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막의 꽃
조현예 지음, 박태희 사진 / 안목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마음이 동일한 하나를 바라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내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는데 상대방이 달의 그늘까지 알아봐주는 것은 또 어떤 느낌일까. 내 속에 걸어들어온 듯한 벗과 더불어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만든다는 건 무척 짜릿할 것이다. 사진가 박태희와 작가 조현예. 둘의 만남은 머나먼 타국에서 우연히 이루어졌다. 둘은 이내 서로의 마음을 맞췄고, 하나의 약속을 했다. 강산이 변할 만큼에서 약간 모자란 세월이 흘렀을 때, 그들 중한 명은 한 줌의 재로 세상과 작별을 했고 남은 한 명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 인사를 했다. 여기 이 책은 그들의 약속에 대한 징표의 다른 이름이다.
책 제목, 사막의 꽃. 만지면 모래가 손가락 사이사이로 흐를듯한 질감의 책 표지에, 앞면 중앙엔 꿈인듯 새 한 마리 날아가고 뒷면엔 바다의 색인듯 파란 나무 한 그루 머물고 있다. 사막을 걷다 보면 새나 파란 나무가 어쩌면 있을 것이며, 어딘가쯤엔 붉은 꽃도 보일 것이다. 사막은 한때 바다였던 기억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 다시 바다로 돌아감을 꿈꾸고도 있는 공간이다. 사막에서 발견되는 심해의 조가비는 사막이 바다를 잊지 않고 있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물 없는 사막에서 피어나는 꽃은, 물 있는 공간을 씨앗 시절부터 잊지 않고 다시 돌아가기를 꿈꾼다. 그곳은 바다일 수도, 물이 가득한 수영장일 수도 있다. 잃어버린 사랑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의 존재도 이와 같을까. 사막처럼 황량해 보이지만 가슴 속 깊이 타고 남은 불씨의 잔해를 소중히 간직했기에, 그래서 실연을 견딜 수 있는 것일까. 조현예의 글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잃어버린 사랑의 간절함도 느껴지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그 무언가를 간직한 아름다움이 보인다.
사진가가 찍은 숱한 사진들을 넘기다 어느 한 지점에서 우연히, 이 세상인듯 저 세상인듯 혼몽스러운 사진들 너머로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붉은 빛깔의 꽃을 발견했다. 그 꽃은 물로 가득한 실외 수영장 구석 한 켠에서 아치를 그리며 서 있었고, 따뜻한 햇살 속에서 수영장 속 물을 흠모하는 듯 보였다. 물이 가득한 수영장을 넘어다보는 붉은 꽃은 혹시, 잃어버린 바다를 추억하는 사막과 같은 의미일까. 박태희는 이 장면을 멕시코에서 찍었다. 붉은 꽃은 또한 가도가도 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 보는 신기루다. 물로 가득찬 수영장에 뛰어들고픈 마음이 사막에서 가지게 되는 간절한 바램이듯, 인간은 삶에서 간절한 신기루를 누구나 하나쯤 품고 산다. 그래서 사막의 꽃은 환상의 꽃이기도 하다. 인생은 어쩜 그 하나의 꽃을 보기 위해 지난한 무채색의 과정들을 견디는 일과 같을까.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붉은 꽃의 사진을 지나치고도 무채색의 사진들은 계속 나타난다. 얼마간 사진과 글들을 계속 보다가 문득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의미를 발견했다. 말이 없는 사진은 말이 없다는 이유로 되려 더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다. 유일한 붉은 꽃 사진과 대비되는 숱한 무채색의 사진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일견 화려해 보이는 그 순간은 너무나 찰나적이어서 차라리 숱한 무채색의 나날만 못하다는 걸. 우리는 정점의 순간을, 사막의 꽃을, 신기루를, 쫓는 부나비와 같지만 정작 인생은 무채색의 나날들에서 향기를 뿜는다는 것을. 십 몇 년동안 찍은 사진들을 모아 처음으로 사진집을 낸 박태희에게서도 무채색의 시간들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20년동안 꾸준히 일기를 쓴 조현예 역시 마찬가지다. 조현예의 그런 무채색의 시간들을 알았기에 박태희는 그녀의 사후 8년을 견딜 수 있었고,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사후 그녀의 일기장에서 발췌했다는 조현예의 글은 한 곳만을 쳐다보는 해바라기같은 글이어서 읽는 내내 마음이 아려온다. 그녀의 글은 사진에 질감을 느끼게도 해주고, 사진에 햇볕을 쬐여주기도 하며, 또 어쩔 땐 사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사진과 글은 둘인듯 하나이고, 하나인듯 둘이다. 서로 각자의 마음과 눈에서 나온 글과 사진이 이토록 잘 어울려서, 그래서 더 눈물겹고 안타까운 책이다.
이런 날, 이렇게 고요한 날,
이런 시간, 이렇게 깊은 시간,
한 사천 밤쯤 되었을까
너를 그려본 시간,
혼자서 꿈을 꾼다
나는 현실이고, 너는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