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렌마트 희곡선 - 노부인의 방문.물리학자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5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김혜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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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희곡이나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상상할 때 나는 배우 중 한 사람의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부담 막강한 연출자가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관객 하고 싶다. 제일 앞줄에 앉아 연극을 보는 관객(실제로 연극을 볼 때도 티켓팅 시작 시간 맞춰 제일 앞줄의 표를 받는 경우가 많은 편이고). 배우들의 얼굴에서 땀이 흐르는 것도 바로 볼 수 있는 자리, 소품 하나하나의 질감까지 느껴볼 수 있는 자리에서. 이 책도, 책 속의 두 편도 그런 상상을 하며 읽었다. 그리고 마음 착잡하다.

우울하고 화도 난다. 사람의 악한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자꾸만 생각해 보게 한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나 살겠다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려고 하는 의지, 다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소수를 해치는 결정, 용서받을 수 있을까? 누가 용서하나? 피해자는 이미 같은 세상의 사람이 아닌데. 복수는 또 뭐란 말인가? 나도 이 복수라는 감정에서는 떳떳할 게 없는 사람인데. 내가 은근하고 사소하게 얼마나 복수를 잘 하는데. 쉬이 떨쳐버리지 못하고 마음 한곳에 남겨 놓고는 끈질기게 내 감정도 상대를 향한 복수심도 얼마나 잘 간직하고 사는데. 내가 얼마나 뒤끝 작렬하게 살려 놓는 사람인데. 그러고 보니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우울함은 내 본성을 확인한 것에서 비롯되었나 보다. 모른 척 하고 싶었던 내 속의 악의를 만나 버려서.

분량이 많지 않아 금방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막과 막 사이 읽는 나도 쉬고 싶었다. 마음이 고단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내게 이 정도의 양심은 있었구나 싶어 다행이었고 한편으로는 그래서 어쩌자고 하는 낭패감도 있었다. 지금이라도 앞으로 착하게 살아야지, 착하게 늙어야지 하고 교훈 같은 다짐을 해야 하나 어쩌나 하다 보니.

작가는 스위스 사람이고, 두 편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도 아마 스위스의 어느 도시라는 것일 텐데, 실제 있는 도시인지 가상의 도시인지 찾아보지는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라는 배경지식을 갖고 읽으면 그때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아야 했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좀더 도움을 얻을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때의 전쟁에서 한참이나 지나온 지금, 그 땅과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감흥을 준다는 것에 있다. 이게 문학의 힘이기는 하겠지만 가끔은 글의 힘이 무서울 정도다. 글의 힘에 비해 인간의 깨달음은 더디고 더딜지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아무리 부조리한 상태를 보인다고 해도, 그래서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결과를 낳는다고 해도, 주저앉는 일만은 없어야 할 텐데. 두 손 두 발 다 내리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독자를 이렇게 맥빠지게 만드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이것이 궁금하다. (y에서 옮김2018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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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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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사는 생물체와 지구 밖에서 온 생물체가 만난다면? 친하게 지낼 수는 없을 테고, 결코. 무조건 싸우려고 들 것인데, 싸우면 누가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현실적으로 지구 밖에서 누군가 지구에 왔다면, 그들이 지구에 올 정도의 과학기술력을 가진 존재라면, 지구 생물체로서는 그들을 이겨 낼 수는 없다는 말을 과학 관계자에게서 듣기도 했는데. SF 소설은 소설이므로 싸움이 일어난다. 누가 누구를 이길 것인가?

소설은 유쾌하다. 배경으로 나오는 우리 사회의 온갖 문제들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유쾌하게 놀림을 받고 있다. 우리네 정치가와 정부 관계자와 이웃 나라의 막된 정치가들이 문어만도 대게만도 상어만도 못한 처지에 놓인다. 문어를, 대게를 쪄 먹으려고 할 게 아니라 이들만도 못한 저들을 쪄 먹어야 할 일인데. 문어와 대게와 상어와 개복치와 해파리와 고래가 손을 잡고 일어나서 잡아가 버렸으면 좋겠다. 뜨거운 이 여름에 이 소설집을 읽고 있자니 이런 바람밖에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리고 한탄하게 된다. 지구 생물체들이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에. 같이 망하자고 같이 죽자고 도리어 덤벼들지는 않을까? 그래서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무서워하는 것일까? 이런 쓸데없는 공상에도 빠져 본다. 날이 너무 더운 탓이다. 기후 변화가 심각해진 이유에 혹시 외계인들의 간섭이 있는 것은 아닐까? 지구에서 인간을 없애 보자며. 문어도 대게도 말을 하는데, 고래도 변신을 하는 소설 속 세상인데, 소설 안에서조차 우리네 삶은 지긋지긋하고 한심하기 그지없는데, 작가는 유쾌하고 통쾌하게 연약한 인간 존재들을 놀리고 있기만 한데. 내 상상은 버릇이 자꾸 없어지고 있다.

