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크기와 가족의 사랑은 반비례한다고 했던가. 약국의 의자 갯수와 손님들간의 정도 반비례까지는 아니겠지만, 그 비스무리하게는 맞는 듯도 하다. 약국의 규모가 작아 긴의자도 하나 뿐이고 어른 둘이 겨우 앉을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용 미니의자가 여러 개 있다. 그래서 젊은 사람이 편안하게 앉아있다가도 노인이 들어오시면 퍼뜩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들을 한다. 마치 버스에서 노약자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듯 말이다.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뿌듯하다기보다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젊은이들도 다들 감기니 뭐니 아파서 오는 환자들인데 젊다는 이유로 자리를 양보를 해야 하니, 서비스 산업이 대세인 한국 사회에서 용납이 되겠냐 말이다. 그렇게 한 번 불편을 겪었으면 다음엔 다른 약국을 갈 듯도 한데 다시 다들 내방해 주시는 걸 보면 고마울 정도다. 명절 같은 날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 기다리듯이 사람들이 한 줄로 약국 밖까지 길게 대열을 만들어 기다리기도 하는데 약을 조제하면서도 감격스러워서, 내가 어디서 이런 경험을 해 보나 싶기도 했다.

오늘도 긴의자에 어르신이 한 분이 먼저 오셔서 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다. 혼자 널찍하니 아예 양 다리를 의자 위로 올려 양반다리로 편안하게 앉아계셨다. 시골 동네에서 간만에 읍내 병원에 약 타러 오신 할머니시다. 나이는 75세. 처음 처방전을 들고 오신 분이신데 약값이 너무 비쌌다. 신경통약이 비급여로 나와서 이에 대한 설명 겸 할머니와 같이 노닥노닥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딸랑~종소리가 들리더니 연세가 있으신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오신다. 약한 설사기가 있으시다며 정로환을 달라신다. 의례적으로 하는 말을 건네 본다. "냄새 나는거요? 안 나는거요?"  "아유. 난 그런 거 몰라. 누가 배 아플 때 정로환 먹으면 낫다고 해서 온거여. 암거나 더 좋은 걸로 줘요~"   "똑같아요. 냄새 나고 안 나고 차이지요. 음..그럼 냄새 나는 걸로 드려볼께요."

보통은 먹는 거는 냄새 안 나는 거, 무좀 치료용으로 쓰는 경우엔 냄새 나는 거를 드리는데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냄새 나는 걸 선호하신다. 양이 많기 때문에 그깟 냄새 쯤은 무시하시는 게다. 이분도 왠지 그런 감이 와서 냄새 나는 걸로 드렸는데 드시고 가실 눈치다. 아주머니는 양반다리 할머니 옆에 아주 쬐금 남은 의자 구석탱이에 엉덩이를 디립다 들이민다. 힘이 부치신 할머니가 옆으로 밀리더니 다리를 슬쩍 아래로 내리며 자리를 조금 양보해 주신다.

