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번째 세계의 태임이 텔레포터
남유하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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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서 묵직한 생각의 무게가 머리를 누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162번째의 세계... 

표지에도 나와 있듯이, 이 소설은 미래를 배경으로 해서 숨가쁘게 전개되는 SF 소설입니다. SF 장르라고 해도, 해외에서는 이미 나올 것이 다 나온 까닭에, 여간 기발하게 사건이 펼치지고 주제가 제시되지 않으면 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죠. 그런데 이 작품은, 우리 한국 작가의 솜씨인데도(인데도?) 대단히 참신한 내용과 한국 독자들에게 잘 어필하는 감각으로 쓰여진 게 놀라웠습니다. 

우선 미래가 배경이지만,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닌 듯합니다. 각종 테크놀로지가 잘 발달한 점은 다른 SF의 그것과 흡사하지만, 제가 느끼기로는 "현재 동시대인의 입장에서 좀 나와 줬으면" 하는 기술 문명 중에서, "현재의 기술 발전 수준으로 미루어 가장 출현할 가능성이 높은 것만" 골라 가면서 등장한다는 게 가장 주목할 만합니다. 이를테면, 파워 수트(영화 "아이언맨"에 나오는 것과 거의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전자 결제 시스템(지금과는 비교 안 될 만큼 발전한 모습 - 이 소설이 상정하는 미래 역시,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갈등이 첨예하게 벌어지고, 그 와중에서도 자본주의는 그 효율을 극단까지 추구하는 속성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시선 스캐너(예를 들어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하체에 시선만 줘도 근처 방법 시스템 단말에서 경고가 나오고, 상황을 봐서 바로 공권력이 출동하는 방식입니다), 장기 손상 환자를 위한 이식 수술 기술(역시 돈 없으면 혜택을 못 받는다는 점에서 디스토피아적 요소입니다), 그리고 수소 연료 배터리 등입니다. 

제가 감탄한 건, 설정의 현실성이었습니다. SF가 판타지와 구별되는 지점은, 얼마나 현재, 독자와 작가가 공유하는 현재와 밀접한 연계, 맥락을 지니고 있느냐입니다. 아무리 고도로 발달한 기술 문명, 그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가 펼쳐지더라도, 이제는 그런 풍성한 상상만으로는 독자의 관심을 끌기 어렵습니다. "현재와 밀접하게 연결된 미래의 기술"만을 소재로 해서도 충분히 이야기 하나가 나올 만큼, 미래를 향한 전망의 시각도 다양해지고 도구(tool)도 넘쳐납니다. 과거에는 미래 기술 문명에 대해 이야기 좀 풀어 내는 것만으로도 희소한 재능으로 평가받았지만, 지금은 현재에 얼마나 적실한, 근접한 내러티브를 설계하느냐가 작가의 센스라고 하겠습니다. 작가 남유하씨는 우리의 세계가 바로 수십 년 후 고스란히 맞이할 수 있는 미래를 세심하게 고안하여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위에서 든 네 가지 놀라운 신기술이 그 예이고, 이 소설의 주제가 된 시간 여행을 둘러싼 그 모든 시스템이야 두말하면 잔소리겠습니다.  

격조 있는 SF는 현실과 사회상에 대한 풍자도 빼놓지 않습니다. H G 웰즈는 "타임 머신"에서, 계급투쟁과 빈부 갈등으로 인해 황폐화한 미래상을 충격적으로 형상화합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은 역시 한국인데요. 한국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 전반으로 확정된 것 같지만, 이 미래는 완전히 여성 중심으로 고착된 체제입니다. 저항은 주로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나는데, 사이버공간이라고는 해도 이미 인간 생활에서 중추적 비중을 차지한지 오래라, 현실에서 도로나 공공장소를 점유하고 벌어지는 시위, 혼란 못지 않게 사회에 부담을 주는 결과입니다. 해킹이나 시스템 에러 발생시 우리가 겪는 각종의 불편을 생각하면, 그리 먼 미래라고도 느껴지지 않는 설정입니다. 

일부 남성 위주의 세계관을 가진 분들이 반여성적 언명을 공공연히 표시하고, 여성부 등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하는 모습은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주변에서 목도하는 일입니다. 또, 짝을 찾지 못한 남성 중 일부가 동성애적 경향으로 흐른다든가 하는 현상(당사자들은 물론 이런 생각에 크게 반대하지만)도 마찬가지죠. 세대 갈등, 성별 대립, 계급 모순은 현재와 하나 다를 것 없고, 바로 이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탁월한 점입니다. "난자"를 둘러싼 이 소설의 주된 내러티브도 결국 모계 중심 사회의 모순에서 비롯했다는 암시에 이르러서는 고개가 숙여질 정도입니다. 그건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남성 우월주의가 얼마나 큰 모순을 지녔는지 우리에게 깨우치려는 의도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유머 코드는 철저히 현대 한국인의 그것에 맞추었지만, "장식체 말투" 등은 그닥 장식적으로 들리지 않았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경박한 반응과 표현이 나온다든가, 캐릭터들의 행태 변화가 큰 설득력이 없다든가 하는 점들이 아쉬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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