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 미래사 한국대표시인 100인선 4
한용운 지음 / 미래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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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시전집 시리즈 중에 디자인 면에서 볼 때 가장 낫다. 하지만 의외로 오타가 많음은 아마 저가의 책을 만드느라 미쳐 교정작업에 많은 신경을 쓰지 않은 듯 하다. 그러나 이러한 태만이 내용은 대충 읽고 겉모양만 따지는 요즘 독서세태를 잘 겨냥한 마케팅이라 생각하니 슬픈 현실이라 생각한다. 오늘 날 출판계에 양서가 없음은 좋은 독자가 없음에 기인하는 탓이 많다. 

님의 침묵... 좋은 시이다. 어떻게 보면 아주 복고 취향의 옛 노래이며 내용도 판에 박힌 봉건적 도덕률의 질곡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는 한 여인의 궁상인데 어찌 그리 나의 마음을 이토록 사로잡을 수 있는가? 운율이나 내용 모두 새로운 시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그런 청승맞은 여인네의 잠꼬대 같은 이런 노래에 이토록 감동하고 공감하는 이유는 뭘까.

생각해 보면 여기 나오는 여인은 참으로 행복한 것인지 고통스러워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떤 문학평론가는 여기 나오는 여인의 상태를 메저키즘적인 것으로 단언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왜냐 하면 그 여인의 심리상태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것을 변태라고 까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내가 보기에 이 여인은 단지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 사이에 끊임없이 갈등하는 것일 뿐인 것을.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물론 통속의 사랑이 아닌 진정한 사랑이며 그것으로 얻는 부차적인 것 세속적 명예나 일신의 안락을 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을 바라고 이러한 사랑의 노래를 함부로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차적인 최후의 사랑. 그 자체로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 이별이후 그러한 사랑은 더이상 현실적인 것이 되지 못한 비현실이 된 상황 바로 이것이 밤마다 시인을 괴롭히고 가위눌리게 하는 눈물의 원천인 것이다. 그리고 이 것은 모든 인간에 보편적인 진정한 사랑의 현실이며 결국 사랑의 환상적 즐거움과 이별의 현실이 토해내는 한숨 간에 갈등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궁극에 시인은 깊이 없는 사랑에 빠지는 인스턴트 세태를 조소한다.

-그러나 나는 시대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과 정조의 심각한 비탄을 하여 보기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자유정조>

-만족은 愚者난 聖者의 주관적 소유가 아니면 약자의 기대 뿐이다. <만족>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 하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복종>

그리고 그는 모든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그러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아마 다음과 같은 태도는 시 전편에 흐르는 그의 단호한 비장감을 분명히 드러낸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랫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어요.<반비례>

아마 이 구절이 시인의 현실인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귀절이라고 본다. 현실의 객관적 인식을 거부하는 반비례의 논리이다. 나는 이러한 시적 자아의 태도가 올바른 것인지 잘 판단할 수 있지는 않다.아마 좋은 점도 있을 것이고 나쁜 점도 다소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서야 간절히도 님을 부른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오셔요>

그리고 마침내는 오랜 방황 끝에 이런 고백을 한다.

-우주와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대철학은 눈물의 삼매에 입정되었습니다. 나의 기다림은 나를 찾다고 못 찾고, 저의 자신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고대>

그래서 마지막 시적 자아는 드디어 님을 찾아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 바로 이 시의 테마인 듯 하다. 다시 읽어봐도 인생과 사랑의 참다운 의미를 느끼게 하고 진정한 행복의 길을 깨우치게 하는 한국문학사에 보기 드문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이 느끼는 과도한 감상적 비애는 당시의 시대상황이 나은 어쩔 수 없는 시대성의 차이일 뿐, 언제나 이 책을 읽으면 그러한 상황속에서도 역시 사랑은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 지고지선한 태양처럼 환히 빛난다는 존재임을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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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의 꿈 (외) 범우 사르비아 총서 642
리처드 바크 지음, 김진욱 외 옮김 / 범우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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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략 중학교 때 읽었던 책인 듯 싶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마음 껏 하늘을 질주하는 갈매기 조나단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재미있고 잊혀지지 않는 작품이었다. 첫 장면은 무언가 남들과 다른 단지 살아갈 양식을 구하는 것으로서의 비행 이상의 어떤 것을 시도하려는 조나단이 무리의 우두머리들에게 배척당해 ?겨나는데서 시작한다. 즉 스스로의 원하는 삶을 택하기 위하여는 집단으로부터 가혹한 배척을 받는 고립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 위대한 예술이 가진 불변의 테마이다. 물론 그러한 삶은 비록 괴로울 지라도 자신의 인생의 "의미"와 "성취감"을 주기에 갈매기 조나단이야 말로 자유로운 삶과 보다 높은 경지의 삶을 누릴 영광을 얻게 된다.

