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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드디어 조르바를 보낸다. 긴 만남이었다. 조르바라는 인물 혹은 '두목'이라는 화자의 매력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데,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이 책을 다 읽지 못하면 다른 책을 펼칠 수 없을 것 같은 내 속의 부담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 부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세계문학, 또는 고전, 제목은 오랜 시간 들어왔으나 정작 읽지는 않았던 그 유명한 책들. 어렸을 때부터 읽으라고 읽어야 한다고는 들었으나 막상 펼쳐 보면 그다지 재미도 없고 지루한 것 같고 억지로 읽어야 하나 싶어 도로 모른 척 하고 싶었던 책들. 더러 읽기는 했으나 읽은 뒤에도 무얼 읽었던 것인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남아 있지 않고 그저 책만 다 훑었다는 헛된 자부심만 품고 멀리 해 버리고 말았던 책들. 언제 읽는 것이 더 나았을까.
제일 좋은 것은 어릴 때도 읽고 자라서도 읽고 나이들어서도 읽고 그러면 좋겠지. 그런데 어려서 선입견을 잘못 얻고 나면 자라서도 좀처럼 손에 잡지 못한다는 게 문제라서 하는 말이다. 으레 재미없겠지, 지루하겠지, 따분하겠지, 그저 그렇겠지,... 그렇게 미루어둔 책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보물이 숨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젊을 때는 젊어서 읽기에 좋은 책이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나이에 따라 읽기 좋은 책이 또 있을 것이다. 젊은 작가의 신선함만큼이나 나이든 작가의 여유와 노련함도 독서의 행복에 기여할 테니. 만약 조르바를 내가 스무살 무렵에 만났다면, 또는 그 이전에 만났다면,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을 보고 나는 십 년 쯤 후에 다시 조르바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때쯤에는 친구처럼 같이 늙어가면서 지금보다 더 가깝게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소설가라는 사람들은 정말 천성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낱낱이 기록으로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읽고 있자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사람은 누구나 제 삶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누구나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거다. 화려하거나 위대하거나 처절하거나 기막히거나 하지 않더라도, 평범하고 내세울 것도 없고 뛰어나지도 않고 크게 불행하거나 크게 성공한 게 아니더라도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제 삶의 주인공이고 제 세계의 중심인 것이다.
조르바도 그냥 그런 인물이었다. 자신의 뜻대로 살고 싶었단 사람. 남이 뭐라고 하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자 했던 사람. 그 차이가 큰 것일까. 원하는 바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원하는 대로 살지는 못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조르바가 대단해진 것인가. 하지만 내가 조르바에게서 본 것은 그런 대단함이 아니었으니, 나는 그저 보통의 한 사람, 그의 삶을 보았을 뿐. 그게 우리네 인생 중의 하나라는 것을 구경했을 뿐. 그런데 그게 참 소중하고 소중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확인했으니.
나이가 들면 이래서 좋은가 보다. 애타는 조바심이 덜해지는 것, 느긋해지는 것, 이해가 되고 체념도 되고 용서도 되는 것. 조르바가 가진 열정조차도 나이든 사람의 여유로 읽히는 이 묘한 이해력이라니.
재미?, 상식적으로 말하는 '재미'는 없었다. 그저 그런 인물의 삶이었다. 그저 그런 삶, 그게 내 재미였던 모양이다. 그게 점점 좋아진다. 그저 그런 것. 꼬이고 엉키고 밟히고 짓밟고 복수하고 후회하고 하는 그런 것 말고.
다만, 조르바라는 남자가 내 취향인 것은 아니었다는 메모는 남겨야겠다.(ㅎㅎ) 크레타라는 곳에 대한 동경은 생겼고. (y에서 옮김20120317)
세상 만사에는 숨은 뜻이 있으려니 싶었다. 사람, 동물, 나무, 별은 모두가 상형 문자, 그 상형 문자를 해독하려 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화 있을진저. 보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사람이며 동물이며 나무며 별이라고 생각할 뿐. 이해할 나이에 이르면 때는 늦는 법..... - P68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 이 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 - P93
나는 행복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 (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 P98
우리는 밤이 깊도록 화덕 옆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행복이라는 것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 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지금 한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지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었다. - P119
세계란 무엇일까? 나는 궁금했다. 세상의 목적은 무엇이며 우리 한순간의 목숨이 어떻게 하여 세상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의 목적은 쾌락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혹자는 정신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한 차원을 높여서 보면 똑같은 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왜? 무슨 목적으로? 육체가 와해되어 버린 뒤에도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의 잔재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영원불멸을 그리는 우리의 끝없는 염원은 우리가 영원불멸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짧디짧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인가 영원불멸한 것을 섬기는 데서 유래하는 것은 아닐까? - 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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