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소식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하늘연못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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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가찌 알라딘서재에 쓴 글 특히 문학에 관한 글들을 다 지우고 싶었으나, 그냥 내 지나온 역사라도 될 것 같아 그냥 남겨두었다. 동양문학이나 작가에 대해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 싶어하였음에도 소세키 조차 읽지 않은 상태였던 것을 보면 성급한 잘못된 글들이었을 것이다. 하긴 문학이 아니라 인물이나 상황 혹은 배경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겠다.

 

소세키의 책을 읽어가면 의외로 소극적인 불교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이는 세계관에 놀라는데 그 때문에 처음엔 무슨 염불외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탐정소설 같이 흥미진진한 장면이 없어 허전하면서도 요즘 문학에서 볼 수 없는 진지함이 있는 점은 좋았다. 확실히 한국문학이나 일본문학이나 지금 공장에서 찍어나오는 것 같은 상업성 있는 지금 문학보다는 이 초기 문학이 훨씬 생각해 볼 거리를 많이 던져 주는 것 같고 읽을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은 것 같다. 되도록 이 때의 문학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 책은 소세키의 단편선을 모아 이 전에 출판했던 <몽십야>를 두 권으로 분책해서 낸 첫 권이다. 한 번 교환요청했는데도 원래 상태가 안좋은 재고가 많은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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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F.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정현종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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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늘은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는 실제 이 책이 명작인지 아닌지는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대충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그토록 좋아하는 작품이라니 아마도 꽤 유익한 작품이 아닐까 한다. 문학성을 떠나 아닌게 아니라 개츠비란 녀석이 무척 재밌는 녀석이긴 한 것 같고 무척 호감이 가는 것 같다. 자신을 배신한 유부녀를 그토록 못 잊고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도 그 심리적 배후에는 그 만의 무언가가 있다고 느껴진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을 보면 괜히 그런 여자들이 대체 어디가 그리도 좋은지 한 번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다. 암튼 존경스럽다.

서술자인 닉 캐러웨이는 아버지의 교훈을 상기시키며 개츠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이런 걸 생각하거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네가 가졌던 그런 유리한 처지에 있지 못했다는 걸 말이야"

그리고 개츠비야 말로 그가 확고부동하게 경멸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지만 잠시 나마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개츠비를 먹이로 삼은 것, 그의 꿈을 따라서 떠돈 더러운 먼지였을 뿐이며 개츠비는 결국 옳았노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의 대담함과 확고함 용기와 열정에는 나역시 공감을 하지만 하고 많은 여자 중에 하필 그런 속물을 좋아하는 그의 이상한 이성관이 그것을 좀 빛 바래게 한다고나 할까.

잠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온 롯데와 베르테르가 생각이 났다. 개츠비의 연인인 데이지는 롯데와는 비할 수 없는 철저한 속물이라 그렇지만 개츠비는 베르테르 만큼 순수한 청년이었으리라. 노란 쪼끼를 입은 18세기말의 베르테르가 20세기 초에 다시 나타난 듯 가슴이 몹시 두근두근 설렌다. 마치 한 10년 쯤 전 헤어진 사랑하던 사람과 꼭 닮은 누군가를 만난 듯... 좋은 작품인지 모르겠지만 암튼 개츠비는 참 좋은 남자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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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개역판 까치글방 86
니콜로 마키아벨리, 강정인 외 옮김 / 까치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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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를 생각하면 항상 플라톤이 떠오른다. 아닌게 아니라 플라톤이 그의 주저인 <국가>에서 밝힌 그의 메인 관심사는 역시 올바른 국가 건설의 방법이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로마사 논고> 등을 통해 이 분야에 대한 그의 숨길 수 없는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위대한 국가 로마에서 이런 국가의 특성들을 열심히 벤치마킹하고자 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극과 극은 통해서일까? 각각 지독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대표하는 그들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관심사 이상으로 많은 면에서 두 인물은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정치적 실패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시대에 있어 조국 이탈리아와 아테네는 각기 국운은 이미 기울어지거나 쇠퇴를 시작하다. 이 점은 두 사람의 가슴에 그들의 정치적 야심의 좌절과 함께 많은 상처를 남긴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조국의 영광을 재현코자 하려는 뜨거운 애국심이야 말로 저작의 주요 동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점이라면, <국가>의 경우 이러한 노철학자의 식지 않은 이상국가에 대한 열망이 느껴지며 <로마사 논고>에서 이미 자신의 정치적 야심이 좌절된 데서 오는 실의 때문인지 그 논조에서 어떤 비감이나 비관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주장대로 필요한 경우 악한 수단을 쓸 수 있음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별로 크게 놀라지는 않는다. 우선 인간관계든 국가간의 문제에 있어서건 경쟁이란 항시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이런 본능을 뿌리 뽑지 못하는 한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때로는 악한 수단이 동원 될 있는 것은 냉엄한 현실이다. 단지 사람들에 의하여 정당하지 못한 승리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인 것이기는 하다. 어떻든 간에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소 순진한 인간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은 될 수 있겠지만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타인에 대한 "악의"만으로는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오히려 고금의 역사는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다 오히려 그 미끼에 걸려 나라를 망친 인물들을 무수히 예시하고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악한 수단이건 선한 수단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은 본질에 벗어나는 말류의 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오히려 검은 고양이건 흰 고양이건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 아닌가?

