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환자 처방전이다. 할머니와 아들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왔다. 아들의 나이는 45세. 감기약이다. 약을 지어서 나와 투약을 하려는데 아들이 이름을 불러도 나를 보지 않는다. 대신 엄마 쪽을 쳐다보며 빙긋 웃는다. 나도 따라 웃으며 할머니에게 대신 약에 대해 설명을 드리고, 약을 드렸다.

아들이 감기가 심하다며 할머니가 약봉투에서 약을 꺼내느라 부산한 동안에도 아들은 계속 엄마를 쳐다보며 빙긋 웃다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머리로 엄마를 가볍게 쿵~ 박는다. 고개를 숙여서 한참을 있더니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또 한참을 있다가, 혀를 아주 길게 내어서 낼름거리다가 입술을 훑고, 코까지 닿나 장난 한 번 쳐보고, 입가에 침을 약간 흘리고, 다시 입술을 훑는다. 그리고 엄마를 보고 또 빙긋 웃는다. 할머니가 아들의 입에 약을 넣어주고, 물컵을 입에 갖다댄다. 아들은 그 와중에도 계속 빙긋 웃는다.

외모가 너무 멀쩡해 다운증후군이 아닌 줄 알았더니, 유심히 보니 아주 약하게 표가 난다. 의자에 얌전하게 앉아서 엄마에게 방긋 웃어주는 중년의 아기가 너무 예뻐, 나도 따라 계속 웃어줬다. 따라 웃다가 보니 아들의 코에선 콧물이 줄줄 흐르고, 입술이 부르터서 엉망인 게 보였다. 마침 조금 전에 서랍을 정리하다가 립밤 하나가 굴러다니는 걸 챙겨놨다. 사은품으로 들어온 건데 팔기는 뭣해서 그냥 놔두고 있는 종류였다. 마침 잘 되었다. "할머니, 아드님이 입술이 많이 부르텄네요. 여기 이거 립밤인데, 아드님 발라주세요."

할머니가 무척 좋아하신다. 케이스를 뜯어서 립밤을 꺼내어 요리조리 훑어보시다가 아들에게 발라주려고 손이 가더니 멈짓, 립밤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케이스에 넣는다. 어? 왜 안 발라주세요? 물어보지 않아도 알겠다. 아들의 입술에는 침이 흥건하게 묻어 있어 지금은 발라봤자 의미가 없겠고, 또 정상적이지 않은 아들이어서 얌전히 입술을 대고 있을 지도 의문이고, 남 앞에서 그런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일테다. 마음이 찡해져서 웃는 아들을 보며 따라 웃었다.

머리로 사람을 쿵쿵 박는 게 저리도 정감있는 행위인 줄 몰랐다. 말을 할 줄 모르는 바보 아들이 할 수 있는 사랑 표현법은 누군가가 보든 보지 않든 웃는 것이겠고, 누가 봐 줬으면 싶을 때는 머리로 똑똑 노크를 하는 거였구나. 아들의 쿵쿵 노크 소리에 할머니가 아들을 한 번 봐줬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지만, 아마도 집에 가서는 실컷 바라봐 줄 것이다. 할머니의 금쪽같은 아들이니까. 갓 태어난 병아리의 각인 현상처럼 중년의 아기는 엄마를 종일 그렇게 따라다니면서 각인을 할 것이고, 엄마는 각인을 받을 것이다. 

얼마전에 아픈 가정사를 털어놓은 부활의 김태원의 부인이 자폐증 아들에게 했던 말처럼. "아이가 너무 귀여워요. 더 안 자랐으면 좋겠어요." 이 말의 깊은 속뜻을 나도 왠지 알 거 같앴다. 나는 아직 아이가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알 거 같앴다. 한 시간 전의 엄청 이상한 손님으로 인해 지쳐 너덜거리는 내 마음의 허물이, 중년 아이의 미소 한 방에 녹아내린다. 아! 백만불짜리 미소. 엄마만 쳐다보고, 나는 봐 주지도 않는 미소지만, 나는 아들을 따라 계속 벙긋거린다. 평안한 일요일 오후가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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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4-24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마음이 찡 합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실화 엘리펀트 맨에게 당신은 그의 그 흉한 모습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그를 피하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늘 웃고 있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자기 엄마가 자기에게 그렇게 늘 웃어주었던 것을 기억하기기 때문이라고 했다지요.
어디가 부족한 것 같은 자식에게는 더 마음이 가는 부모의 마음이랄까요.
그런데 일요일인데 일하셨나봐요?

달사르 2011-04-26 23:56   좋아요 0 | URL
네. ^^ 주 7일 근무랍니다. ^^ ㅎ 농담이고, 격주마다 일요일 근무를 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쉬는 일요일 근무라서 몸도 마음도 더 피곤한데 저런 분들이 다녀가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어요. 저의 피로회복제 같은 손님들이랍니다.
중년 아기에게 엄마란 존재가 있어 무척 다행이다 싶어요. 우리네 모두의 엄마도 그러하듯이.

엘리펀트 맨이 그런 내용이군요. 제목만 들어봤습니다. 다음에 한번 봐야겠어요.

2011-04-26 18: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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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6 2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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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6 18: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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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6 23: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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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16: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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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2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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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0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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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0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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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0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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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6: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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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7: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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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8: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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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8: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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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23: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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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0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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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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