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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 앞에 서 보게 한다. 내 것이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 죽음. 앞서 이 작가의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읽은 후 이 제목의 책을 냈다고 하여 궁금해서 빌린 책인데 앞책에 비해 다가오는 무게가 갑절 이상이다. 거대하고 조심스럽고 두렵다. 죽음 앞에서 정녕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겪은 가족의 죽음을 떠올려본다. 몇 가지로 나뉘어진다.
1. 외할머니-환갑을 갓 넘으셨을 때 아무런 병 없이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
2. 아버지-마흔아홉에 말기 암 진단, 수술 한 번 후 3개월만에 집에서 돌아가셨다.
3. 시부모님-노화에 따른 당뇨와 뇌졸중 등의 병으로 몇 년 동안 수차례 병원을 다니시다 돌아가셨다.
4. 할머니-백열 세, 몸도 마음도 아픈 곳 없이 다만 기력이 떨어져 혼자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2년 정도 요양원에서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
5. 남편의 숙부님-암 진단, 수술 거부, 진통제의 도움만 받으시면서 1년 반 후에 돌아가셨다.
이쯤 쓰고 보니 이 책 속의 사례들과 겹친다. 결국 죽음의 유형도 비슷하다는 뜻이겠다. 특별히 불운한 사고가 아니라면 늙어서 죽든가 늙어서 아파 죽든가. 내 죽음 또한 이 유형에서 벗어날 것 같지는 않다.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죽는 게 끝까지 사람다움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과연 그럴 수 있기는 한가? 좋은 죽음이라는 게 있는가?
의사인 작가는 죽어 가는 환자들을 보면서 많은 갈등을 겪는다. 어떤 처치가 환자를 위한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지금의 의료 상황이 환자 본인보다는 병원의 입장, 간병인의 입장을 더 우선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나 또한 잘 모르면서 그 상황에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고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면 가족을 힘들게 하는 것보다는 요양원에 들어가는 게 여러 모로 낫다고 여기면서. 정말 몰라서, 죽음이라는 게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지 몰라서 이제까지 잘못 생각해 왔던 게 아닌가 싶다.
인간의 존엄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몸의 존엄, 마음의 존엄. 함부로 말할 수가 없다는 것도 답답하다. 내 죽음을 처리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내가 죽음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내 의사만이 중요한 게 아닐 것이다. 사는 일도 이렇게나 고단한데 이제는 죽는 일조차 미리 헤아려 두어야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자칫하면 가족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두렵고, 그렇다고 아직 죽지도 않았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지레 포기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작가는 의사로서 느끼는 안타까움을 잔뜩 담아서 말하고 있다. 완전한 해결책은 없지만 조금 더 나은 방법을 찾고는 있다고. 억지로 살려 두는 것만이 환자를 위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말에는 마음이 떨리기까지 했다. 그렇지, 의사로서도 환자 가족들의 어떤 선택은 안타깝기 그지없었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내 죽음을, 내 가족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도무지 모르겠다. 어렴풋이 방향은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기는 해도 이런 일은 정작 마주쳐야만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이에 따라 점점 몸의 부분들에 고장 신호가 온다. 약해지고 어긋나고 돌이킬 수 없어지고. 살아 있지만, 굳이 죽음에 매달릴 것까지는 없겠지만, 아예 모른 척할 수가 없다. 생각은 깊고, 마음이 어두워질 따름이다. 그래도 이 책을 읽은 것은 정말 다행이다. (y에서 옮김20190809)
결국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조망할 때는 단순히 매 순간을 평균 내서 평가하지 않는다. 어차피 삶은 대부분 잠자는 시간을 포함해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간다. 인간에게 삶이 의미 있는 까닭은 그것이 한 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단위라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전체적인 구도는 의미 있는 순간들, 즉 무슨 일인가 일어났던 순간들이 모여서 결정된다. 사람들이 매 순간 느끼는 즐거움과 고통을 측정한다는 건 인간의 근본적인 면을 간과하는 행위다. 겉으로는 곤경에 처한 것 같은 삶이 실은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 더 큰 목적을 가지고 있다. 경험하는 자아-순간에 몰입하는 자아-와 달리 기억하는 자아는 기쁨의 정점이나 비참함의 심연만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인식하려 한다. 그리고 이는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끝나는지에 따라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미식축구 팬이 마지막 몇 분 동안 일이 잘 안 풀렸다고 해서 이전 세 시간 동안 행복했던 시간을 모두 망쳤다고 기억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경기가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에서는 결말이 중요하다. - P364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우리의 우선순위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식이 무언지 불확실할 때는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 모두 중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기나긴 고통과 짧은 기쁨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 중에는 고통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정점도 중요하고, 종점도 중요하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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