 보려고 해서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잊은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동물들이 우리를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숨을 쉬고, 배가 고프면 먹고, 보고 싶은 것을 보면서 살아가는 삶이 아마도 똑같겠지요. 거기에 이 동물원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인간의 또 다른 면을 조금 더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자연을 이해하려는 목적으로 동물원이 존재합니다. 숲과 나무가 있고, 온갖 동물들이 있습니다. 책에서나 볼 수 있는 동물들을 눈앞에서 보게 되는 신기함도 맛보게 합니다. 살아있는 교육이라는 목적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그 공간(동물원)에 대해 그럴싸한 포장도 가능합니다. 동물‘다운’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곳이라고 보이게끔 합니다. 그런데 그런 동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도 같습니다. 인간이라는 동물, 똑같이 그 고유의 영역과 역할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라는 동물은, 우리(牛李)의 바깥쪽에 있었던 게 맞는 걸까요? 굳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를 둘러싼, 우리를 달리지 못하게 하고, 숨쉬기 힘들게 하고, 갇혀있게 만드는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요? 자유로웠던 동물들의 모습과 동물원 안의 동물을 교차적으로 보여줄 때마다 뭔가가 꿈틀꿈틀 가슴 속 저 밑바닥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한 페이지씩 계속 넘기다 보니 알겠습니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동물일 수 있는 인간도 동물원 안의 동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요. 자유로울 것 같은 인간도 자유로울 수 없는 수없이 많은 경험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을 수 없고, 쉬고 싶다고 해서 쉴 수 없었고, 그리고 더 많은 이유들로 자유를 누릴 수 없었던 순간을 떠오르게 합니다. 삶에서 선택할 수 없는 순간을 만날 때마다 우리 인간은 자유를 잠시 내려놓은 시간을 만나야만 했습니다.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보니, 동물원 안에서 원하는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동물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동물원 안의 동물들과 눈이 마주친 우리 인간이란 동물은 소리가 아닌 눈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똑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저마다가 가진 고유의 빛을 내면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같은 모습으로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챈 순간, 공감이란 매개체로 서로를 보는 눈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렇게 다시 시작됩니다. 너(동물들)와 나(인간)의 함께 하는 이야기가...

글이 많지 않은 이 책의 장점은 그림으로 표현된 동물들의 모습을 통해서 또 다른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들려주고, 보고, 이야기가 끝나고, 그렇게 익숙하게 한 편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읽는 이로 하여금 이 책 한권으로 다른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게 합니다. 엄마와 아이가 함께 읽어가는 시간, 읽어가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만드는 효과, 같은 것을 두고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까지 같이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새로 시작될 이야기가 어떻게 들려올지 저도 기대가 됩니다.



조심스럽게 덧붙입니다.
이 책 안에 담긴 그림들을 다 옮겨놓고 싶을 만큼 그림 한 장이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글을 대신하는 그 그림들을 많이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림책의 특성상 이 책을 만나게 될 다음 독자를 위하여 이 리뷰에 이 책 속의 그림들을 많이 담아내지 않았습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만날 시간을 기다리는 분들을 위한 배려의 마음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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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보다 - 동물들이 나누는 이야기
윤여림 글, 이유정 그림 / 낮은산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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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부터 너무 시끄러워 나가보니, 하늘에 까마귀 떼가 날고 있었습니다. 정말 하늘이 까맣게 뒤덮여 어두컴컴할 정도였어요. 그걸 보시더니 엄마가 ‘바람이 일어나겠구나.’ 말씀하십니다. 까마귀가 시끄럽게 날면 바람이 일어난답니다. 보통은 좋지 않을 일이 불어닥칠 것을 예견하는 의미의 말이죠. 그게 언제 적부터 들려오던 이야기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어른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까마귀가 그렇게 날고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강풍이 불었습니다. 방의 창문과 대문이 큰 소리를 내며 흔들릴 정도로 아주 센 바람이 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말이지요. 하늘이 온통 흐리고,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비가 갑자기 쏟아지더군요.

