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지금 말고 아주 먼 훗날에, 잊고 있던 기억들 속에서 불현듯 떠올라, 그 시절을 돌아보며 눈가에는 눈물이 맺히고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추억과

바로 이 순간에 문득 아득한 먼 미래가 겹쳐지며, 지금 이 즐거운 시간이 분명 먼 미래 어드매 쯤에는 추억이 되어 존재하겠지, 그리고 그때엔 이와 꼭같이 행복하진 않겠지, 라는 슬픈 예감같은 추억이 있다.
 

 데니즈가 문득 예감같은, 슬픈 추억이 될 것 같은 현재를 느낀다. 후자의 추억이다. 데니즈는 헨리 키터리지의 약국에 새로 취직한 아주 귀여운 새댁이다. 그녀의 남편도 이름이 헨리이며 데니즈는 정갈하고 단정한 매무새와 대화법으로 헨리 커트리지의 마음에 쏙 든다. 이름이 같은 남편 헨리 역시 헨리 커트리지의 친근한 마음의 벗이 된다. 아이가 생기기를 바라고 행복한 가정을 꾸미기를 꿈꾸는 데니즈가 행복 속에 문득 슬픈 예감을 하는데, 정말로 남편을 잃는 사건이 터졌고, 데니즈는 행복했던 한때를 추억에서만 되살릴 수 있었다. 슬퍼하는 데니즈를 위해 헨리 키터리지가 사다준 고양이 역시 데니즈에게 위안이 되어주다, 다시금 사고를 당한다.

패닉 상태에 빠진 데니즈를 보면서 슬픈 예감의 정체에 대해 문득 궁금해졌다. 행복의 순간에 느끼는 슬픈 예감은 사람에게 어떤 의미일까. 길게 보면, 그 예감 덕에 무언가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니, 고마운 예감일테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을 온전하게 즐길 수 없기에 절반의 행복에 미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유한의 생명인 사람에게 과연 온전한 행복이란 게 존재하기나 할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이라는 결승점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는 인간의 삶에서 온전한 행복이 존재한다면 그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왠지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의 인정'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인정하기란 무척 어렵겠지만, 이 지울 수 없는 현실의 인정에서부터 온전한 행복이 시작되리라 본다. 예컨대 나보다 나이 드신 부모님의 미래에  닥칠 순간에 대비한 준비, 그리고 나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그 순간에 대한 대비 같은 거 말이다.

후자의 추억이 전자의 추억보다 많아진다면, 그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가 될까. 세상에 존재하는 아픔의 종류를 많이 알았다는 증거가 될까. 주말이면 의식적으로 가족들과 외식을 하려고 한다. 일종의 추억쌓기. 촌스럽기 그지없는 단어지만, 촌스러운 것만큼 진실된 게 또 없을 테니까. 그 추억은 가까운 미래에 지금 사는 이곳과 조금 많이 떨어진 곳에서 살아보고 싶은 내 욕심을 위해서, 그때에 외로울 때 필요한 추억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점점 늙어가시는 부모님에게 언젠가는 닥칠 이별의 순간에 조금은 덜 슬프기 위한 핑계거리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음..그런 마음가짐으로 시작한, 조금은 영악한 계획이었던 주말의 외식이 이제는 가족들의 은근한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자식이 외식시켜준다는 자랑도 여기저기 할 수 있고, 집에서의 식사와 달리 외식에서는 다양한 이야기꽃이 활짝 필 수 있는 자리마련이 되고 있고, 그리고 서로에 대한 새삼스러운 관심이 조금씩 더 생겨진다는 것도 있다. 후자의 추억이 꼭 슬픈 것만은 아닌 걸 알겠다.

음...데니즈는 ... 시간이 흘러, 아기 엄마가 된다. 이걸로 후자의 추억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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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17: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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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3: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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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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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00: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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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01: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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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6: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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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7: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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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8: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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