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의 힘 - 조직심리학이 밝혀낸 현명한 선택과 협력을 이끄는 핵심 도구
박귀현 지음 / 심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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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많은 조직들은, "과거의 방식" 더이상 현재와 미래에 통하지 않으리라는 터프한 예상과 관점에 이제는 자발적으로 동조하는 듯합니다. "무슨 소리야, 이 잘되던 걸 왜 갖다버려?" 같은 반발은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튀어나오지 않습니다. 방향성과 비전에 대해선 합의가 이뤄졌는데, 현장에서 문제의 절박함에 걸맞는 실천이 이행되는지는 또 별개 문제입니다. 개인의 의식 구조에 비유하자면, "머리로는 충분히 납득했으나 몸에 습관이 배이지 않았고, 가슴으로는 여전히 거부감이 남은" 상태에 가깝습니다. 머리와 손발이 각각 따로 노는 셈이니, 결국 각성도 건성에 머묾이나 마찬가지라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분은 어학 학습을 두고선 "국영수가 아니라 체육이 되어야 한다"고도 말하던데, 사실 아무리 유용한 방침, 이론이라 해도 학습 단계에 머물면 안 됩니다. 말 그대로 몸에 밴 "체육" 단계에 이르러야 구체적인 성과가 나옵니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입니다. 

혁신을 구체적 방안까지 마련해 놓은 조직도 왜 현장에서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법과 진단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고안한 "도미노론"에 의해 설명합니다. 미국의 경영서, 자계서 저자들이 취하는 태도가 흔히 그렇습니다만, 마인드셋을 바꿔 놓을 패러다임에 대한 설파는 최근 자제하는 모습입니다. "당장 당신의 일상에서 무엇이라도 바꿔 놓을 '방법론'"을 제시하려 애쓰는 게 시장의 대세이며, 이것이야말로 독서 시장에 임하는 유능한 기업가(저자 포함)의 혁신 그 실천이겠기 때문입니다. 혁신을 말하는 저서가 자신은 구태의연한 장르적 양식에 기댄다면 그만큼 큰 아이러니가 또 없겠지요. 혁신은 구색이 아닌 "명실상부"라야 설득력이 있고, 실제적 효용을 담보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타성을 일거에 제거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적용시킬 수 있는가? 저자는 조직 안의 비효율 요소를 일신할, "첫번째 도미노"를 찾아 "바른 방향"으로 넘어뜨리는 게 중요하다고 합니다. 첫째 도미노를 찾는 것도 쉽지 않고, 찾은 도미노가 넘어져야 할 바른 방향을 알아내는 것은 그 다음으로 중요하고 어렵습니다. 어느 조직, 현장에나 이런 첫번째 도미노 같은 요소, 장애물이 존재하고, 눈밝은 경영진이 반드시 이를 찾아 과감한 혁신의 첫발을 떼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저자는 "참된 의미의 혁신"과 꼭 구별되어야 할 것이 "기존 코스에 새 메뉴 하나의 추가"라고 지적합니다. 이미 완성도 높게 꾸려진 코스에 사실 새 메뉴를 단 하나라도 전체와 조화를 이루게, 혹은 미식가의 입맛을 새로 자극하게끔 추가하기도 결코 쉬운 과업이 아닙니다. 헌데 기존 코스가 변화를 거부하며 테이블을 잔뜩 장악하고 있는 한, 까짓 새 메뉴 하나가 작은 자리를 차지해봤자 참석자의 눈길도 끌기 쉽지 않습니다. 기존의 판을 송두리째 바꾸지 않고는, 어렵사리 이룬 새 메뉴의 인트로덕션도 대양에 빠뜨려진 잉크 한 방울처럼 무의미해지기 일쑤이며, 이런 전체적 구조에의 타성적 흡수야말로 모든 혁신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거대한, 그리고 일반적인 함정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엄밀히 말해 혁신이 전무한 조직은 없으며, 다만 혁신의 반가운 새싹이 무심한 분위기에 매몰되고 마는 게 진짜 문제라는 겁니다. 

