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ㅣ 문학동네 시인선 145
이병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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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에 읽다가 덮어 두었다. 오늘 아침에 깨어 지난 밤에 읽다가 짚어 두었던 구절부터 다시 읽는다. 가을밤이라고 해서 섣불리 머물렀던 것이 아니었구나.  


한 편 한 편이 시이면서 드라마이면서 다큐멘터리이면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느 한 편 그냥 넘겨지지 않았다. 이런 시집을 만나면 마음이 경건해진다. 시인은 한 행 한 행에 얼마나 시간을 들였을까. 겉으로는 후루룩 썼더라도 그 후루룩에 모였을 시간들을 나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겠다. 다른 이의 마음을 건드릴 힘이 있는 글이라면 한 줄의 글도 그냥 모이지는 않았으리라는 것, 그걸 믿을 수 있어서 내가 시를 읽는다. 내게 와 닿는 시를 읽고 있으면 내가 가 보지 못했던 시간과 공간을 선물로 받고 있는 것만 같다.   


무심한 듯 보여도 깊고 짙다. 살짝 건드리며 지나치는 것 같은데 베인 마음을 들려 준다. 아플 수 있다면 함께 아파하자고 하는 것 같아서 나는 내 생의 아주 적은 부분을 나눈다. 기꺼이 아프기는 하겠지만 고작 이만큼의 내 감동이 시인에게 혹은 다른 독자에게 아니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 또 어떤 목숨들에게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인지.


이 시집을 만나서 이번 가을은 풍요로웠다고 남겨 본다. (y에서 옮김20201106)

당신도 원래 바다였다

당신이 어떤 세월에 휩쓸리다 살 곳을 정했다고

흐르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마라 - P17

그럴 때 있어서



어떻게든 이으려 애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모두를 없애는 것도 중요할 때



이기지 않으려는 것까지도 중요할 때 - P25

나는 여기에 자주 올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마주치기 위해

아주 다르게 하고 오기로 한다 - P38

눈이 왔는데 아무 소식 없었다고 하지 말기를

글씨를 써놓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말하지 말기를 - P59

우리는 어찌어찌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태어난 게 아니라

좋아하는 자리를 골라

그 자리에 잠시 다녀가는 것



그러니 그 자리에 좋은 사람 데려가기를

이번 생에서는 그리 애쓰지 말기를



다만 다음 생에

다시 찾아오고 싶을 때를 대비해

꼭꼭 눌러 그 자리를 새기고 돌아가기를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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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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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도 그 여운에 젖어 하루를 넘길 수 있다니, 아주 괜찮은 기분이다. 이만큼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었던 책이라면, 내게는 축복이고 행운이다. 읽기를 잘 했다.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많이 담겨 있는 책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무엇보다 치밀한 구성. 사람 사이의 관계가 꼬이고 꼬이더라도 그 과정이 억지스럽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러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을 놓을 수 없을 만큼의 즐거운 긴장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끝까지 알 수 없는 결말. 그러나 이 작가의 작품에서 내가 본 결말은 앞선 내용에 비해 비교적 약했다는 기억은 이 책에서도 여전하였으나, 이 정도로라도 만족한다. 또 등장인물들에 대한 호감.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까지 미움이나 증오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게 부여해 준 필연성, 인간으로서의 서글픈 한계, 같이 서글프고 더욱 흥미로워진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는 동질감이 국적을 넘어서 하잘것 없는 내 편견을 넘어서 호감을 갖게 해 준다. 그러면서 내가, 이러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각에 이르도록,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좋았던 모양이다.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거북한 거부감은 별도로, 일본인 개인에 대해서는, 특히 작가들에 대해서는 내 호감도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것처럼, 지금 일본의 젊은이들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면, 이런 태도로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한다면, 혹은 작가가 젊은 독자들에게 이런 자세를 가진 젊은이들을 기대하는 의도를 가지고 쓴 글이라면, 일본의 미래가 어둡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기성 세대는 신세대를 염려하게 마련이고, 이대로라면 세상이 망할 것 같다고 한다 해도 망하지 않고 거듭나 이어져 왔으니, 일본 또한 그러하리라. 후쿠시마 원전은 그들에게 앞으로도 계속 숙제로 주어지게 될 것이고.    


잘 짜여진 구성, 내가 이 요소를 노골적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진작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왜 인식하지 못했을까 모르겠다. (y에서 옮김201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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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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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소설. 작가 이름에 대한 기대로 부담없이 읽는 소설. 딱 그만큼의 즐거움으로 읽었다.  


배경은 스키장이다. 내가 스키를 타지는 못하지만 스키장에서 남들이 스키 타는 것을 보며 노는 일은 다소 즐거워하는 편이므로 소설을 읽는 일에는 거부감이 없었다. 상상하는 것도 좋았고. 


추리소설이나 범죄 드라마의 공식 같은 것 하나. 초반에 의심받을 만한 사람은 범인이 아니더라는 것. 그러면 두 팀의 대결이 된다. 작가나 감독이 한쪽, 다른 쪽에는 독자나 시청자가 있다. 둘은 특히 작가 쪽은 상대를 완벽히 속여 보려고 한다. 독자나 시청자가 끝까지 범인을 찾지 못하고 반전을 느낀다면, 그리고 작가의 의도에 감탄한다면 작가도 독자도 만족하게 되는 결과. 


