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 체인지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18
최정화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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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설정, 낯선 전개는 아니었으나 내 의식에 인상적이었나 보다. 읽고 난 뒤에 꿈을 꾸었다. 내가 호르몬을 제공받는 쪽이 아니라 제공하는 쪽으로. 지금의 내 나이와 상관없이 나는 호르몬을 주는 쪽에 더 이입했던 것일까? 어리지도 젊지도 않으면서 나는 나보다 더 가난한 청춘을 애틋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일까? 


꿈속에서 무서웠다. 내 목숨을 돈과 바꿔 나가야 한다는 전제가, 그렇게 이어야만 한다는 삶의 무게가. 살기 위해서 죽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인데. 꿈은 꿈이어서 순간의 공포만 남기고 곧 흩어졌다.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충격은 충격이었던 셈, 꿈에서 깬 뒤에도 괜히 뒤숭숭했다. 일상을 흔들 만큼은 못되어도 일상을 소중하게 되새겨볼 만큼은 되었다. 


이 작가의 이름이 낯설다. 다른 소설책에서 이 작가의 작품을 봤을 수도 있는데, 내가 쓴 기록을 찾아 보면 작가의 이름을 새겼을 수도 있는데 지금 기억에는 없다. 더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또 나는 부자가 되고 있다.


책은 은행나무 시리즈 중의 한 권이다. 이 시리즈, 욕심이 생긴다. 나는 방금 만난 내 탐욕에 몹시 흐뭇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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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멋진 날이야
김혜원 지음 / 고래뱃속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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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이였다면, 모르면서 안 보이면서 다 알고 보이는 척 자만하는 어른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보고 안 보이면 솔직하게 궁금해 하는 아이였다면, 이 동화의 참맛을 훨씬 빨리 훨씬 강하게 느낄 수 있었을까? 아니, 이 또한 어른으로서의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저에게 보이는 대로 볼 뿐, 남들보다 더 보겠노라는 욕심 따위 갖고 있지 않을 테니까.

투명하면서 파란 개가 나온다. 이 파란 개는 시우라는 아이를 따라다닌다. 그 곁에 갈색 개도 따라다닌다. 셋의 관계를 알아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림보다 글에 더 매달린 탓인 것 같다. 누가 누구인지,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그림책이 어째 불친절하다는 생각까지 하고 말았으니. 

파란 개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걸 알아채야 한다. 투명하다는 건 금방 알아봤는데, 왜 투명한 건지 금방 몰랐다는 건, 내 삶에서 투명하게 사라져간 반려동물이 없었기 때문일까. 새삼 알고 나니, 금방 먹먹해지고 만다. 시우는, 저 어린 시우는, 파란 개와 이별을 해야 할 텐데. 차도로 뛰어드는 갈색 개를 끌어안는 순간 이별과 만남이 바뀐다. 

멋진 날은 이렇게 온다. 오직 자연스러운 이별과 만남으로만 이어지는 날들이었으면 좋겠다. (y에서 옮김2021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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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옷을 입은 사나이 ㅣ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3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석환 옮김 / 해문출판사 / 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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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가가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푸아로 경감도 마플 여사도 안 나오는 작품이다. 대신 아버지를 잃고 혼자가 된, 아름다운 아가씨 앤 베딩펠드가 나와서 용의자를 쫓는다. 그것도 영국을 출발하는 배를 타고 남아프리카까지.

사건이나 범인을 찾는 과정보다 나는 이 남아프리카 여행 일정에 재미를 더 느꼈다. 그 시대에 이런 형태의 배를 타고 이렇게 이렇게 탐험을 했더란 말이지. 다이아몬드를 찾겠다는 목적으로. 돈 있는 사람이 먼저 나서서 찜 하면 그저 내 것이 되던 시절, 빼앗기는 쪽은 뺏기는 줄도 모른 채, 제국주의는 그렇게 실현되었더란 말이지. 지금도 어딘가에는 이렇게 탐험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또는 이렇게 해서 원하는 것을 갖고 싶은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이면 오래 되었다고 해야 하나,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라고 해야 하나. 개인으로는 대체로 생이 마감되었을 시간이겠지만 가족 단위로 보면 후손이 살아 있을 정도인데, 선조가 그런 방식으로 얻은 부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부자로 살고 있을 텐데, 영국만이 아니라 이 나라 저 나라 할 것 없이, 심지어 우리 역사에도 있을 텐데, 다이아몬드가 다른 대상으로 바뀌기만 했을 뿐, 빼앗아서 내 것으로 삼았던 어느 한 시절의 유산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사회 갈등의 한 축이 되고 있는 것일 텐데...