"추가된 혁신"은 차라리 "없는 혁신"과 결과에 있어 다를 바 없으니, 타성을 이루는 거대한 판을 통째 엎는 "결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예컨대 삼성이 오늘날의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서기까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벤트는 바로 이건희 회장의 "불량품 화형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도, "기존의 관습과 패러다임은 격변하는 현실 앞에 아무 쓸모 없음"을, 모든 조직원이 지켜보는 앞에 거대한 선포식을 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는데, 이게 바로 20여년전 이건희 회장이 내린 결단과 다를 바 전혀 없습니다. 조직원들의 주의를 확실히 끌고, 절박한 경각심을 고취한 후, 조직 전체가 무슨 방향으로 나갈지 분명히 정하는 게 CEO 결단의 핵심 의의라는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건 첫걸음을 확실히 떼는 "결정"이며, 이 결정에서 혁신의 방향성이 정해집니다. 이 방향이라는 게 "모든 타성을 일소할, 도미노가 넘어질 바른 방향"임은 이미 앞에서 지적되었습니다. 이처럼 올바른 방향이 정해지고서도, 도미노 게임을 해 본 분들은 알겠지만 마디마디에 어떤 결절이 발생하지 않아야 연쇄 전도가 효과적으로 이뤄지죠. 관리자는 첫 도미노가 제대로 넘어진 후에도, 바른 방향성이 지속되도록 "통제"가 효과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면서, 이의 적절한 사례를 여러 기업들의 현장 관리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독자에게 알기 쉽게 편집하여 들려줍니다. 이를 두고 "깜빡이(블링커)"와 "룸미러"의 기능에 간명하게 비유하는 데서 저자의 재치가 드러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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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번째 세계의 태임이 텔레포터
남유하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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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서 묵직한 생각의 무게가 머리를 누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162번째의 세계... 

표지에도 나와 있듯이, 이 소설은 미래를 배경으로 해서 숨가쁘게 전개되는 SF 소설입니다. SF 장르라고 해도, 해외에서는 이미 나올 것이 다 나온 까닭에, 여간 기발하게 사건이 펼치지고 주제가 제시되지 않으면 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죠. 그런데 이 작품은, 우리 한국 작가의 솜씨인데도(인데도?) 대단히 참신한 내용과 한국 독자들에게 잘 어필하는 감각으로 쓰여진 게 놀라웠습니다. 

우선 미래가 배경이지만,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닌 듯합니다. 각종 테크놀로지가 잘 발달한 점은 다른 SF의 그것과 흡사하지만, 제가 느끼기로는 "현재 동시대인의 입장에서 좀 나와 줬으면" 하는 기술 문명 중에서, "현재의 기술 발전 수준으로 미루어 가장 출현할 가능성이 높은 것만" 골라 가면서 등장한다는 게 가장 주목할 만합니다. 이를테면, 파워 수트(영화 "아이언맨"에 나오는 것과 거의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전자 결제 시스템(지금과는 비교 안 될 만큼 발전한 모습 - 이 소설이 상정하는 미래 역시,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갈등이 첨예하게 벌어지고, 그 와중에서도 자본주의는 그 효율을 극단까지 추구하는 속성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시선 스캐너(예를 들어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하체에 시선만 줘도 근처 방법 시스템 단말에서 경고가 나오고, 상황을 봐서 바로 공권력이 출동하는 방식입니다), 장기 손상 환자를 위한 이식 수술 기술(역시 돈 없으면 혜택을 못 받는다는 점에서 디스토피아적 요소입니다), 그리고 수소 연료 배터리 등입니다. 