할머니, 약이 좋으셔서 그런지 약값이 많이 비싸네요. 만 원이나 하는데 이렇게 비싸서 어짜지요..
으응. 그랴. 비싸도 줘야제. 인자 이거 밥 묵꼬 묵으믄 나 아픈 데 낫는 거쟈? 엣다. 돈.
아이고야. 무슨 약값이 고래 비싸대요? 할머니가 어덴가 많~이 아프신가봐요?
하하. 아니에요. 약이 좋은 거여서 그래요.
아지매는 나중에 나이 들어 이리 아프지 마소. 약값도 많이 드니까는 말이제. 근데, 아지매는 속이 안 좋다구요? 뭐 자셨길래 속이 안좋다요?
냐~ 저녁을 급히 먹었더니 속이 부대끼네요. 워매~무슨 약이 이리 냄시가 고약하요? 아이고야~ 이걸 어케 묵으라꼬..아가씨요..나, 다른 걸로 바까주믄 안될까?
어머~아주머니~ 뜯은 거라서 안되요. 그냥 코 막고 드셔요. 자, 제가 세 알 챙겨드릴께요. 이렇게 제가 친절하게 물도 떠다 드리잖아요. 자 이제 약 입에 넣으시구요. 물 드셔요. 쭉~들이켜셔요~아이고, 우리 아줌마 약도 잘 드시네요~
아이고, 쓰라. 뭔 약이 이래 맛 없노. 나는 정로환 이런 거는 첨 먹어본다카이
아직 젊어서 첨 먹어보는겨? 난 약힘으로 사는디..
어머. 아니에요. 두분이 연세가 비슷해보이시는데요? 요 아주머니는 머리 염색도 하고, 화장도 해서 젊어보이지만, 그래도 자세히 보니 비슷해보여요~
그랴? 아지매는 몃 살이교?
소띠..
그랴? 나도 소띠인디?
어...소띠요?  그럼 두분이  띠동갑이에요? (나도 모르게 말실수) 
아지매 몃 살이신데요?
나..칠십다섯
할머니는요?
칠십다섯
에이..두분이 동갑이시네요. 하하. 봐요 제 말이 맞죠. 두분이 비슷한 연배라시니까요? 하하하(애써 수습)


낯선 두분이 친하게 대화하시다가, 동갑임을 확인하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뀌시더니 서둘러 두분 다 가게를 나가셨다. 한분은 자기보다 젊어보이는 아지매를 보니 새삼 더 늙어보이는 자기가 서글퍼져서, 또 한분은 또래보다 젊어보이긴 하지만 훨씬 늙어보이는 상대방을 보면서 새삼 본인의 나이를 확인하게 되어서일까. 관절이 아프시다는 할머니는 총총걸음으로, 배가 아프시다던 아주머니는 배를 꼿꼿하게 펴고 재빨리 가게 문을 열더니 다시 모르는 사이가 되어서 각자의 길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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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년의 사춘기
고은 지음, 김형수 엮음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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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출근길에 후두둑 떨어지는 목련을 보았다. 고개를 돌렸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중학교 때 선생님께 배운 노래는 어느날 속절없이 떨어지는 목련을 본 순간 더 이상 부르지 않았고 길에서 목련을 접하면 고개부터 돌아갔다. 그러나 어제밤 고은의 시에서 이 부분을 발견하고는 목련꽃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

뜨락의 목련이 윷처럼 쪼개어지고 있다
                                                              <폐결핵>

감탄..살해당한 봄이니 뭐니로 표현되는 글들은 떨어지는 목련에 애도를 표하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들어간다. 나는 이 감정이 싫다. 목련은 그저 자기 생을 마치고 순리대로 떨어질 뿐인데.. 왜 우리는 이렇게 자연 스스로의 목련을 안경을 쓰고 바라봐질까. 그 아름다움이 언제까지 지속되었으면 하는 우리의 이기심, 우리의 욕심 때문일까. 물론 나 역시 이 혐의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그리고 벗어날 방도를 모르기에  외면으로 그나마 체면치레를 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고은의 '윷처럼 쪼개어지고 있다' 는 표현은 뭐랄까, 차원이 다른 언어를 쓰는 느낌이다. 윷처럼 쪼개어져서 피어나고, 윷처럼 쪼개어져서 바닥에 흩어지는 목련. 장엄한 우주의 질서 속의 한 개체로서의 목련이 와락 달려드는 느낌이다.


사별했다. 애도조차도 무례하다
                                                              <소등>

아...멋지다..고은의 시는 한 줄로도 시가 된다. 따로 떼어도 시이고 모아놔도 시가 되는 희한한 시. 그만큼 정신의 집중력이 대단하다는 의미겠다. 고은의 시를 읽을 때의 그 저릿함은 한껏 늘어진 정신에 커다란 침을 한 방 맞는 느낌이다. 영혼의 세례를 받는 느낌이다. 사별의 아픔을, 애도조차 무례하다 느끼는 것은 그만큼 사별의 대상을 존중한다는 것이고, 대상의 전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며, 자연의 일부로 화한 대상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것이다. 이승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존재가 무(혹은 새로운 유)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장엄한 다비를 보는 느낌이랄까.


