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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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외교관들의 미숙하고 불성실한 근무태도가 많은 국민들을 분노스럽게 하고 있다. 자국민들이 이역 땅에서 사형을 당하도록 면담한 번 하지 않고 이를 추궁하는 방송국 측에 태연히 잘못이 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답하는 대한민국 외교관들. 그들은 비록 외무고시라는 어설픈 선발방식을 통해 외교관이 되었지만 실은 공연히 세금이나 축내는 "오적"과 같은 부류의 하나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쓴 홍세화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였으며 그의 많은 동기들이 그와 같은 어설픈 외교관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교는 공무원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요 민간외교가 두나라의 이해와 발전을 위해  보다 중요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민관외교는 이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다른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서가 가장 좋다. 홍세화가 20년에 걸쳐 만났던 다양한 계층의 프랑스인들과의 만남은 매순간이 한국사회와 프랑스사회의 접촉이자 산 외교의 현장이었다. 이 글을 베스트셀러화함에 의해서 프랑스 사회를 널리 소개하는데 성공한 홍세화야 말로 누구보다 훌륭한 한국과 프랑스의 민간외교관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국내 최고의 학부를 나온 엘리트로서 20년간 일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이러한 일에 바쳐온 한국사회에 흔치 않은 "노블레스 오블레쥬"의 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박정희 시대에 서울 문리대를 다니며 유신말에 남민전이라는 조직에 가입했던 작가가 조직이 적발되면서 뜻하지 않는 프랑스 망명을 겪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경험하게 되는 일종의 수기라고 해 둘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당장 한국이면서도 남과 북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므로써 아무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던 그야말로 철저한 "이방인"이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의 기록이다. 또한 그와 함께 또 다른 세계와 만나고 점차 그에 익숙해 져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기도 하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그리고 있는 프랑스는 항상 그가 항상 돌아가야한다고 생각하지만 갈수 없는 조국 한국과 분리될 수 없는 "홍세화식의 프랑스"라는 점인 것 같다. 그 때문에 100여년 전 파리꼬뮌의 전사들의 묘지에 찾아가서도 문리대시절의 비슷한 꿈을 꾸었던 지난 시절과 그 때의 동료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도 한국과 한국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나타난다. 그래서일까 저자가 주장하고픈 "똘레랑스"란 것도 한국사회에 비교해 너무 강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글에서도 최근 문제가 되는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의 폭동의 씨앗이 무엇인지 언급은 되어 있지만 저자는 그것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한계가 있지만 새로운 사회를 택시운전사의 눈을 통해 거의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 책은 혼란한 한국사회에서 벗어나 그럭저럭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작가가 남민전의 동료들의 석방소식을 듣고 안도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는 역시 작자가 비록 몸은 프랑스에 있어도 여전히 한국사회에 많은 미련을 갖고 있다는 한 예이다. 또 이런 좀 갑작스런 끝은 2탄 <세느강....>을 염두에 둔 포석같이도 느껴진다. 홍세화의 한국생활 중 그의 아버지의 일은 나같은 세대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그의 동숭동시대는 EBS의 <지금도 마로니에에는>같은 드라마로 대충 이해가 되긴 하지만 말이다.

