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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시집보내기 ㅣ 문학동네 동시집 37
류선열 지음, 김효은 그림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놀이는 여분의 것이고, 놀이는 여유가 있을 때, 자유 시간에 행해지는 것’(요한 호이징아, 『호모루덴스』, 까치, 1993)이라고 한다면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일’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오로지 놀이를 할 수 있는 자유 시간과 놀 공간은 꼭 필요하다. 아이들의 놀이는 아이들이 만드는 문화가 되는데, 노는 아이들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이들의 문화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 오늘도 아이들은 교실과 학원 강의실에서 나가 어둠 속으로 비척비척 시무룩하게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류선열의 동시집 『잠자리 시집보내기』는 아이들의 놀이를 빼앗은 어른들 보라고 나온 시집 같기만 하다. 나는 이 시집에 들어있는 그 때 그 시절을 온 몸으로 겪고 자란 아이였다. 지금도 「똑딱 할멈」처럼 뜨겁게 달궈진 돌멩이에 떨어진 물방울이 스며들며 사라져 가던 모습, 돌멩이의 온기, 귀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며 귓구멍이 시원해지던 느낌이 생생하다. 몸에 새겨진 일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더니 잠자리를 잡으려고 선 계집아이 정수리는 따갑고 잠자리 다리를 엄지와 검지로 잡았을 때 전해지던 그 격렬한 반항으로 손끝이 찌릿하다.
멀쩡한 잠자리 꽁지를 자르고 날개를 자르고 꽁지에 실을 묶어 기둥에 매달아 놓기도 하던 아이들은 잔인하고 나쁜 아이들이 아니었다. 강원도 ‘떼사공’을 짓궂게 놀려먹고, 앞서가는 친구를 도둑이라고 놀리며 그렇게 뭔가를 가져보고 잡아보고 장난치고 골려먹다가 어느 날 문득, 정말 문득 잠자리한테 미안해지는 순간이 닥친다. 그 때가 되어 아이는 더 이상 그런 놀이를 하지 않는다.
대상에 대한 미안함과 이해와 타자성이 생기기까지 아이들은 수많은 잠자리를 제물로 삼는다. 자연은 아이들에게 무한하게 당하면서 용서하고 참아내며 아이들을 길러내고 아이들은 싸우고 화해하면서 자라는 것이었다.
놀 시간, 놀 공간만큼이나 필요한 것은 놀이를 받아 주는 어른이다. 국수를 밀면 으레 ‘국수꼬리’를 널따랗게 남겨주던 엄마의 마음, 그걸 태우지 않고 고소하게 구워주기 위해 몸을 굽혀 입으로 바람 조절을 하던 아버지의 마음이 필요하다.
형도 없고 엄마도 일하러 간 사이 혼자 남은 심심한 아이에게는 할머니 집에 가는 것 자체가 놀이고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신랑신부도 되고 아기도 되며 아프기도 하고 고쳐주기도 하는데(「우리들의 소꿉놀이」) ‘호랑이 사냥꾼’ 쯤이야.
“메주 냄새 굼뜨는 할머니 방을 열면/여덟 폭 병풍에 호랑이 한 마리/나는 다짜고짜 그놈을 쏘아요./그러면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호랑이를 잡아 주셨으니 곶감을 드려야지.”(「호랑이 사냥」)라고 말하는 할머니가 있어서 이 아이의 놀이는 사냥 의식으로 완성 된다. 이 아이가 느낄 성취감과 뿌듯함은 서사에 힘입어 시대를 넘어선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어쩌면 요즘 아이들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일단 요즘 아이들의 경험 밖, 지나간 시간과 공간이며 역사 혹은 신화로 배우지도 못할 소소한 일상이다. 그것을 이야기로 들려주기 때문에 가난, 배고픔, 누나를 잃은 ‘샛강아이’의 슬픔 같은 낯선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졌다.
“이 세상에서 아이들의 마음밭을 가꾸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믿는 어른들과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사랑할 줄 모르는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자.”고 다짐하며 이제 첫 시집을 묶어냈을 시인의 이 말은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다행히 시집 복간으로 우리는 한 때 놀이-문화의 창작자였던 아이들에게서 놀이를 빼앗은 어른이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이 시집을 읽을 아이들이 있다면 그들이 놀이의 주인이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어른을 향해 눈을 흘길지도 모르겠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사랑할 줄 모른 어른으로서 그 눈총을 따갑게 받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