사실 까마귀를 떠올리면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까마귀와 관련된 속담의 대부분도 좋지 않은 것에 비유한 것이 많지요. 그런데 까마귀는 까마귀만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아도 원래부터 까마귀가 해왔던 대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요. 그게 까마귀의 자리일 테니까요. 날개를 가졌으니 하늘을 날고, 가고 싶은 곳을 향해 날갯짓을 하고, 사람들이 좋지 않은 일을 예견하는 동물로 인식하더라도 그대로 살아가는 게 익숙한, 그래야만 하는 까마귀만의 자리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최소한의 자유는 있으니까요.

서점에서 이 책의 표지를 본 순간 저 눈망울과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 선해 보여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어서, 그 눈으로 보는 것을 저도 같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 책의 느낌을 ‘아름다움’으로만 생각하면서 펼쳐들었습니다. 아름다우면서 강함까지 동시에 보였던 그림들의 붓 터치, 동물원에서 마주하던 동물들을 이 책을 통해 다시 보게 된 반가움, 각각의 동물들의 특징을 잘 살린 글.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제가 이 책에 대해 읽지도 않고 먼저 가졌던 아름다움은 거기에서 잠시, 멈추었습니다. 동물들의 특징이나 생김새를 보고 끄덕끄덕하던 익숙함은 거기에서 잠시 멈추었고, 대신 그 자리에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자리했습니다. 입장료를 내고 동물원에 들어가고, 그림책에서나 만났던 다양한 동물들을, 아이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좋은(?) 의도로 동물들을 보면서 자리를 옮겨 다니고, 선심이라도 쓰듯 가지고 갔던 과자를 던져주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미처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동물원의 그 동물들과 저 사이에 존재하는, 우리(牛李)라는 상당히 높은 장벽이 하나 있었다는 것을요. 우리(동물들과 나)는, 우리(牛李)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왜 그동안 못하고 지내왔던 것일까요. 무의식중에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아예 그 우리(牛李)의 존재를 인식조차 하지 않고 동물원의 동물들을 보아왔던 것은 아니었는지 읽어가는 내내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우리(牛李) 안의 동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동물들은 당연하게 그 안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동물들은 자신들만의 색깔이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당연한 유전자로 받아들이는, 달리고, 날아오르고, 헤엄치고, 타고 오르는 동물들 그 고유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두 발로 서고 두 손으로 물건을 집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날갯짓이 없어도 몇 시간씩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다던 콘도르, 적이 나타나면 뒷발로 서서 개짓는 소리를 내면서 경고를 하는 프레리도그, 한 시간에 백 킬로미터의 속도로 빨리 달릴 수 있다던 치타, 이미터가 넘는 높은 바위도 훌쩍 뛰어 오르내리던 바바리양, 캄캄한 밤에도 소리 없이 사냥을 할 수 있는 올빼미, 무리와 함께 사냥하고 울어대는 소리가 노래로 들리는 늑대, 추운 북극에서도 눈보라를 헤치고 먹이를 찾는다는 북극곰, 조련사의 말을 너무 잘 알아들어 동물원의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돌고래, 힘이 좋은 긴 팔로 나뭇가지를 타고 다닌다던 긴팔원숭이, 먹이가 많은 호수를 찾아 한 번에 몇 킬로미터씩 날아간다는 쇠홍학.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 바로 다음에 아픈 마음을 갖게 하는 모습이 이어집니다. 날고 싶어도 날지 못하는, 뛰어 오르고 싶어도 뛰어 오를 일이 없는, 달리고 싶지만 작은 공간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은, 푸른 바다를 헤엄치고 싶지만 갈 수 없는, 무리들이 그리운 이 동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동물원 안의 동물들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아프리카 초원이, 깊고 푸른 바다가, 울창한 숲이, 편안한 집 같은 동굴의 천장이, 눈 덮인 설원이 그리울 것만 같습니다. 