스위스나 프랑스가 어린시절 부터 줄기차게 살기좋은 나라라고 손꼽혀 온 것도 더욱 이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별로 튀거나 재밌는 내용이나 표현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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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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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이런 것이었다. 인터넷 뉴스 <프레시안>의 기획물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를 읽어가면서 우리민족의 기원과 만주와 연해주 및 중앙아시아에 걸쳐 널리 분포하는 유목민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들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고려시대만 해도 우리는 중국 민족이 우리를 오랑캐(夷)라 부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진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런 기억들이 희미해지고 자신을 그런 오랑캐와 같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고 나 역시 그런 생각들에 둘러싸여 성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단군이나 동명왕의 건국신화 역시 이들 유목인들 공통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들과 문화적 언어적으로 더욱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이 칭기스칸에게 주목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유목민의 역사란 매우 한심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유목민의 과거의 영광이 오늘날 재현될 수 있을까 도대체 이런 옛날 이야기가 요즘같은 산업사회에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줄 수 있단 말인가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과거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에서는 유럽이나 중국 이슬람의 찬란한 정주문명세계가 문화 생활에서 오는 문약함으로 인해 끊임없이 거친 야성적 기질의 유목민들에게 정복당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는 그러한 야성적 기질로 세상을 지배하고 그 발전에 이바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제  유목인은 중국이나 러시아같은 안정된 정주문명에 의해 정복되고 그들에 의해 문화적 발전을 의존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오늘 날의 문명은 너무도 고도화 된 것이다. 우리의 유목인적 시절의 유산에 하나인  조그만한 주방도구들을 나는 오늘 바라보면서 어떤 처량한 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바빳길래  우리의 조상들은 이 한반도라는 곳으로 쫓겨 들어와서 주방도구조차 바꾸지 않고 그냥 수 천년을 그대로 살아왔던 것일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같은 뿌리를 가진 최대의 세계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스칸에 대한 자랑스러움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가 도달했던 지위 만큼이나 칭기스칸에게서는 본 받아야 할 점들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되었으며 칭기스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저자 웨더포드 씨를 비롯하여 칭기스칸의 재능을 알아준 수많은 명사들이 존재했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로저베이컨 같은 중세의 선각자들은 이미 칭기스칸의 위업이 단순히 난폭과 야만의 결과가 아닌 과학과 철학을 결합한 결과였다고 이 책은 언급하고 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몽고제국 역시 칭기스칸이란 불굴의 의지와 냉철한 지성을 갖춘 영웅에 의해 이룩되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 할 수가 있다. 칭기스칸이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오직 생존본능에 의해 살아가다가 마침내 협력자들을 얻어 몽고를 통일하고 부족을 재정비하여 세계대제국의 기초를 닦는다는 것은 참으로 격찬을 보내지 않고는 보기 힘든 인간드라마가 아닌가 한다. 게다가 그가 이 엄청난 세기적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제정했던 유목생활을 개선하고 교역과 통치를 원활히하는 선진적 제도들 그리고 새로운 전투기술들. 그것들은 유럽의 중세사회를 온통 흔들어 잠에서 깨웠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훌륭한 후계자들을 두었다. 우구데이와 쿠빌라이는 테무친의 유업을 계승 각각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유럽과 중국을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이것이 몽고제국의 역사이다.오만한 서양제국주의자는 몽고인의 미개함과 잔인함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전쟁중에 재치있는 몽고인들이 택한 유언비어전술에 불과함을 이 책은 밝혀주고 있었다. 칭기스칸의 위업! 그것은 지성의 승리였다.