제가 감탄한 건, 설정의 현실성이었습니다. SF가 판타지와 구별되는 지점은, 얼마나 현재, 독자와 작가가 공유하는 현재와 밀접한 연계, 맥락을 지니고 있느냐입니다. 아무리 고도로 발달한 기술 문명, 그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가 펼쳐지더라도, 이제는 그런 풍성한 상상만으로는 독자의 관심을 끌기 어렵습니다. "현재와 밀접하게 연결된 미래의 기술"만을 소재로 해서도 충분히 이야기 하나가 나올 만큼, 미래를 향한 전망의 시각도 다양해지고 도구(tool)도 넘쳐납니다. 과거에는 미래 기술 문명에 대해 이야기 좀 풀어 내는 것만으로도 희소한 재능으로 평가받았지만, 지금은 현재에 얼마나 적실한, 근접한 내러티브를 설계하느냐가 작가의 센스라고 하겠습니다. 작가 남유하씨는 우리의 세계가 바로 수십 년 후 고스란히 맞이할 수 있는 미래를 세심하게 고안하여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위에서 든 네 가지 놀라운 신기술이 그 예이고, 이 소설의 주제가 된 시간 여행을 둘러싼 그 모든 시스템이야 두말하면 잔소리겠습니다.  

격조 있는 SF는 현실과 사회상에 대한 풍자도 빼놓지 않습니다. H G 웰즈는 "타임 머신"에서, 계급투쟁과 빈부 갈등으로 인해 황폐화한 미래상을 충격적으로 형상화합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은 역시 한국인데요. 한국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 전반으로 확정된 것 같지만, 이 미래는 완전히 여성 중심으로 고착된 체제입니다. 저항은 주로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나는데, 사이버공간이라고는 해도 이미 인간 생활에서 중추적 비중을 차지한지 오래라, 현실에서 도로나 공공장소를 점유하고 벌어지는 시위, 혼란 못지 않게 사회에 부담을 주는 결과입니다. 해킹이나 시스템 에러 발생시 우리가 겪는 각종의 불편을 생각하면, 그리 먼 미래라고도 느껴지지 않는 설정입니다. 

일부 남성 위주의 세계관을 가진 분들이 반여성적 언명을 공공연히 표시하고, 여성부 등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하는 모습은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주변에서 목도하는 일입니다. 또, 짝을 찾지 못한 남성 중 일부가 동성애적 경향으로 흐른다든가 하는 현상(당사자들은 물론 이런 생각에 크게 반대하지만)도 마찬가지죠. 세대 갈등, 성별 대립, 계급 모순은 현재와 하나 다를 것 없고, 바로 이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탁월한 점입니다. "난자"를 둘러싼 이 소설의 주된 내러티브도 결국 모계 중심 사회의 모순에서 비롯했다는 암시에 이르러서는 고개가 숙여질 정도입니다. 그건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남성 우월주의가 얼마나 큰 모순을 지녔는지 우리에게 깨우치려는 의도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유머 코드는 철저히 현대 한국인의 그것에 맞추었지만, "장식체 말투" 등은 그닥 장식적으로 들리지 않았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경박한 반응과 표현이 나온다든가, 캐릭터들의 행태 변화가 큰 설득력이 없다든가 하는 점들이 아쉬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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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듯 가볍게 - 인생에서 여유를 찾는 당신에게 건네는 말
정우성 지음 / 북플레저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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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오늘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날이 되길 바라며 우리는 직장에서 가정에서 열심히 땀 흘려 뛰고 가족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작은 행복에 만족할 줄도 알고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내어 살갑게 대하기도 해야 하는데, 사는 게 워낙 힘들기도 하고 경쟁에서 뒤떨어지면 안 된다는 공연한 강박 때문에, 정작 소중한 것을 놓치는 게 아닌지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나는 아직 그(그녀)에 대한 감정이 남았습니다. 가능하면 그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서 같이 더 추억도 쌓아가고 알콩달콩 감정도 나눠 갔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그녀)의 반응은 냉랭합니다. 혹은 데면데면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변할 사람 같았으면 벌써 변했습니다.(p22)" 아마 나 역시, 이렇게 돌아서 버린 상대의 상태를 벌써 알고 있었겠습니다. 그런데도 미련을 놓지 않는 건, 나 혼자 아직 감정을 유지 중인 게 억울하기도 하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 뻔한 현실에 애써 눈을 감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내가 추해집니다. 손해 보고 물러난다는 생각으로 질척거리면 본인만 더 추해집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헤어짐이 정답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답은 간단할수록 그게 정답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오해가 있으면 조속히 풀어야 합니다.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의 파탄으로 이어지거나, 관계는 관계대로 붕괴하고 나 자신의 마음에도 큰 상처가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도 "가벼운 오해라면 적극적인 해명으로 풀어야 한다(p50)"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그게 심각한 오해라면, 그래서 말 몇 마디로 간단히 풀기 어렵거나 반대로 불화가 더 크게 번질 가능성까지 있다면 어떨까요? 이럴 때에는 그냥 아무 말도 말고 상대에게 시간을 주라고 합니다. 상대도 (최소한의 말이 통하는 이라면) 내가 왜 침묵을 지키는지 생각을 해 볼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며 저는, 제가 참 각박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다툼이 생기면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려고만 했지, 그의 감정이 아물고 난 뒤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할 여유를 한 번이라도 줘 볼 생각을 했던가? 이런 배려를 벗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게 중학생 때였으니 삶이 참 메마르지 않았던가 하고 말입니다. p137을 보면 똑같은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본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자는 애정 표현을 수시로 해 주라고 합니다(p86). 우리 한국인들은 구미 사람들에 비해 감정의 소통 기술이 서툰 면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고 돈을 많이 벌어도 내 주변에 날 진심으로 이해해 줄 사람이 하나도 안 남았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사랑한다는 진짜 내 감정을 제때 표현 못 해서 떠나간 이들을 두고 결국은 후회의 감정만 가득하다면 내 삶이 너무도 공허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사소한 것도 내가 아끼고 어루만지면 세상에 다시 없는 보석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원래 내가 다시 보기 힘든, 나에게 꼭 맞는 소중한 사람이었다면 그 회한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대체 뭣 때문에 망설입니까.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날 것 같은가요? 

