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인화 지음 / 세계사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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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단의 비구들이 그대를 나가세나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 나가세나는 무엇입니까? 그대의 머리카락이 나가세나입니까?
 대왕이시여.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몸에 난 털이 나가세나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손톱, 치아, 피부, 살갗, 신경, 뇌, 혹은 그외의 어떤 것이 나가세나입니까?
 아니면 이들 전체가 나가세나라는 말입니까?
 그러자 나가세나 존자는 그 어느 것도 아니라고 답했다.
                                      - 밀란다 왕의 질문(불교 경전)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던 화제작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 책은 당시를 사는 인간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미쳐 깊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던 문제 즉 내가 누구인지하는 자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주는 문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사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논란을 일으키기 까지한 새로운 문체와 구성과 특이한 시점은 너무나 매력적이기 까지 하다. 그 뿐인가. 한장의 첫머리에 삽입된 우리나라의 시인들의 시를 보면서 우리에게도 저렇게 좋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시들이 있었나하는 생각과 함께 우리문학의 멋을 독자들에게 알려줄 뿐 아니라 주제와 결부되어 더욱 주제의식을 드높이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글은 80년대 대학생이었던 인물들이 90년대를 맞이하면서 느끼는 감성과 내적인 고뇌를 여러 인물들의 독백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보다 나은 자아실현을 모색하는 과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비록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당시의 세태나 상황을 다 대표한다고 하기는 부족하지만 작가는 나름대로의 관점을 가지고 자신만의 자아관을 이야기한다. 의대출신으로 작가를 지망하며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란 작품을 쓰고 있는 중이면서 작품에 "인생이 내게 가르쳐준 모든 것, 나에게 생을 견디게 한 모든 것"을 담겠다는 은우는 이 글의 여러화자 중 단연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것같다. 은우의 조력자이며 담당비평가로 파쇼적인 성향에 지금은 제2의 다까끼 마사오(박정희)의 탱크소리를 기다리는 문수, 문제의식을 가지 활동가로 조직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규진, 규진의 여자친구이며 동지이지만 변화된 현실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정임, 소시민적인 인물들로 은우의 애인인 모범생스타일의 의사인 윤희와 방탕한 쾌락주의 의사 성규.

사실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나의 존재의 본질에 대하여 대답하기란 철학의 대가에게도 그리 쉽지 않은 질문 더 심하게 말하면 하나의 우문(愚問)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에 대해 말하기를 극도록 꺼리고 또 그것을 공적인 장소에서 밝히기를 매우 어려워하는 우리 사회의 답답한 풍토에서 사회현실이나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이야기 하기 전에 자기자신의 문제를 당당히 밝히고 해결애야 함을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이 글이 주장하는 자아회복에 대해서 많은 부분 공감하게 된다.

아쉬운 점은 이후 작가의 실망스런 행적이라 하겠다. 강준만 교수의 글에서 박정희를 예찬하는 이인화의 <인간의 길>을 파시즘의 길이라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도대체 이처럼 진지한 자아의 탐구자를 이토록 “邱시킨 원인은 무엇일까. 작가는 문수를 통해 우회적으로 愚衆들과 졸부에 대한 분노가 그 이유라고 말하고 있지만 진실성이 의심스럽다. 파시즘이란 자아확립이 미숙한 강력하고 폭력적인 인간을 영웅으로 숭배하고 동일시함으로서 자아도피를 하는 인간의 전형을 산출한다는 면에서 작가 이인화의 타락은 차라리 안쓰러워 보이기 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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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박완서 소설전집 9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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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처음 접했던 것은 아주 어렸을 적 휴일날 보여주는 텔레비젼의 방화프로를 통해서 였던 것같다. 당시 내가 좋아했지만 자주 볼 수 없던 유지인씨가 자기 동생에 대해 회상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했는데 왠지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인지 채널을 다른데로 찰카닥 돌려버렸다. 그리고 가끔 다시 돌려보는 식으로 그러니까 내용은 잘 모르겠고 가끔 오목이 역을 맡았을 이미숙씨가 절규하는 장면 그런 것들은 용케도 내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이런 하찮아 보이는 기억들이 아직까지 기억이 나의 인상이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한 번은 꼭 이 소설을 읽어보고 싶은 심정을 가졌음은 어인 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 2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야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어찌된 일인가?

박완서란 작가의 이름. 나는 지금까지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다.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왠지 모르게 유치해 보인다고 나 할까. 때때로 그들의 작품에서 강한 느낌이나 인상을 받을 때조차 왠지 남성작가들의 작품에 비해서 어려보이고 도저히 남자로서 공감이 안되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특히나 박완서씨의 소설은 아니지만 그가 쓴 몇몇 신문의 칼럼이나 수필집을 읽으면서 그와 나는 애당초 가치관 자체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책을 용기내어 읽어보니 내가 품어왔던 따뜻한 겨울에의 염원과는 거리가 있고 오히려 그런 환상을 무참히 깨어 놓는 작품이었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이 내는 중심주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매우 애매하였고 그로 인해 지금 이 순간도 키보드를 두드리기가 매우 망설여지는 과연 내가 이 작품을 잘 파악하고 있는지 자신없어 지는 감이 있으나 가히 오기를 부려 이 글을 적어본다.

