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년의 사춘기
고은 지음, 김형수 엮음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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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출근길에 후두둑 떨어지는 목련을 보았다. 고개를 돌렸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중학교 때 선생님께 배운 노래는 어느날 속절없이 떨어지는 목련을 본 순간 더 이상 부르지 않았고 길에서 목련을 접하면 고개부터 돌아갔다. 그러나 어제밤 고은의 시에서 이 부분을 발견하고는 목련꽃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

뜨락의 목련이 윷처럼 쪼개어지고 있다
                                                              <폐결핵>

감탄..살해당한 봄이니 뭐니로 표현되는 글들은 떨어지는 목련에 애도를 표하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들어간다. 나는 이 감정이 싫다. 목련은 그저 자기 생을 마치고 순리대로 떨어질 뿐인데.. 왜 우리는 이렇게 자연 스스로의 목련을 안경을 쓰고 바라봐질까. 그 아름다움이 언제까지 지속되었으면 하는 우리의 이기심, 우리의 욕심 때문일까. 물론 나 역시 이 혐의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그리고 벗어날 방도를 모르기에  외면으로 그나마 체면치레를 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고은의 '윷처럼 쪼개어지고 있다' 는 표현은 뭐랄까, 차원이 다른 언어를 쓰는 느낌이다. 윷처럼 쪼개어져서 피어나고, 윷처럼 쪼개어져서 바닥에 흩어지는 목련. 장엄한 우주의 질서 속의 한 개체로서의 목련이 와락 달려드는 느낌이다.


사별했다. 애도조차도 무례하다
                                                              <소등>

아...멋지다..고은의 시는 한 줄로도 시가 된다. 따로 떼어도 시이고 모아놔도 시가 되는 희한한 시. 그만큼 정신의 집중력이 대단하다는 의미겠다. 고은의 시를 읽을 때의 그 저릿함은 한껏 늘어진 정신에 커다란 침을 한 방 맞는 느낌이다. 영혼의 세례를 받는 느낌이다. 사별의 아픔을, 애도조차 무례하다 느끼는 것은 그만큼 사별의 대상을 존중한다는 것이고, 대상의 전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며, 자연의 일부로 화한 대상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것이다. 이승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존재가 무(혹은 새로운 유)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장엄한 다비를 보는 느낌이랄까.


긴 편지를 쓰고 끝에는 '끝'이라고 썼다.
(중략)
들쥐들이 종점에서 종점으로 몰려다닌다.
(중략)
너무나 많은 끝이 내 발등에 쌓인다
                                                
              <예감>
얼마나 많은 끝이 또 하나 지나는가
                                                              <폐결핵>

고은의 시어들 중 특히 '끝, '종점'의 의미는 무엇일까. 열여덟 살의 자살소동과 함께 미국 항만운수와 검수원, 엿장수, 중등 교사, 거지, 승려, 시인, 정치범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그의 삶 속에서 여러 번 겪었을 '끝'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삶에 '끝'이란 것이 있기나 할까. 고은은 끝이다, 라고 생각한 지점을 도대체 얼마나 여러번 닿아봤을까. 그렇다. 끝까지 가고 나면 다시 원점, 출발선인 것이다. 그저 끝이 숱하게 발등에 쌓일 뿐인 것이다. 몸으로 체득했을 그의 숱한 끝을, 이제 겨우 몇 개 경험했을 뿐인 나의 끝으로 감히 견주어보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하나 이야기하자면 고은의 '끝'은 '재생'을 알고 있는 끝이다. 다시 돌아옴을 아는 끝. 그래서 그는 사별의 애도조차 무례하다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누구의 말이라도 말 속에는
일생의 파도소리가 들어 있다

                                                           <소등>

고은의 50년 시의 인생을 엮으신 김형수 시인이 무척 좋아하신다는 부분. 그리고 나 역시 그저 명심하고 또 명심하고픈 그런 부분. 이런 구절을 읽고 나면, 주위의 사람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고, 위대해 보인다.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속에서 몰아치는 파도소리를 듣고 싶어진다. 사람들마다 제각각일 파도의 파장을 느껴보고 싶어진다. 누군가 미워지는 사람이 있을 때, 이 구절을 음미해 보기 바란다. 그 사람이 더없이 사랑스런 사람으로 달리 보일 것이다. 고은은 어쩜 이런 철학적인 시를 쓸 수 있을까. 고은의 시는 이 한 권밖에 접하지 못했지만, 그의 시어들은 자연의 형상, 자연의 소리들을 시로 옮겨 놓은 것 같다. 반짝이는 햇살, 뜨거운 태양, 이런 식의 외형적 형상 말고 자연의 본질을 직관으로 꿰뚫어 시로 옮겨놓은 것 같다. 그의 시는 작살이 되어 나를 뚫어 자연에 내다 건다. 그의 작살에 잡히고서야 비로소 나는, 그의 수중에 들고서야 그제야 나는, 자연의 비밀을 아주 조금 알아차린다. 이런 전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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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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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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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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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00: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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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0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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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6: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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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7: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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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7: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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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8: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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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23: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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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0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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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14: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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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15: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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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0 2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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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02: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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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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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2 0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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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2 13: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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