사회 생활 하다 보면 내 생각을 딱부러지게 말하기 어려울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애매하게,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표현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들 합니다. 그런데 매사가 이런 식이면 결국 누구한테도 신뢰를  못 쌓을 수 있습니다. 듣기는 싫어도 저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지는 않다, 이런 믿음이 어느 순간 세평의 대세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어 속담에 "정직이 최상의 책략"이라는 말이 있죠. 책략과 정직은 서로 전혀 맞지 않는 관계인데도 말입니다. 최고단수의 속임수, 처세술은 아예 속과 겉이 같은 일관된 솔직함이라는 게, 사실 경험이 많이 쌓이고 쌓여야 이를 수 있는 깨달음 아니겠나 생각합니다.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의 연속입니다. 석가모니는 사고(四苦) 중 하나로(어쩌면, 으뜸가는 괴로움으로) 태어남을 꼽았습니다. 생명의 탄생은 무엇보다 큰 축복인데 그는 태어남이야말로 모든 고난의 시작이라고 갈파한 것입니다. 생이 그 시초점부터 괴로움이라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이런저런 괴로움은 딱히 억울할 것도 한맺힐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좋은 날이 더 많지 않았냐고 저자는 말합니다. 불평불만으로 이 아깝고 유한한 생을 무익하게 채우기보다는 희망과 긍정으로 마음을 다듬고 주변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게, 소중한 생을 부여받은 인간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한 세상 살다 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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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 - 서울 거리를 걷고 싶어 특서 청소년문학 35
김영리 지음 / 특별한서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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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비범하면서도 우리가 뭔가 공감을 보낼 수 있는 매력 있는 젊은이입니다. 이른바 "용도 불명"으로 분류된 개체이기에 저 척박한 환경에서 어떤 난제를 척척 해결하는 지배계급에 속할 자격이 없죠. 다만 탄생시에 일정 배려를 받았기에 노화가 느리고(뒤에 나오지만 아마도 시험관 시술을 통해 이 모든 장점이 유전자 조작으로 구현, 주입되는 듯), 이 점에서 썸타는 사이인 여자와는 처지가 다릅니다. 또 AI인 아테나는 주인공을 두고 "권위 존중 면에서 낮은 점수를 주"었는데, 시스템에 대해 불평불만으로 가득하거나 확 뒤집어버려야 한다는 식(이른바 반역자 기질. p129)까지는 아니지만 은근 반항심을 품고 사는 우리네 평범한 장삼이사들의 정서와 아주 닮았기 때문에 뭔가 이런 개성도 마음에 듭니다. 