요즘 싸구려 대중문화의 홍수의 시대는 과거에는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던 것을 도리어 괴상한 일이라고 간주하는 일이 많다고 느낀다.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갈매기 조나단의 삶이 이상하고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허나 이말은 우리들이 인스턴트 대중시대의 속류적 삶에 찌든 천민으로 자라왔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할 것이다. 마치 새가 날기 위해서는 알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깨쳐야 하 듯 인간이 단지 먹고사는데 매이지 않고 그 이상의 인간됨을 찾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고립감과 모험은 불가피하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너무 편하고 쉽게 생각한다. 인생을 의식주의 자판기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여기나온 갈매기 조나단과 그의 동료 구도자를 동양적 의미에서 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침 없는 그의 기상을 보라! 진정으로 날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안락과 안일함을 벗어나 진정한 구도심을 위해 헌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동서에 예외없이 모든 구도자들은 세속을 등졌다. 그것이 인도에 있어서는 사문이요 중국의 도인이다. 또한 유럽에도 수도원 등을 두어 학자를 수련시켰다. 철인의 시조 격이었던 플라톤 역시 이러한 엄격한 훈련을 통하지 않은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 아무런 기대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조나단의 꿈과 그것을 위한 역정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삶이었던 것이다. 보다 높이 날기 위해 고립이나 하찮은 근심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새해에는 조나단처럼 보다 높이 날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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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 현대지성신서 19
성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김기찬 옮김 / 현대지성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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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이르기를 서양의 스승이라 말한다. 그는 영원한 고전 <신국론>에서 황폐화된 반기독교적 로마의 몰락을 비판하고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세계의 비전을 제시한 야심가였다. 중세의 대부분을 많은 현인과 성자들이 그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르네상스 등의 시대를 거치며 교회가 쇠락의 길을 걸을 때 조차 그는 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종교인이 아닌 철학자로서도 일급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아우구스티누스가 왜 기나긴 지적 편력을 끝내고 그리스도교에 귀의하게 되었는지를 이 책을 통해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 문명의 충돌지대였던 알렉산드리아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교인이었던 어머니 아래서 경건한 가정 교육을 받았던 그는 조금씩 그의 기대에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가 자주 찾던 탈선의 현장이었던 극장 들이 당시의 아프리카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한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헬레니즘문화의 꽃이었던 알렉산드리아가 있었으며 레판트에 유입되었던 조로아스터 나 예수 등 명멸한 대사상가들의 사상들이 공존했었다. 물론 석가의 이야기도 어느 정도는 전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 때 이들 종교를 절충한  마니교에 심취했었던 듯하다. 그의 지적 방황은 마침내 플라톤 아카데미학파의 회의주의적인 철학과 만났으며 여기서 그는 비록 그들의 현명함에 대해 어느정도 인식하고 그에 대해 놀라움을 느꼈다. 아마도 그것이 후일 그리스도교에 플라톤 철학을 중요한 요소로 남겨놓게 된 이유일 것이다. 허나 그러한 플라톤적 지식은 그의 일상에는 큰 보탬을 주지 못했으며 궁극에 있어 그의 구원자는 바로 예수의 가르침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믿음을 앎에 위에 두며 알기 위해 믿는 것에 대해 거부하게 되는 듯 싶다. 결국 만신창이가 된 그의 생활에 빛을 던져주고 구원의 손길을 건낸 것은 예수 그리스도 였으며 그에 대한 경배와 참된 사랑 안에서 그는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득도"나 "열반"에 이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대단한 웅변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빼어난 문체가 일품이다. 한자 한자 읽어내려가면서 파스칼을 읽는 듯한 짜릿함에 몸을 떨었다. 물론 헛된 지식을 지상의 가치로 뽐내는 속물들이야 한마디로 그의 종교적 열정을 이성의 굴복정도로 하잖게 여길 줄 알지만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오랜 방황을 통해 그러한 오만함의 함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제발 헛된 지식의 장사꾼들은 그의 방황과 편력이 기록된 이 위대한 고전을 읽고 예수의 위대한 사상을 음미하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치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마치 베드로가 예수를 세번 배신한바와 같이 그가 기독교로 돌아오기까지의 몇 년간은 의미 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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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
조갑제 지음 / 조선일보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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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의 기자생활 30년의 역작-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우리는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일러 수구꼴통으로  너무 쉽게 매도하는 것을 지켜봐 왔다. 한마디로 민주화 시대에 그런 사람들을 향수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짓이고 우스꽝스럽다는 것이다. 사실 그 동안 보수나 기득권층의 부패상을 볼 때 또 조선일보의 조금 악의적 편파보도를 볼 때 그와 같은 운동에 공감은 하면서도 점점 그 "안티조선운동"류의 진보운동들이 관성화된 하나의 집단유희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한 이벤트에는 "너희는 수구꼴통이야. 수구꼴통이 하는 짓이 그렇지."하는 식의 그럴것 같다하는 파퓰리즘적 선동이상의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즉 거기에는 정당성 있는 의식적 비판은 빠진 셈인 것이다. 예전에 빨갱이라 하면 그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듯 수구꼴통하면 그것이 마치 유죄의 증거가 된 듯하다. 한마디로 빈수레가 요란하다고 수구꼴통으로 몰기만 하면 자신들의 정당성은 확보되는 듯한 극도의 포퓰리즘적 세태. 이것이 대한민국 진보의 현실이라하면 지나친 것일까?

