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의 일생 - 오늘이 소중한 이야기 (양장본), 2024년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단편상 수상작 ㅣ 오늘을 산다 1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새의노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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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의 내 삶과 내가 바라는 삶의 차이는? 이 둘의 차이가 크면 불행을 느끼는 강도가 클 것 같고 차이가 적을수록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드는데 확신은 못하겠다. 삶에 대한 평가만큼 자기주관적인 것도 또 없을 테니. 그래도 막연하게나마 바라기는 하겠지. 지금과 다른 삶? 또는 지금과 비슷하더라도 더 나아 보이는 삶? 우리는, 나는, 사는 일에 참, 의미를 얻으려고 하는 것 같다. 안 하면 안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가가 그리고 있는 두 가지의 삶. 도넛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화를 그리는 쓰유쿠사 나쓰코, 나쓰코가 만화로 그려 보여 주고 있는 화과자 가게의 하루코. 둘은 비슷한 소재나 환경에 연결도 되고 조금씩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나쓰코가 만들어 낸 만화 속 인물이 하루코이니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나쓰코 본래의 모습과 나쓰코가 바라는 모습으로 나누어졌다가 합쳐졌다가. 작가가 인물을 만들어 내는 의도 하나를 알 것 같다.
 
만화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생활을 담담하게 그려 내고 있다. 이게 더없이 마음에 든다. 나쓰코는 나쓰코대로 하루코는 하루코대로. 나쓰코가 맞이한 뜻밖의 상황에 잠깐 놀라기도 했지만 삶은 또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짐작한 대로, 예측하는 대로만 와 주는 것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살기 위해 또 살아내야 하는 일이고. 

크고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주목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생에 경의를 보낸다. 우리 모두 애를 쓰면서 살고 있는 것이니까. 이대로도 잘 살고 있는 것이니까. 나쁜 마음 나쁜 행동 안 하려는 것만 해도 어딘데. (y에서 옮김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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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인 조르바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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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조르바를 보낸다. 긴 만남이었다. 조르바라는 인물 혹은 '두목'이라는 화자의 매력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데,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이 책을 다 읽지 못하면 다른 책을 펼칠 수 없을 것 같은 내 속의 부담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 부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세계문학, 또는 고전, 제목은 오랜 시간 들어왔으나 정작 읽지는 않았던 그 유명한 책들. 어렸을 때부터 읽으라고 읽어야 한다고는 들었으나 막상 펼쳐 보면 그다지 재미도 없고 지루한 것 같고 억지로 읽어야 하나 싶어 도로 모른 척 하고 싶었던 책들. 더러 읽기는 했으나 읽은 뒤에도 무얼 읽었던 것인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남아 있지 않고 그저 책만 다 훑었다는 헛된 자부심만 품고 멀리 해 버리고 말았던 책들. 언제 읽는 것이 더 나았을까.  


    제일 좋은 것은 어릴 때도 읽고 자라서도 읽고 나이들어서도 읽고 그러면 좋겠지. 그런데 어려서 선입견을 잘못 얻고 나면 자라서도 좀처럼 손에 잡지 못한다는 게 문제라서 하는 말이다. 으레 재미없겠지, 지루하겠지, 따분하겠지, 그저 그렇겠지,... 그렇게 미루어둔 책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보물이 숨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젊을 때는 젊어서 읽기에 좋은 책이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나이에 따라 읽기 좋은 책이 또 있을 것이다. 젊은 작가의 신선함만큼이나 나이든 작가의 여유와 노련함도 독서의 행복에 기여할 테니. 만약 조르바를 내가 스무살 무렵에 만났다면, 또는 그 이전에 만났다면,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을 보고 나는 십 년 쯤 후에 다시 조르바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때쯤에는 친구처럼 같이 늙어가면서 지금보다 더 가깝게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소설가라는 사람들은 정말 천성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낱낱이 기록으로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읽고 있자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사람은 누구나 제 삶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누구나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거다. 화려하거나 위대하거나 처절하거나 기막히거나 하지 않더라도, 평범하고 내세울 것도 없고 뛰어나지도 않고 크게 불행하거나 크게 성공한 게 아니더라도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제 삶의 주인공이고 제 세계의 중심인 것이다.  


