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
안도현 / 열림원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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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은 발신자와 수신자가 한 사람과 한 사람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청소년의 것인가, 어린이의 것인가 하는 범주 구분은 그래서 크게 쓸모 있지 않다. 그간 어른인 발신자가 청소년과 어린이를 향해 띄우는 이야기가 눈높이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종 난처한 일이 생기고는 했다. 그때의 수신자는 어린이 대부분, 청소년 대부분이었다. 범주를 정하는 일은 발신자의 운신의 폭을 좁혀 오히려 상상력을 방해했다.

그래서 청소년의 것은 청소년이 써야한다는 말은 틀렸다. 우선 그들의 경험과 사고의 폭이다. 문학에 깊이가 생길 수 없다. 또한 그들이 표현하는 우리말의 수준이다. 문학은 언어로 구축되는 예술이다. 언어를 다루는 것은 문학의 기본이다. 청소년들이 다루는 언어의 양과 질은 문학 언어로 다져진 시인과 소설가 보다 나을 수가 없다. 미숙한 발신자는 위험하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미숙한 문학이 되고 마는 것이다. 천재가 있어야 하는 이유다.

문학은 이 두 가지가 있고 나서야 문학이 된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작은 패를 달고 있는 <짜장면>을 읽는 동안 글은 그가 누구든 단 한 사람의 독자를 만나러 여행을 시작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삐삐 시대에 열일곱에서 열여덟을 보낸 가출 소년이 인생이란 짬뽕 국물을 숟가락으로 함께 떠먹는 일이란 것을 알게 되고 그 애와 내가 수없이 만났기 때문에 겨울이 지나갔다.”고 주관적이 되며, “양파는 가슴속에 아무것도 감추고 있지 않으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짜장면 집 배달부로 일하는 동안 발견하며 이제 한 꺼풀 허물을 벗는 게 내가 이해한 이야기의 형상이다.

불안한 십대의 표상으로 등장한 오토바이와 두 번의 목숨과 바꾼 사고는 흔히 흔들리는 십대의 모습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들은 선생이나 아버지, 짜장면 집 주방장 같은 억압에 반항하되 자주 어설프고 결국 압도당하며 반성문을 쓰는 것으로 타협한다.

이 동화를 읽으면서 떠 오른 몇 가지 상념들.

집이란 어른이 되어 한번 떠나면 더 이상 그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런데 왜 그렇게 그 집을 떠나고 싶었을까.

미술 선생에게 반항했던 소년처럼 나는 누군가에게 반항을 해본 적이 있던가.

내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는가, 아버지와 내가 오로지 발신자와 수신자가 되어 눈을 마주쳤다고 느꼈던 것을 떠올려 보았더니 놀라워라, 몇 가지가 안 된다는 것.

글을 읽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재미가 있겠지만 문장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는 것. 좋은 문장과 마주쳤을 때 내가 느끼는 기분은 흔히들 말하는 명품과 만났을 때 느끼는 그 기분과 같겠지.

이 동화를 읽고나니 속없는 양파의 하얀 살을 씹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알싸하지만 달고 물이 많아 시원해지는, 그 맛마저 쉽게 사라져 버리는 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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