동물원 안에서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을 바라보는 인간들은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만 여겼습니다. 동물들은 그 안에서, 인간들은 그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익숙했습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그럴 권리가 있는 것 같이요. 인간은 걷고 달리고, 노래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자유롭게만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만 생각하면서 그 동물들을 보고 있었나 봅니다. 긴 장벽 같은 우리(牛李)를 사이에 두고 동물들과 우리가 바라 볼 때, 우리는 그 동물들이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바라보았습니다. 그 반대의 시선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로 말이지요. 그 안의 동물들이 볼 때 우리들은 안에 있는 존재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동물들을 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 같이요. 서로가 서로를 다르게만 보려고 해서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잊은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동물들이 우리를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숨을 쉬고, 배가 고프면 먹고, 보고 싶은 것을 보면서 살아가는 삶이 아마도 똑같겠지요. 거기에 이 동물원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인간의 또 다른 면을 조금 더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자연을 이해하려는 목적으로 동물원이 존재합니다. 숲과 나무가 있고, 온갖 동물들이 있습니다. 책에서나 볼 수 있는 동물들을 눈앞에서 보게 되는 신기함도 맛보게 합니다. 살아있는 교육이라는 목적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그 공간(동물원)에 대해 그럴싸한 포장도 가능합니다. 동물‘다운’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곳이라고 보이게끔 합니다. 그런데 그런 동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도 같습니다. 인간이라는 동물, 똑같이 그 고유의 영역과 역할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라는 동물은, 우리(牛李)의 바깥쪽에 있었던 게 맞는 걸까요? 굳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를 둘러싼, 우리를 달리지 못하게 하고, 숨쉬기 힘들게 하고, 갇혀있게 만드는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요? 자유로웠던 동물들의 모습과 동물원 안의 동물을 교차적으로 보여줄 때마다 뭔가가 꿈틀꿈틀 가슴 속 저 밑바닥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한 페이지씩 계속 넘기다 보니 알겠습니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동물일 수 있는 인간도 동물원 안의 동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요. 자유로울 것 같은 인간도 자유로울 수 없는 수없이 많은 경험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을 수 없고, 쉬고 싶다고 해서 쉴 수 없었고, 그리고 더 많은 이유들로 자유를 누릴 수 없었던 순간을 떠오르게 합니다. 삶에서 선택할 수 없는 순간을 만날 때마다 우리 인간은 자유를 잠시 내려놓은 시간을 만나야만 했습니다.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보니, 동물원 안에서 원하는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동물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동물원 안의 동물들과 눈이 마주친 우리 인간이란 동물은 소리가 아닌 눈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똑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저마다가 가진 고유의 빛을 내면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같은 모습으로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챈 순간, 공감이란 매개체로 서로를 보는 눈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렇게 다시 시작됩니다. 너(동물들)와 나(인간)의 함께 하는 이야기가...