이제 문어도 대게도 해파리냉채도 못 먹겠다. 항복하라고, 살려 달라고, 혼내겠다고 제각각의 목소리로 나를 흔들어 댈 것만 같다. (y에서 옮김2024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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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퍼센트 인간 - 인간 마이크로바이옴 프로젝트로 보는 미생물의 과학
앨러나 콜렌 지음, 조은영 옮김 / 시공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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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읽었다. 몰랐던 바를 알게 되는 신기하고도 놀라운 내용들. 문제는 항상 이 다음에 일어난다. 이제 알았으니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과학 정보는 늘 이러했다. 몰랐던 것을 알게 해 주고 그래서 이전과 다른 대처를 해야 한다고. 알고 나면 알기 전보다 훨씬 마음이 복잡해진다. 이건 맞는 말일까? 맞겠지? 과학자들이 연구한 것이라며? 과학자가 연구했다면 다 맞는 건가? 그래서 이들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건가? 맞는 말이라는데 난 왜 자꾸 망설이는 것이지? 지금 내가 느끼는 익숙함과 편리함을 포기하기 싫어서?

미생물이 무엇인지, 이들이 내 몸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인지, 미생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인지 막연하게 알고 있던 바를 상세하게 설명해 놓은 책이다. 장수가 가장 큰 병이 되고 있다는 시대에 살면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것도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몸 안에 있다는 미생물 특성을 제대로 알고 다루는 게 필요한 일이다. 격하게 인정한다. 이 길이 이제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니라는 것도.

사람은 동물의 한 종이고, 한 개체로서 살아간다. 나 자신은 나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존재지만 생명체 차원에서는 그저 한 개체일 뿐이다. 지구에서 더불어 살다가 사라지는, 사라지면서 미생물의 도움으로 분해되고 마는, 분해되어 다시 다른 생명체의 거름이 되는. 생명의 거대한 순환 구조를 생각하면 내가 참으로 작고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알겠는데 또 그래서 더욱 소중한 존재인 것도 알겠다. 내가 살아야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노릇이니까.

현대인들이 겪는 각종 질병의 원인과 현상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얻은 장점(패스트푸드나 가공식품 따위)들이 우리 몸을 도리어 해치고 있다는 말은 새삼스러운 바도 아니고 어떻게 고쳐 나가야 하는지도 대체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 자세한 연구 자료들로 설명해 놓았다. 과학적인 이유와 근거가 궁금했던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 정보들이다.

내 몸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내 안의 미생물들을 좀더 신경을 써서 돌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양치질부터 건강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섭취하는 태도, 적절한 운동 등등이 나를 위한 일이자 내 미생물들을 위한 일이 된다는 것, 내 미생물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몸을 유지해야 내가 건강해진다는 것. 출산과 육아는 이제 거리가 먼 사항이 되었으니 다른 이들에게 미루고. 게다가 맹장수술마저 해버렸으니 어쩌나 하는 뒤늦은 안타까움을 잠깐 잡았다가 놓는다.

나는, 내 몸은, 이 책을 읽었다고 좀 달라질까? 글쎄... (y에서 옮김2024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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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ㅣ 문학동네 시인선 187
안미옥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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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제법 오래 전에 구해 놓았고 이제야 펼쳐 읽는다. 빨간색 표지를 계속 보고 있었던 셈이다. 