아시다시피 박완서 작품의 주된 키워드는 속물근성, 소시민의 안일한 삶, 소외된 하층민, 물질 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우리들의 습관속에 깊이 스며든 위선과 거짓을 낱낱이 우리에게 밝혀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깊이 숨기고 우리들이 나날이 흘려보내는 무섭고 가슴시린 감정들을 소설에 정확하게 적용하고 있었고 밤을 새워가며 작가의 사상을 따라가 보면서 어쩌면 한 인간의 심리를 이다지도 꿰 뚫고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경이와 함께 전율감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정말 이 시대 한국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한 거장이 우뚝 서 있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이 글은 밥한그릇을 더 먹기 위해 전쟁통에 동생을 내 버린 한 7살 소녀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그리고 있다. 하나의 우화같기도 하지만 이 소녀가 커가며 장성해 가면서 결혼을 하고 얘를 낳고 하면서 점점 타락해져 가는 과정을 보면서 이 가공할만한 사건들이 실제로 우리 일상에서 비일비재한 일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여러 한계조차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은 아마도 성악설에 가까울 것같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악에 대해서 어느정도 인식을 할 수는 있지만 도저히 그것을 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들 자신의 악을 인정하면서도 작가는 이를 규제할 만한 사회제도적인 보장을 촉구하는데 까지는 도저히 이르지 않고 아니 그것을 회피함면서 한 개인의 그릇된 점들을 파헤치는데 전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누구라도 이 소설이 많은 사실들을 담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되더라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공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애시당초 이 작가의 관점은 너무 크게 치우쳐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루는 주제도 언제나 사회의 부정적인 면들에 시각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이러한 문학의 최종적 귀결점을 찾기는 아마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주제의 한계. 작가도 사람인 이상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의 부정적인 면들은 제한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작가의 저서가 넉넉잡아 한 수레쯤 된다는 것은 결국 작가가 이런 부정적인 소재를 찾고찾다가 나중에는 만들어 내기까지 해야 했다는 것을 누구나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예를 들어 이 소설이 페미니즘 소설인가? 작가가 많은 소녀팬(?)들을 가졌으니 그들에게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작가는 여기서 빈민가의 여자들은 자기가 잘못선택해서 지옥같은 수렁에 빠졌고 여성의 사회활동에는 많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난받는다. 그런데 왜 이런 소설을 박완서가 쓰면 페미니즘 소설이고 이문열이 쓴 소설은 반여성적으로 매도되어야 할까? 도대체 왜.왜.왜?
내 생각으로는 이문열의 <선택>이야 말로 진정한 페미니즘 소설로 생각된다.

끝으로 작가 자신도 1987년 판에 내었던 소설에도 이렇게 밝히고 있다는 것을 밝혀 두고 싶다. 작가가 그린 것은 삶의 어두운 현실이었지만 정작 독자들이 꿈꾸어야 할 것은 그 너머 참으로 있어야 할 세계라는 것을 말이다.

작가의 재능에 비에 "대안"이랄 것이 없었기에 아쉬움을 이렇게 거칠게 토로해 본다.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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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1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가형 옮김 / 해문출판사 / 199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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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아가사 크리스티는 추리의 여왕으로 불릴 정도로 가장 많은 추리소설을 남긴 사람들 중에 한사람이며 작품도 일정 수준 이상은 된다.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가 아마도 추리소설을 땔 때 쯤인 초등학교 육학년 때 시립도서관에서 읽었던 것 같다. 추리소설로서는 좀 시시껄렁한 이야기겠지만 이 책의 범인은 널리 알려진대로 사람의 심리를 교묘히 조작함으로써 자신의 살의를 조용히 달성하는 마각을 드러낸다. 물론 그범인은  정말 인생사에 닳고 닳은 늙은 이란 점이다. 언제나 남을 배려하는 듯한 차분한 말속에 엄청난 살의가 나타난다. 결론은 뭐였더라.

아가사 크리스티의 만년의 작품으로 인생과 범죄에 대한 통찰이 잘 나타나 있다. 작가는 아마도 추리작가로 만족하기 보다는 인생에 대해 조금은 달관적이고 관조적인 생각을 작품에 담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과 비슷한 작가의 소설로는 <쥐덫>이란 작품이 있는데 같이 읽으면 좋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파문을 일으킨 소설에는 <애크로이드 살인>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완전범죄를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모든 최고의 범죄 중의 최고의 형태인 것이다.

동양적인 말로 "借刀殺人"이라 하던가. 젊은 사람들은 이런 류의 늙은 노회함에 잘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읽지 말고 좀 더 커서 읽었더라면 좋았을 소설.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하네.