긴 편지를 쓰고 끝에는 '끝'이라고 썼다.
(중략)
들쥐들이 종점에서 종점으로 몰려다닌다.
(중략)
너무나 많은 끝이 내 발등에 쌓인다
                                                
              <예감>
얼마나 많은 끝이 또 하나 지나는가
                                                              <폐결핵>

고은의 시어들 중 특히 '끝, '종점'의 의미는 무엇일까. 열여덟 살의 자살소동과 함께 미국 항만운수와 검수원, 엿장수, 중등 교사, 거지, 승려, 시인, 정치범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그의 삶 속에서 여러 번 겪었을 '끝'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삶에 '끝'이란 것이 있기나 할까. 고은은 끝이다, 라고 생각한 지점을 도대체 얼마나 여러번 닿아봤을까. 그렇다. 끝까지 가고 나면 다시 원점, 출발선인 것이다. 그저 끝이 숱하게 발등에 쌓일 뿐인 것이다. 몸으로 체득했을 그의 숱한 끝을, 이제 겨우 몇 개 경험했을 뿐인 나의 끝으로 감히 견주어보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하나 이야기하자면 고은의 '끝'은 '재생'을 알고 있는 끝이다. 다시 돌아옴을 아는 끝. 그래서 그는 사별의 애도조차 무례하다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누구의 말이라도 말 속에는
일생의 파도소리가 들어 있다

                                                           <소등>

고은의 50년 시의 인생을 엮으신 김형수 시인이 무척 좋아하신다는 부분. 그리고 나 역시 그저 명심하고 또 명심하고픈 그런 부분. 이런 구절을 읽고 나면, 주위의 사람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고, 위대해 보인다.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속에서 몰아치는 파도소리를 듣고 싶어진다. 사람들마다 제각각일 파도의 파장을 느껴보고 싶어진다. 누군가 미워지는 사람이 있을 때, 이 구절을 음미해 보기 바란다. 그 사람이 더없이 사랑스런 사람으로 달리 보일 것이다. 고은은 어쩜 이런 철학적인 시를 쓸 수 있을까. 고은의 시는 이 한 권밖에 접하지 못했지만, 그의 시어들은 자연의 형상, 자연의 소리들을 시로 옮겨 놓은 것 같다. 반짝이는 햇살, 뜨거운 태양, 이런 식의 외형적 형상 말고 자연의 본질을 직관으로 꿰뚫어 시로 옮겨놓은 것 같다. 그의 시는 작살이 되어 나를 뚫어 자연에 내다 건다. 그의 작살에 잡히고서야 비로소 나는, 그의 수중에 들고서야 그제야 나는, 자연의 비밀을 아주 조금 알아차린다. 이런 전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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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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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지금 말고 아주 먼 훗날에, 잊고 있던 기억들 속에서 불현듯 떠올라, 그 시절을 돌아보며 눈가에는 눈물이 맺히고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추억과

바로 이 순간에 문득 아득한 먼 미래가 겹쳐지며, 지금 이 즐거운 시간이 분명 먼 미래 어드매 쯤에는 추억이 되어 존재하겠지, 그리고 그때엔 이와 꼭같이 행복하진 않겠지, 라는 슬픈 예감같은 추억이 있다.
 

 데니즈가 문득 예감같은, 슬픈 추억이 될 것 같은 현재를 느낀다. 후자의 추억이다. 데니즈는 헨리 키터리지의 약국에 새로 취직한 아주 귀여운 새댁이다. 그녀의 남편도 이름이 헨리이며 데니즈는 정갈하고 단정한 매무새와 대화법으로 헨리 커트리지의 마음에 쏙 든다. 이름이 같은 남편 헨리 역시 헨리 커트리지의 친근한 마음의 벗이 된다. 아이가 생기기를 바라고 행복한 가정을 꾸미기를 꿈꾸는 데니즈가 행복 속에 문득 슬픈 예감을 하는데, 정말로 남편을 잃는 사건이 터졌고, 데니즈는 행복했던 한때를 추억에서만 되살릴 수 있었다. 슬퍼하는 데니즈를 위해 헨리 키터리지가 사다준 고양이 역시 데니즈에게 위안이 되어주다, 다시금 사고를 당한다.