여름 시 몇 편이 아주 돋보였다. 겨울 시 여러 편보다 더. 뜨거운 날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겨울 시가 나를 좀 구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펼치자마자 녹아 내리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 글도 이 더위를 이기지 못하는구나, 얼음도 눈도 속수무책이구나, 여름만이 끔찍하게 떠들고 있구나...  바람조차 열기로 떨고 있다. 


시는 승리자의 말이 아니라 패배자의 말이라는 말, 내가 어디서 누구한테서 들었던가? 모르겠다. 진짜 들었던 말인지 내가 혼자 궁리한 말인지. 시를 읽으면서 신이 난다는 기분을 얻은 적이 없으니. 세상과의 대면에서 진 쪽이 쓴 말, 사람과의 대결에서 진 쪽이 쓴 말, 상황과의 대립에서 진 쪽이 쓴 말, 내가 읽는 시들은 늘 이쪽에 있다. 읽는 내 취향 탓일까, 쓴 시인의 정서 탓일까. 오늘도 나는 이 시집에서 지고 있는 사람을 본다.


문이 인상 깊었다. 열린 문, 닫힌 문. 열린 집, 닫힌 집. 집이 덩달아 인상적이 되었다. 내 집은 세상의 어느 자리에 있을까? 시인이 찾고 있는 집은 세상의 어디에서 시인을 기다리고 있을까? 문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애써 발견해도 열리지 않고 문 안 쪽의 집안은 나를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들어오지 말라는 듯. 보면서도 이 시인은 울지 않는다. 울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대신 시를 쓴다.  


이렇게 문 앞에 서 있는 시인 한 사람을 곁에 둔다. 

일상이 뒤죽박죽이라면
조금 더 헤쳐놓아도 될까 - P14

마지막 인사는 마지막에 하는 인사가 아니라 마지막이 올 때까지 하는 인사일까. - P19

어둠을 접어서 옆에 두면 잠이 잘 온다
나는 작게 더 작게 접는다
접을 수 없을 때까지 접는다 - P21

걸을 때마다 여름 열매들이 발에 밟혔다
언제부터 열매라는 말에
이토록 촘촘한 가시가 들어 있었을까 - P42

부서진 마음, 무너진 마음, 부족한 마음, 꽉 찬 마음, 쏟아지는 마음, 넘어지는 마음, 터진 마음, 젖은 마음, 뾰족한 마음, 여린 마음, 단단한 마음…… - P60

깨진 자리마다 꽃이 피는
녹슨 여름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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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에 잊어버린 것 - 마스다 미리 첫 번째 소설집
마스다 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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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의 작품을 연달아 읽는 중-다소 가볍고 길지 않고 무난하고 편하고. 내게는 만화>산문>소설 순이다. 줄글보다는 만화로 전달하는 쪽이 더 와 닿는다는 뜻이다. 노골적이든 은근하게든 이 작가의 경우 줄글 전달이 편하지 않았다.

 

언뜻 생각하면 그림으로 된 만화가 글보다 작가의 의도를 더 직설적으로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겠지만 같은 내용이라도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 만화로 나타날 때 더 함축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 작가의 작품들로 인해 알 수 있었다. 작가에 따라 글로 드러내는 게 더 효과적인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 이 작가는 만화 쪽이 나았다는 것, 작가에게 끌리는 매력이 더 깊었다는 것, 소설책이 이 한 권밖에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랬다는 것을 메모해 둔다.

 

요즘 내가 한 영역에서는 정신적으로 시달리고 있는 게 맞는 모양이다. 가벼운 글을 가볍게 읽고 싶어 하고 가벼운 생각으로 시간을 메우려고 하는 것을 보면. 마스다 미리의 그림이나 생각은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데 적절하고.

 

남자와 여자의 오묘하면서도 끈질긴 관계. 정도껏 사랑하고 정도껏 미워할 일인가. 적당히 숨기고 적당히 속이면서 유지해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어떤 때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지혜롭다 싶다가 어떤 때는 교활하다 싶어진다. 어느 쪽이든 살아 남기 위해 택한 삶의 방식이었을 것이고, 내가 그때마다 다르게 느꼈다면 그 순간순간의 내 삶이 아슬아슬했던 탓이었겠지. 속여서 기쁘기도 했고 속여서 낭패스럽기도 했고.

 

나는 잊어버린 것이 없어 좀 서글프다. (y에서 옮김201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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