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가는 개미 - 2016 화이트 레이븐즈 선정도서 문학동네 동시집 38
유강희 지음, 윤예지 그림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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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올 그의 시집은 손바닥 동시집일 줄 알았다. 한 두 줄, 서너 줄에 뜨거운 심장을 심어놓은 시들이 매력적이어서 풀이 벌레에게/-내가 널 굶기는 일은 없을 거야//벌레가 풀에게/-죽을 때까지 네 곁에 있어 줄게라고 만일 풀과 벌레가 프러포즈를 한다면(전문)처럼 한 순간 환히 빛나는 동시들로 묶인 시집.

이 시집에는 특히 아이 사람, 어른 사람이 거의 없다. 한두 편 들어있을 법한 말놀이 동시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집요할 만큼 사람 이외의 것에 관심을 보이고, 사람이라야 약자로서의 타자들인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이거나 식칼을 들고 부추밭에 가는 할머니, ‘짤린사람,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거기에 가해자로서의 사람인 족제비를 친 운전자, 오리를 도살장으로 데려가는 트럭 운전사 정도.

사람이 없는 자리에 시인은 동식물과 사물(, 의자, 화장지, 소화기, 슬리퍼, 파리채)을 데려다 놓았다. 사람대신 동식물과 무생의 사물을 얘기하지만 결국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시인이 해석하는 동식물과 사물의 세계는 세상의 중심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나비를 물고 가는 개미의 삶은 고단하고 개미의 치열한 삶 앞에서 우리는 문득 겸허해지려고 한다. 개미의 삶을 들여다 본 뒤에는 발걸음을 조심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걸어야할 것 같으니.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는 동식물과 사물은 궁극적으로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하는 벗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인식이지만 이것을 말하는 주체의 시선은 아이의 시선이기 보다는 어른의 시선에 가깝다. 그렇다보니 어릴 적 내 얼굴을 드디어 찾았다//여치랑 앉아서 내리는 비도 또랑또랑 같이 보자여치 얼굴은 자연과 인간의 행복한 합일을 이야기하는데 이 짧은 시에 아이의 감성, 아이들의 공감이 끼어들 틈은 좁아 보인다.

아이들의 현실을 다루고 있는가와 별개로 아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인가는 동심의 폭을 넓혀 보는 것이다. “어른이면서 어른이 아니고 아이이면서 아이가 아닌 그 어떤 것을 동심이라 한다면시인은 여치 얼굴에서 어린 나를 만났고, 동심을 보았고, ‘둥글며 환한어떤 세계가 열리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공감하는 그 어떤 지점은 동시를 쓰는 시인들의 운명과도 같다. 그리고 우리는 여치 얼굴을 통해 그 지점의 행복한 합일이 어렵다는 것도 안다.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시적 상상의 힘인데 가령 아이의 공을 받아내는 벽의 가슴에 이 든다거나 슬리퍼가 물고기로 변신을 하고 화장지는 혀는 있으나 말하기 이전에 구겨지는 욕망의 좌절, 의자는 네 발 달린 동물, 소화기는 웃음을 참고 있는 아기 코끼리가 되는 방식이다. 시적 상상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이런 사물의 변환은 언제나 즐겁고 동시적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무생의 대상이 사람처럼 감각하는 존재가 된다는 상상은 자칫하면 유치해질 수도 있다. 공을 받아낸 벽이 멍이 든다거나 슬리퍼가 물고기 된다거나 파리와 파리채가 공생한다는 것이 내게는 그렇다. 이것은 이미 굳어버리고 각질화 된 어른의 감성 탓이겠지만 동시에서는 너무 오래 사용된 상상 기법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생의 사물을 이야기하지만 종이컵의 상상은 좀 다르다.

파릉 파릉/저 나무/커다란 종이컵//후루룩 새 떼 날아와/종이컵에/쪼르륵 담기면//바람 갑자기 불어와/새 떼 주르륵/흘러넘치고//파랑파랑/몸을 떠는/저 물가의 나무//, , /쓰러질 듯/커다란 종이컵

-종이컵전문

 

앞에 예로 든 시가 무생의 대상에서 생명을 보려는 시선이었다면 이 시는 나무-생명에서 무생을 보는 방식으로 시선이 자리바꿈했다. 벽이 멍이 든다고 해도 벽이 생명을 가진 대상이 되지 못했지만 이 시를 통해 종이컵은 이전의 무생의 종이컵과는 다른 종이컵이 된 것만 같다. 현실에서도 익숙한 대상인 종이컵의 담는다는 속성을 차용하여 나무와 거기에 와 앉는 새 떼의 형상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종이의 재료가 나무라는 것도 종이컵과 나무의 조합을 무리 없게 한다. 이것은 이미 살아있는 대상에서 출발한 상상이기에 조금 더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한 순간의 착란은 시가 보여주는 마법이며 빼놓을 수 없는 시적 재미다. 이런 순간에 세상은 스치듯 다른 세상의 얼굴을 보여주는데 무생물과 생물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순간의 재미라면 종이컵의 방식은 무척 유효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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