패닉 상태에 빠진 데니즈를 보면서 슬픈 예감의 정체에 대해 문득 궁금해졌다. 행복의 순간에 느끼는 슬픈 예감은 사람에게 어떤 의미일까. 길게 보면, 그 예감 덕에 무언가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니, 고마운 예감일테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을 온전하게 즐길 수 없기에 절반의 행복에 미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유한의 생명인 사람에게 과연 온전한 행복이란 게 존재하기나 할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이라는 결승점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는 인간의 삶에서 온전한 행복이 존재한다면 그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왠지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의 인정'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인정하기란 무척 어렵겠지만, 이 지울 수 없는 현실의 인정에서부터 온전한 행복이 시작되리라 본다. 예컨대 나보다 나이 드신 부모님의 미래에  닥칠 순간에 대비한 준비, 그리고 나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그 순간에 대한 대비 같은 거 말이다.

후자의 추억이 전자의 추억보다 많아진다면, 그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가 될까. 세상에 존재하는 아픔의 종류를 많이 알았다는 증거가 될까. 주말이면 의식적으로 가족들과 외식을 하려고 한다. 일종의 추억쌓기. 촌스럽기 그지없는 단어지만, 촌스러운 것만큼 진실된 게 또 없을 테니까. 그 추억은 가까운 미래에 지금 사는 이곳과 조금 많이 떨어진 곳에서 살아보고 싶은 내 욕심을 위해서, 그때에 외로울 때 필요한 추억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점점 늙어가시는 부모님에게 언젠가는 닥칠 이별의 순간에 조금은 덜 슬프기 위한 핑계거리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음..그런 마음가짐으로 시작한, 조금은 영악한 계획이었던 주말의 외식이 이제는 가족들의 은근한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자식이 외식시켜준다는 자랑도 여기저기 할 수 있고, 집에서의 식사와 달리 외식에서는 다양한 이야기꽃이 활짝 필 수 있는 자리마련이 되고 있고, 그리고 서로에 대한 새삼스러운 관심이 조금씩 더 생겨진다는 것도 있다. 후자의 추억이 꼭 슬픈 것만은 아닌 걸 알겠다.

음...데니즈는 ... 시간이 흘러, 아기 엄마가 된다. 이걸로 후자의 추억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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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17: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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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3: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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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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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00: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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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8: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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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환자 처방전이다. 할머니와 아들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왔다. 아들의 나이는 45세. 감기약이다. 약을 지어서 나와 투약을 하려는데 아들이 이름을 불러도 나를 보지 않는다. 대신 엄마 쪽을 쳐다보며 빙긋 웃는다. 나도 따라 웃으며 할머니에게 대신 약에 대해 설명을 드리고, 약을 드렸다.

아들이 감기가 심하다며 할머니가 약봉투에서 약을 꺼내느라 부산한 동안에도 아들은 계속 엄마를 쳐다보며 빙긋 웃다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머리로 엄마를 가볍게 쿵~ 박는다. 고개를 숙여서 한참을 있더니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또 한참을 있다가, 혀를 아주 길게 내어서 낼름거리다가 입술을 훑고, 코까지 닿나 장난 한 번 쳐보고, 입가에 침을 약간 흘리고, 다시 입술을 훑는다. 그리고 엄마를 보고 또 빙긋 웃는다. 할머니가 아들의 입에 약을 넣어주고, 물컵을 입에 갖다댄다. 아들은 그 와중에도 계속 빙긋 웃는다.