글이 많지 않은 이 책의 장점은 그림으로 표현된 동물들의 모습을 통해서 또 다른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들려주고, 보고, 이야기가 끝나고, 그렇게 익숙하게 한 편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읽는 이로 하여금 이 책 한권으로 다른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게 합니다. 엄마와 아이가 함께 읽어가는 시간, 읽어가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만드는 효과, 같은 것을 두고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까지 같이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새로 시작될 이야기가 어떻게 들려올지 저도 기대가 됩니다.



조심스럽게 덧붙입니다.
이 책 안에 담긴 그림들을 다 옮겨놓고 싶을 만큼 그림 한 장이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글을 대신하는 그 그림들을 많이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림책의 특성상 이 책을 만나게 될 다음 독자를 위하여 이 리뷰에 이 책 속의 그림들을 많이 담아내지 않았습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만날 시간을 기다리는 분들을 위한 배려의 마음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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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힘을 보낼게, 반짝 - 여자와 공간, 그리고 인연에 대한 공감 에세이
김효정(밤삼킨별) 지음 / 허밍버드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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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한집 건너 하나씩 있는 게 커피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프랜차이즈 커피점이다. 처음부터 커피를 마시려던 것은 아니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콧속으로 스며들어오는 커피 향을 만났을 때, 바쁜 일이 없을 때 즉흥적이지만 잠깐 쉬어가도 좋다고 생각이 들 때면 생각하지도 않았던 커피를 마시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내가 커피점에 들어가기 전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은 ‘할인쿠폰이 있나?’ 또는 ‘할인 적용되는 카드가 있던가?’ 하는 생각이다. 한 끼 밥값과 비슷한 커피한잔의 값을 다 내고 마시기에는 너무 비싸다. 뭔가 억울한 느낌이다. 다행히도 할인되는 카드 정도는 있어서 안심하고 출입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런데, 가끔은 어느 골목길의 한갓진 구석, 그것도 프랜차이즈가 아닌 테이블 두세 개가 전부인 아주 작은 찻집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뭐에 홀린 듯 문을 열고 들어가서 몇 개 안 되는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가끔은 차도 거의 안 다니는 창밖도 내다보면서 구경을 한다. 바깥 구경이 지루해질 만하면 작은 실내를 구경하기도 한다.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싶으면 편하게 책장을 넘기기도 한다. ‘이렇게 오래 앉아 있으면 주인이 싫어하려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편한 분위기에 엉덩이가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커피 한잔의 값이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할인이 전혀 없는 그 값을 제대로 지불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먼저 생긴다. 그건 아마도 그 ‘공간’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어서일 게다. 나에게 주어진 그 몇 시간(혹은 몇 분)의 배려가 고마워서일 게다. 너무 흔한 게 그런 곳이지만, 또 너무 흔하게 편하지 않은 곳이 그런 곳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밤삼킨별.

다이어리, 다른 이의 글과 함께 한 사진으로 만난 것이 전부였다. 다이어리는 1년을 꽉꽉 채워서 쓰고도 한동안 아까워서 정리를 못했던 기억으로 나와 함께 한 밤삼킨별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에세이집 몇 권을 통해서 밤삼킨별의 사진을 만났다. 특별할 것 없는 사진들인 것 같았는데 글과 함께 만나는 사진은 그 순간 특별해진다. 뷰파인더를 통해 보이는 것들을 셔터를 누르는 순간 담게 되는 것, 셔터를 누른 이가 가지는 그 감정과 느낌이 그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특별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밤삼킨별(김효정)의 사진은 그렇게 다가와 있었다. 다이어리 속의 일상처럼, 누군가의 글에서 느껴지는 감성처럼,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처럼…….

 

반짝! 마켓 밤삼킨별...

홍대 어느 구석진 곳, 번화가도 아닌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 곳에 위치한 그곳이 이제는 번화가 못지않게 너무 유명한 곳이 되어버렸다. 저자가 보여주었던 사진들을 통해 이미 유명해졌기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마켓 밤삼킨별만의 특별함이 존재하기에 그런 것 아닐까. 예전에 읽었던 일본의 어느 카페이야기를 보는듯한 착각에 빠질 것 같았다. 그곳만의 특징이 너무 매력 있어서 한번쯤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 손끝이 근질거리는 것만 같은. 주택을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마켓 밤삼킨별의 모습 역시 그랬다. 최소한의 공사로 원래 있던 집의 느낌을 살려 놓은 곳, 시멘트가 마르길 기다리던 시간에 지르밟고 간 고양이 발자국마저 인테리어가 되어버린 곳, 옛날 옛적 누군가의 집 다락방을 그립게 만드는 곳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마켓 밤삼킨별로 여행을 온 소품들을 통해 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머무르는 곳이다. 저자가 해외에 한번 나갔다 올 때마다 함께 온 아이들(소품들)과 저자의 가족이 드나드는 곳, 손님으로 오는 이들에게 볼거리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곳이다. 누군가의 새 출발을 위한 결혼식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책과 음악이 어우러진 시간으로 그 공감을 채워 넣는 곳이 되기도 하고, 밤삼킨별의 기억과 추억과 삶이 차곡차곡 쌓이는 곳이 되기도 하는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선점’이라는 단어가 틀릴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이 바라보지 않았을 때, 별로 없었던 것을 먼저 발견했을 때에 차오르는 기쁨은 특별하다. 1시간, 아니 1분, 1초라도 먼저 좋아하게 되면 선점한 기분이 든다.(174페이지) 저자는 마켓 밤삼킨별을 위한 장소를 발견했을 때 이런 기분이 든다고 했다. 나에게도 이런 기분이 들게 하는 유일한 경우가 있다. 아직 누군가의 손에 닿지 않은 책, 그런데 내 마음에 들어온 책이 그렇다. 나만 좋아하고 싶고, 나만 알고 싶고, 나만 공감하고 싶은 책이 있다. 누군가에게 이런 책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려 소개해주고 싶으면서 동시에 말하고 싶어지지 않는 책이 있다. 오직 ‘나만의 책’으로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책을 만날 때 나도 저자처럼 ‘선점’한 기분에 취하고는 한다. 그리고 그런 취함을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 책으로…….


