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길 옆 조그만 마당가 손바닥만한 꽃밭이었다.
백일홍, 봉숭아, 맨드라미 때 이르게 핀 국화 몇 포기
식구들만 보려고 만든 화려한 꽃밭이 아니었다
길 가는 사람 누구나 그 앞을 지나는 사람 누구나 함께 볼 수 있게 울타리 없는 마당가 손바닥만한 꽃밭이었다.-30쪽
할아버지 요강
아침마다 할아버지 요강은 내 차지다
오줌을 쏟다 손에 묻으면 더럽다는 생각이 왈칵 든다 내 오줌이라면 옷에 쓰윽 닦고서 떡도 집어 먹는데
어머니가 비우기 귀찮아하는 할아버지 요강을 아침마다 두엄더미에 내가 비운다 붉어진 오줌 쏟으며 침 한 번 퉤 뱉는다.-31 쪽
누나
눈 내리는 날 시집을 가면서 포근한 눈 같은 마음도 가지고 갔어요
그런데도 어쩌다 찾아가보면 매형이 신던 양말 기워신고 누나는 입던 옷 뿐이었어요
누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학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고향 학골에 날아와 어릴 적 뛰놀던 길 돌아보는 그런 학이 되고 싶다 했어요.-42쪽
가을 까치집
올 봄 새끼 한 배 키우고 내내 비워 둔 가을 까치 집
잎 떨군 감나무 가지들이 꼬옥 감싸고 있다
맨날 쓸고 닦지 않아도 되는 나무 꼭대기 까치네 집 바람 맞아도 그만 비를 맞아도 그만 까치들 어디 가서 돌아오지 않는데
무슨 보물 단지 안은 듯 입 떨군 감나무 가지들이 꼬옥 감싸고 있다.-62쪽
소풍 날
정님이는 멸치볶음만으로 채워진 도시락이 부끄러워 구석에서 등 돌리고 가만가만 먹었다.
닭튀김, 소시지부침 철이른 참외와 토마토가 든 빛깔 고운 선희네 도시락 곁눈으로 몇 번이나 훔쳐보다가 또 침을 삼키다가 저도 몰래 얼굴이 달아 강물로 뛰어갔다.
누가 볼세라 등을 돌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얼굴을 씻었다.-104쪽
할 말
현숙이가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오더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래 무언데?
선생님. 있지요, 이번에 나 청군 좀 시켜 주세요. 4학년 올라올 때까지 한 번도 청군을 못 해 봤어요.-105쪽
소풍길 아이들
머리에 모자 등엔 과자 든 가방 동무들과 떠들고 웃으며 소풍을 갑니다.
길가엔 꽃다지꽃 냉이꽃 아이들 키처럼 낮게 피고
멀리서 바라보는 아이들은 그냥 꽃입니다.
소리 없이 바람에 쓸리는 꽃다지 냉이처럼 강둑 따라 늘어선 아이들 그냥그냥 꽃입니다.-112쪽
김옥춘 선생님
달려가서 선생님을 부르면 뒤돌아 서 있다가 우리를 꼬옥 안아 줍니다.
땟국물 흐르는 손 따뜻이 쥐어 주시고 눈 맑다 웃으시며 등 두드려 줍니다.
그럴 때면 선생님 고운 옷에 푹 나를 묻고서 선생님 냄새를 맡아 봅니다.
선생님을 선생님을 우리 엄마라고도 생각해 봅니다.-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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