외모가 너무 멀쩡해 다운증후군이 아닌 줄 알았더니, 유심히 보니 아주 약하게 표가 난다. 의자에 얌전하게 앉아서 엄마에게 방긋 웃어주는 중년의 아기가 너무 예뻐, 나도 따라 계속 웃어줬다. 따라 웃다가 보니 아들의 코에선 콧물이 줄줄 흐르고, 입술이 부르터서 엉망인 게 보였다. 마침 조금 전에 서랍을 정리하다가 립밤 하나가 굴러다니는 걸 챙겨놨다. 사은품으로 들어온 건데 팔기는 뭣해서 그냥 놔두고 있는 종류였다. 마침 잘 되었다. "할머니, 아드님이 입술이 많이 부르텄네요. 여기 이거 립밤인데, 아드님 발라주세요."

할머니가 무척 좋아하신다. 케이스를 뜯어서 립밤을 꺼내어 요리조리 훑어보시다가 아들에게 발라주려고 손이 가더니 멈짓, 립밤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케이스에 넣는다. 어? 왜 안 발라주세요? 물어보지 않아도 알겠다. 아들의 입술에는 침이 흥건하게 묻어 있어 지금은 발라봤자 의미가 없겠고, 또 정상적이지 않은 아들이어서 얌전히 입술을 대고 있을 지도 의문이고, 남 앞에서 그런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일테다. 마음이 찡해져서 웃는 아들을 보며 따라 웃었다.

머리로 사람을 쿵쿵 박는 게 저리도 정감있는 행위인 줄 몰랐다. 말을 할 줄 모르는 바보 아들이 할 수 있는 사랑 표현법은 누군가가 보든 보지 않든 웃는 것이겠고, 누가 봐 줬으면 싶을 때는 머리로 똑똑 노크를 하는 거였구나. 아들의 쿵쿵 노크 소리에 할머니가 아들을 한 번 봐줬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지만, 아마도 집에 가서는 실컷 바라봐 줄 것이다. 할머니의 금쪽같은 아들이니까. 갓 태어난 병아리의 각인 현상처럼 중년의 아기는 엄마를 종일 그렇게 따라다니면서 각인을 할 것이고, 엄마는 각인을 받을 것이다. 

얼마전에 아픈 가정사를 털어놓은 부활의 김태원의 부인이 자폐증 아들에게 했던 말처럼. "아이가 너무 귀여워요. 더 안 자랐으면 좋겠어요." 이 말의 깊은 속뜻을 나도 왠지 알 거 같앴다. 나는 아직 아이가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알 거 같앴다. 한 시간 전의 엄청 이상한 손님으로 인해 지쳐 너덜거리는 내 마음의 허물이, 중년 아이의 미소 한 방에 녹아내린다. 아! 백만불짜리 미소. 엄마만 쳐다보고, 나는 봐 주지도 않는 미소지만, 나는 아들을 따라 계속 벙긋거린다. 평안한 일요일 오후가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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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4-24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마음이 찡 합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실화 엘리펀트 맨에게 당신은 그의 그 흉한 모습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그를 피하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늘 웃고 있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자기 엄마가 자기에게 그렇게 늘 웃어주었던 것을 기억하기기 때문이라고 했다지요.
어디가 부족한 것 같은 자식에게는 더 마음이 가는 부모의 마음이랄까요.
그런데 일요일인데 일하셨나봐요?

달사르 2011-04-26 23:56   좋아요 0 | URL
네. ^^ 주 7일 근무랍니다. ^^ ㅎ 농담이고, 격주마다 일요일 근무를 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쉬는 일요일 근무라서 몸도 마음도 더 피곤한데 저런 분들이 다녀가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어요. 저의 피로회복제 같은 손님들이랍니다.
중년 아기에게 엄마란 존재가 있어 무척 다행이다 싶어요. 우리네 모두의 엄마도 그러하듯이.

엘리펀트 맨이 그런 내용이군요. 제목만 들어봤습니다. 다음에 한번 봐야겠어요.