그래서 나는 어떤 때는 그런 류의 가벼운 진보라는 것에 회의가 든다. 아니 요즘은 그들의 무책임한 가벼움에 짜증이 설설 나려고 한다. 그에 비해서 조갑제 기자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에 자칭타칭으로 글 쓴다는 이는 많지만 이미지조작이 아닌 사실(Fact)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적 불성실함을 가벼운 농담 또는 교묘한 술수로 가리고 잘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내용을 가지고 자신의 감상을 50 프로 이상 덧붙여 이야말로 판타지를 만들어 놓는 것만을 보아 왔기 때문에 나는 감히 조갑제식 글쓰기를 진정한 의미에서 대한민국 글쓰기의 혁명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를 수구꼴통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그의 50프로만 닮으려 했어도 나라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갑제의 이런 사실 리포트는 많지만 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와 같이 분량상 방대한 야심작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조갑제가 이 야심작에서 그리려는 인물은 우리현대사를 가름하는 분수령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박정희이다. 이것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현대사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사실에 근거해서 저자는 그에게 불리한 내용조차도 모두 실었으며 그렇기에 박정희를 지지하건 싫어하는 사람이건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지지를 표명할 것이라면 한번 쯤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도리라 생각한다.

박정희에 대해서도 나는 무조건 비난하는 진보에 대해서 조금 의심을 두고 있다. 즉 세계사적 맥락에서 박정희가 독재를 했다고 그게 그렇게 비난받아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근대화역사는 서양의 그것을 압축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역사를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독재자를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박정희가 세종대왕만큼은 못되더라도 유럽의 계몽군주 이를테면 표르트대제나 프리드리히 황제 쯤은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분명한건, 솔직히 우리나라와 같이 문치의 전통이 깊은 나라에서 군인 출신으로 만18년을 일인자의 지위에 있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재능이 뒷받침 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박정희는 3번에 걸쳐 죽음을 무릎쓴 경력이 있는 그야말로 수시로 죽음과 삶을 오락가락했던 인물이었다. 조갑제의 주장에 의하면 어머니 뱃속에서 낙태를 하려는 어머니의 공격을 받은 것 까지 쳐서 4번일지도 모른다.
태어나서 만군장교로 자원했을때가 첫번째요 국방경비대내의 남로당총책으로 조직절발로 사형까지 받을 뻔 했던 것이 두번째다. 그리고 516으로 한강다리를 건널때가 세번째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무슨 사심이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나는 오히려 진보를 가장하면서 사실 사적으로는 매우 탐욕스러운 많은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선악의 기준이란 무엇인가말이다. 그리고 516을 이끌었던 젊은 장교들도 비교적 그 이전의 나이먹은 구태정치인들보다 훨씬 참신했다는 생각이다. 당연히 그럴수밖에 없다. 맨날 한가하게 요정이나 드나들며 감투흥정이나 벌이는 것을 정치로 생각했던 한량들과 비록 동족을 죽여야 했지만 죽음의 전선을 발로뛰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기술을 습득해야 했던  실전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과 비교가 되겠느냐는 생각이다.