반짝! 누군가의 미소와 눈물...
햇살이 눈이 부시게 들어오는 그 자리가 눈물이 나게 했다. 나란히 앉는 자리, 낯설지 않은 자리, 편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갖게 하는 자리. ‘마켓 밤삼킨별은 숨어서 헤어지기 좋고 울기에도 좋은 공간 같다고(274페이지)라고 말하던 남자의 모습이 눈에 밟혀 내내 투명한 창문만을 바라보고 있게 만드는 자리였다. 누군가에게 ‘헤어지자’고 말할 때, 나란히 앉는 자리만큼 안정된 자리는 없는 듯하다. 상대방의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자리, 내 목소리가 창문에 반사되어 나에게 전달되는 위치, 그래서 그 아픔의 소리가 나에게도 똑같이 전달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내 입을 통해 ‘헤어지자’고 말하는 그 순간 그 말은 상대와 나에게 같이 들려오는 말이 되어버려 헤어짐의 고통을 같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고.

 


반짝! 우리가 꿈꾸던 ‘공간’...

자신만의 방이 필요할 때,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때 우리는 나만의 공간을 꿈꾼다. 나만의 것들로 꾸미고 채우고 내가 편히 있을 수 있는 공간을 그리워한다. 마켓 밤삼킨별의 등장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누구나가 그 ‘공간’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찾아들고 싶게 만드는 공기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지나가다 호기심에, 차 한 잔 생각에, 작은 소품들의 유혹에, 또 다른 기억 하나 보태고 싶은 마음에 저절로 발길을 당기는 곳. 누군가와의 담소가 그리워 찾아지는 곳, 벽에 끼적인 낙서 하나가 온 맘을 흔드는 곳, 누군가는 만남을, 누군가는 헤어짐을 만드는 곳, 그리고 더 많은 꿈꾸기를 하게 만드는 곳이다. 그 안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을 테지. 그래서 자꾸만 찾아가게 되는 곳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그곳은.

 

커피향과 그리운 사진들과 함께 이 밤에 들려온 이야기는 밤잠을 설치게 한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공감을 하면서 같이 그리워한다. 특히 저자의 사진과 글이 함께 한 이야기를 나는 처음 만나서 그런지 더 새롭다. 그동안에 만났던 저자의 사진들이 저자의 이야기와 함께 들려오는 맛은 좀 다르다. 뭐랄까, 아메리카노만 마시다가 시럽을 듬뿍 넣은 달달한 크림커피를 마시는 기분? 뭔가가 한 가지 더 채워진 느낌이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녀의 사진이 가득 담긴 다이어리를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다시 시작할 하루하루에 그녀의 사진이 나의 일상과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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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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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도 모르는 살인의 현장을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일까. 나는 분명 눈을 감고 있었고, 누구의 손에 일어난 살인사건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오직 결과물로만 그 현장에 내 눈 앞에 있다. 현장에 있는 사람은 단 두 명이다. 살아있는 나와 죽어있는 여섯 살 아이의 시체 한 구. 아이의 목에 둘러 있는 것은 내 신발의 끈이다. 정말, 내가 죽인 것인가?