이 서울에서는 모호한 말만을 씁니다. 나이가 꽤 많은 닥터 입장에서는 현재의 프랑스나 유럽 사회 역시, 마치 작중 화성의 미래처럼 모국어를 다들 잊어가며 영어를 만국 공용어처럼 쓰는 현실이 SF나 마찬가지로 여겨질지 모릅니다. 이 와중에 타인에 공감 잘하고 성대모사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 롭 같은 이가 미래에선 별난 재능(p114)의 소유자로, 이처럼 특별한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주목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긴 노래 춤에 능한 재능이 인류 역사상 우리 시대처럼 높은 대우를 받았던 적이 없었듯이 말입니다. 

"용도불명(p189)" 화성 콜로니에서는 인공지능의 발명 후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데, 바로 롭처럼 어정쩡한 사람들이 대거 "용도불명"으로 분류된 것, 다른 하나는 로봇의 발전 때문에 힘 쓰는 일을 하던 남자들의 역할이 크게 축소되어 사회에서 여성들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점입니다. 아니나다를까 이 소설은 남자 주인공이 상급자에게 받은 성적 제안을 거절하자 불이익을 받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요즘도 근절되지 않은, 군대 등 폐쇄적인 조직 안에서 빈발하는 sex harassment가 역패턴으로 벌어지는 셈입니다. 용도불명의 다른 말은 바로 "잉여인간(p218, p257)"입니다. 

이 소설은 중반부터 마치 H G 웰즈의 <타임머신>을 보듯, 핵전쟁 후 폐허가 된 지구(="푸른 행성")에 임무를 띠고 귀환(?)한 롭이 에로스 섬, 또 불평등의 섬에서 목도한 갖가지 기이한(그러나 익숙한) 사회상을 보고 느끼게 된 바를 통해 일종의 문명 비판을 시도합니다. 에로스 섬은 아름다운 청춘남녀가 일종의 지상낙원을 이루고 사는 구역, 장애가 있거나 폴리아모리를 거부하거나 늙고 병든 이들이 거주하는 구역 둥로 나뉩니다. 봉 소바주(bon sauvage)라는 낭만 가득한 이데아가 바로 이들을 두고 이르는 말이겠습니다.   

다른 섬은 그렇지 않아서 마치 우리 현대인들이 일구고 사는 사회와 비슷합니다. 쓸모가 떨어지는 개체는 부적응자 무능력자로 찍혀 서서히 도태되며,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며 불평등이 당연한 이치로 간주되는 곳. 영리한 롭은 이 섬이 바로 자신의 원소속 공동체(화성 콜로니)와 조금도 다름없는 원리에 의해 움직임을 바로 통찰해 냅니다. 이 두 섬은 남자가 여자를 차지하는(분배하는) 방식이 극과 극이지만, 화성에서 이미 여성이 남성에 대해 우위를 차지해버린 상황과 대조된다는 점에서는 닮았습니다. "능력 위주의 사회(p272)" 

그녀는 콜로니에서야 기세등등하게 지내던 엘리트였겠으나 이곳 서울에서 포로가 된 후 어느 전사에게 성노리개, 기껏해야 출산 도구 이상의 취급을 못 받는 비참한 신세입니다. 어느 남성(열등한 종족인) 밑에서 종속적인 대우를 받는 자체가 참을 수 없지 않았겠습니까. 요령 좋은 주인공 롭이 순식간에 쥘마에 대해 상하 주종 관계를 세우는 장면이 우스우면서도 통쾌했습니다 ㅋ  이런 정직하지 못하고 속물스러운 여자는 그런 비겁한 술수에 당해도 마땅하다고나 할까요. 