앤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작가의 분신이라고도 한다. 갈색 옷을 입은 사나이를 찾아가는 앤의 열정으로 작가의 열정까지 짐작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일을 이런 방식으로 화려하게 겪어 볼 수 있는 것도 작가들의 능력일 테지. 나는 그저 편한 상태에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으로 보아 작가의 소질은 없는 게 확실하고.

이제 정말 몇 권 안 남았다 싶다. (y에서 옮김2022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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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윌리엄! ㅣ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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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글을 계속 읽다 보면 지겹다거나 질린다거나 하는, 그래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는 것이 나은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은 아니었다. 계속 읽어도 좋았고 얼른 읽어도 좋았으며 남아 있는 책장의 수가 적어지는 게 마냥 안타깝기만 했다. 이대로 더 봐도 좋은데 말이지.(그럼에도 새로 나온 책을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이 계산 속이란.)


윌리엄은 화자인 루시 바턴의 첫 남편이다. 이 작가의 소설을 여러 권 읽으면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는데 지루하지 않고 도리어 신기해진다. 세상이 온통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 작가의 서술을 빌린다면 내가 안전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투명하게 느껴졌던 자신의 일부가 인정을 받고 있는 기분이 되어서. 데이비드와 재혼을 한 뒤에도, 데이비드가 죽고 난 뒤에도 첫 남편인 윌리엄과 친구로 지내는 루시. 두 사람 사이에 두 딸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관계는 퍽 낯설다. 우리의 정서로 가능할 것인가 싶고.


첫 남편이든 두 번째 남편이든 루시의 독백은 지극히 매력적이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가. 내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내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게 이토록 설렐 말이었던가. 어쩌면 나는 앞으로 새로 만나는 나에게 커다란 설렘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이 말만으로도 설레려고 한다.


나는 나를 다 모른다. 나는 나를 조금은 안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 나는 당신을 조금은 안다. 모르면서, 조금 알면서 다 알고 있다고 얼마나 착각을 하였던가. 고상한 심리학 책보다 더 많이 생각하도록 해 준 소설이다, 작가다. 겸손해야 하는 이유를 알겠다. 조금씩만 덜 우겨도, 조금씩만 더 양보해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 더 평온한 마음을 느끼게 될 텐데. 서로를 더 사랑하게 될 텐데. 루시가 얼마나 자주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던지 놀랍기만 했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서 사랑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존경하는 것도 다 우리가 겪는 일이다. 한번 그랬다고 내내 그러하지도 않고 자꾸 바뀐다고 나무랄 일도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 속 자신의 실체를 어떻게 다룰 수 있겠는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따라가는 것이라고 윌리엄이 루시에게 했던 말도 생생히 떠오른다.


나의 평범한 일상 안에서군데군데 모습을 드러낼 소설 속 장면들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그때마다 나도 사랑을 느낄 것이다.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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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중력가속도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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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무엇이 있을까? 환상? 과학? 학생들의 과학 글쓰기 작품을 읽다 보면, SF 영화를 보다 보면, 어떤 상상력이 좋은 것인지, 어떤 상상력이 허무맹랑한 것인지 구별을 할 수 있게 된다. 말도 안 된다 싶어도, 이성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것처럼 보여도, 이 세상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럴 듯한 이야기, 바로 그러한 상상. 그래서 좀 행복해진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뜬금없이 위로를 받는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기기도 하는 그러한 상상, 바람직한 상상.

 

작가 배명훈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아니다. 처음 읽은 글부터 마음에 들어 했던 것도 아니다. 읽을수록 괜찮아지고 있다. 사 놓은 책이 또 있는데, 기대가 된다. 외국 작가보다 우리 작가의 글이 좋다는 느낌을 만나게 되면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 이럴 때만큼은 나는 국수주의자가 된다. 쉽게 만나지 못해 자주 섭섭하기도 하고.

 

환상이라는 장르 쪽에 마음이 많이 열렸다. 최근 이쪽 소설에서 긍정적인 인상을 많이 얻었던 덕분이다. 무엇보다 딸과 아들의 영향이 컸다. 얘들이 즐겨 읽는 작품을 소개받으면서 곽재식이나 배명훈, 듀나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내 취향을 넓히게 된 셈이니까(아직 거북한 작가들도 있고). 스티븐 킹이나 더글러스 애덤스에게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읽으면서 더 좋아지면 독자인 나도 작가인 그들에게도 더 좋아지는 일이 되는 것이겠지. 더 재미있고 즐겁게 쓰라고 더 재미있고 유쾌하게 읽어 볼 테다. 읽는 즐거움, 더 무엇을 바라랴. (y에서 옮김2017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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