사실 이 책은 이 책의 내용보다는 이 책이 출판되고 읽혀질 수 있는 시대에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종교적으로 불온한 내용이 진지하게 검토될 수 있는 이러한 사회는 바로 근대로의 발전의 토대가 아닌가?

비록 이 책의 주장들의  현재적인 가치에 대해 여전히 의심이 많지만 플라톤이 가졌고 마키아벨리가 공유한 바 그 열정에는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과 오늘 날의 한국과 그들의 시대를 감히 한 번 비교해 보고 그에 대해 진지하고도 건설적으로 비판적 토론을 한 번 해보고 싶다. 그러나 오늘 날 한국의 지적 풍토에서 쉬운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나 자신도 이 분야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회의적이다. 열정만으로 될 일은 아니다.

역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사실 이 책이 그리 탐탁치 않게 느껴지는 것도 거꾸로 그 놈의 열정이 너무 치나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마키아벨리의 경우 그의 정치적 좌절에 대한 실의와 조국의 현실에 대한 컴플렉스가 과학적이기 보다 감정적으로 세상을 그리는게 한 것은 아닌지. 그런 점은 이성을 그다지 강조하는 플라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한 권의 책으로 현대의 복잡한 국제정치를 설명하려 하지말라. 따지고 보면 마키아벨리즘도 알아두어야 할 정말 협소한 한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이 넓은 만큼이나 더 정확히 알고자 한다면 보다 열린 마음과 그에 따른 성실하도 깊이있는 연구가 뒷받침되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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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안오는 밤에 쓴 시 -양장본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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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리스뜨"에게 주는 충고의 편지 형식으로 된 푸슈킨이 첫 정식 발표했다는 시로 부터 시작한다. 재밌는 것은 발표연대는 1814년. 만일 우리나라의 예전 습관 처럼 호적신고를 1-2년 늦추지 않는다면 1799년 생이라니 대략 한국나이로 15-16세란 말이다. 내 나이 15,16살 때 나는 무엇을 했던가 생각해 보았다. 그 당시 내가 읽었던 책이란 그저 교과서 외엔 만화책이나 무협지 정도가 였을 뿐이었다. 러시아판 천재교육의 효과였을까? 나이를 생각하면 좀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지만 천재의 충고 중 가슴에 와 닿는 구절만 나름대로 적어본다.

아리스뜨여. 종이를 낭비하는 자가 시인은 아니라네

좋은 시란 그렇게 쉽게 써지는 게 아니네.

시에 취미가 없는 자, 그래서 근심 걱정 없이

조용히 세월을 보내는 자 행복하도다

풍자의 펜으로 너를 괴롭히게 될까 두렵구나.

 

솔직이 푸슈킨의 시는 어렵다. 아니 어렵다기 보다 좀 생소한 편이란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서정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 서사시에 몰두하고 있는 점이 바로 그 이유일 것이다.서사시란 본래 딱딱하기 마련아니던가. 또한 푸슈킨이 결투 끝에 단테스의 칼에 찔려 죽음에 이르렀을 때 차르는 그에 대한 책임론 등으로 비난을 받았으며 그의 애도가 자신의 권위에 대한 반항으로 비화할까 장례식마저 통제 했을 만큼 푸슈킨은 정치적인 면과 깊숙히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21세기의 한국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솔직히 피부에 와 닿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시인인 친구에게>란 그의 데뷰작에서 보면 어렴풋이라도 이 천재가 마음에 품고 싶은 바를 짐작이라도 할 것 같다. 우선 그가 대화를 하고 싶은 자들은 시는 고민없이 쉽게 쓰고 명성이 우렁차게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라 믿는 어리석은 시인일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그 어리석은 사람들을 문화예술인으로 넓혀 볼 수도 있고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영웅이 되려하는 러시아의 애국자 지망생들에 대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가 시를 통해 대화를 원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이와 같을 것이다. 반대로 전제자인 차르나 그에 굴종하는 민중을 조롱하는 것도 변함없는 테마가 아닌가 한다. 시대와 역사 문화는 다르지만 푸슈킨이 점잖게 표하는 그에 대한 울분과 격정에 공감을 느끼는 바 적지 않으며 그의 다난하고 고독한 삶과  돌연한 죽음에 슬픔을 느끼며 한편으로 분노하게 된다. 아울러 <범인에겐 침을, 바보에겐 존경을, 천재에겐 감사를>이란 격언이 생각나게 된다.