주인공인 소피가 처음 목격한 장면이다. 자신의 눈앞에 일어나있는 살인 사건의 장소에서 자신도 모르는 일들이 일어났나보다. 알 수 없다. 누가 좀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봐도 살인자가 되어 있는 자신의 입장이다. 사실 확인은 나중이다. 그 자리를 떠나야만 한다.

굉장히 긴박감 넘치는 장면들로 시작하고 있었던 이 책은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그 긴장감이 고조된다. 계속 잠깐씩 기억을 잃어버리는 소피, 눈을 뜨면 언제나 살인사건의 현장에 시신과 자신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상황. 누가 봐도 이건 소피가 살인자가 된 상황이다. 그리고 소피는 수배자가 되고 계속 도망자가 되어 살아간다. 그러던 중, 자신의 마지막 선택으로 한 남자와의 결혼을 만들어간다. 오직 그녀가 살아갈 길은 그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결혼을 한다. 이제 우리가 지켜봐야 할 것은 소피가 택한 그 남자와의 결혼이 소피의 남은 인생을 걸만한 선택이었는지를 확인하는 것뿐이다.

이미 읽은 전작 『알렉스』로 그 진가를 확인하게 된 작가다. 한 여자의 사연과 그에 따른 복수심이 불러왔던 살인들은 법으로 처벌 받아야 마땅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중심으로 보자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는 잔인한 말을 쏟아내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작품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 역시나 한 여자의 알 수 없는 인생 이야기가 들려올 거라 생각했다. 억울하다면 억울하고, 잔인하다면 잔인한 마무리가 이 이야기 속의 모든 인물들이 모두 가해자이며 피해자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이유도 모르고 반미치광이가 되고 살인자가 되어버린 소피, 오직 자신의 사랑을 잃어버린 그 한가지로 복수를 꿈꾸었던 한 남자, 그리고 알게 된 진실(그게 진실 맞아?)로 일어나는 또 하나의 죽음.

모든 것은 마치 그렇게 정해지기로 약속한 것처럼 너무나도 차분하게 차근차근 진행되어갔다. 죽음마저도 예고된 것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소피의 도피를 쫓아가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그녀에게 이입되어 같이 전력질주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 누구라도 그 순간에는 그렇게 달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하리라. 내가 살인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런데 우습게도 그렇게 달리던 것을 한 순간에 멈추게 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는, 허무함과 충격이 동시에 밀려온다.
“내가 지금껏 왜 그렇게 달린 거야?”

이제 상황은 역전이 된다.
도피가 아닌,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달리는 것이다. 앞으로 달리기 위해서 때로는 모험도 해야 한다. 숨기 위함이 아닌 그 무언가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듯이 한차례 전쟁을 치르고 건너야 할 관문인 것이다. 다른 것은 필요 없다. 무조건 싸워야 한다. 그리고 이겨야만 한다. 오직 그 순간 다시 달릴 수 있게 되니까 말이다.

이 책이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장르를 넘어서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또 그 모습을 지켜보게 만들기에도 충분했다. 한 사람이 미쳐가는 과정, 그게 누군가의 손으로도 가능한 일이라는 것, 누군가의 슬픔이 만들어낸 복수, 알지 못했던 일로 피해자가 되는 사람, 거짓된 진실들로 또 하나의 상처받은 영혼이 만들어진다는 것도. 그 모든 것들이 정신적인 일들로 생겨나고 끝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섬뜩하면서도 언제 내가 만날지도 모를 일이라는 과장된 걱정까지 끌어안고 읽게 되는 이야기였다. 거기다가 인물들의 심리를 읽어가는 재미 또한 상당했던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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