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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 - 서울 거리를 걷고 싶어 ㅣ 특서 청소년문학 35
김영리 지음 / 특별한서재 / 2023년 11월
평점 :
주인공은 비범하면서도 우리가 뭔가 공감을 보낼 수 있는 매력 있는 젊은이입니다. 이른바 "용도 불명"으로 분류된 개체이기에 저 척박한 환경에서 어떤 난제를 척척 해결하는 지배계급에 속할 자격이 없죠. 다만 탄생시에 일정 배려를 받았기에 노화가 느리고(뒤에 나오지만 아마도 시험관 시술을 통해 이 모든 장점이 유전자 조작으로 구현, 주입되는 듯), 이 점에서 썸타는 사이인 여자와는 처지가 다릅니다. 또 AI인 아테나는 주인공을 두고 "권위 존중 면에서 낮은 점수를 주"었는데, 시스템에 대해 불평불만으로 가득하거나 확 뒤집어버려야 한다는 식(이른바 반역자 기질. p129)까지는 아니지만 은근 반항심을 품고 사는 우리네 평범한 장삼이사들의 정서와 아주 닮았기 때문에 뭔가 이런 개성도 마음에 듭니다.
이 서울에서는 모호한 말만을 씁니다. 나이가 꽤 많은 닥터 입장에서는 현재의 프랑스나 유럽 사회 역시, 마치 작중 화성의 미래처럼 모국어를 다들 잊어가며 영어를 만국 공용어처럼 쓰는 현실이 SF나 마찬가지로 여겨질지 모릅니다. 이 와중에 타인에 공감 잘하고 성대모사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 롭 같은 이가 미래에선 별난 재능(p114)의 소유자로, 이처럼 특별한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주목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긴 노래 춤에 능한 재능이 인류 역사상 우리 시대처럼 높은 대우를 받았던 적이 없었듯이 말입니다.
"용도불명(p189)" 화성 콜로니에서는 인공지능의 발명 후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데, 바로 롭처럼 어정쩡한 사람들이 대거 "용도불명"으로 분류된 것, 다른 하나는 로봇의 발전 때문에 힘 쓰는 일을 하던 남자들의 역할이 크게 축소되어 사회에서 여성들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점입니다. 아니나다를까 이 소설은 남자 주인공이 상급자에게 받은 성적 제안을 거절하자 불이익을 받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요즘도 근절되지 않은, 군대 등 폐쇄적인 조직 안에서 빈발하는 sex harassment가 역패턴으로 벌어지는 셈입니다. 용도불명의 다른 말은 바로 "잉여인간(p218, p257)"입니다.
이 소설은 중반부터 마치 H G 웰즈의 <타임머신>을 보듯, 핵전쟁 후 폐허가 된 지구(="푸른 행성")에 임무를 띠고 귀환(?)한 롭이 에로스 섬, 또 불평등의 섬에서 목도한 갖가지 기이한(그러나 익숙한) 사회상을 보고 느끼게 된 바를 통해 일종의 문명 비판을 시도합니다. 에로스 섬은 아름다운 청춘남녀가 일종의 지상낙원을 이루고 사는 구역, 장애가 있거나 폴리아모리를 거부하거나 늙고 병든 이들이 거주하는 구역 둥로 나뉩니다. 봉 소바주(bon sauvage)라는 낭만 가득한 이데아가 바로 이들을 두고 이르는 말이겠습니다.
다른 섬은 그렇지 않아서 마치 우리 현대인들이 일구고 사는 사회와 비슷합니다. 쓸모가 떨어지는 개체는 부적응자 무능력자로 찍혀 서서히 도태되며,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며 불평등이 당연한 이치로 간주되는 곳. 영리한 롭은 이 섬이 바로 자신의 원소속 공동체(화성 콜로니)와 조금도 다름없는 원리에 의해 움직임을 바로 통찰해 냅니다. 이 두 섬은 남자가 여자를 차지하는(분배하는) 방식이 극과 극이지만, 화성에서 이미 여성이 남성에 대해 우위를 차지해버린 상황과 대조된다는 점에서는 닮았습니다. "능력 위주의 사회(p272)"
그녀는 콜로니에서야 기세등등하게 지내던 엘리트였겠으나 이곳 서울에서 포로가 된 후 어느 전사에게 성노리개, 기껏해야 출산 도구 이상의 취급을 못 받는 비참한 신세입니다. 어느 남성(열등한 종족인) 밑에서 종속적인 대우를 받는 자체가 참을 수 없지 않았겠습니까. 요령 좋은 주인공 롭이 순식간에 쥘마에 대해 상하 주종 관계를 세우는 장면이 우스우면서도 통쾌했습니다 ㅋ 이런 정직하지 못하고 속물스러운 여자는 그런 비겁한 술수에 당해도 마땅하다고나 할까요.
스케일이 크고 기술적 미장센이 꼼꼼하면서도 묵직하게 문명 비판을 담았으며 우리 독자들이 언제나 좋아라하는 선남선녀들의 로맨스까지 펼쳐져서 너무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