한마디로 푸슈킨의 처한 상황을 잘 이해는 못해도 공감은 간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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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 열전 1 동양고전신서 25
사마천 지음, 박일봉 엮음 / 육문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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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을 위대한 역사가라고 흠모해 왔던 나는 인터넷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위대한 역사가인 만큼 오직 사실만을 기록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의혹이 가는 부분이 적지 않음을 느꼈다.

특히 우리 역사에 관한 부분이 그렇다. <조선 열전>. 이것을 첨 읽었을 때 교과서에 나온 얘기가 이걸 보고 쓴 것인가 부다 하면서 그 역사적 사실의 진위 여부는 긴가민가했다. 그래도 사마천이 쓴 것인데 하는 마음에 조선을 멸하고 세웠다던 한사군이 한반도에는 없었을 거라고 무심히 생각했다. 그러나 인터넷 상에서 관련 자료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인터넷 자료를 읽고 다시 한번 사기의 <조선 열전>을 정독해 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왕험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은 없었다. 오히려 조선왕 우거가 내란으로 망했지만 황험성은 당당히 버텼다는 기록만 있었다. 사마천 조차 왕험성의 함락은 끝 내 언급하지 않고 그 토착지배자를 군후로 삼았다는 것으로 이 기사가 끝나고 있는 것이다. 그저 토착인을 책봉했다는 것은 잘 춰주어야 조선과 명의 관계가 될까말까한 일인데? 사마천은 전쟁의 승패나 원정의 성패에 대해는 끝내 침묵하고 있으므로 무제의 조선 원정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한사군은 완전한 픽션이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사군 운운하는 것은 마치 한나라에 마치 황우석같은 거짓 공로를 보고하는 자들이 있었으리라 생각했지만, 사마천은 또한 원정으로 참혹하게 처벌된 무제의 장군들을 제시했다. 즉 무제역시 원정의 실패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럼 역사를 왜곡한 것은 사마천 자신이었을까. 어쩜 무제 자신이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오히려 실패를 승리로 바꿔 기록을 남길 사가를 원했기에 그 본보기로 대대로 유력 사관 가문의 사마천을 그토록 불구로 만들고 싶어했던 것은 아닐까?

무제는 원정의 실패를 알았다. 사마천도 진실에 관한 최소한의 실마리는 남겨 놓았다. 그는 어떤 압력때문에 진실을 기록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한사군은 사마천 당대로 부터 수백년간 중국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데 이는 아마도 그 지역에서 한과 조선을 오가며 허다한 거짓보고를 해 온 중국인이나 그에 영합하는 조선인들 때문일 것이다. 이는 조선이 문자를 아는 사람이 드믄 문맹지대였던 시대에나 가능한 사업이었을 것이다. 역사기록이 뚜렸해지는 4세기에 이르면 낙랑군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인데 이는 문자상으로만 존재했던 것이 한반도에서 문자기록이 보편화되자 그야말로 문자상에서 없어지느 것이라고나 할까? 아직도 "학문"의 그럴듯한 탈을 쓴 신판 사대주의자들이 식민사학의 영향이 너무도 뿌리깊고 한국에서 나의 이 주장을 야유할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칭해준 낙랑군의 마지막 태수가 누구더냐? 그것은 백제의 근초고왕이 낙랑의 마지막 태수가 아니더냐. (이는 백제의 요동요서경영과 관련된 것이다) 그보다 삼백년 전에는 무엇이 달랐을 거라고 변변한 학식도 없이 진정 너희는 국가의 체통을 그닥 손상하고 싶더냐? 그런데도 낙랑군이 한반도에 존재했다고 학문의 탈을 뒤집어 쓰고 우길 것인가? 너희가 학문적 실증을 외치지만 너희는 당시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중국사기꾼의 기만도 분별할 줄 모르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졸개들 뿐이다.(오늘 따로 유난 흥분되는구나)

이런 점만 없다면 정말 사기는 정말 세계에서 몇 손가락에 드는 명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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