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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개역판 까치글방 86
니콜로 마키아벨리, 강정인 외 옮김 / 까치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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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를 생각하면 항상 플라톤이 떠오른다. 아닌게 아니라 플라톤이 그의 주저인 <국가>에서 밝힌 그의 메인 관심사는 역시 올바른 국가 건설의 방법이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로마사 논고> 등을 통해 이 분야에 대한 그의 숨길 수 없는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위대한 국가 로마에서 이런 국가의 특성들을 열심히 벤치마킹하고자 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극과 극은 통해서일까? 각각 지독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대표하는 그들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관심사 이상으로 많은 면에서 두 인물은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정치적 실패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시대에 있어 조국 이탈리아와 아테네는 각기 국운은 이미 기울어지거나 쇠퇴를 시작하다. 이 점은 두 사람의 가슴에 그들의 정치적 야심의 좌절과 함께 많은 상처를 남긴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조국의 영광을 재현코자 하려는 뜨거운 애국심이야 말로 저작의 주요 동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점이라면, <국가>의 경우 이러한 노철학자의 식지 않은 이상국가에 대한 열망이 느껴지며 <로마사 논고>에서 이미 자신의 정치적 야심이 좌절된 데서 오는 실의 때문인지 그 논조에서 어떤 비감이나 비관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주장대로 필요한 경우 악한 수단을 쓸 수 있음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별로 크게 놀라지는 않는다. 우선 인간관계든 국가간의 문제에 있어서건 경쟁이란 항시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이런 본능을 뿌리 뽑지 못하는 한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때로는 악한 수단이 동원 될 있는 것은 냉엄한 현실이다. 단지 사람들에 의하여 정당하지 못한 승리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인 것이기는 하다. 어떻든 간에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소 순진한 인간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은 될 수 있겠지만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타인에 대한 "악의"만으로는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오히려 고금의 역사는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다 오히려 그 미끼에 걸려 나라를 망친 인물들을 무수히 예시하고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악한 수단이건 선한 수단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은 본질에 벗어나는 말류의 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오히려 검은 고양이건 흰 고양이건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 아닌가?

사실 이 책은 이 책의 내용보다는 이 책이 출판되고 읽혀질 수 있는 시대에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종교적으로 불온한 내용이 진지하게 검토될 수 있는 이러한 사회는 바로 근대로의 발전의 토대가 아닌가?

비록 이 책의 주장들의  현재적인 가치에 대해 여전히 의심이 많지만 플라톤이 가졌고 마키아벨리가 공유한 바 그 열정에는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과 오늘 날의 한국과 그들의 시대를 감히 한 번 비교해 보고 그에 대해 진지하고도 건설적으로 비판적 토론을 한 번 해보고 싶다. 그러나 오늘 날 한국의 지적 풍토에서 쉬운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나 자신도 이 분야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회의적이다. 열정만으로 될 일은 아니다.

역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사실 이 책이 그리 탐탁치 않게 느껴지는 것도 거꾸로 그 놈의 열정이 너무 치나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마키아벨리의 경우 그의 정치적 좌절에 대한 실의와 조국의 현실에 대한 컴플렉스가 과학적이기 보다 감정적으로 세상을 그리는게 한 것은 아닌지. 그런 점은 이성을 그다지 강조하는 플라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한 권의 책으로 현대의 복잡한 국제정치를 설명하려 하지말라. 따지고 보면 마키아벨리즘도 알아두어야 할 정말 협소한 한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이 넓은 만큼이나 더 정확히 알고자 한다면 보다 열린 마음과 그에 따른 성실하도 깊이있는 연구가 뒷받침되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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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 열전 1 동양고전신서 25
사마천 지음, 박일봉 엮음 / 육문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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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을 위대한 역사가라고 흠모해 왔던 나는 인터넷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위대한 역사가인 만큼 오직 사실만을 기록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의혹이 가는 부분이 적지 않음을 느꼈다.

특히 우리 역사에 관한 부분이 그렇다. <조선 열전>. 이것을 첨 읽었을 때 교과서에 나온 얘기가 이걸 보고 쓴 것인가 부다 하면서 그 역사적 사실의 진위 여부는 긴가민가했다. 그래도 사마천이 쓴 것인데 하는 마음에 조선을 멸하고 세웠다던 한사군이 한반도에는 없었을 거라고 무심히 생각했다. 그러나 인터넷 상에서 관련 자료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인터넷 자료를 읽고 다시 한번 사기의 <조선 열전>을 정독해 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왕험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은 없었다. 오히려 조선왕 우거가 내란으로 망했지만 황험성은 당당히 버텼다는 기록만 있었다. 사마천 조차 왕험성의 함락은 끝 내 언급하지 않고 그 토착지배자를 군후로 삼았다는 것으로 이 기사가 끝나고 있는 것이다. 그저 토착인을 책봉했다는 것은 잘 춰주어야 조선과 명의 관계가 될까말까한 일인데? 사마천은 전쟁의 승패나 원정의 성패에 대해는 끝내 침묵하고 있으므로 무제의 조선 원정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한사군은 완전한 픽션이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사군 운운하는 것은 마치 한나라에 마치 황우석같은 거짓 공로를 보고하는 자들이 있었으리라 생각했지만, 사마천은 또한 원정으로 참혹하게 처벌된 무제의 장군들을 제시했다. 즉 무제역시 원정의 실패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럼 역사를 왜곡한 것은 사마천 자신이었을까. 어쩜 무제 자신이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오히려 실패를 승리로 바꿔 기록을 남길 사가를 원했기에 그 본보기로 대대로 유력 사관 가문의 사마천을 그토록 불구로 만들고 싶어했던 것은 아닐까?