나폴레옹과 박정희의 비교해 보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경우는 코르시카의 유력집안출신으로 프랑스에서 교육받고 독립을 위해 전투를 지휘한 경험도 있지만 결국 망명과 귀화를 거쳐 프랑스의 황제로 등극하게된다. 박정희는 그의 조국이 코르시카 처럼 일본에 귀속될 것으로 생각했는지 아예 미련없이 만군에 지원했다. 그러나 그의 조국은 얼떨결에 독립이란 것을 했지만 그것이 그의 나폴레옹이 되려던 꿈에 방해가 되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프랑스 혁명이후 혼란기처럼 박정희도 419이후의 혼란을 틈타 정권을 잡았다. 귀족 출신인 나폴레옹이 교양이 풍부했던 것을 빼면 꽤 비슷하다. 박정희는 조선의 나폴레옹이 되겠다는 꿈을 어느정도는 이루었다고 봐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말 서양처럼 시간이 많이 흐르면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조금은 성숙되지 않겠느냐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역시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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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혁명하라
함석헌, 김진 / 오늘의책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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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하면 한민족 사상계가 나은 영웅이자 스타 그리고 새로운 혁명아라 할 수 있다. 오늘에도 선생의 글을 읽어보아도 정말 어쭙지 않은 외래 사상이나 그것에 대한 베낌 흉내냄으로 점철된 출판 및 사상계의 현실 속에서도 단연 빛난다고 생각한다. 비록 돌아가신지 꽤 오래 된 분의 글이지만 나 역시 그의 글을 보면서 깨닫는 바가 많고 선생의 총명함에 거듭 고개 숙여지는 바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내가 본래 남을 선생이라 부르는 것을 싫어하는 관계로 또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아래 부터는 좀 익숙한 명칭으로 그를 함석헌 옹이라 하겠다. 함옹은 본래 의사가 되려고 했다는데 왜 전혀 다른 방향 신문명이 가져온 유망한 직업을 거부하고 종교적 사상가로 전회하게 되었는지 무척 궁금하다. 아마 중국의 대작가 노신의 일화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노신 역시 반식민지화가 되어가는 중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한 민족이 영원히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고쳐야 할 것은 몸 만이 아니오 그릇된 정신을 가지면 건강한 몸도 고작 날품팔이로 밖에는 쓰여지지 않음을 통찰했으며 그리하여 그는 중국의 정신을 고치는 의사가 되기 위해 의학을 포기하고 문사의 길로 접어 든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문명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제국주의와 독재의 횡포와 폭력, 나태와 타락, 배금주의에 대해 함옹이 대안으로 생각했던 것은 바로 정신문명의 복원을 통한 인간혁명의 길이다. 이를 위해 함옹은 무엇보다도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방기되어 사멸해가는 동서의 고전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일까? 기독교를 비롯하여 중국의 제자백가 특히 노장사상, 인도의 정신문명까지 그의 사색이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었으며 그것이 융합하여 "씨알" 이란 웅대한 결실을 맺게되는 것이다. 씨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껍데기나 즉물적인 현실이 아니라 그 배우에 있는 더 큰 참됨이요 진리요 도(道)다. 그것을 이해하고나 보고 듣기는 어렵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고차원적인 존재인 생명의 본질과도 깊은 관련을 맺는 것이다. 물질문명이나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을 해도 그것을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장의 안락함이 아닌 그 속에 숨겨진 약동하는 생명의 진리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보려하지 말고 만지려하지 말고 깨쳐야 한다. 당장 인간혁명의 길에 나서 실천하라. 그것이 함옹이 남긴 씨알사상의 요지라 할 수 있다.

물론 씨알사상의 한계도 있다. 그것이 너무 정신위주의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점을 아마 부인하기는 힘들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의 즉물적이고 포퓰리즘적 인스턴트 감각시대에 아쉽게도 함옹의 사상이 외면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그가 여러가지 국난의 소용돌이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한 결과 이와 같은 성과를 얻었다는 점이다. 그가  우리나라에 머물지 않고 보다 보편적으로 세계에 통하는 참다운 사상을 만들려는 포부로 그것을 위해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와 동일한 포부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이미 한 세대전에 그와 같은 고민을 하고 실천을 해왔던 선배의 생각을 한 번쯤은 경청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한다. 나도 참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함옹의 고전이해 특히 노장이나 공자를 볼때마다 무릎을 탁치곤 한다. 한세대 이전의 사람인데도 자신의 부족함이 너무 크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괜히 포퓰리즘이나 감각주의에 젖어 함부로 옛것이고 옛사람이야기라고 무시할 것이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음 세대에는 반드시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사상가가 우리나라에 나오기를 바라며 이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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