그리고 잠시 크리스티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며 만년에 이런 소설을 썼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연륜에서 오는 삶에 대한 통찰 때문이었을까. 크리스티의 젊은 시절을 보니 멋지게 생긴 미녀에 재능까지 겸비한 듯 하지만 정작 첫 남편 크리스티와는 별로 사이가 좋지 못해 자살까지 시도했었다고 한다. 미인은 박명이라고 그 때 죽었으면 그의 소설들을 볼 수가 없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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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메를 고쳐매며
이문열 지음 / 문이당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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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문열이란 작가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아마도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그 때 우리 학교는 그냥 평범한 작은 여대 옆에 있었기 때문에 그 주변에 형성되었던 작은 상가들을 통해서 대충 대학생활에 대한 어떤 환상을 키울 수 있었다. 그 때 카페나 레스토랑에 붙어있는 조금은 이질적은 광고 포스터에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란 글씨가 퍽이나 낭만적으로 씌어 있었다는 것을 나는 기억한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386세대의 젊은 도덕선생님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는데 난 그것을 아주 잔소리처럼 싫어했다. 저 선생님은 저런 걸 우리들에게 읽히면서 무슨 특권의식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라고 나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용도 뭣도 없는 이미지 뿐이라는 것을 이미 소년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문열이 이번에는 이 책을 통해 자신과 그간 논전을 벌여온 젊은 논객들을 또 다시 비판하면서 우리같은 젊은 세대에게 또 잔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이미지가 어쩌고.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이미지를 이용해서 우리들같은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털어간 사람이 바로 자신이 아닐까. 또한 젊은 논객들에 대한 아쉬움의 표시인지 준엄한 꾸짖음인지에 대해 공감을 안 하지도 않지만 그런 비판을 이문열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어떤가? 아마도 동일한 오류를 이문열 자신도 범하고 있을 것이다. 이문열이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이 자기만큼 지적인 탐구도 열심히 하지 않은 "천둥벌거숭이들"이기 때문이지 다른 잘못이 있어서는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다. 공자는 자기가 실천해 익숙치 않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하였거늘, 오늘날 한국 사회가 이꼴인 것이다. 누구 한사람을 탓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끝으로 나도 작가에게 잔소리 좀 해 보고 싶다. 듣기는 싫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이 잔소리이니 말이다. 작가가 과거에는 자신을 비난한 사람들이 선배나 또래였는데 지금은 천둥벌거숭이라고 하는데 행여 작가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상황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나이값을 해야 하는 법이다. 그 때 선배들이 베푼 관용은 훌륭한 것이나 이제는 상황이 바뀐 것을 작가가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젊고 참신한 사람들에게 그런 관용을 바란다는 것은 작가의 미련이다. 오히려 작가 자신이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 나이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아마 누가 더 바른 소리를 하건 간에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일반적 규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계속해서 철없는 아이로 살겠다고 법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계속 그리하면 여생이 편치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번 책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늙은이들의 책은 이만 읽으련다. 늙은 이들의 잔소리가 싫어 이번 글을 쓴다. 이 글을 빌어 나의 이런 결심을 피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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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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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독도상공에서 영공을 침범한 일본 비행기와 우리 공군과의 충돌이 있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일본 소설에 대한 좋은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여전히 망설여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이 어떻게 되든 간에 일본 문화를 정확히 이해하는 일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본과 우리나라가 서로 에게 자극받아 경쟁을 통해 더욱 발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난 원래 일본에서 들여오는 것들은 그다지 좋게 여기지 않았는데 상실의 시대를 일독하면서 그러한 나의 좁은 울타리에 갇힌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처절하게 깨달아야만 했다. 한편 한국의 문화 풍토를 생각하면서 한숨 짓게 만들었다. 도대체 우리나라에서는 왜 이렇게 훌륭한 소설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한국 작가들은 일본 작가들에게 조금은 배워야 할 점이 있는 것 같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일본 작가들은 뭔가 독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전에 충분한 준비기간을 거치는 것 같다. 그것은 하나의 성실성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정말로 생각하고 느끼고 이해했던 것들을 독자들에게 내놓는 것이다. 그런데 학국의 작가들은 그런 성실성을 갖춘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대부분의 한국작가들은 뭔가 성급하고 생경하고 남의 말은 들을 줄 모르고 항상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다. 그래서 깊이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이런 것이 한국작품을 무턱대고 매도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에대한 감상. 내가 얘기안해도 수 많은 독자들이 리플을 달아노셨기에 더이상 덧붙일 것도 없다. 단지 한가지 본인이 비틀즈 매니아로서 한가지 느낌을 표명하자면 나는 그 머시기냐 노리젼 우드란 곡을 들으면서 전혀 "상실의 비애"를 느껴 본적이 없고 소설을 읽고도 느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매우 황홀한 발라드 풍의 노래인데 작가는 어디에서 비애를 느꼈다는 것인지 다소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외에는 매우 좋은 사색과 감정들이 이소설에 있었다. 나도 시간이 나고 외국어를 잘 하면 작가한테 편지를 보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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