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크기와 가족의 사랑은 반비례한다고 했던가. 약국의 의자 갯수와 손님들간의 정도 반비례까지는 아니겠지만, 그 비스무리하게는 맞는 듯도 하다. 약국의 규모가 작아 긴의자도 하나 뿐이고 어른 둘이 겨우 앉을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용 미니의자가 여러 개 있다. 그래서 젊은 사람이 편안하게 앉아있다가도 노인이 들어오시면 퍼뜩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들을 한다. 마치 버스에서 노약자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듯 말이다.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뿌듯하다기보다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젊은이들도 다들 감기니 뭐니 아파서 오는 환자들인데 젊다는 이유로 자리를 양보를 해야 하니, 서비스 산업이 대세인 한국 사회에서 용납이 되겠냐 말이다. 그렇게 한 번 불편을 겪었으면 다음엔 다른 약국을 갈 듯도 한데 다시 다들 내방해 주시는 걸 보면 고마울 정도다. 명절 같은 날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 기다리듯이 사람들이 한 줄로 약국 밖까지 길게 대열을 만들어 기다리기도 하는데 약을 조제하면서도 감격스러워서, 내가 어디서 이런 경험을 해 보나 싶기도 했다.
오늘도 긴의자에 어르신이 한 분이 먼저 오셔서 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다. 혼자 널찍하니 아예 양 다리를 의자 위로 올려 양반다리로 편안하게 앉아계셨다. 시골 동네에서 간만에 읍내 병원에 약 타러 오신 할머니시다. 나이는 75세. 처음 처방전을 들고 오신 분이신데 약값이 너무 비쌌다. 신경통약이 비급여로 나와서 이에 대한 설명 겸 할머니와 같이 노닥노닥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딸랑~종소리가 들리더니 연세가 있으신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오신다. 약한 설사기가 있으시다며 정로환을 달라신다. 의례적으로 하는 말을 건네 본다. "냄새 나는거요? 안 나는거요?" "아유. 난 그런 거 몰라. 누가 배 아플 때 정로환 먹으면 낫다고 해서 온거여. 암거나 더 좋은 걸로 줘요~" "똑같아요. 냄새 나고 안 나고 차이지요. 음..그럼 냄새 나는 걸로 드려볼께요."
보통은 먹는 거는 냄새 안 나는 거, 무좀 치료용으로 쓰는 경우엔 냄새 나는 거를 드리는데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냄새 나는 걸 선호하신다. 양이 많기 때문에 그깟 냄새 쯤은 무시하시는 게다. 이분도 왠지 그런 감이 와서 냄새 나는 걸로 드렸는데 드시고 가실 눈치다. 아주머니는 양반다리 할머니 옆에 아주 쬐금 남은 의자 구석탱이에 엉덩이를 디립다 들이민다. 힘이 부치신 할머니가 옆으로 밀리더니 다리를 슬쩍 아래로 내리며 자리를 조금 양보해 주신다.
할머니, 약이 좋으셔서 그런지 약값이 많이 비싸네요. 만 원이나 하는데 이렇게 비싸서 어짜지요..
으응. 그랴. 비싸도 줘야제. 인자 이거 밥 묵꼬 묵으믄 나 아픈 데 낫는 거쟈? 엣다. 돈.
아이고야. 무슨 약값이 고래 비싸대요? 할머니가 어덴가 많~이 아프신가봐요?
하하. 아니에요. 약이 좋은 거여서 그래요.
아지매는 나중에 나이 들어 이리 아프지 마소. 약값도 많이 드니까는 말이제. 근데, 아지매는 속이 안 좋다구요? 뭐 자셨길래 속이 안좋다요?
냐~ 저녁을 급히 먹었더니 속이 부대끼네요. 워매~무슨 약이 이리 냄시가 고약하요? 아이고야~ 이걸 어케 묵으라꼬..아가씨요..나, 다른 걸로 바까주믄 안될까?
어머~아주머니~ 뜯은 거라서 안되요. 그냥 코 막고 드셔요. 자, 제가 세 알 챙겨드릴께요. 이렇게 제가 친절하게 물도 떠다 드리잖아요. 자 이제 약 입에 넣으시구요. 물 드셔요. 쭉~들이켜셔요~아이고, 우리 아줌마 약도 잘 드시네요~
아이고, 쓰라. 뭔 약이 이래 맛 없노. 나는 정로환 이런 거는 첨 먹어본다카이
아직 젊어서 첨 먹어보는겨? 난 약힘으로 사는디..
어머. 아니에요. 두분이 연세가 비슷해보이시는데요? 요 아주머니는 머리 염색도 하고, 화장도 해서 젊어보이지만, 그래도 자세히 보니 비슷해보여요~
그랴? 아지매는 몃 살이교?
소띠..
그랴? 나도 소띠인디?
어...소띠요? 그럼 두분이 띠동갑이에요? (나도 모르게 말실수)
아지매 몃 살이신데요?
나..칠십다섯
할머니는요?
칠십다섯
에이..두분이 동갑이시네요. 하하. 봐요 제 말이 맞죠. 두분이 비슷한 연배라시니까요? 하하하(애써 수습)
낯선 두분이 친하게 대화하시다가, 동갑임을 확인하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뀌시더니 서둘러 두분 다 가게를 나가셨다. 한분은 자기보다 젊어보이는 아지매를 보니 새삼 더 늙어보이는 자기가 서글퍼져서, 또 한분은 또래보다 젊어보이긴 하지만 훨씬 늙어보이는 상대방을 보면서 새삼 본인의 나이를 확인하게 되어서일까. 관절이 아프시다는 할머니는 총총걸음으로, 배가 아프시다던 아주머니는 배를 꼿꼿하게 펴고 재빨리 가게 문을 열더니 다시 모르는 사이가 되어서 각자의 길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