무제는 원정의 실패를 알았다. 사마천도 진실에 관한 최소한의 실마리는 남겨 놓았다. 그는 어떤 압력때문에 진실을 기록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한사군은 사마천 당대로 부터 수백년간 중국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데 이는 아마도 그 지역에서 한과 조선을 오가며 허다한 거짓보고를 해 온 중국인이나 그에 영합하는 조선인들 때문일 것이다. 이는 조선이 문자를 아는 사람이 드믄 문맹지대였던 시대에나 가능한 사업이었을 것이다. 역사기록이 뚜렸해지는 4세기에 이르면 낙랑군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인데 이는 문자상으로만 존재했던 것이 한반도에서 문자기록이 보편화되자 그야말로 문자상에서 없어지느 것이라고나 할까? 아직도 "학문"의 그럴듯한 탈을 쓴 신판 사대주의자들이 식민사학의 영향이 너무도 뿌리깊고 한국에서 나의 이 주장을 야유할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칭해준 낙랑군의 마지막 태수가 누구더냐? 그것은 백제의 근초고왕이 낙랑의 마지막 태수가 아니더냐. (이는 백제의 요동요서경영과 관련된 것이다) 그보다 삼백년 전에는 무엇이 달랐을 거라고 변변한 학식도 없이 진정 너희는 국가의 체통을 그닥 손상하고 싶더냐? 그런데도 낙랑군이 한반도에 존재했다고 학문의 탈을 뒤집어 쓰고 우길 것인가? 너희가 학문적 실증을 외치지만 너희는 당시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중국사기꾼의 기만도 분별할 줄 모르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졸개들 뿐이다.(오늘 따로 유난 흥분되는구나)

이런 점만 없다면 정말 사기는 정말 세계에서 몇 손가락에 드는 명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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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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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역사 교과서 맨 앞 장에 마땅히 와야 하지만 고교과정에서는 중국사에 밀려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다고 막연히 생각해 왔는데 최근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어 수메르를 다시 보게 된다. 하나는 수메르인들이 똑같은 비중으로 설명되는 황하문명에 비교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양의 사료를 남겼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바로 그들역시 인더스 문명을 창조했던 드라비다인들과 더불어 우리와 비슷한 언어구조를 가진 교착어를 쓰는 민족이었다는 점이다. 빙하기가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기 부터 엄청난 문명을 일으켜 그 역사와 문화가 이처럼 생생히 전해지는 것만도 경이인데 그들이 우리 한민족과 관계가 있는 친척벌의 민족이라는데 대해 놀라움에 더해 어떤 민족적 긍지마져 느끼게 하였다. 사실 참다운 문화인 문명인으로서 한국인의 자격에 대해 심한 비관의 의혹을 품던 나에게 이것은 하나의 희망의 메세지였다.

문학적 가치에 대해 조금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이 책 역시 놀라움의 연속이다. 특히 이 구약의 창세기가 이 서사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이 그러하다. 사실 수메르의 다른 문헌들을 보면 수메르 이하 메소포타미아의 명멸했던 수많은 신화와 설화들이 성경에 도용되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남긴 성경을 무시하는 바는 아니지만 수메르 당대에 이스라엘은 이름조차 없는 변방의 무명의 유목민에 불과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여자가 남자의 늑골로 만들어졌다는 것 역시 수메르 이래의 메소포타미아의 오래된 민담임은 물론이고 책을 한 번 쭉 읽어보니 여자란 존재를 문명에 있어서 퇴보적인 그 무언가로 보는 시각이 많아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어색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 성경을 쓴 사람과 길가메쉬를 쓴 사람을 싸잡아 "마초"로 보려한다면 그것은 극히 편협한 시각이오 표피적 사고 방식일 것이라고  다시 반성하게 된다. 뭐니 뭐니 해도 수메르 시대는 원시공동체사회가 노예제 고대국가 체제로의 이행을 완결한 시대라는 배경을 가졌음을 이해해야 한다. 당시 수메르의 비옥한 초승달지대는 주변의 야만인들이 출몰하는 산악지대에 외로운 문명의 섬이었다.  축척된 식량과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을 이들 야만인들로 부터 지키는 일 즉 전쟁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또한 여기 나오는 길가메시 역시 무엇보다도 아마 전쟁을 잘하는 인물인데 이러한 인물이 오늘날의 관점에 있어 조그만 흠이 있다고 그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시각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런 용맹함이 바로 문명을 지켜낸 힘이었음을 어느 누가 부인할까. 나는 이렇게 이 글을 문학적인 관점 보다는 고대의 사회사적인 면에 촛점을 두고 읽어 보았다.

