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이 자라날 때 문학동네 청소년 4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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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저는 존재감이 없는 아이인가봐요. 막 친구들끼리 수다떨고 놀다가 제가 다가가서 말을 하면 제 말이 안 들리는 것처럼 친구들이 저를 대해요. 제가 벽, 같은가봐요."

하얀 벽
벽이 말한다.
-너도 이제 혼자구나
-내가 왜 여기 있냐구 글쎄 생각나 네가 나보고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거 같다고 했었어
-내 이름은 없었어 신학기가 되어 모두들 새 반을 배정 받았는데 내 이름을 아무도 부르지 않았어 내 이름이 없는데 아무도 알지 못했어 잊어버린거야 나를 그때 난 정말 벽이 되었어


놀란 나는 말문을 겨우 연 조카가 고마웠다. 한달간 조카와 같이 강변을 거닐기도 하고, 식당에 가서 뭘 시켜먹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 결과 드디어 조카가 입을 열었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순식간에 내성적이 된다. 준비없이 당하는 경우엔 더더욱. 그토록 밝고 화사하던 아이가 어느결에 성격이 백팔십도로 바뀌어 어두침침한 아이로 변해서 걱정이 컸는데 아이의 말문으로 치료의 첫 신호탄이 울린 것이다. 알고보니 왕따 시키는 아이는 작년까지 조카의 친한 친구였다. 집안이 가난하고 공부도 잘 하지 못하던 아이는 자기와 정반대이며 선생님께 이쁨까지 받는 조카와 잘 지내면서도 늘쌍 눈에 가시로 조카를 여겼나 보다. 학년이 바뀌면서 그 아이는 사춘기를 겪으며 친구를 왕따시키는 방법을 터득했다.

손톰이 자라날 때
선주가 뺨을 감싸 쥐었다. 손이 얼얼했다. 내가 선주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마치 궁지에 몰린 쥐새끼, 아니 고양이처럼. 선주는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툭 튀어나온 눈을 커다랗게 뜨고 벌벌 떨면서 눈물만 줄줄 흘렸다. 놀란 건 선주만이 아니었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서 있었다. 심장이 조그맣게 오그라든 채 굳어 버린 것만 같았다. 선주의 뺨에 난 손톱자국이 독이라도 오른 것처럼 벌겋게 부어올랐다.

평소에 담임이 조카에게 관심가지는 게 싫었던 아이는, 조카가 대장놀이에 기질이 없는 걸 눈치챘다. 선생님이 잘 해주는 애는 대부분 그 반에서 대장질을 하는데 개중에 순한 애들은 그걸 못한다. 그렇담 조카를 왕따시키는 건 식은 죽 먹기. 먼저 다른 친구에게 조카 흉을 본다. "지가 뭘 그리 잘나서 저리 잘난 척이다니? 공부 좀 잘 하믄 다인가? 선생님은 뭘 보고 쟤만 이뻐 한다니? 아이 재수없어." 이런 식으로 몇 마디만 오가도 동조자가 생긴다. 그 다음번엔 우리 노는데 조카가 끼일 때 슬쩍 조카 말을 몇 번 씹어준다. 그럼 같이 흉보던 다른 애들도 슬쩍 같이 씹게 되는데 이때 조카의 반응을 살펴서 조카가 대놓고 발끈하면 시기를 조절해야 되고, 조카가 상처를 받은 눈치면 본격적으로 따를 시키기 시작하면 된다. 사람 한 명 왕따 시키는 거, 일도 아니지 뭐. (물론, 내 속이 그리 편치는 않다구. 나도 알아. 친구를 괴롭히는 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거. 그래서 어쩌라구? 당신이 나를 알아? 나도 괴로워. 나도 괴롭단 말야. 그치만..나도..나도..얘처럼 그런 평안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살고 싶고, 나도 얘처럼 선생님에게 이쁨받고 싶고, 나도..나도..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 먹고 싶단 말야. 우유값이 없어서 징징거리는 엄마 목소리 더는 듣기 싫어. 싫다구..난, 어쩜 친구가..되고 싶었던..걸까?)

난 네가 되고 
예전엔, 내가 말하기 전에 주영이가 먼저 그 말을 했다. 그럼 나는 말을 하려다 말고 어색하게 웃곤 했다. 그럴 때마다 말을 삼키며 다문 입안에 이물질이 가득 들어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쾌하고, 불길하기까지 한 기분이. "내가 무슨 말이든 하려고만 하면, 네가 먼저 해 버렸잖아. 내가 할 말을 읽고, 일부러, 일부러 방해했잖아!" '그걸 이제 알았어? 병신 같은 년.'

자라는 성장기의 아이들은, 특히나 한국적 상황에 놓인 아이들은 스트레스가 무척 많다. 가난한 집은 가난한 집대로, 학원 순례하는 아이들은 또 그 나름대로, 그 스트레스를 풀 길이 없는 아이들. 그 스트레스는 어디로 갈까. 풀 때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동기에게 푸는 아이도 생기겠다. 아이에게서 자라나는 잔혹성. 아이는 순수하기에 동시에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 

고누다
난 그 교실에서 총을 쏜 거다. 20발의 총알을 가지고. 탕탕탕. 신나게 총을 쏘다가 마지막 한 발이 남았을 때, 누구나 그러하듯 나 역시, 잠시 뜸을 들인 거다. 아쉬운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던 거다. 내게 보라는, 마지막 총알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난 처음부터, 그리고 마지막에도 보라를 남겨 둘 생각은 없었다. 난 모두에게 손가락을 겨누고 있었으니까.

손가락으로 겨누어 총을 쏘면 순식간에 살아있는 생명체를 둘로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나. 나는 그런 능력으로 학급 친구들을 하나만 남겨놓고 죄다 쏘아버렸다. 둘로 나누어지자마자 진짜는 쏜살같이 가짜를 먹어삼킨다.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난 그 장면이 무척 잔인했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 총을 겨눌까. 이제 반에는 보라 한 명밖에 안 남았다. 마지막 남은 총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게 이런 능력이 도대체 왜 있는 걸까. 나는 왜 다른 얘들이랑 다를까. 왜 다른 얘들은 나와 놀아주지 않을까. 혹시, 내가 총을 겨눈 걸..친구들이 알까. 설마..내가 외롭다..거나 그래서, 보라를 남겨놓은 건 아니..겠지? 게다가 보라는 이미..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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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7 12: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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