이 작가의 작품을 어지간히 읽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해결해 나갈 것인가 읽는 중에는 제법 파악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역시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직도 충실한 독자로 남아 있을 수 있겠다. 더 읽고 싶기도 하니까.


소설 속 흐름을 잡고 있는 한 가지 더-상처가 미치는 영향. 한 인간에게든 그 인간이 속한 공동체에게든, 치유되지 않는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관계를 힘들게 한다는 것. 소설 속이니까 해피앤드가 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고. (y에서 옮김201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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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ㅣ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88
    박남준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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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글 그 안에 담겨 있는 긴 이야기, 그 이야기를 읽는다. 이 가을에.

    자라면서 혹은 살면서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늘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들, 늘 곁에 있는데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들, 어느 순간 그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들어오라고 해도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굳이 챙기지 않았는데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그게 꼭 나이 탓인 것만 같다. 그런 나이가 오는 것이다. 저절로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

    박남준의 시를 이 시집에서 처음 본 것은 아닌데, 내 감상의 기록의 흔적을 찾지 못하겠다. 어쩌면 그때는 또 내게 보이지 않았던 탓인지 모르겠다. 다시 찾아봐야겠다. 내게 있을 그의 다른 시집을.

    아주 새로운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을 끄집어 내어 소중한 느낌으로 만나게 한다. 내가 이것을 잊고 있었구나, 미안하다, 잊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제 생각해 내었으니 참 다행이다, 라고 느끼게 하는 구절들.

    다 읽고 나니 마음이 좀 아팠다. 1부에서는 그저 좀 편했는데, 2부, 3부, 4부로 넘어가면서 시들이 아프게 한 것이다. 우리 말로 된 시들이 깊고 깊은 아픔을 준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아직도 이 아픔과 함께 살아가야 할 세상이라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세상은 참으로, 좀처럼 변하기 어려운 모양인 것이지. (y에서 옮김20110918)

    한때 그대를 위해 붉은 목숨을 내놓으리라
    그런 날이 있었다 - P18

    한마디로 인연이란 만나는 일이다
    기쁨과 고통,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물들어간다는 뜻이다 - P29

    사람의 삶도 상처를 통해서야
    비로소 깊어지는가 - P30

    사랑은 쉬지 않고 닮아가는 것
    동그랗게 동그랗게 모나지 않는 것
    안으로 안으로 깊어지는 것 - P32

    그리움도 오래된 골목 끝 외딴 감나무처럼 낡아질 수 있을까 - P37

    꽃을 바라보다 내 얼굴을 만져보네
    새들의 하늘을 올려보다 걸어온 발등을 바라보네
    이제 그만 나른해져야겠네 - P71

    비, 비, 이 땅은 지금 우기의 날들
    저 비를 딛고 일어설 아름다운 희망의 꿈을 꾸어봅니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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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이야기들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0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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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온 소설집이다. 다행이다, 책이 나온 것과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이.


    이 소설집의 이런 소설,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소설을 읽을 때면 나는 잠시 바란다. 나도 소설가가 되어 보았으면, 소설가처럼 이야기를 지어 보았으면, 소설가처럼 다른 사람에게 주목하고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으면, 무엇보다 내가 만든 이야기로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내가 받았듯이, 내가 감동하였듯이, 내가 나를 애틋하게 아낄 수 있게 되었듯이.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이 이야기가 되는 순간, 이것이 마법이다. 잠시 현실을 잊고, 지긋지긋한 일상을 지우고,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고 원수가 되는 순간을 막을 수 있는 시간, 소설을 읽는 시간. 나는 어떤 사람인지,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무엇보다 함께 있어 행복한지 떨어져 있어 더 행복한지 확인하고 점검하고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 


    아일랜드와 영국의 작은 동네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들이다. 멀다. 낯설다. 그런데도 마음이 쓰리다. 두근거리고 울컥하고 뜨끔하고 난처해진다. 등장인물이 바뀌고 배경 공간이 바뀌어도 내 안에서 일렁이는 움직임은 비슷하게 난폭하다. 거칠어지는 호흡이 소설을 읽는 나를 전보다 더 괜찮은 사람으로 인식시켜 준다. 이렇게 흔들릴 수 있다니, 아직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삶에 열려 있구나 하면서.  


    모두 10편. 나는 10번 이상의 삶을 지나왔다. 한 사람을 지나고 다음 사람을 만나면서 앞사람을 잊었다. 10편 모두 읽은 뒤 모두 잊었다. 사람은 가고 이야기만 남는다더니 나는 이야기도 보낸다. 다 보냈는데 하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 살아 있다, 내 주변에. 마트에서 카페에서 건널목에서 주차장에서 자꾸 나타난다. 소설도 못 쓰는 내게 어쩌라고?


    어떤 이야기는 소설이 되고 어떤 이야기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어떤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다. '모르는 여자'가 더 이상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다들 조금씩 모자라고 조금씩 외롭고 조금 더 짖궂은 면을 갖고 있어서 상처를 입힌다. 이 또한 어쩔 수가 없다. 소설을 읽으면 조금 덜 하지 않을까 기대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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