문학적인 면에서의 느끼는 바라한다면 이러한 같은 민족의 영웅이 가진 빛과 그림자라고 할 만한 것이라고나 할까. 그보다 2500년 이후의 인물인 중국초대 황제가 된 시황제 영정이 정력적이고 특출난 지략을 짜내 마침내 천하통일을 이루었으나 그 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방탕히 지내는가 하면 불노초를 구하려했던 것 과 마찬가지로 길가메쉬도 수많은 적들을 원정에서 무찔른 아마 진시황만큼의 영토는 아니더라도 당시의 수메르 도시국가 몇개를 많이 병합한 위대한 인물임을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정력과 능력 그리고 지력이 갖추어져야 하지만 그러한 반면에 그 역시 죽음 앞에서 번민과 갈등을 거듭하여 현세적 영화를 지속하려고 한다. 특히 평생의 정복싸움의 고락을 함께한 동지 엔키두의 죽음앞에서 마침내 그의 참아 왔던 인내심이 폭발한다. 하지만 적어도 3분지 1은 그 역시 인간이기에 이를 받아들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나아가 이는 길가메쉬를 포함한 인간 보편의 문제로서 우리 모두 함께 인생에 대한 철학적인 각성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여 보다 높은 문화인이 될 것을 요구 받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동일한 고뇌를 그리스도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야훼가 그에게 그러한 시련을 주었고 제우스가 오딧세우스에게 귀향의 9년간의 시련을 주었든 아누 이하 수메르의 제신들이 길가메쉬을 시험하고자 했던 이유도 분명하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신의 시련이며 어느 누구도 그것을 회피해서는 아니되는 성질의 것이다.

비록 이 작품의 문학성을 어느 정도로 낮춰 보더라도 이 글을 통해 수메르 문명이하 오리엔트 문명이 기간상 결코 현대문명에 뒤지지 않는 만큼 섣불리 무시할 수 있는 그런 문명은 아니라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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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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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책을 어느 류로 묶어야 적당할 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요즘 인문사회 계통에는 그 만큼 흥행에 성공하는 작가가 없는 듯하다. 또한 그는 상업주의를 자신이 굳이 지양할 뜻이 없음을 공언하고 있으며 <인물과 사상>단행본 시리즈이래 과도한 다작에서 오는 작품하나의 퀄러티에 대한 독자들의 의구심을 쉽게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많은 강빠(?)들을 거느린 독서시장의 거물로 성장해 있다. 이는 오히려 우리나라 인문사회 쪽으로 정말 실력있고 성실한 작자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런 류의 가벼운 농담을 곁들인 현대사류들이 권위있는 교양서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아닐까? 그 나마 다행인것은 강준만의 자료실에는 학자들의 논문은 물론 일반 대중매체, 역사적 사료가 될 만한 갖가지 자료들이 무려 1만여 개의 테마별 파일 속에 정리되어 있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비전공자인 강교수도 한국현대사를 논할 자격은 있지 않은가 싶다.

한국현대사에 관하여 대학시절 기억나는 책은 강만길의 <고쳐쓴 한국현대사>,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정도다. 지금와 생각하면 강만길의 책은 너무 학술적이라 따분하고 박세길은 친북적이고 다분히 선동적 관념사관으로 문장이 거칠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강준만의 책은 흥미 본위의 사건을 많이 첨가했으며 저자 자신의 주관적인 역사의식이 과도하다고나 할까. 그는 마치 역사상의 실존인물들이 자신의 취향과 기호에 맞추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한 면에서 그의 독특한 양비론이 이 책 전편을 휘감고 있다. 박정희의 기회주의도 문제지만 장면의 무능도 그에게는 도저히 봐줄 수 없는 문제다. 춘추전국의 대사상가인 한비자는 요를 칭송하는 동시에 순이 풍속을 바로잡았다는 유가의 주장을 모순이라 하였다. 그런데 강준만은 쿠데타세력과 장면을 번갈아 칭찬하기도하고 비난하기도 하는점이 의아하다. 저자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면 과연 저자가 516을 긍정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대한 것이다.