2011-04-26 18: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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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6 2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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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6 18: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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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6 23: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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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16: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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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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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0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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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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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키터리지라는 멋진 이름이 있건만 나는 왜 올리버 키터리지의 남편이라고 부를까. 그만큼 올리버 키터리지가 인상이 깊었기 때문이겠지. 그냥 올리버라 해도 되고, 키터리지 부인이라 해도 되는데 나는 꼭 그녀를  올리버 키터리지 씨라고 불러준다. 책을 통해 알게 된 그녀이지만 그녀의 전존재감이 내게 푸근하게 다가와 나를 위로해주기 때문이며, 또한 내가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기 때문이리. 이 책을 읽은지는 꽤 오래 되었다. 신간으로 읽었으니 말이다. 예전에 썼건만 어쩌다 잃어버린 리뷰를 복구하는 의미로 이번에 다시 읽었고, 헨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봤다. 

  

  

 

   
  헨리 키터리지는 오랫동안 이웃 마을에서 약사로 일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여름날 약국으로 이어지는 큰길로 들어서기 전 마지막 구간의 가시덤불에서 야생 라즈베리가 송알송알 알이 맺힐 때나 ,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약국으로 차를 몰았다. 은퇴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일찍 일어나 예전의 그런 아침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떠올렸다. 마치 세상이 혼자만의 비밀인 듯이.  
   

 

시작이 이렇다. 그리고 나는 시작부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에게? 여기서? 여기에 눈물샘을 자극하는 부분이 어디에 있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눈물을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예전의 관리 약사 시절의 나라면 나 역시 이런 대목이 뭐 어떻다구, 생각할 터이다. 그러나 바뀐 내 상황을 들어보면 조금은 공감 지점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현재 만으로 3년 가까이 개국 약사로 일하고 있고, 첫 해에는 일 년 365 일 중 9 일을 쉬어 일년동안 356 일을 아침 아홉시부터 밤 11시까지 근무했다. 그 사이에 술주정뱅이로 인해 경찰서도 갔다왔고, 가만 서 있다가 뺨도 맞아봤으며, 욕설은 여러 번 들어봤고, 시비도 참았고, 그리고..고마우신 손님들도 많이 만났다. 나는 아침마다 일어나기 싫었다. 가게 입구가 멀리서 보이면, 등교하기 싫은 아이마냥 배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그랬다. 그러나 막상 약국을 들어서면 하루를 시작해야 하므로 억지로 억지로 웃는 낯으로 하루를 보냈다. 워낙에 돈 욕심도 없는데다가, 집안 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라는 효녀스런 이유 조차 없이, 누군갈 도와줬다 뒤통수를 맞은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청춘을 네모난 공간의 감옥에서 썩는다 싶어 무척 우울했다. 식사시간이 따로 없는 직업상 식사 중 두세 번 일어나면 적게 일어나는 거라 감사해야 하고, 그렇게 일어났다 앉아서 밥 먹다를 반복하면 나중에는 숟가락 들기조차 귀찮았다. 화장실 갈 때도 그 틈에 찾아오신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수 없으므로 불안한 마음으로 볼 일을 보기에 늘 시원치가 않았다. 그런 하루가 쌓여서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흘렀다. 일 년 후에도 나는 여전히 약국이 감옥일 줄 알았는데, 어느날부터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헨리만큼 두근거리는 마음에는 못 미치지만, 세상이 혼자만의 비밀인 것처럼 출근길이 행복하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조금은 약국 출근 하는 일이 즐거워진 것이다. 그동안 내게 무슨 일이 생겼길래?