책을 다 읽고 나니 현실로 돌아와 그럼 지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우리의 기원이 유목인이라 해서 우리가 다시 유목생활 비문명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앞에는 고도산업사회라는 새로운 넘어야할 험준한 산맥이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아득한 옛날 유목생활에서 농경생활로의 적응에 성공했듯이 이제 우리는 부족한 자원과 협소한 지리적 제약이란 악조건을 극복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나름의 길을 모색해 내야 하는 절박한 시점에 와 있다. 나는 이 책에도 이야기 되었듯 구 소련이 행했던 몽고역사에 대한 약탈과 박해에 대해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본래 그들은 먼저 개화한 문명국으로서 미개척한 주민들에게 문명전파라는 숭고한 사명을 달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약소민족의 등을 친 경우라 더욱 분개스럽다. 그러나 그것이 비단 몽고나 위구르 같은 민족들 뿐만의 일일까. 서구세력은 이미 동양의 정주 세계에도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이와 같은 문화파괴와 약탈을 해 왔던것을 보면 꼭 이 일은 러시아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쨌든 우리에게도 서세동점은 공과 과가 공존한다. 우리나라만 해도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룩했다. 비록 나라는 둘로 갈라졌지만서도... 이제는 러시아나 중국같은 정주문명국이 더 이상 이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본연의 임무 문명전파의 사명을 다 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나라나 유목민들도 더 이상 조상대대의 그러한 삶을 계속할 수 없음을 깨닫고 테무친의 개척정신과 의지를 새로운 상황에 창조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수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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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역 논어 홍신한문신서 1
이기석.한백우 역해, 이가원 감수 / 홍신문화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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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항시간(陳恒弑簡)! 논어 憲問 편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지금으로 부터 2500년 전  진항은 이 사건에서 신하로서 주군이었던 제나라 간공을 살해하고 훗날 그의 자손대에는 춘추전국시대 최대 강국이었던 제나라를 탈취하고 만다. 이와 같은 전무후무한 엄청난 사태를 들은 공자는 조정에 나가 이를 문책하여 토벌할 것을 간하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양문화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른 바 노자에 말하기를 큰 도가 없어지니 인의가 생겼다(大道廢有仁義)는 말이 과히 틀린 것이 아닌 것이다.사실 공자의 일생과 주장은 어찌 보면 지나치게 치우친 도덕주의적인 관점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렇담 공자의 주장은 오로지 이제는 쓸데없는 무가치한 인습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모르겠다. 그것은 이 논어를 통해서 내가 연구하고자 했던 토픽 중의 하나였음을 고백해야 겠지만 아직 결론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보다도 나는 공자의 고결하고 솔직한 일생에서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공자의 가르침 중 가장 믿을 만한 것은 사실상 논어 한편뿐이라는 점을 잘 알것이다. 이 논어를 통해 본 공자의 일생은 결코 예수처럼 신성하지도 플라톤처럼 진리에 대한 사랑에 몸바치는 대단한 고집을 보여주지도 못한다. 사실 그의 일생은 실패로 점철되어 있다. 생각해보라. 도덕이 땅에 떨어진 춘추에서 전국으로 전환되는 변혁기에 공자의 주장이 먹혀들리가 있겠는가? 그는 여러 열국의 군주와 그 가신들로 부터 멸시당하는 장면이 이 논어에는 솔직히 실려있다. 공자를 멸시하는 사람들은 권력자뿐이 아니라 일반 무지렁이 농사꾼에서 도술을 닥는 은둔자 심지어는 그의 직계 애제자 까지 매우 투터운 층에 걸쳐 광범위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죽을때 까지(一以貫之) 그는 자신의 주장을 한치도 굽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자가 그토록 지기코 싶었던 가치와 사상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사상은 복잡한 것 같지만 한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참다운 인간다움의 실현 바로 이 간단한 명제이다. 잘 알다시피 공자의 사상은 "인(仁)"이 한자로 대변될 수 있는데 이 글자의 기원은 사람 인자 두 개(人+人) 즉 개인에 그치지 않고사람사이에 발생하는 여러가지 필요한 덕목을 통해 보다 큰 인간다움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그는 극기복례(克己復禮) 즉 자기 자신의 소아심이나 영웅심리를 초월하여 보다 넓은 세계속의 자기 실현 참다운 인간됨을 추구한 것이며 그를 위한 노력에 한치의 게으름이나 주저함이 없었던 이 위대한 사상가에 대해 우리는 새삼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으며 그의 언행을 기록한 이 논어는 현대인에게도 올바른 삶이 무엇인가하는 지침서가 되기에 충분할 것 같다. 물론 여기 나오는 도덕률이 지나치게 봉건윤리로 충효를 강조하고 수직적 인간관계에 충실하다고 비판하는 이도 있을 것이나 이는 마치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는 격일 것이다. 공자의 노력은 뒷전으로 보고 당대를 오늘날과 똑같은 시각에서 보기에 그러한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나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와 같은 책에 크게 공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현실적 문제가 과연 공자로 부터 발생했는지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같다. 공자의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보다 인간적으로 살고자 하는 노력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는 개혁의지는 존경받을 만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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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한글 패션 굿모닝 성경 - 중(中) 성경찬송합본 색인 - 가죽,지퍼,AG베이지
아가페출판사 편집부 엮음 / 아가페출판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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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교와는 거리가 멀고 기독교나 성경에 대해서는 더구나 잘 모른다. 그러나 독서애호가의 한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는 만큼 이 인류최대의 베스트셀러를 한번은 읽어보아야 겠다는 마음을 가져보았다. 그래서 영풍문고에 가서 제일 적합한 것을 고르려다 보니 이 책이 아니라 "슬림 큰 글 성경"이란 책이  비슷한 가격대의 책 중에 제일 나은 것 같았고 재밌게 보고 있는 중이다. 글자도 크고 해설도 끼어 있어 나와 같이 신앙심이외의 관심으로 성경을 보려는 사람에게 이 아가페에 나온 성경을 추천한다.