스케일이 크고 기술적 미장센이 꼼꼼하면서도 묵직하게 문명 비판을 담았으며 우리 독자들이 언제나 좋아라하는 선남선녀들의 로맨스까지 펼쳐져서 너무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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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아이가 함께하는 사춘기 수업 - 방황하는 내 아이 속마음 읽기
정철모.채혜경 지음 / 청년정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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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는 당황스럽겠지만 반항이나 양가성은 자립을 위해 필요한 발달상의 통과점이다(p23)." 참 의미심장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사춘기는 아이에게 위험하기도 하지만, 평생 귀여운 아이로 부모 곁에 머물 수 없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겪어야 하며 그래야먄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책에서는 모든 이상행동이 치료대상인 건 아니고, 자폐 스펙트럼과 무관하게 그저 사춘기라서 보이는 증상일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설명은 과연 이 분야 전문가다운 친절하고 적확한 설명이며, 한편으로 자폐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사춘기 증상까지 같이 받아내고 다뤄야 하는 그 부모님들이 얼마나 어려움이 크실까 하는 생각도 새삼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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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는 꼭 또래가 아니어도, 친구를 하나 두게 하라고 조언합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인 한 아이가 나오는데 당연히 이런 아이는 교우관계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동네 모형가게에 다니면서 단골 손님들과 친해졌다고 합니다. 그 손님들도 순전히 같은 취미로 모인 이들이니 괜히 어떤 병을 문제삼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다. 다만 이는 일본의 사례라서 그렇고, 우리 같으면 순전히 동호회에서 만난 이들조차 취미 외적인 이슈, 사회적 지위라든가 재산 같은 걸 공연히 문제 삼는 못된 이들이 있고 거기서 받은 스트레스로 자살한 사례도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조심할 부분이 있다는 점 언급하고 싶고, 다만 친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주위에 부모뿐이고 다른 친구(관계)를 못 만든 아이는 이걸로 평생 콤플렉스가 생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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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식은 우리들 일반인들이 스몰스텝 위주로 잘게 쪼개어 난관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 p33에서는 다소 의외랄까, 탑다운 방식도 병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아니 소소하고 작은 걸 아직 못하는데 더 상위단계 방법을 어떻게 가르친단 말인가, 무엇보다 ABA에 안 어울리지 않나 싶지만 저자는 그게 바로 우리들 비전문가의 오해라고 지적합니다. 아이에 따라서 특정 애로가 아주 안 넘어가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 단계 때문에 계속 거기 머물 수는 없습니다. 스몰스텝에서 살살 위로 높여나가는(p33. 높혀나가는 x) 방식을 바텀업이라 부른다면, 탑다운은 지금 당장 아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마치 편법처럼 시원시원하게 가능한 단계부터 먼저 싹싹 찾아 목표, 목표부터 일단 달성하고 보는 방식입니다. 권위자의 가르침을, 나의 상식보다 앞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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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사춘기가 아니라 해도 자기 통제의 힘을 키우는 단계가 특히 청소년에게는 중요한 것 같습니다. p40에는 네 가지 방법이 나오는데 첫째 강화를 받지 않아도 기다린다입니다. 강화는 심리학 개념이고 일정한 보상을 통해 특정 행동을 유도하는 걸 가리키죠. 이게 사실 성숙한 인간이 되고 안 되고의 결정적 갈림길인 것 같습니다. 미숙한 인간은 장기적으로 보아 A가 분명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보상이 필요해요!"라면서 당장 무슨 대가가 주어지길 기다리고, 떼를 씁니다. 이 단계가 지독하게 안 넘어지는 유형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명문대 진학에 성공하는 유형은 머리가 딱히 좋다거나 하기보다, 순간의 유혹과 편해지고 싶은 충동을 이기느냐 아니냐에 더 크게 의존합니다. 이 고비를 못 넘는 유형은 커서도 공무원 시험이건 한능검이건 토익이건 절대 통과를 못하고 평생 그렇게 삽니다. 청소년기를 어떻게 보냈는지가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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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행동계약서를 작성하고 이것이 남 좋으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과정이며, 약속을 지키는 인간이 얼마나 품위 있고 멋진 인간인지 스스로에게 확신을 시키는 게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책에서는 가르칩니다. 또 잘못이 있으면 엄마아빠한테 매를 맞아서 고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 스스로 수정하는 게 핵심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이 단계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미숙하고 어리석은 반 범죄자로 사느냐 조직에서 회사에서 존중 받는 사회인이 되느냐가 갈린다는 점을 깨닫게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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