    조르바도 그냥 그런 인물이었다. 자신의 뜻대로 살고 싶었단 사람. 남이 뭐라고 하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자 했던 사람. 그 차이가 큰 것일까. 원하는 바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원하는 대로 살지는 못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조르바가 대단해진 것인가. 하지만 내가 조르바에게서 본 것은 그런 대단함이 아니었으니, 나는 그저 보통의 한 사람, 그의 삶을 보았을 뿐. 그게 우리네 인생 중의 하나라는 것을 구경했을 뿐. 그런데 그게 참 소중하고 소중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확인했으니. 


    나이가 들면 이래서 좋은가 보다. 애타는 조바심이 덜해지는 것, 느긋해지는 것, 이해가 되고 체념도 되고 용서도 되는 것. 조르바가 가진 열정조차도 나이든 사람의 여유로 읽히는 이 묘한 이해력이라니.  


    재미?, 상식적으로 말하는 '재미'는 없었다. 그저 그런 인물의 삶이었다. 그저 그런 삶, 그게 내 재미였던 모양이다. 그게 점점 좋아진다. 그저 그런 것. 꼬이고 엉키고 밟히고 짓밟고 복수하고 후회하고 하는 그런 것 말고.  


    다만, 조르바라는 남자가 내 취향인 것은 아니었다는 메모는 남겨야겠다.(ㅎㅎ)  크레타라는 곳에 대한 동경은 생겼고. (y에서 옮김20120317)

    세상 만사에는 숨은 뜻이 있으려니 싶었다. 사람, 동물, 나무, 별은 모두가 상형 문자, 그 상형 문자를 해독하려 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화 있을진저. 보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사람이며 동물이며 나무며 별이라고 생각할 뿐. 이해할 나이에 이르면 때는 늦는 법..... - P68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 이 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 - P93

    나는 행복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 (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 P98

    우리는 밤이 깊도록 화덕 옆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행복이라는 것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 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지금 한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지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었다. - P119

    세계란 무엇일까? 나는 궁금했다. 세상의 목적은 무엇이며 우리 한순간의 목숨이 어떻게 하여 세상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의 목적은 쾌락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혹자는 정신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한 차원을 높여서 보면 똑같은 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왜? 무슨 목적으로? 육체가 와해되어 버린 뒤에도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의 잔재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영원불멸을 그리는 우리의 끝없는 염원은 우리가 영원불멸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짧디짧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인가 영원불멸한 것을 섬기는 데서 유래하는 것은 아닐까? - 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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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두근거리는 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예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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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뜻밖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날의 내 연애 과정을 돌아보게 되었다. 별로 내세울 것도 없고, 그다지 슬퍼할 것도 쓸쓸할 것도 없는, 그래서 더욱 아쉬운 것.

     

    작가는 현재 미혼인 것으로 보이나 사귀는 사람은 있는 것 같고, 다만 학생 시절에 친구들마냥 남학생과 사귀지 못한 것을 많이 아쉬워하고 있다. 어렸을 때 남학생과 사귈 경우, 할 수 있는 많은 귀엽고 예쁜 짓들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이 들어서도 내내 아쉬워하는 것을 보면서 귀여운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 그 시절에는 남들에게 친구들에게 보이기 위한 사랑을 하기도 하니까.

     

    나는, 나는 어땠을까. 글을 한 편씩 읽을 때마다 관련되는 내 행동이 떠오르고 내가 하지 못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의외로 신선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게도 이런 면이?