구약은 장황해서 아예 읽기를 중단했다. 신약이 좀 읽기 수월하고 특히 예수의 ˜과 사상이 나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다. 어떤 이는 예수의 이 한마디-"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한 말씀 안에 노자이래 동양에서 말해졌던 도와 소크라테스의 진리와 근래 생철학 사조들이 예수의 삶과 사상에 융해되어있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 과연 이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의 위대한 가르침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 편 궁금한 점도 여전히 남는다. 특히 유다가 왜 스승 예수를 신고 단행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스승을 고발한다는 것은 많은 고뇌를 필요로 할 일인데 말이다. 흠, 그가 자살했다데 대해서는 더더욱 믿을 수 없기까지 하다. 오히려 호의호식한 밀고자가 흔한 이 세상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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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그네 1
최인호 지음 / 문예출판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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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진부한 언어로 전락해 버린 셈이 되었지만 「사랑」이라는 주제를 고결스럽게 다뤄보고 싶은 욕방을 갖고 있다. 「사랑」이란 언어는 오늘날 대중가요로, 소설로, 영화로, 종교로 가장 흔하게 쓰여지는 낱말일 것이다.
거의 모든 예술 형태에 문화에 사회현상에 「사랑」이란 낱말이 조미료처럼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생명을 지니지 못한 死語로 소멸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누구나의 가슴속에 들어 있으나 퇴화되어 버린 「사랑」의 감정에 지휘봉을 들이대고 불꽃을 일궈보고 싶다. 나는 문명의 숲속에서 화폐해가는 현대인의 마음 속에 불을 일궈 밭을 가꾸는 「火田民」의 역할을 하고 싶다.

이것이 초판 책 날개 씌여있는 작가의 말이다. 대학시절 나는 가끔씩 다혜 앞에 나타날 수 없었던 민우의 모습을 떠올려 본 적이 있었다.

다혜가 민우를 처음 만난 것은 봄날의 오후였다. 우연히 마주친 다혜의 집에서 민우는 다혜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수줍고 순결한 <피리 부는 소년> 민우는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며칠 뒤부터 민우는 용기를 내어 다혜에게 편지를 쓴다. 내용은 조금 싱겁다. 도서관 앞 분수대에서 기다리겠노라는... 이Ž’게 두 사람의 사랑은 시작하는 듯 하지만 민우는 뜻하지 않은 시련으로 끝없는 나락에 빠지게 된다. 그 해 겨울에 이미 민우는 기지촌의 고용 지배인으로 양공주 출신의 은영과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모질게도 세월은 흘러 친구 현태에게 지금은 그의 애인이 된 다혜를 만나고 싶다하는 민우의 청을 현태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기엔 늦었어. 넌 이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그것은 정말 현태 뿐아니라 다혜나 민우를 위해서 좋은 일이었을까. 현태와 다혜의 웨딩마치가 울리던 즈음엔 가슴 속에 다혜에 대한 그림움과 고민을 품은 민우는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는다.

이 것이 이 책의 줄거리다. 혹은 너무 통속적이고 상투적 이야기가 아닌가도 싶다. 또한 민우라는 지나친 순결컴플렉스를 가진 인물을 등장시키고 미화함으로써 독자들을 비현실적인 환상적인 세계로 몰고간 혐의를 작가에 둘 수 있으리라. 하지만, 볼래 진정한 사랑이란 그렇 듯 순결하고 진실한 것을... 오히려 현태식의 사랑을 현실적이라 하여 사랑이라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사랑에 거짓을 섞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야 말로 거짓이요 환상이요 비현실인 것이다.

이 순간 아득한 기억 속에 민우를 떠올려 본다. 나의 젊은 기억들도... 그가 그랬듯 어느 골목 다혜의 집앞을 서성이며 혹시 있을 지도 모를 다혜의 모습을 찾아 본다. 동명의 영화에서 현태가 민우에게 던진 말이 생각 난다.

「너는 더 이상 지난 날의 피리 부는 소년이 아니야 ! 」

도대체 민우는 나에게 어떠한 의미인가? 그는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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