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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삼의 피
박종화 지음 / 어문각 / 1995년 9월
평점 :
절판
역사소설로 유명한 박종화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것이 이 <금삼의 피>라고 생각하기에 수십번씩 이를 읽고 또 읽어본다. 이 책을 통해 본 연산은 스스로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 나 온갖 황음 방탕한 짓을 실천에 옮기는 폐덕한 군주이지만 위악(僞惡)을 할 망정 위선의 역겨움은 보여주지 않는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고금에 그 누구보다 효성스런 아들이지만 그 효도로 인해 폭군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 그의 타고난 바 딜레머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폭군으로서 역대 어떤 왕들에게도 감히 비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그에게 있다. 요즘도 정치권에서 대통령을 정적들이 궁예나 광해군 등에 비해 공격하는 꼴은 보았어도 연산과 비교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아마 한국사에 전무후무의 대폭군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숙한 인간에게 있어도 그가 어린 나이에 모후의 사사를 어렴풋이 듣고 충격을 받고 다시 십수년 후의 외조모 신씨 부인에게서 어머니의 피묻은 금삼을 건네 받는 장면에서 안타까움의 연민어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나 같은 이의 설명보다는 저자 박종화가 직접지은 서사가 이 책을 소개하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여기에 옮겨본다.
<만백성을 울리고 육충혼(六忠魂)의 피를 뿌려 천고의 긴 한을 품으신 채 영월(寧越) 청랭포에 외롭게 이슬과 같이 쓰러지신 단종대왕(端宗大王)의 험악한 풍파도 이제는 한마당 꿈, 해와 달이 동쪽 하늘과 서편 산 마루로 숨바곡질하는 동안에 세월은 흘러서 사십 년(四十年)이다.
한번 가신 왕손(王孫)은 다시 돌아올 기약이 묘연하건만, 염량세태에 흔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이야 다시 누가 있어 옛일을 생각이나 하랴.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이란, 진국명산 만장봉에 청천이삭출 금부용(鎭國名山萬丈峯靑天削出金芙蓉)이라 하던 높고 높은 왕궁(王宮)의 진산(鎭山) 북악이 우줄우줄 옛 모양 그대로요, 노들들 남쪽 조그마한 언덕에 임자 없는 육 충신(六 忠臣) 여섯 개 무덤이 천추에 억울한 한(恨)을 호소할 길이 없으매, 밤마다 밤마다 꿈틀거려 흐르는 강물을 향하여 추수한 외마디 곡성을 애처롭게 부르짓어 강변 어부한이의 가슴을 선뜻선뜻하게 할 뿐이다.
부귀영화를 뺏앗아 만년이나 누릴듯, 후세의 비평을 듣는 단종의 삼촌 세조도 겨우 열세 해 만에 호화로운 꿈도 한줌의 흙을 보태었을 뿐이요, 그의 원자(元子) 덕종(德宗)은 세조 생전에 참혹한 꼴을 본 것이매, 손도 꼽지 않으려니와, 둘째이신 예종(睿宗)이 또한 겨우 왕위에 오르신지 일 년에 이 세상을 버리시니, 나이 겨우 스무살이신 예종이 장남한 왕사(王嗣)를 두실 리 없다. 세조비 정희왕후(貞憙王后)의 명을 받들어 덕종의 둘째 아들이신 자산군(者山君)을 왕위에 모시니 곧 성종(成宗)이시며, 임금 노릇 하신지 스물 다섯 해, 춘추 서른 여덟에 승하하시니 원자 연산(燕山)이 왕위에 올랐다.
때는 바야흐로 태평성대, 영특한 임금 갸륵한 어른으로 존숭을 받으시는 성종으로도 호색이 빌미가 되어, 비빈 사이에 질투의 불길이 일어나고, 나중에 세자의 어머님이요 곤전마마이신 막중한 왕비를 폐위시키고 또 사약을 내리니, 백성의 집인들 어찌 이러한 흉변이 있으랴. 한 지어미 원한을 품으매 오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거늘, 막중한 왕비어니 종묘 사직이 어찌 위태치 아니하랴.
호곡해 울 때마다 눈물 씻은 손수건, 눈물은 다하여 피눈물로 변하니, 비단 수건에 점점히 북은 핏자국 물들고 물들어 퇴색되어 변했다.
위에서 내리신 사약을 받고 통곡할 때, 친정 어머니 신씨에게 당부하기를,
"동궁이 내내 탈 없이 자라나거든 부디부디 이 수건 전해서 주오. 철천의 이 원한을 싯겨주오." 독약을 마시고 한많은 세상을 등져 버렸다.
밤 말은 쥐가 듣고 낮 말은 새가 듣는다. 아무리 구중 궁궐 깊은 속에 금지옥엽으로 감추어 기른 왕자인들, 당신 생모의 이 참혹하게 돌아간 정경을 눈치 채지 못하랴.
영특하다 하던 연산은 드디어 마음이 변하여 나중에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첫 정사가 당신의 어머님 원수를 갚는 일이요, 둘째 정사가 황음 방탕한 짓을 주저 없이 하는 일이다.
산천초목이 떨지 않을 수 없고, 벼슬아치 선비들의 목숨이 가을 바람에 휘날려 떨어지는 낙엽과 같다. 황음방탕하니 재물이 소용되고, 재물이 소용되니 백성을 긁을 수 밖에 없다. 원성이 하늘에 까지 뻗힐 듯하니 나라이 어찌 위태치 않으랴.
뻐꾸기 울음소리에 애끊인다 노래하던 단종대왕의 영혼이, 사십 년 뒤 이때까지 그대로 계시다면, 이 어지러운 모양을 어떻게 보실 것이냐. 노들 강변에 귀곡성 울어예는 사육신의 여섯 무덤 한많은 그 울음을 이젤랑은 거두시오.
부귀영화만이 한마당 꿈자리랴. 생 백년이 모두다 공(空)인 것을, 빈손으로 태어나서 빈손으로 돌아가니, 왕후면 무엇하고 장상인들 나을거냐. 구름가 듯 물흐르 듯 천고(上千古)에 남은 것은 허무 뿐이다.
지금에 연산(燕山)이 또한 간지 사백 삼십 년이다. 백의서생이 옛 역사를 뒤져거리다가, 넘치는 정렬에 끌리어 붓대를 잡아 소설을 얽으니, 일만 일이 모두다 공인 바에야 정(情)만이 그대로 남을 이 없다. 또한 한개 부질없은 장난이 아니고 무엇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