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연히 박주원이 기타를 치고 정엽이 노래를 부른 <빈대떡신사>를 들었다. 차 안에서 한 번 듣고 말았지만 원곡을 알고 다시 들어본 노래는 동화적이다. 빈대떡신사의 허영과 사치를 빠른 기타리듬과 물방울 같은 가수의 목소리로 노래 부르니 비극적 요소는 사라지고 가벼운 노래가 된다. 노랫말(내용)은 그대로 두고 가수와 악기(문체)가 바뀌니 새로운 <빈대떡신사>가 되었다.

이 노래를 새롭게 편곡한 작가는 이 노래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 노래가 만들어지고 불렸던 몇 십 년 전이나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의 효용성이었을까, 그냥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오로지 새로 불러보고 싶었던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깔끔하고 동요적이며 가벼워진 <빈대떡신사>의  신사가 여전히 귀엽고 안쓰럽다. 가진 것 없으면서 허세와 허영으로 옷을 빼입고 장날 마다 외출을 했던 친정 아버지가 바로 그 신사였고 지금도 그런 쓸쓸한 가장(家長)이 있을테니.

그러니까 내가 이 새로운 <빈대떡신사>를 들으면서 감응한 것은 내용의 변함없음에 조금 더 가까운 듯하다. 현란한 기타 리듬과 가볍고 맑은 가수의 목소리가 전체적인 분위기를 가볍게 해준 것이지만 쓸쓸함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문체가 중요하다는 말은 잘못되었는가. 아닐 것이다. 이 노래의 원곡을 모르는 현재의 누군가에게 이 노래는 원곡이 될테니, 오히려 이 노래는 현재적 문체로 새로 탄생한 노래일 것이다. 말하자면 무엇을 쓰는가와 어떻게 쓰는가는 늘 함께 중요하다.

어떻게에 해당하는 문체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황정은은 이 문체를 낯설게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척하기가 될 수도 있다.)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여러 가지가 낯설다.

제목과 글이 만나지 않아 낯설다.

고모리라는 지명이 낯설다.

여장 남자가 낯설고 앨리시어라는 이름도 낯설다.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있는 어떤 상태, 누군가는 미치는() 시간, 누군가는 꿈꾸는()시간, 누군가는 무언가에 홀리는() 순간 등을 말하는 씨 발의 상태라는 말도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낯선 명명이다.

문체를 걷어낸 이 소설의 뼈대는 익숙하다. 월남한 가장, 첩이 된 젊은 여자, 그 여자의 불행한 과거, 자식들을 향한 분풀이, 정화조 설치를 반대하는 이기심과 돈 앞에 무너지는 양심, 부모의 학대, 어이없는 동생의 죽음, 형의 가출 등은 낯익은 풍경들이다.

황정은은 이 낯익은 풍경들에게 낯선 이름을 주고, 최대한 감정을 걷어 들인 상태에서 차갑게 바라본다. 황량한 들판에서 서서히 풍화되어가는 개의 시간을 묘사하는 장면은 서늘하다.

감정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도 한 듯 아버지는 순수하게 개인적이며 엄마는 순수하게 악하며 동생은 순수하게 모자라며 앨리시어는 순수하게 객관적이다. 감정의 뒤섞임도 없고 갈등의 뒤섞임도 없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은 원시적이다.

이러한 상태를 작가는 묘사와 서술을 거둔 말끔한 문장으로 처리한다. 감정적인 묘사와 서술은 없고 대상을 바라보는 거리 또한 감정이 전혀 없이 냉정하게 처리한다.

비명이나 한탄, 원망, 자학, 애처로움 등이 끼어들어 줄줄 흘러넘쳐야 할 감정을 다 잘라버리자 공간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이 소설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읽게 되고 다 읽는 데 오래 걸렸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그 공간을 독자가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사건을 바라보게 될 때의 그 서늘함이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이런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 이 소설의 문체일 것이다.

그런데 내게 문제는 늘 그 다음이다.

이렇게 서늘하게 보고 나서 무엇이 남았는가 보면 그 무엇이 보이지 않는다. 황정은 식으로 소설을 읽는 동안 -의 상태에 있다가 그 시간이 끝나고 만 것 같은. 그게 다여도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 이후를 늘 바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독서 취향일 뿐이다.

시집은 다시 꺼내보고, 다시 책꽂이에 꽂아도 소설은 그런 행동을 반복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독서 취향일 뿐.

노래를 듣는 순간 그 흥에 젖는 것이 노래의 몫이듯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어떤 상태에 빠질 수 있다면 그것이 이 소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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