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요강 -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보는 시 보리 어린이 4
임길택 글, 이태수 그림 / 보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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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길 옆
조그만 마당가
손바닥만한 꽃밭이었다.

백일홍, 봉숭아, 맨드라미
때 이르게 핀 국화 몇 포기

식구들만 보려고 만든
화려한 꽃밭이 아니었다

길 가는 사람 누구나
그 앞을 지나는 사람 누구나
함께 볼 수 있게
울타리 없는 마당가
손바닥만한 꽃밭이었다.-30쪽

할아버지 요강

아침마다
할아버지 요강은 내 차지다

오줌을 쏟다 손에 묻으면
더럽다는 생각이 왈칵 든다
내 오줌이라면
옷에 쓰윽 닦고서 떡도 집어 먹는데

어머니가 비우기 귀찮아하는
할아버지 요강을
아침마다 두엄더미에
내가 비운다
붉어진 오줌 쏟으며
침 한 번 퉤 뱉는다.-31 쪽

누나

눈 내리는 날 시집을 가면서
포근한 눈 같은 마음도 가지고 갔어요

그런데도 어쩌다 찾아가보면
매형이 신던 양말 기워신고
누나는 입던 옷 뿐이었어요

누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학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고향 학골에 날아와
어릴 적 뛰놀던 길 돌아보는
그런 학이 되고 싶다 했어요.-42쪽

가을 까치집

올 봄 새끼 한 배 키우고
내내 비워 둔 가을 까치 집

잎 떨군 감나무 가지들이
꼬옥 감싸고 있다

맨날 쓸고 닦지 않아도 되는
나무 꼭대기 까치네 집
바람 맞아도 그만
비를 맞아도 그만
까치들 어디 가서 돌아오지 않는데

무슨 보물 단지 안은 듯
입 떨군 감나무 가지들이
꼬옥 감싸고 있다.-62쪽

소풍 날

정님이는
멸치볶음만으로 채워진
도시락이 부끄러워
구석에서 등 돌리고
가만가만 먹었다.

닭튀김, 소시지부침
철이른 참외와 토마토가 든
빛깔 고운 선희네 도시락
곁눈으로 몇 번이나 훔쳐보다가
또 침을 삼키다가
저도 몰래 얼굴이 달아
강물로 뛰어갔다.

누가 볼세라 등을 돌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얼굴을 씻었다.-104쪽

할 말

현숙이가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오더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래 무언데?

선생님. 있지요,
이번에 나 청군 좀 시켜 주세요.
4학년 올라올 때까지 한 번도 청군을 못 해 봤어요.-105쪽

소풍길 아이들

머리에 모자
등엔 과자 든 가방
동무들과 떠들고 웃으며
소풍을 갑니다.

길가엔
꽃다지꽃 냉이꽃
아이들 키처럼 낮게 피고

멀리서 바라보는 아이들은
그냥 꽃입니다.

소리 없이 바람에 쓸리는
꽃다지 냉이처럼
강둑 따라 늘어선 아이들
그냥그냥 꽃입니다.-112쪽

김옥춘 선생님

달려가서 선생님을 부르면
뒤돌아 서 있다가
우리를 꼬옥 안아 줍니다.

땟국물 흐르는 손
따뜻이 쥐어 주시고
눈 맑다 웃으시며
등 두드려 줍니다.

그럴 때면
선생님 고운 옷에
푹 나를 묻고서
선생님 냄새를 맡아 봅니다.

선생님을
선생님을
우리 엄마라고도 생각해 봅니다.-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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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4 0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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