처음 낯선 경험을 한 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에게 상담인지 하소연인지 헷갈리는 애매한 대화를 하고자 오신 가게 근처 식당 아주머니의 사연을 세 시간동안 들은 날을. 아주머니는 식당 일을 오랜간 하신 탓에 몸이 여기저기 아프신 건 참겠는데 두고두고 지속되는 두통 때문에 못 견뎌하셨단다. 그래서 병원도 여기저기 다녀보시고, 기 치료도 받으시고, 교회도 다니시고, 급기야 이상한 수련 단체까지 다니면서 상담과 치료를 받으셨다. 약국은 특성상 병원이나 한의원 말고 다른 곳에서 하는 치료법은 신용을 하지 않는데, 아시는 분이어서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싶은 심사로 듣기 시작한 것이 두 시간을 훌쩍 넘어선 것이다. 퇴근 시간인 밤 11시가 넘어서지만 아주머니의 트이기 시작한 물꼬는 멈추지 않았고, 급기야 눈물까지 훌쩍이며 집안 일을 하나 둘 털어놓으셨다. "다른 공간이면, 다른 약국이면, 내가 이런 말 안 하는데, 내가 그동안 꾹꾹 눌러 참고 여지껏 살아왔는데, 약사님은 오랜 이웃인 동네 부부의 딸이니 내 딸이나 마찬가지인 느낌이고, 너무 편해서 어쩌다보니 이런 말까지 하게 되네요."  훌쩍이며 하시던 아주머니의 말에 나 역시 따라서 눈물이 고였고, 나는 처음으로 '위로'란 것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신경 정신과에서나 할 법한 그런 상담을, 동네 약국에 불과한 곳에 들어와 딸 같은 존재인 나에게 죄다 털어놓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또한 흥분이 되었다. 그때 내 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샘 솟듯 터져서 나왔다. 그 정체는 '측은지심' 일수도 있고, '공감' 일수도 있고, '위로' 일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건 나는 이분과 아주 깊은 파장에서 공명을 했다는 것이다. 실컷 울고 나신 아주머니의 눈은 아주 맑았고, 나와의 대화가 그 어떤 약보다 더 좋은 효과를 봤다는 걸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말재주가 그리 있지도 않은 나였건만, 그저 들어주고 추임새를 넣어준 정도였건만, 가운을 입은 나의 위치와 딸 같은 존재라는 나의 자리 때문에 그런 좋은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결국 밤 12시에 퇴근을 했지만 나는 그날의 일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이 아주머니에게만은 다시 내방하는 경우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상담을 해주리라 마음 먹었다. 누군가와 그런 특별함이 생기는 것, 그게 바로 오래도록 한 업종을 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특별한 관계가 하나 둘 늘어가는 걸 보는 일, 그게 바로 또한 노년까지 즐기며 한 업종을 할 수 있는 비결일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오래도록 쌓였을 때만, 헨리 키터리지처럼 아침 출근길에서 저런 느낌을 받을 수 있고 퇴직 후까지 출근 길의 행복한 두근거림을 추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아주머니 덕에 나는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조금씩 생겨났다. 약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지루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은근히 기다려지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났음을 어느날 문득 느꼈을 때, 나는 왠지 즐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출근길에 멀리서 약국의 분홍 간판이 보이기 시작할 때 조금 두근거리는 것도 생겼다.

헨리 키터리지의 글에서 또한 느낀 감동 지점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서두에 깊은 공감을 하면서 늘 게으르기 짝이 없던 내가 아직까지 약국을 하고 있는 걸 알았고, 아프다는 핑계로 문 닫은 적 없는 것도 알았고, 여전히 늦게까지 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음에 여행이 허락될 정도로 건강이 회복된다면, 나는 좀더 오래 약국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숨구멍이 될 정도의 여행이 허락된다면 말이다. 나는 나이 들어서까지 헨리 키터리지처럼 그런 은근한 기쁨을 누려보고 싶다. 헨리의 그 기쁨은 같은 업종을 오랜간 종사해온 사람의 습관에서만 얻을 수 있는 기쁨이니까 말이다. 힘겨운 하루하루가 쌓여 일 년이 되고, 흰머리 희끗해지고 은퇴할 때까지 시간이 흐르다 보면 느끼게 되는 연륜 같은 거..나는 아직 어림도 없지만, 그런 느낌을 감만 잡을 뿐이지만, 오랜 시간 같은 업종을 종사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존경심 같은 거, 그런 게 진하게 느껴지는 글의 서두이다. 그래서 더욱 따뜻한 소설.  소설에서 이런 기쁨을 낚는 일이 바로 소설 읽는 맛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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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17: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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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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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1: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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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6: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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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8: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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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2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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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0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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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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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2 0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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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2 1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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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5 17: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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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6 1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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