     

    재미삼아 나열해 보자. 내가 연애라는 것을 하는 동안 해 보고 싶었으나 해 보지 못한 것들에 무엇이 있었던가. 유원지에서 솜사탕 먹기, 도서관에서 자리 잡아주고 같이 공부하기, 커플링이나 반쪽짜리 커플 목걸이 나눠 갖기, 잔디밭에 자리 깔고 도시락 먹기. 이렇게 쓰면서 생각해 보니 못해 본 것보다는 남들처럼 해 본 게 많다는 생각도 든다. 하기야 어린 시절의 나는 꽤나 영악했고 눈치도 빨랐고, 잔머리도 잘 굴렸으니까. 다만 내가 내 풀에 좋아서 해 본 것들이다 보니, 흐뭇하게 그리운 기억이 없다는 것, 그게 아주 많이 쓸쓸하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이제, 두근거리지 않는 자신이 더 마음에 든다. 남자, 그 어린 존재에 무얼 그리 마음 잡힐 일 있을까 보냐고. 나는 그때 왜 그리 헛되이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까. 이 깨달음이 그다지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자각만으로는 큰 위로가 되지 않는 쓸쓸함.  (y에서 옮김201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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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 갇히다 - 책과 서점에 관한 SF 앤솔러지
    김성일 외 지음 / 구픽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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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편의 SF 소설이 실려 있는 책을 신청해서 받았다. 책과 서점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 글들인데 낯선 기획이 아니라고 여겼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분위기의 책을 읽은 적이 있고. 이런 종류의 소설집이 계속 나오고 있는 건 독자인 한 사람으로서 퍽 반가운 일이다. 작가들은 자꾸자꾸 쓰고 독자들은 자꾸자꾸 읽다 보면 좋은 작품이 나올 확률은 분명히 높아지게 마련일 테니까.    


    이번에는 읽기 전부터 내 멋대로의 계획을 세워 두었다. 세 가지 기준을 정해 놓고 8편의 작품을 줄로 세워 보겠다는 것. 순전히 내 편의를 위한 작품 줄세우기로, 나는 SF 소설 비평가도 아니고 작품의 우열을 평가할 만한 안목이나 능력이 없으므로 오로지 내 취향에 따른 것임을 먼저 밝혀 놓으려고 한다. 작품의 좋고 안 좋고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그럼에도 굳이 줄세우는 방식을 택한 내 태도가 불쾌하신 분께는 너그러운 용서를 구한다. 이렇게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탓이오니.) 


    8편의 작품을 줄세운 내 기준은 세 가지다. 재미, 감동, 참신. 하나씩 조금 더 자세하게 풀어 써 보고 순서대로 나열해 보겠다. 


    1. 재미

    나는 재미있는 소설을 좋아한다. 읽으면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도 이것이다. 이 글, 재미가 있구나, 혹은 재미없구나. 재미있는 글은 단편소설일 경우 한달음에 읽게 된다. 읽는 중에는 남은 책장이 얼마 안 되어 곧 끝날 것만 같은 마음에 두근거리는 기분을, 다 읽고 나면 더 읽고 싶다는 아쉬움을 많이 느낀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나면 두 배 이상의 시간을 산 행복한 기분이 들고 재미가 없을 경우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에 쓰린 기분을 느끼고 만다.     


    SF 소설의 경우 배경(특히 과학적 지식이나 원리)에 대한 설명이 글 안에 녹아 있지 않고 겉으로 장황하게 드러나 있으면 재미가 많이 없어진다.  


    재미(읽는 몰입도)에 따른 작품 순서



    1



    문녹주(금서의 계승자)



    2



    이경희(바벨의 도서관)



    3



    김성일(붉은 구두를 기다리다)



    4



    이지연(역표절자들)



    5



    전혜진(모든 무지개를 넘어서)



    6



    송경아(12월, 길모퉁이 서점)



    7



    천선란(두 세계)



    8



    오승현(켠)



    2. 감동


    내가 좋아하는 소설은 감동을 주는 소설이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를 나는 많이 존경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 사람이 사람에게서 감동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아주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로서 이보다 쉽고 진하게 행복을 나누는 활동이 또 있을까 싶다. 


