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 기한 친구 문지아이들
박수진 지음, 정문주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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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수진은 장애인을 약자로 보고 보호해()야 한다는 관습화된 통념을 흔들되 가능하면 무겁지 않고 진지하지 않게 말해보기로 한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자이며 보호와 관리, 시혜의 대상이라는 통념 속에 갇힌 장애인의 태도와 그들을 그런 통념 속에 가둔 비장애인의 시선 둘 다 교정해야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지적 장애가 있는 민재와 윤지, 은지, 신체적 장애가 있는 수호와 유리가 약간의 망설임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자신의 장애를 약자의 기호로 내세우지 않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보인 이런 태도는 꽤 오래 전부터 교정되어 온 것이어서 비로소 생긴 사건은 아니다.

박수진이 좀 더 신중하게 교정하는 것은 비장애인의 태도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민재에게 지면 창피하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말이 그간의 통념이었다면 낯선 곳에서 긴장한 찬이가 나도 모르게 민재 노래를 따라 했다. 낯선 곳에서 듣는 민재 노래 때문에 긴장이 풀(1등 앞선, 27)”리는 듯한 감정을 느끼는 지점은 적어도 찬이가 갖고 있던 통념을 흔들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찬이의 심경에서 나또한 탁 불이 켜지는 듯한 감정을 느꼈고 찬(비장애인)이가 민재(장애인) 때문에 피해를 봤던 것보다 민재가 훨씬 큰 강도의 피해를 입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더 중요하다. 아픈 사람이 참는 것보다 아프지 않은 사람이 참는 게 더 쉬운데도 말이다. 찬이가 느낀 저 감정의 경험은 더 많아져야 한다.

비슷한 지점인데 휠체어를 탄 수호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나 걱정(이 걱정은 비장애인이 겪는 불편으로 생기는 짜증 쪽에 더 가깝다)이 아니라 휠체어를 탄 수호가 지하철을 타고 내릴 시간을 기다려준다거나 떨어진 교통 카드를 주워 주는 꼬마의 아주 평범한 관심, 화장실 이용을 돕는 할아버지의 약간의 인정이면 충분하다. 이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가 아닌가.

또 다리가 자유롭지 않다는 유리의 장애를 지우고 대신 센 팔 힘에 주목한 정다정의 태도는 얼마나 당연한가.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장애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꽤 많이 구부러져 있다는 것이다. 유쾌한 정다정과 부루퉁해 보이지만 결코 용기 없는 아이는 아니었던 유리의 태도 때문에 혼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억지로 반성하고 죄책감에 젖게 하는 게 아니라 사과하고 바로 잡을 기회가 된 것 같아 다행이다. 동생을 위한 정신지체인 누나 은지의 눈물겨운 칭찬 통장 소동도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자. 정다정과 유리가 보여 준 유쾌함은 다운증후를 앓고 있는 윤지를 좋아하는 정우와 그런 정우를 좋아하는 하경의 삼각관계로 이어진다. 대놓고 정우를 좋아하는 윤지나 그런 윤지가 재밌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정우 사이에 다운 증후라는 질병은 감기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정우가 감기 같은 것으로 본 것 같은 윤지의 질병을 마치 다운증후를 앓는 사람이 사랑받는다는 게 가능한가 의아하고 놀라워하는 하경의 반응은 익숙한 다수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하여 박수진이 다룬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도를 통해 내가 얻은 것은 장애인이 약자가 아니라 소수라는 것이다. 소수가 비정상이 아님은 당연하다. 정상성이 다수를 옳거나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라면 이것은 굉장히 허약한 논리임에 틀림없다. 이 작품집을 통해 우리 사회가 비장애인인 다수를 중심으로 구축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환기하는 일은 중요하다.

결국 우리가 그의 작품을 읽으며 취해야 하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시선과 태도를 교정하고 수정하는 일이다. 무언가를 바꾸는 일을 아픈 사람이 아니라 아프지 않은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 모두 언제나 아플 수 있는 연약한 몸들이라는 사실은 예정된 사실이다. 아프고 나서야 깨닫는 것은 늦고 이미 아픈 사람들이 온 몸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을 외면하는 것은 외눈박이를 자처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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