어쨌든 나름대로 강준만은 균형적인 입장에 서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나름대로 박정희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면들을 실었고 장면을 위한 상당한 분량의 변명거리와 또한 그의 한계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저자의 서문에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는 박정희를 말하여 마치 한국적 기회주의자의 대표인 듯이 묘사했는데 나는 그것이 저열한 포퓰리즘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박빠라도 된 듯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나도 박정희를 별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의심할 바 없이 박정희는 합법적 민주정부를 폭력으로 뒤엎고 민중위에 군림한 폭군이고 독재자이며 옛날같으면 삼족을 멸할 역적이다. 하지만, 박정희를 좀더 깊숙히 연구해 본 사람이라면 그런 이면에 나라의 대통령으로서는 할일을 했다는 점을 쉽게 무시할 수가 없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박정희에게 침을 뱉기가 망설여 진다. 요를 말하면 윤보선이 516을 올것이 온 일종의 당위라 인정하여 당시의 상황을 말했듯 그 이후의 상황도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할일을 한 것 뿐었다. 나는 박정희정도의 인간을 가지고 기회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에 찬성할 수가 없다. 물론 포퓰리즘적으로 표피적인 면만 들여다 보면 천왕에게 혈서까지 쓰고 황군 장교로 자원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민족지상과 민족적 민주주의를 외쳤으니 대단한 위선이고 기회주의라고 봐줄 수도 있다. 인간이기에 물론 실수도 있었고 대통령 한 번 더 하려고 지역감정까지 부추긴 야비함도 있었지만, 박정희시대를 잘 들여다보면 의심할 바 없이 그가 대통령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최선을 다한 사람과 기회주의자가 동일시 될 수가 있는지 한국적 포퓰리즘을 오히려 단죄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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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집 한길그레이트북스 52
조식 지음,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옮김 / 한길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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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남명 조식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뜨겁다. 이유는 아마 그 동안 남명 사상이 퇴계와 율곡에 비해 크게 과소평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남명하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따라서 퇴계의 제자라고 아는 사람도 있으나 사실 그는 퇴계와 동갑인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아직도 그가 조선후기 활동했다는 이유로 그를 성리학자의 범주에 귀속시키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이것도 좀 그렇다. 남명의 거친 글들을 대하면 그는 결국 우리가 말하는 율곡과 퇴계의 조선성리학에 대한 비판론자이자 비관론자였다는 것을 이처럼 알 수 있다. 나는 남명의 글들을 읽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조선성리학을 비판하는 것과 같은 관점이 이제 개화된 세상에서나 사람들의 인식이 깨어져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발생한 즉시 그 단점이 적나라할 정도로 실랄하게 공격당했던 매우 자명한 관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실린 남명의 을묘사직서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하겠다.

그런 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명이 퇴계에 보낸 서찰 한 편인데 당시 퇴계와 고봉간의 사단칠정론을 두고 하는 듯한 남명의 언급이었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며...>

글을 읽어보면 정말 실랄한 비판이었다. 그리고 단성현감 사직소에서는 당시의 혼란한 실정에 대해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오늘 날 우리가 조선후기의 역사를 보더라도 이것은 하나의 예언과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조식은 율곡이나 퇴계처럼 소위 천리를 담론하는 글들을 짓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소신이었기도 했지만. 또 그의 별명이 칼을 찬 유학자 였다는 것도 기억할 만하다. 실록에는 그가 늘 방울을 차고 칼을 턱에 받치고서 자신의 마음가짐을 다잡곤 했다한다. 정말 이런 정신으로 바른 말을 했으니 정신이 번쩍 들어 정말 학자로서 효과가 컸을 것이란 생각이다.  오늘날 나태한 수험생들이 있다면 대입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다.

그와 그의 문도들의 활약을 극화한 <정인홍과 광해군>이란 조여항씨가 지은 소설이 있는데 극적인 효과를 위해 상대당파에 대해 지나치게 깍아 내린 것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런대로 아주 거짓은 아니다. 한 6할은 진실이라고 보장할 수 있다. 당세의 영웅이었던 대유 조식과 의병장 정인홍을 저버린 역사에 대해 나역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은 없다.

또, 성리학에 대해 이런식으로 한마디 하자면 이상하게 아직 우리사회에는 아직까지 아주 니까짓게 무엇을 하느냐는 식으로 호통을 치며 훈계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이런 분들 때문에 정말 피곤하다. 대부분 그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들이다. 조식과 더불어 나는 그들에게 역시 분개한다. 하나는 그들의 우물안 개구리식 신토불이 사상과 둘째는 그들의 개구리 세계관이 가져온 학문적 졸렬함. 전자에 나는 분개하며 그들의 엉터리 학문에 대해서 전혀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다. 정말 이 자리에서 조선 성리학을 변호하고 싶은 분들께 꼭 권하고 싶은 남명의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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