    내가 소설에서 얻는 감동의 양은 내가 바라는 이상향을 얼마나 잘 그려 내고 있나에 달려 있다. 소설이 있음직한 현실을 바탕으로 작가가 바라는 모습으로 나타내는 글의 장르라고 할 때 내 바람과 작가의 바람이 얼마나 비슷하게 이어지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작가가 그려 놓은 세상이 내가 바라는 세상과 가까워 보인다는 느낌을 받으면 내 바람이 엉뚱한 게 아니라는 것, 내 바람이 무모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내 바람과 같은 바람을 갖고 있는 소설가가 있으니 외롭지 않다는 느낌마저 얻을 수 있어 더욱 좋다.


    SF 소설은 현실에서 마주하기 어려운 모습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는 볼 수도, 체험할 수도 없는 환경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 그렇지만 다루는 내용이나 주제는 우리네 현실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상상과 현실이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섞이고 넘나드는 가운데에서도 삶의 진실은 고스란히 살아 있다. 그러니 바라는 마음은 더욱더 간절할 수밖에. 현실이 고달프다고 느끼는 강도가 셀수록 상상의 세상에서 끌어당기는 빛은 더 환하더란 말이지. 빛에 대한 기억이 남루한 현실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어 줄 정도로.      



    감동(내가 바라는 이상향과의 일치도)에 따른 작품 순서



    1



    이경희(바벨의 도서관)



    2



    김성일(붉은 구두를 기다리다)



    3



    이지연(역표절자들)



    4



    문녹주(금서의 계승자)



    5



    송경아(12월, 길모퉁이 서점)



    6



    전혜진(모든 무지개를 넘어서)



    7



    오승현(켠)



    8



    천선란(두 세계)




    3. 참신


    SF 소설이라면 뭔가 새로울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소설을 읽는 중에 어디선가 본 듯한 것들이 자꾸 떠오르면 그만 내려놓게 된다. 물론 본 듯한 것임에도 다루는 방식이 새로우면 당연히 그 작가의 솜씨에 반한다. 이게 중요하다. 시간 여행이든 외계인과의 만남이든 다른 차원에서의 사건이든 알만한 내용이지만 이들이 어떻게 내게로 새롭게 와 닿는가 하는 것.   



    참신(지겹지 않은 새로움)에 따른 작품 순서



    1



    문녹주(금서의 계승자)



    2



    이지연(역표절자들)



    3



    이경희(바벨의 도서관)



    4



    김성일(붉은 구두를 기다리다)



    5



    천선란(두 세계)



    6



    전혜진(모든 무지개를 넘어서)



    7



    오승현(켠)



    8



    송경아(12월, 길모퉁이 서점)




    4. 장점


    8편의 글을 20자 이내로 요약해 보았다. 앞서 세 가지 기준으로 내 멋대로의 줄을 세워 보기는 했지만 각각의 글은 각각의 장점을 갖고 있고 이를 간단히 말하는 게 나름 흥미로웠다. 단점은 굳이 들먹일 필요를 못 느낀다.  


    [20자로 요약한 장점]


    김성일(붉은 구두를 기다리다) - 짧은 분량이 품고 있는 길고 낭만적인 서사

    문녹주(금서의 계승자) - 사람을 책으로 만들어 버린 혹독한 발상 

    송경아(12월, 길모퉁이 서점) - 누구나 품고 있을 길모퉁이 서점 하나

    오승현(켠) - 지켜야 할 것은 지키고 말겠다는 태도

    이경희(바벨의 도서관) - 어떤 첨단 시대에도 중요한 건 자유의지

    이지연(역표절자들) - 표절과 창조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경험

    전혜진(모든 무지개를 넘어서) -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책만 있다면 괜찮아 

    천선란(두 세계) - 여기가 아닌 그곳으로의 위험한 선택


    5. 권하고 싶은 사람

    오랜 시간 해 왔던 일의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을 읽고 나서 이 글을 읽었으면 싶은 사람을 탐색해 보는 일. 좋은 것은 나누면 두 배 이상으로 좋아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작품을 두고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은 그 대상에 대한 내 관심의 양과 호감도를 대신 보여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이 아직도 즐겁다. 막상 실천하고 있지는 않지만 생각만으로도.


    [권하고 싶은 사람]

    김성일(붉은 구두를 기다리다) - 신화의 가치와 참된 역할에 대해 새삼 확인하고 싶은 사람

    문녹주(금서의 계승자) - 남자와 여자 사이의 풋풋하고도 기묘한 사랑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

    송경아(12월, 길모퉁이 서점) - 위로가 될 공간이 한 곳쯤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 

    오승현(켠) - 도저히 포기가 안 되는 대상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

    이경희(바벨의 도서관) -인류의 기억을 다 모은 바벨탑이 전하는 메시지가 궁금한 사람

    이지연(역표절자들) - 자신이 자신의 기억을 못 믿는 상황이 꽤 흥미롭다고 여기는 사람

    전혜진(모든 무지개를 넘어서) - 책과 서점이 누군가의 생을 구할 수 있다고 여전히 믿는 사람

    천선란(두 세계) -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을 끝내 받아들이겠다고 각오한 사람


    6. 그리고

    따뜻한 SF 소설을 읽고 싶다. 따뜻한 SF 소설은 없을까. 나만 이런 따뜻한 SF 소설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아직 못 찾았고 못 읽은 것일까.


    마지막으로 나만의 세 기준에 따라 점수를 종합했을 때 가장 좋다고 여겼던 작품은 이경희의 ‘바벨의 도서관’이라고 남겨 놓는다.(y에서 옮김20210222)



    Y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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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ㅣ 난다시편 9
    허수경 지음 / 난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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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에 실린 첫 시 '공항에서'가 마음에 들었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이후 읽은 시들은 '공항에서'에 가려 나를 울리지 못했다. 나는 시집 전체에 푹 빠져 들겠다고 작정하고 들어섰다가 '공항에서' 한 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무래도 좋다. 한 권의 시집 안에서 단 한 편이라도 제대로 만나는 일이 어디 흔했던가. 나는 먼먼 공항으로 시인을 만나러 간다.


    실제로 내가 공항에 갈 일은 없다, 아직까지는. 어디로 떠날 일도 없고 누군가를 배웅하거나 마중할 일도 없다. 비행기는 비행기, 나는 나, 우리는 서로 아득하기만 한데, 이 시인 덕분에 공항으로 간다. 내 기억 속의 공항들, 어느어느 곳들, 실제와 상상이 섞이고 뒤집혀서 내가 그려보는 공항은 나만의 공항이 된다. 공항을 상상하는 일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듯하다, 하루를 온전히 보내고 싶을 정도다.


    어느 새 시인이 우리를 떠나간 지 10년이 다 되어 간다. 누군가는 먼저 가고 누군가는 남는다. 먼저 간 이들이 시를 남겨 놓았다면 남은 쪽은 훨씬 덜 서운하겠다, 내 입장에서는. 시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 남겨 놓은 작품을 모은 것이라 시인 자신은 모르는 시집인 셈이다. 이 사실을 잊을 수가 없는 채로 읽다 보니 시에 깃들여 있는 죽음의 이미지를 놓칠 수가 없다. 시인은 알고 있었을까? 자신에게 다가올 마지막 상황을. 


    더 이상 모을 수도 쌓아 놓을 수도 없을 이 시인의 책들 위에 이 시집도 얹는다. 나보다 먼저 간 이여, 나보다 멀리 가 있기를. 

    사랑하는 사람아, 당신을 기다리면서 물들면서
    나는 이 세상 속, 어떤 예쁜 사람이 되어
    사라져간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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